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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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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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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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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석 (9)

DUMMY

리버가 방법을 설명한 후 식당 안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우선 루나와 길버트는 잠잠했다. 그 둘은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은 채 처음과 똑같은, 그러니까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관심 사이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토비는 리버를 칭찬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마지막으로 두 노인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 리버는 두 노인을 향해 재차 설명했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괜찮은 방법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야밤에 슬쩍 숲으로 들어가 불을 지르는 것 말이에요."


두 노인은 거의 동시에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밀러와 하멜은 길버트의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길버트는 어째서인지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밀러와 하멜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한번 마주 보았다. 곧 밀러가 별 수 없이 나선다는 투로 설명했다.


"우리들은 바보가 아닐세.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생각은 공습이 발생한 며칠 후에 곧바로 떠올렸네. 하지만 그 방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네."


"어째서 그렇죠?"


"우선 낮에 숲에 들어가서 불을 놓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네. 자네들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낮에 숲에 들어가는 일은 자살 시도나 다름없겠지. 불을 놓기도 전에 베르미들의 밥이 될 테니 말일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밤의 숲이 안전한 것은 아니네.

물론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베르미들이 밤에 활동하지 못하는 것은 맞네. 그렇지만 베르미들을 제외하더라도 그곳엔 스퀼라들이 있네. 그것들은 밤에 어느 정도 둔해지긴 하지만 활동을 못하는 것은 아닐세. 숫자로 따지자면 스퀼라들은 베르미들의 천분지 일이나 될까한 숫자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네. 우리들에겐 그 정도의 수조차 치명적이니까."


그쯤 설명하고나서 밀러는 길버트를 슬쩍 곁눈질했다. 하지만 길버트는 여전히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밀러는 그 사실에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평소처럼 직접 나서지 않냐고 물으려던 밀러는 그러나 맞은 편에 있는 두 사람의 열렬한 시선을 받고서 입을 다물었다. 밀러의 맞은 편에서 리버와 토비는 어서 계속 설명하라는 압박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밀러는 설명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네. 그래, 스퀼라들의 절대적인 수가 적으니 우리는 어찌저찌 그 놈들을 피해서 불을 놓을 수야 있을 걸세. 하지만 불을 붙이는 과정 또한 결코 쉽지 만은 않네. 불이라는 놈은 그야 포악한 성질을 가진 잡식성 괴물이지만 그래도 가리는 것이 몇 가지 있지. 예를 들자면 수분이 가득한 식물이나 흙과 돌 따위가 그렇겠지.

자네의 생각은 알겠네. 자네는 아마 숲의 한 부분에 불을 붙이면 곧장 숲 전체로 불이 번질 거라 여기는 게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 불은 생각보다 쉽게 번지지 않네. 바람을 고려해야 하고, 또 연소될 물질을 고려해야 하지.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하자면 결국 숲의 넓은 구역에 동시에 불을 붙이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네. 그런데 그것은 확률이 지극히 낮은 도박일세. 어두운 밤에 어디 숨어있는지 모를 스퀼라를 죄 피해가면서 각자 정해진 구역에 동시에 불을 놓는 일 말일세.

게다가 그 확률이 낮은 도박에 걸린 판돈은 영지민들의 목숨이네. 야밤에 그런 작전을 시행하자면 많은 인력이 필요할 테지. 그럴 경우 작전이 실패할 때 입을 인명 피해는 치명적이네. 우리는 지금도 성벽에 기대 간신히 버티고 있네. 여기서 병사가 더 줄어든다면 듀라트 영지는 절대 정오를 넘길 수 없을 걸세. 따라서 자네의 방법은 우리로선 실행하기 요원한 방법일세."


밀러의 말이 끝나자 그때까지 희망적인 예측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던 토비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하게 바뀌었다. 다만 리버는 아직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이 번지지 않는 게 문제라면 기름을 뿌리면 되지 않을까요?"


"베르미들의 수로 추정하건대 그들의 영역은 이 영지보다 훨씬 넓을 걸세. 그 부근을 덮을 만큼의 기름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애초에 남부에서 기름은 귀한 물건일세. 자네는 상인이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 테지."


"그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리버는 밀러가 아닌 길버트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름을 구하기 어렵다는 말은 동의할게요. 하지만 기름의 양이 문제라면 해결 방법이 있지 않나요? 영지 뒤 편의 숲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 둘러 보니 영지의 정면에는 그 나무가 많던데요. 그러니까 음, 잠시만요 이름이 잘 기억나질 않네요. 왜 있잖아요? 잎이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한..."


리버가 유심히 나무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자 토비가 얼른 옆에서 거들었다.


"혹시 카투스 나무를 말하는 거냐?"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영지의 앞 쪽에는 카투스 나무가 많잖아요?"


리버가 길버트에게 재차 질문했다. 주변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리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째서 리버가 이 중요한 시기에 다소 한가롭게까지 들리는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리버와 함께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길버트는 인상을 적잖이 찌푸리고 있었다. 길버트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리버는 그 표정에서 어떤 사실을 확신했다. 리버는 재차 질문했다.


"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카투스 나무에서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음, 그러니까 아마 방법이..."


"...카투스 나무의 겉면에 넓고 거친 상처를 낸 뒤 거기서 흘러나오는 진액을 모으면 됩니다. 그렇게 모은 진액을 증류하거나, 혹은 나무의 그루터기 자체를 건류해 기름을 뽑아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테레핀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길버트는 간결하게 대답한 후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잠깐 동안 길버트의 설명에 대해 생각했다. 곧 밀러와 하멜은 길버트의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다. 두 노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다시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온 하멜이 추궁하듯 길버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테지? 가령 테레핀을 뽑아내는 과정이 아주 복잡하고 전문적이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름을 얻는 과정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거나, 필요한 도구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들 말일세.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길?"


마지막 대목은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하멜은 반드시 긍정의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눈초리를 길버트에게 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하멜의 옆에서는 밀러가 역시 거의 비슷한 눈길로 길버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길버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길버트는 왠지 모를 어색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혔다가, 이내 다시 목을 똑바로 세웠다. 그러고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버트는 꺼내기 어려운 얘기를 억지로 꺼내려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집사님. 그렇게 기름을 얻는 방법은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도 않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리버군의 말처럼 영지의 정문 앞에는 카투스 나무 군락이 있으니 기름의 양도 충분할 겁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쾅-하는 묵직한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주먹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려친 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밀러는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응시했다.


"길 자네는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내가 설명한 것은 전부 자네가 알려준 것이잖나. 맨 처음 불을 놓는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자네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기름을 구할 수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럼 자네는 그 방법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길버트는 우중충한 얼굴로 함구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침묵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강력한 긍정을 뜻하곤 한다. 바로 지금 길버트의 침묵이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또 길버트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그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밀러는 소리쳤다.


"자네가 어떻게!"


밀러의 꽉 쥔 주먹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밀러는 경악과 분노, 불안과 황당함, 그리고 배신감으로 혼재된 복잡한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기세여서 토비는 슬쩍 팔짱을 풀었다. 밀러는 다시 고함쳤다.


"어떻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나! 심지어 자네는 그 죄 없는 수 많은 청년들이, 바로 코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매일 지켜 보았잖나! 말을 하게 길버트!"


소리치며 길버트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밀러는 그러나 하멜에게 저지당했다. 하멜은 분노에 찬 밀러의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정하게 밀러."


"진정? 어떻게 진정하란 말인가? 이 녀석은 영지를 살릴 방법을 알고 있었네! 그런데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잖나!"


"길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네."


하멜은 침착한 태도로 밀러를 자리에 앉혔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았던 밀러는 오랜 친구의 침착함에 어쩔 수 없이 화를 삭히며 다시 착석했다.

밀러를 진정시킨 하멜은 물끄러미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하멜은 차분한 태도로,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태도로 물었다.


"대답해주게 길버트. 지금 이 영감의 말이 사실인가? 자네는 정말 그 방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태 우리에게 침묵해 온 겐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길버트에게 쏠렸다. 길버트는 슬픈 눈으로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종내에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세로저었다.


"말씀하시는 것이 카투스 나무에서 다량의 기름을 추출해 숲을 태우는 방법이라면... 예,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첫날 공습이 시작된 바로 그 날 오후에 떠올렸습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밀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밀러는 마치 온 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곧장 친구를 부축하려던 하멜은 고민 끝에 길버트에게 되묻기로 결심했다.


"첫날부터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길 자네는 어째서 그 방법을 쓰지 않았나? 나는 자네가 언제나 영지의 젊은이들을 가엾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가 가끔 지독할 만큼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도 말일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네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할 때가 많다네. 게다가 나이를 적잖이 먹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들을 읽을 수 있게 되지.

하지만 나는 지금 의심을 거둘 수가 없네. 자네의 인간성에 대해서 말일세.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우리들 곁에 있었던 겐가. 혹시 학자로서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나? 도망칠 수 있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얼간이들을?"


"...제 인간성에 대해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힐난하거나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던 것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공습이 이어지는 바로 오늘까지 누군가 기름을 얻는 방법을 알아내고, 또 그것을 이용해 숲을 불지르자고 나섰다면 저는 영지의 유일한 백인장으로서 저지했을 겁니다."


하멜은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이 끔찍한 공습을 끝낼 방안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시행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를 말렸을 거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말렸을 겁니다."


"길버트. 그런 식의 대답은 그만하고 제발 이유를 말해주게. 나는 그것을 꼭 알아야겠네. 자네에게 죽어가는 영지민들을 관찰하는 악취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이제와서 그것 무슨 이유였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것 같긴 하네만 그래도 말해줄 수 없겠나?"


"숲을 태워버리는 것은 인간 답기는 해도 사람 답지는 못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답지 못하다니?"


좌중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팔짱을 끼고 있던 토비가 불현듯 혼자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토비는 미약한 동정이 깃든 눈빛으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토비의 시선을 받은 길버트는 자조 섞인 미소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이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영감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듀라트 영지에는 몇 달 동안 비가 일절 내리지 않았습니다. 맞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것과 자네의 배신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겐가."


길버트는 밀러의 그 떨떠름한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설명을 이었다.


"이 곳에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여태 공기가 숲 쪽으로 흘렀다는 말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공기도 마찬가지로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혹시 바람의 방향을 말하고 싶은 겐가?"


"그렇습니다. 바람은 여태 영지에서 롭스 산맥 쪽으로 불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저희들이 오늘 이전에 기름을 구해 불을 놓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되냐니? 그야 전부 타버릴 게 아닌가."


밀러는 당연한 얘기라는 투로 곧장 대답했다. 그 옆의 하멜과 맞은 편의 리버 역시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잠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시점에 토비는 왠지 모르게 화난 사람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고, 루나는 여전히 묵묵하게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관찰하던 길버트는 종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 그토록 지난하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길버트는 노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 아마 영감님의 말처럼 될 겁니다. 마지막 만이 떠오르는 시기의 대기는 지독하게 건조합니다. 그 마지막 만은 고작 며칠 전에 졌습니다. 이전에, 그러니까 저것들의 공습이 시작된 직후에 불을 질렀다면 영지에는 어떤 피해도 없었을 겁니다. 막대한 양의 기름은 숲을 태울 테고, 바람은 그 난폭한 포식자를 롭스 산맥으로 실어다 줄 테고, 또 그 과정에서 베르미와 스퀼라들은 몇 줌의 재로 변해버렸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영지를 구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리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롭스 산맥에는 베르미와 스퀼라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곤충과 벌레. 들짐승과 날짐승. 어쩌면 그 용맹하기 짝이 없는 숲의 수호자 페루스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산맥의 남쪽으로 불이 죄 번질 것을 고려하자면 그곳에 살고 있을 쿠니들과 숲무스. 그리고 아돌프들..."


말의 마지막 즈음에서 길버트는 슬쩍 토비의 눈치를 살폈다. 토비는 상관 말고 계속 하라는 듯 킁-하고 콧김을 한 번 내뿜었다.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요괴들과 마찬가지로 그 모든 것들이 몇 줌의 재가 돼버릴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영지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그 수 많은 생명들을 태워버릴지도 모를 그 방법은, 지극히 인간적이기는 해도 사람 다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길버트의 설명이 끝났다. 루나와 토비는 애초부터 별 말을 하지 않았고, 리버와 하멜은 이제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밀러는 어느샌가 잠잠해져 있었다.

방금 전 길버트가 말한 사람 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명확했기에 식당 안의 누구도 쉽사리 대꾸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그것은 사람 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식당 내부를 휘감았다. 바깥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만이 조용하고 낮게 울렸다. 분위기는 어색했고 공기는 축축했다. 시간은 마치 격랑 없는 파도처럼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왠지 모를 아득한 시간 속에서 밀러는 언젠가 길버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에 길버트는 요괴들의 습격이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라 말했었다. 그것은 참으로 적합한 비유였다. 그것들은 실제로 파도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밀러는 그것이 자연재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얘기를 꺼낼 당시 길버트는 자연재해란 인간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밀러가 지켜본 길버트는 정작 그 자신이 몇 달 동안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멜의 말처럼 그것은 굳이 직접 물어보거나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분명한 감정이었다.


어느 쪽이냐면, 밀러는 길버트가 영지민들에게 동정심을 내비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해를 입은 사람이나 화마가 덮친 사람의 모습은 대개 끔찍하며, 그 사람들을 동정하는 일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죄책감의 경우는 다르다. 애초에 길버트의 말에 따르자면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자연재해란 그저 일어나는 일이다. 태풍을 향해 왜 거기 있냐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일이다. 베르미들의 공습은 길버트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밀러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밀러는 경악에 물든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창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무심한 눈빛을 관찰한 밀러는 마침내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눈 앞의 그 말 수 적은 학자는 듀라트 영지의 모든 인간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결책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법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시행하지 않았고, 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탓에 길버트는 매일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청년들을 직시해야만 했다.


순간 밀러는 어떤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밀러는 공습이 이어진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 몇 달 동안 눈 앞의 남자가 느꼈을 외로움과 죄책감 그리고 고독감 같은 것을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밀러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은 도저히 한 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길버트는 여전히 창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밀러는 그 무뚝뚝한 학자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밀러는 곧 그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미신적인 느낌이었지만 길버트는 위로를 받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위로는 접어두더라도 밀러는 사과의 말 정도는 건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같은 방법을 떠올린 사람이 영지에 한 두명만 더 있었더라도, 길버트는 그토록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창밖을 응시하던 길버트가 문득 두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길버트와 두 노인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어떤 말도 오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빛에서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이해와 교감의 시간이 흐르던 중 불현듯 툭- 하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 안이 적요로 차 있었던 탓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소리의 주인공은 루나였다. 감탄스러울 정도의 무신경함으로 그때까지 식사에 집중하고 있던 루나가 수저를 탁 하고 내려 놓았다. 루나는 냅킨을 집어 들고서 우아한 손동작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선 리버를 쳐다보며 훈계하듯 말했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너는 오지랖이 너무 지나쳐. 이 영지가 사라지는 것은 저들의 문제야.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사람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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