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782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09.23 20:32
조회
31
추천
2
글자
12쪽

다면기 (5)

DUMMY

이름 없는 숲이 네 사람을 품고 있었다.

각각 인간 여성, 인간 남성, 그리고 아돌프 한 명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특이한 조합의 일행이었다.

마지막 만이 끝난 시기였기에 밤의 숲은 선선하다기보단 약간 추운 편이었다.


숲이 네 사람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나는 길버트를 품고 있었다.

루나는 바닥에 누운 길버트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고서, 한 손으로 길버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얼핏 보기에 그 장면은 어머니가 잠든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것 같은 자상한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루나의 행동은 모성애와는 어떤 연관도 없으며, 당연히 길버트에게 불쑥 연심이 피어올라서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나는 눈을 감고서 가만히 길버트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오랜 시간 그 자세를 유지했다.

문득 시원한 숲바람 한 줄기가 루나의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루나가 눈을 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루나의 손 아래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길버트가 축축한 바닥에 누운 채 이리저리 머리를 뒤틀기 시작했다.

루나는 살며시 길버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 밑에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루나가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퍽 즐거운 꿈이라고 할 순 없겠군.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말이야."


다음 순간 루나가 그때까지 받치고 있던 길버트의 머리를 다시 흙바닥에 조심스레 내려 놓았다.

몸을 일으킨 루나는 자신이 처음에 있던 위치로, 그러니까 모닥불 옆에 높인 통나무로 걸어간 뒤 그 위에 걸터앉았다.

통나무에 앉은 루나는 길버트를 관찰했다.

도중에도 길버트는 괴로운 듯 연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누워 있는 길버트의 바로 위 공중에서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 수십 마리가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빛을 이리저리 머금고 날아다니는 그 모습은 마치 페어리들의 연무 같았다.


루나는 배낭 안에서 허브 주머니와 찻주전자를 꺼냈다.

이어서 주전자를 모닥불 위 나무에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끓었고 고풍스러운 찻잔도 준비됐다.

루나를 중심으로 민트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숲의 온도가 낮은 편이어서 차는 금방 식었다.

루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밤의 숲은 고요했고, 바닥에 누운 세 남자의 몸 위에서 이루어지는 나비들의 연무는 객관적으로 봐도 꽤 볼만한 것이었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차를 마시기 꽤 좋은 환경이었다.


루나가 여유로운 태도로 다시 차를 한입 머금었을 때, 이번에는 길버트가 있던 반대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서 토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들고 있는 찻잔과 토비의 모습을 한 번 번갈아 본 루나가 마침내 찻잔을 내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토비 앞으로 다가간 루나는 토비의 머리를 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방금 전 길버트처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기에는 토비의 머리가 너무 무거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루나는 그냥 토비의 머리맡에 주저 앉았다.

어차피 자세가 불편하다는 것 외에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루나는 한 손을 토비의 이마에 올려 놓았다.

토비의 부드러운 갈기털이 루나의 작고 하얀 손을 폭 감쌌다.

기분 좋은 감촉에 슬며시 웃으며 루나는 중얼거렸다.


"궁금하군. 너희 종족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꿈을 꾸는지."


루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더운 날의 아지랑이처럼 사방으로 발산하는 정신 속에서 토비는 눈을 떴다.

흙바닥. 그 위의 잔풀. 자그마한 자갈.

우선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정도였다.

별다른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서 토비는 얌전히 다시 눈을 감았다.

물론 졸리다는 이유로 다시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눈을 뜨자마자 강제로 현실로 내몰린 정신 쪽에서 꽤나 과격한 불평을 토로했다.

그래서 토비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눈을 감자 곧 그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토비의 육체 쪽에서 능숙하게 정신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다만 협상은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 쪽은 자신이 없으면 육체를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육체 쪽은 자신이 없다면 어차피 정신은 머무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두 토론자의 주장이 전부 그럴 듯 했으므로 협상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토비는 어느 쪽 편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토비는 교섭이 이루어지는 동안 좀 더 세심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처음 시야에 들어왔던 흙바닥이 바로 코 앞에 있었으므로, 현재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몸 상태가 이상했다.

몸은 마치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결국 토비는 잠시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교섭도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정신과 육체를 회복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누워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정확한 인과관계야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경험에 입각해 판단해 보자면 대개 회복이 필요한 환자들은 누워있기 마련이니까.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던 토비는 어느 순간 정신과 육체 사이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토비는 누운 채로 멀끔멀끔 눈을 껌뻑였다.

바닥에서 흙 먼지 냄새가 올라왔고, 숲 냄새와 더불어 그 속에 섞인 흐릿한 피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토비의 검은 코가 씰룩거렸다.

문득 입 안에서 퍽퍽한 감각이 느껴졌다.

몇 번 입을 오물거린 토비는 자신의 입 속에 흙과 털이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시해버리기엔 다소 많은 양이었고, 굳이 무시할 이유도 없었다.


"퉤!"


토비는 상체를 일으키고 입 속에 있던 것들을 멀리 뱉어냈다.

바닥에 앉고 나자 그제야 주변 풍경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의 흙바닥은 이곳저곳이 거칠게 쏠리고 파여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격렬한 전투라도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비로소 토비는 여태 자신이 무얼하고 있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누보와 서열정리 중이었다.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토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서열정리라면,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었던 이유가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지극히 익숙하고, 동시에 아주 오래 전에나 들었던 것 같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토비보다 몸집이 큰 아돌프 한 명이 주저 앉아 있는 토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토비는 어렵지 않게 아돌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누보였다.


토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누보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토비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누보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이어서 누보가 팔을 당겼고, 토비는 그 힘을 이용해 거의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내 두 다리로 서게 된 토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보를 향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 십 분 정도 되려나?"


"끄응..."


토비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토비는 누보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은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어쨌든 누보는 부족의 우두머리였고, 자신은 도전하는 입장이었다.

더불어 누보는 부족 내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 센 아돌프이며, 부족에서 가장 많은 서열정리 도전을 받은 아돌프기도 했다.


이 경우 도전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족 내에서 가장 많은 전투를 치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횟수 만큼 싸움에 노련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누보는 아직까지 서열정리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열한 것들은 부족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서열정리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창피해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토비는 대결 도중 십여 분 가까이 바닥에 처박힌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창피했다.

토비가 누가 보더라도 심각하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자, 누보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라 토비. 네 나이에 그 위치까지 오른 것도 충분히 대단하니까. 나를 제외하면 아마 부족에서 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장담하지."


"이런 썅..! 지금 그걸 위로랍시고 건네는 거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


토비의 투정에 누보가 빙긋 웃었다.

어느 순간 토비는 누보의 팔꿈치 쪽 털이 뭉텅이로 뽑혀 있는 것을 눈치챘다.

토비의 시선을 받은 누보가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이것 말이로군.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절대 입을 벌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그냥 머리채로 밀쳐버렸더니 이렇게 돼버렸어."


토비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방금 전 자신이 뱉어냈던 입 속의 털뭉치를 떠올리고 나서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토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서열정리 중에 상대방을 물어 뜯다니, 당분간은 숲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웠다.

토비는 애꿎은 흙바닥을 발로 이리저리 차다가 이내 자신이 까먹은 의례가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다분히 주저하던 토비가 결국 어느 순간 씹어 뱉듯 말했다.


"그래, 이번에도 내가 졌다! 젠장할, 누보 네게 이 말을 하는 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군."


"정확히 열 세 번째지."


누보의 대답에 토비는 적잖이 놀랐다.

물론 한 아돌프에게 그토록 많이 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하지만 토비는 누보처럼 거칠고 강인한 아돌프가 여태 자신과의 대결 횟수를 일일이 세고 있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았다.

토비가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누보가 깊게 미소 지었다.

곧 누보가 턱짓과 눈빛으로 숲 쪽을 가리켰다.

토비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보가 가리킨 방향에 몇몇 여자들이 서 있었다.

전부 부족의 아돌프들이었고, 또 토비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여자들이 모여서 떠들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토비는 이해했다.

여태 대결 횟수를 세고 있던 것은 아마 대결이 벌어질 때마다 찾아오던 저 여자들이 분명했다.


그렇게 토비와 누보가 시선을 보내자, 그때까지 숲 한 켠에서 수군거리고 있던 여자들이 뚝 말을 멈췄다.

이어서 누가 봐도 호의에 가까운 눈빛을 두 남자에게 열렬히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세 번째 만이 다가올 시기여서, 그녀들의 가슴은 평소보다 훨씬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최근 며칠 동안 밤의 숲에선 여자들의 울음 소리가 지겹게도 울려 퍼졌다.

토비는 진저리를 치며 얼른 누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 여자들의 모습을 보아 하니 이번 축제야말로 자신과 누보의 목덜미가 남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돌프 여성은 만 축제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으면 그 상대의 목을 물곤 한다.

물론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축제의 의례적인 행사였다.

그저 마음에 드는 상대의 목 근처를 가볍게 무는 것 뿐인 단순한 풍습이다.


하지만 수십 명의 여자가 한 남자를 마음에 들어하는 경우엔 상황이 약간 심각해진다.

경쟁자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여자들은 그중 자신의 이빨 자국을 더욱 선명히 남기고 싶어한다.

당장 저번에 열린 만 축제도 그랬다.

그때 자신과 누보는 목 근처의 털이 죄다 뽑혀 나갈 정도로 공격 받았었다.


토비는 그 모든 상황을 순식간에 종합했다.

그리고 축제가 열리기 전에 좀 더 빨리 자신의 계획을 진행 시키기로 결심했다.

여자들은 공터의 가장자리에서 여전히 두 남자에게 야릇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토비가 몸을 한번 소스라치자 누보가 이해한다는 투로 말을 걸어왔다.


"토비, 잠시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좀 할까?."


"응? 갑자기 무슨 얘기를 말이냐?"


"네가 곧 방랑을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토비는 반색했다.


"좋아. 조용한 곳으로 가지."


숲 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두 아돌프는 숲의 한 지점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6 다면기 (9) 23.10.03 18 3 14쪽
75 다면기 (8) 23.09.28 31 3 13쪽
74 다면기 (7) +1 23.09.28 27 2 17쪽
73 다면기 (6) 23.09.24 55 3 13쪽
» 다면기 (5) 23.09.23 32 2 12쪽
71 다면기 (4) 23.09.21 37 3 12쪽
70 다면기 (3) 23.09.18 35 3 16쪽
69 다면기 (2) 23.09.17 36 3 18쪽
68 다면기 23.09.16 33 3 13쪽
6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3) 23.09.16 36 3 17쪽
6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7 4 12쪽
6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1) 23.09.09 39 3 16쪽
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63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9) 23.09.05 42 4 17쪽
62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8) 23.09.03 45 4 16쪽
61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7) 23.08.31 44 4 15쪽
60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6) 23.08.30 45 4 14쪽
59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5) 23.08.29 40 4 15쪽
58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6 4 21쪽
5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23.08.27 41 3 21쪽
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2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5 5 15쪽
53 착석 (14) 23.08.07 78 4 15쪽
52 착석 (13) +2 23.08.03 137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0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69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69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4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