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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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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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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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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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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DUMMY


하멜은 부근에서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 있었다. 곧게 허리를 편 하멜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묵묵히 산 중턱을 주시했다. 산 중턱에선 작은 불빛이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고 하멜의 눈동자는 그 불빛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 영감아, 호들갑 떨지 말고 그만 내려와. 굳이 그 위에 있지 않아도 다 보이지 않나."


얼마간 타성적인 기분에 취해 중턱을 바라보던 하멜은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바위 아래에서 밀러는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빈둥대고 있었다.

하멜은 밀러의 말을 무시할까 하다가 잠시 후엔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의 지적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중턱의 불빛은 바위 밑에서도 잘 보였으므로 굳이 불편하게 바위 위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멜이 바닥으로 내려오자 밀러가 다시 핀잔을 줬다.


"불안한 것은 알겠지만 그냥 길을 믿으라구 이 친구야. 길이라면 나와 자네의 변변찮은 시력이나 움직임까지 전부 고려한 뒤 계획을 세웠을 테니."


"길의 현명함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단지 저곳에 있을 세 사람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지."


"걱정이 아니라 불신이겠지 이 사람아. 물론 타지인이 작전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은 불신의 요소가 되기 충분하지. 하지만 자네가 아돌프를 걱정하는 것은 카니쿨라가 페루스를 걱정하는 꼴 아니겠나."


하멜은 못마땅했지만 이번에도 밀러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역시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밀러는 시종일관 겁에 질린 카니쿨라처럼 조마롭게 구는 친구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렸다. 밀러는 적당한 높이의 바위를 찾아 거기에 풀썩 앉았다.

밀러는 현 시점에서 긴장과 불안에 휩싸이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비참했던 시간은 너무 길었고, 그 시간은 늙고 고지식한 노인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물끄러미 하멜을 바라보던 밀러는 오랜 친구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해소 시켜주기로 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하멜. 아니, 정확하게는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해야겠지. 금방 해결될 문제네 걱정이나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없지. 자네가 지금 안고 있는 걱정거리는 어차피 오늘 밤 이후로 싹 사라질게 아닌가.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말일세."


"팔자 좋은 말을 늘어 놓는군. 보통 게으름뱅이들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팔자가 좋은지 어떤지는 이 밤이 지나야 알게 되겠지. 하지만 하멜, 기왕 같은 시간을 보낼 거라면 불안에 떨며 초조해 하기 보다는 유쾌하게 보내는 쪽이 확실히 낫지 않나.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함없네. 우리는 산 중턱을 주시하다가, 저 쪽에서 신호를 보내 오면 불을 놓으면 그만일세. 아주 간단한 일 아닌가. 군인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바로 그래서 자유롭지. 우린 군인이잖나 우린 명령이 내려오면 명령을 수행하면 되는 게야."


"하극상을 벌이겠다는 말은 아닐세. 당연히 주어진 역할은 충실하게 이행해야지. 하지만 의심이 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 애초에 이 구역 말일세. 나는 숲과 분리시킨 이 구역 안에 요괴들이 몽땅 잠들어 있을 거라는 점이 아직까지도 의심스럽네. 그리고 우리들의 얼굴에 칠한 이..."


무뚝뚝하게 말하던 하멜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맞은 편에서 밀러가 더는 못참겠다는 듯 킬킬 웃어버렸기 때문이다. 밀러는 동의한다는 듯 하멜의 말을 이어 받았다.


"그래 확실히 얼굴의 분칠은 영 이상하구만. 자네는 마치 페루스의 수염을 달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어쩌겠나 이 가루를 바르지 않으면 스퀼라들의 표적이 된다고 하니 바를 수 밖에. 실제로 우리들은 숲의 중앙부까지 어떤 요괴도 만나지 않고 왔잖은가. 이 정도면 효과는 확실한 셈이지."


"이 요상한 가루의 효과에 대해선 인정하겠네. 하지만 구역의 문제는 여전히 의문일세."


그렇게 말하며 하멜은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물론 특이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두 노인이 있던 장소는 모로 보나 평범한 숲이었고, 또 평범한 대지였다. 그럼에도 하멜은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아무튼 그놈들의 굴은 땅 깊숙한 곳에 있잖나. 길의 현명함이나 그 토비라는 아돌프의 수완이야 믿을 수 있네. 믿을만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명함과 수완으로 어떻게 요괴들의 영역을 재단할 수 있겠나. 그건 어떤 인간도 불가능한 일이잖나. 밀러 자네는 이 일에 관해 들은 것이 있나?"


"음 그렇군, 자네는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이 구역을 정한 것은 길과 토비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두 아이들 쪽이네."


"그 아이들이?"


"길에게 언뜻 듣기로는 여자아이 쪽이 마법 비슷한 것을 쓸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 자네도 봤을 게 아닌가. 우리가 카투스 나무의 수액을 채취하고 뿌리를 뽑고 다녔을 때, 길버트와 토비 그리고 두 아이가 이 산을 휘젓고 다니던 것을 말이야."


하멜은 기억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긴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아침부터 길버트와 토비 그리고 리버와 루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숲을 돌아다니기는 했다. 길버트는 그 산행이 일종의 정찰이며, 하멜이 현재 서 있는 구역의 크기와 둘레를 재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들이 길버트의 계획에 깊고 적극적으로 관여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그렇지만 빗속에서 손을 잡고 뛰어다닌다고 해서 요괴들의 영역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눈에 그 산행은 조금 위험한 밀회를 즐기는 청년들의 일탈 같은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네."


"하멜, 이 고지식한 늙은이야. 자네를 보고 있으면 늙을수록 고민만 많아진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구만. 단순하게 생각하게 단순하게. 어차피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도처에서 여지없이 매일 일어나고 있잖나. 더군다나 이것은 마법에 관련된 일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이해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그만일세."


"자네 다운 무책임한 발언이로군."


쌀쌀맞은 대꾸에 밀러는 다소 과장되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보게 하멜, 우리는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어째서 밤마다 제 자리에 떠오르는지 설명할 수도 없네. 요컨대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는 말일세,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 길을 보게, 길은 그 아이들이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일임했네. 여기서 우리가 두 아이나 그 아돌프를 믿을 필요는 없네. 우리는 그저 길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평소 늘 그러던 것처럼 말이야.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잖나."


하멜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대꾸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멜은 다시 묵묵히 산 중턱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본 밀러는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해버렸다.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밤의 숲은 전체적으로 고요했고 또 신비로웠다.

가끔 벌레들이 치륵대거나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이 서로 쏠리는 소리 외엔 대부분 잠잠했다.

밀러는 무료함을 느꼈다. 하멜에게 호들갑을 떨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사실 밀러는 그것 밖에 할 일이 없다는 점도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더불어 계획의 정확한 시작 시점을 알 수 없었기에 긴장을 풀고 늘어져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밀러는 다시 슬며시 하멜에게 말을 걸었다.


"인생이란 말이지. 하멜 자네처럼 그리 신중하고 복잡하게 살 필요가 없는 것일세. 피오 신의 섭리도 그렇지. 피오 신은 항상 성실한 인간에게는 매정하고, 게으른 인간에겐 자비롭거든."


밀러의 예상대로 하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간 밀러를 무시하던 하멜은 그러나 잠시 후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대꾸해왔다.


"말도 안되는 소리는 집어치우게. 신은 성실한 인간을 더 사랑하시네. 게다가 성실한 인간이 더 많은 보답을 받는 것이 당연히 이치에 맞는 일이잖나."


"무슨 소린지 이해를 할 수 없구만. 그럼 하멜 자네 말은 신께서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에 따라 더 보살피고 덜 보살피고 하신다는 말인가? 마치 자식을 서너 명쯤 둔 부모가 어떤 자식에게만 더 특별한 애정을 쏟는 것처럼?"


"...그것이 옳겠지. 그게 아니라면 교단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일반적인 사람보다 신앙심이 더 두터운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신 또한 그들을 통해 얘기하시잖나. 게다가 나는 자네 말처럼 여러 아이가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중 가장 성실하고 현명한 아이에게 관심을 쏟게 될 것 같네."


"아니, 아닐세. 하멜 자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신의 본성이 아니란 말이야. 신은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공평하신 분이잖은가. 가난하고 궁휼한 농노에게도, 사치스럽고 권위적인 귀족도 신께선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겠나.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려던 밀러는 그러나 말을 멈췄다. 밀러의 시야에 허공에 뜬 밤독수리 한 마리가 포착됐다. 밀러는 달빛을 받아 날개를 번쩍이는 그 밤독수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얼마간 하늘을 멍하니 관찰하던 밀러는 다시 지상으로 고개를 내렸다. 밀러는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말이네. 인생을 더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상인이 있고, 또 한 편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지독한 게으름뱅이가 있다고 쳐봄세. 상인의 미덕이 성실함이니 만큼 그 상인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머쥔 상황이네. 그는 꽤 많은 돈을 모았지. 반대로 게으름뱅이에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네.

자, 그럼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그 둘에게 각각 빵 한 덩어리를 주었다고 생각해보게. 같은 빵이지만 그 가치는 전혀 다르게 되네. 요컨대 성공한 상인에게 있어서 그 빵은 그리 큰 가치가 없는 것이지. 그는 그의 창고에 이미 밀을 가득 쌓아두고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게으름뱅이에게 그 빵은 어떤가? 그에게는 물론 더없이 귀중한 것이겠지."


밀러의 설명에 하멜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말은 그 빵이 신의 은총이나 혹은 보살핌이라는 겐가?"


"그렇지. 은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네 하멜. 은총 자체는 그렇지.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일세. 남부의 귀족들이 사실 별 차이점도 없는 북부제 가구를 그토록 비싼 값에 들여놓으려 애쓰는 것을 보게. 가치란 결국 자신의 현재 상황에 따라 정해지는 법이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처음의 내 말을 이해하기 쉽겠지. 결국 인생을 대강 살아가는 자야 말로 역설적으로 신의 은총과 보살핌을 가장 크게 느끼는 자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뭔가 대꾸하려던 하멜은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하멜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오랫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밀러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밀러는 친구의 걱정과 고민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 놓았고, 더불어 본인의 따분함까지 해소했다는 사실이 여간 만족스러웠다.

밀러가 밤의 정취에 빠진 지 한참이나 지난 뒤에, 불현듯 하멜이 미심쩍다는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솔직히 자네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진 못하겠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궁금한 점이 생겼네."


"응? 뭐든 물어 보게.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뭐든 대답해주지."


"밀러 자네, 대체 언제부터 열렬한 신학도가 된 겐가?"


하멜의 진지한 표정에 밀러는 웃음을 터뜨렸다. 밤의 공기 속으로 노인의 바람 빠진 끅끅대는 웃음 소리가 퍼져나갔다. 한참을 웃고 나서 밀러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품은 사람의 얼굴로 하멜을 바라보았다.


"우리 영지의 유일한 주교님은 상당한 애주가시더군. 저택의 포도주는 유용하게 쓰였네. 관리해준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지. 만약 자네가 교리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베릴 주교를 찾아가게. 질 좋은 포도주 한 병이면 그는 아마 자네가 납득할 때까지 언제고 설파해 줄 걸세."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끝난 후에나 가능한 얘기로군."


그 말을 끝으로 하멜은 다시 수심에 잠긴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밀러는 자신이 마지막에 괜한 말을 덧붙였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동시에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한 친구를 곁에 두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귀찮은 일임을 체감했다.


"그래 모든 것이 끝난 후 찾아가게. 오늘 밤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그러니 그 뒤에 할 일이나 생각해 두게. 아마 영지를 복구하려면 자네의 힘이 많이 필요할 테니. 응? 이보게 듣고 있나 하멜?"


여태 꼬박꼬박 대답하던 하멜은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밀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밀러는 친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러는 산 중턱의 빛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멜이 다급하게 외쳤다.


"신호가 왔네!"


하멜은 급하게 밀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가 신호를 보낸 모양이군."


혼잣말을 내뱉은 밀러는 산 중턱이 아닌 자신들이 위치한 정반대 쪽의 숲을 바라보았다. 길버트가 있을 만한 곳을 유의 깊게 살폈지만 나무들이 너무 풍성하고 키가 큰 탓에 역시 길버트 쪽의 횃불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밀러는 반신반의하던 이 전달 체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작전의 개요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화전을 일구는 것처럼 숲의 한 구역을 따로 분리 시킨 후, 그 구역의 가장자리에 일제히 불을 놓으면 된다. 그것이 끝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집을 짓는 일을 '건축 재료를 적절히 쌓아 올리면 된다'는 설명과 딱히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일이 그렇듯 길버트의 작전 역시 실행 단계를 살펴 보자면 지독하게 복잡한 상황이 발생한다.


다행히 그중 가장 지난했던 숲에 들어오는 일은 루나가 해결했다. 루나는 자신이 제조한 특수한 가루(밀가루를 포함한 각종 알 수 없는 재료들이 들어간)를 몸에 바름으로써 요괴들의 인식 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효과가 있는 듯했다.

다음으로 동시에 불을 놓는 문제가 남아 있다.

숲의 한 쪽에서 불을 놓는다면 깨어난 요괴들이 전부 한쪽 방향으로 도망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소기의 목적과 달리 엄한 숲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된다. 따라서 불은 반드시 동시에 놓아져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어떤 행동을 한다는 말은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숲 속에서의 의사소통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영지민들이 둘러싼 구역의 가장자리는 짧게 잡아도 몇 천 큐빗이나 되며, 관목이 너무 무성한 나머지 도중에 채 벌목하지 못한 구역들도 남아 있었다.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힘든 환경이다.


그래서 길버트는 인원을 세 군데로 나누어 배치했으며, 의사소통 수단을 목소리가 아닌 불빛으로 정했다.

길버트는 숲의 동쪽에는 자신과 월렛을, 숲의 서쪽에는 밀러와 하멜을, 그리고 중심에 있는 산 중턱에는 리버 일행을 배치했다.

모든 신호는 일단 길버트가 있는 동쪽 숲에서 시작된다. 다만 그 신호는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숲의 서쪽에선 인지할 수 없다.

여기서 중턱에 있는 리버 일행이 다리 역할을 맡는다. 리버 일행이 길버트의 신호를 받고 그것을 똑같이 밀러와 하멜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지금 밀러가 인지한 것도 바로 중턱에서 보내온 그 신호였다.

밀러는 유심히 중턱을 관찰하다가 이내 지시했다.


"좌우로 흔들리는군. 시작하세 하멜."


밀러의 말처럼 중턱의 불빛은 좌우로 천천히 길게 오가고 있었다.

준비 단계의 신호였다.

밀러는 늘어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불을 놓는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은 고작해야 열 명 중 한 명 꼴로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그저 뎅그러니 홰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자칫하면 산맥 전체를 태워버릴지도 모를 작전이었고, 그래서 길버트는 혹여 벌어질 실수를 대비해 시야를 밝힐 정도의 횃불만 미리 밝혀 놓기로 했다.

밀러는 소리쳤다.


"불을 나눠라!"


밀러의 명령에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횃불을 들고 있던 병사들이 바로 옆에 있는 병사들의 홰에 자신의 횃불을 가져다 댔다. 불은 빠르게 양 옆으로 전달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병사들이 횃불을 지니게 됐을 때 두 번째 신호가 왔다.

하멜이 병사들을 독촉하고 있는 밀러에게 외쳤다.


"두 번째 신호일세 밀러!"


밀러는 서둘러 산 중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턱의 불빛은 이번에는 위 아래로 요동치고 있었다. 밀러는 재차 명령했다.


"곧 시작된다! 자리를 잡아!"


불을 나누기 위해 흐트러졌던 대형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의 대형을 확인한 후 밀러는 초조한 심정으로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신호는 세 가지 뿐이며,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신호 뿐이었다. 마지막 신호가 오면 모든 병사들이 한꺼번에 불을 놓으면 된다. 그러면 아마 불은 미리 뿌려둔 페레핀과 기름을 타고 번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순간 삐이익- 하는 소리가 창공에서 울려 퍼졌다. 밀러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에 보았던 밤독수리가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밀러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밀러는 불을 놓고 난 이후의 일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에 일어날 일은 온전히 신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 정신적으로 편할 것 같았다.

밀러는 언젠가 길버트와 역사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사건은 아주 우연적인 원인으로 일어나며, 그 진행 방향 역시 전혀 추측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뒤에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때가 있다. 밀러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신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병사들과 두 노인 사이에 성급하고 초조한 침묵이 흘렀다.

몇몇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횃불을 바닥에 떨궈버릴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병사들의 다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잠깐만..."


병사들을 관찰하던 밀러는 어느 시점에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 밀러는 병사들이 과도한 긴장감과 중압감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다 냉정한 마음으로 주변을 자세히 관찰한 밀러는 곧 숲 자체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밀러가 관목과 흙과 바람이 긴장해서 떨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가설을 세운 것과 거의 동시에 어느 병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밀러는 거의 반사적으로 비명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밀러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얼굴에 들러 붙은 베르미를 떼어내고 있는 병사가 있었다.

밀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밀러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음 번 병사의 비명이 들려온 순간 밀러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황급히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주변의 바닥에 어느샌가 무수한 구멍들이 생겨나 있었다.

물론 밀러는 그것을 두더지나 아르마딜로의 굴로 착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착각할 수도 없었다. 그 구멍의 크기와 모양은 언제나 영지에서 보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문득 삐이익-하는 밤독수리의 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밀러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밀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 하는 다소 맥빠지는 소리였다.

네 번째 병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밀러는 적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검을 빼 들었다.

비명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며, 밀러는 조금 전 하멜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곧 밀러는 그 고지식한 영감에게 잘난 체하며 늘어 놓았던 자신의 설교가 치명적인 단점 하나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야 피오 신께선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실 것이다. 그것이 신의 본질이며 역할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피오 신은 어쩌면 요괴들조차 사랑하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제기랄..."


밀러가 욕설을 삼켰을 때 갑자기 바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흙이 대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악-"


베르미와 스퀼라들이 밤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며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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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5 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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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2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5 5 15쪽
53 착석 (14) 23.08.07 78 4 15쪽
52 착석 (13) +2 23.08.03 137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0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69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69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4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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