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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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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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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6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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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3)

DUMMY

말콤의 지적에 마르코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순진하다는 말은 도둑들에게 있어서 비난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고민하며 그간의 언행을 점검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도 마르코는 자신의 언행에서 이렇다할 문제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결국 마르코가 자포자기한 투로 물었다.


"...그만 놀리고 가르쳐주십쇼. 이렇게 투명할 만큼 미래가 보장된 사업을 공작은 어째서 우리에게 맡기는 겁니까?"


"으음. 굳이 말하자면 방금 전의 네 추측은 사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완전 터무니 없는 생각은 아니란 말이지. 아무튼 무벤은 신성한 곳이야. 이 경우 신성하다는 단어는 권력이라는 단어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단어지. 남부건 북부건 말이야. 그러니 권력의 상징인 자드의 카니쿨라들보단 우리들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우린 행정권과 신권의 정치적 대립과는 아무 연관도 없으니까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말콤이 연기를 한 모금 내뱉었다.

조금은 투미해진 눈빛으로 타들어가는 꼭지를 바라보던 말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거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무엇보다 현실성과 합리성이야. 우선 그 전에 자드 공작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해볼 필요가 있겠군. 자드라는 남자는 말이지, 만약 수렁에 빠진 누군가가 자신의 옷깃을 잡고 살려 달라고 외치면 곧장 칼을 빼들고선 그 손목을 잘라버릴 남자야. 그리고 반대로 그 자신이 수렁에 빠지면 가장 우애가 두터웠던 친구의 옷자락마저 힘껏 움켜쥐고 잡아 당길 남자지."


"지독하게 이기적인 남자라는 말이군요."


"그래. 자드 공작은 한없이 이기적이지. 그런 남자가 우리에게 부탁했다는 것은, 심지어 내게 저자세로 나왔다는 건 그럴만한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야. 진부한 표현이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거지."


말콤의 설명에 대해 생각하던 마르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이유를 추측할 수 없는 건 여전한데요. 일단 자드는 할 수 있잖습니까. 어, 그러니까... 이것이 북부와의 거래인 데다 유통 장소가 무벤이라는 점이 걸리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야 자드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 큰 장애물도 아닐 것 같은데요."


"맞아. 잘 지적했어. 점점 똑똑해지는군. 그건 현실성에 관한 얘기지. 그리고 마르코 네 말대로 현실적으로 자드는 충분히 혼자서 사업을 벌일 수 있어. 그럼 두 번째 합리성이 남는군. 이번에는 여기에 한 번 주목해보자고."


"이 니코티아나를 유통하기만 하면 막대한 부를 얻을 테니 이 사업은 모로 봐도 합리적이겠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반응에 마르코가 약간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마르코. 이 순진한 친구야. 물론 돈이라는 건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아주 합리적인 이유가 되곤 하지. 하지만 자드에게는 아니야. 어차피 그는 대륙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고작 황금 쪼가리를 얻고 싶다는 목적은 그에게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단 말이야."


결국 마르코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콤은 토라진 부하를 보며 웃어준 뒤 설명을 이었다.


"내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우선 이 얘기부터 해보자구. 그래, 내가 자드의 방에 들어선 순간 그는 나를 벌레 보듯 하더군. 아마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은 몸집이 좀 커다란 벌레나 다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마르코, 큰 벌레가 더럽다고 해서 무작정 손바닥으로 단숨에 짓뭉개버리면 어떻게 될까?"


마르코가 그 장면을 상상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피가 튀어 더러워지겠죠?"


"맞아. 베르미를 밟아 터트릴 때처럼 체액이 터져 나와서 몸이 더러워질 테지. 나는 바로 그 점이 의심스러웠단 말이지. 연초 장사라는 것은 어떻게 봐도 고귀한 신분이 벌이기엔 추잡한 짓거리야. 더욱이 우리 같은 벌레들을 이용하자면 더욱 추잡해지지. 전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것이 북부를 위한 공익 사업인 줄 알았단 말이야."


"공익 사업이요? 아니, 그것보다 북부를 위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말콤은 테이블을 검지 끝으로 딱딱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야. 남부는 북부를 직접 통치할 수 없지. 이유는 간단해. 북부는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추운 곳이니까. 나도 나데자 같은 그나마 남쪽에 가까운 도시들은 몇 번 가봤지만, 도저히 인간이 살 만한 곳이 아니더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지. 직접 통치하지 못하기에 아직도 북부는 야만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야. 대륙은 황제의 것이지만 행정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지방자치단체에 귀중한 세금을 퍼부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음... 그럼 종합해보자면 공작은 북부에서 연초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북부에 돈을 전달해주고 싶은 겁니까? 여태 관심을 주지 못했던 자신의 땅에 사업이라는 대의적인 명분으로 돈을 쥐어 주고 발전시키고 싶다는 이유로?"


"맞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처음 자드의 방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공익 사업인 줄 알았던 것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마르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만요. 그런 줄 알았다는 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 사업은 어떻게 봐도 이상하거든. 아까 말한 것처럼 자드가 돈을 원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 오늘 그와 만나서 대화해보고 그 점은 확신으로 바뀌었지. 하지만 이것이 공익 사업이라고 치기에도 이상해. 공익 사업이라면 굳이 이 사업을 우리에게 맡길 이유는 없어. 게다가 자드의 방에서 공작이 취했던 태도도 이상하지. 어째서 우리 같은 도둑들에게 그토록 저자세로 나왔을까?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무벤에서 이 사업을 하겠다는 깨끗한 놈들은 널리고 널렸을 텐데 말이야."


"그냥 속 시원히 좀 말해주십쇼.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해가 되질 않잖습니까. 대체 자드의 목적이 뭡니까!"


마르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알고 있다면 어서 말하라'는 의미의 표정으로 말콤에게 소리 질렀다.

상관에 대한 태도는 결코 아니었지만 말콤은 화를 내는 대신 초조하고 답답해 하는 부하의 모습을 즐겼다.

잠시 후 말콤이 여태 탁자에 탁탁 부딪혀 대던 손가락질을 멈췄다.

이어서 말콤은 팔짱을 낀 채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마르코가 마른 침을 한번 삼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말콤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도 모르겠어."


"예?"


"그런 어벙한 표정은 남들 앞에선 짓지 마. 얕보이니까. 으음. 뭐, 의도를 정확히 알 수야 없지. 나는 인간의 속마음을 읽는 아돌프도 아니니까 말야.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어. 적어도 공작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우리들을 써먹으려는 건 아니야. 내가 그 자리에서 공작을 약 올렸음에도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그건 이까짓 연초를 유통하는 것보다 훨씬 큰 모욕이었거든. 음... 이봐 마르코. 우린 말이지, 어쩌면 엄청난 일에 휘말린 건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일이라니, 그거 혹시 도둑의 감입니까?"


"그래 도둑의 감이야. 하지만 틀림 없겠지. 내 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으니까. 공작은 분명 어떤 일에 대해 심려하고 있어. 아마 그 일이란 자신의 권력으로도 해결 못할 종류겠지. 해결할 수 있다면 혼자서 진즉 해결해버렸을 남자니까. 그의 실행력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지. 암 그렇고 말고. 아무튼 그는 남부가 평화에 절어있었을 때 홀로 전쟁을 외쳤고, 곧바로 시행해버린 남자니까. 그런 남자가 굳이 도둑들의 손을 빌려서까지 사업을 한다는 건 말이지..."


말콤은 탁자 위에 양손을 세운 뒤 그 위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마르코는 램프 빛에 물든 말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말콤의 행동은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가만히 말콤을 응시하던 마르코는 문득 이제는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거의 잊혀져버린 말콤의 예전 별명이 떠올랐다.


말콤의 예전 별명은 거미였다.

마르코는 그보다 더 적합한 별명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보 길드의 마스터 자리는 운이나 요행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말콤은 온갖 정보를 취합하고 섞은 뒤 결론을 도출해내는 일에 있어선 따라올 자가 없었다.

거미라는 별명은 그 과정에서 대륙 전역에 촘촘한 정보망을 뿌려 놓는 모습에서 붙여졌다.

그 거미줄은 남부와 북부를 가리지 않고 가늘고 넓게 펼쳐져 있으며, 말콤은 자신의 거미줄에 걸려든 정보를 놓치는 일이 없는 남자였다.


마르코는 지금 말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무수한 정보들의 처리 과정을 생각해보았다.

말콤은 남북의 복잡한 정치 관계나 무역세, 현행 법령에 따른 적법한 과정과 절차, 심지어는 주요 인사들이 각자 애인을 만나는 횟수까지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에 마르코가 약간 아득해지는 기분을 받고 있었을 때, 턱을 괴고 있던 말콤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일관 웃고 있던 말콤의 입꼬리가 어느새 평평해져 있었다.

말콤은 마르코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마르코, 현재 콜텐에 살고 있는 쿠니들은 몇 명이나 있지?"


"예? 쿠니 말입니까? 으음. 제가 알기론 두 명 정도입니다만."


"두 명이라. 그걸론 부족할지도 모르겠군. 좋아, 명령하지. 마르코 너는 지금 당장 발이 빠르고 수완 좋은 녀석들에게 쿠니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도록 지시해. 적어도 쿠니 세 명 이상은 필요할 거야. 만약 수도에서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영지에 있거나 혹은 숲에서 사는 쿠니들이라도 불러 모아. 어떤 지시보다 이 지시를 최우선으로 진행하도록."


"예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쿠니들은 왜 불러 모으는 겁니까? 그 귀여운 종족은 인간들의 정치나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을 텐데요."


마르코의 질문에 말콤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칼은 대장장이에게, 요리는 요리사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어?"


뜬금없는 말에 한참 동안 고민하던 마르코의 시야에 조금 전 피웠던 연초가 들어왔다.

이윽고 마르코는 말콤의 말을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 약초학에 박식하다.

물론 연초 잎은 약초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있지만, 어찌 됐든 식물에 관한 지식에서 쿠니들을 따라갈 사람은 없다.


"일단 저 니코티아나를 분석할 생각이시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던 마르코를 말콤이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려 봐 마르코. 생각해보니 자드가 우리에게 처음 부탁했던 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군. 그건 어떻게 되고 있지? 그 북부 놈과 결탁해서 꼬맹이 둘과 아돌프 하나를 잡아 들이는 일 말이야."


"그 건이라면, 일단 얼마 전에 스라바라는 남자가 갑자기 우리 쪽 인원을 전부 물렸습니다. 그러고선 웬 요상한 노인과 둘이 행동하는 것 같더군요. 참 멍청한 남자입니다. 사람을 찾는데 있어서 정보 길드원들 만큼 뛰어난 인재는 없는데 말이죠. 아무튼 그 새하얀 북부놈과는 별개로 듀라트 영지에도 지금쯤 지시가 하달 됐을 겁니다. 아마 벌써 그 세 명을 포획한 뒤에 이리 이송하고 있는 지도 모르죠."


"흐음. 그 쪽에도 인원을 더 배치하도록 해. 왠지 그 세 명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군."


"혹시 그것도 도둑의 감입니까?"


말콤이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진중한 표정이었기에 마르코도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르코는 말콤에게 경례한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말콤은 묘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탁자 위의 연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



한 걸음 아래로 내딛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먼지에 자드는 인상을 구겼다.

자드는 미세한 먼지들이 호흡 속에 섞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지하는 지나치게 낡고 케케묵어 있었다.

하지만 시종이나 하녀들에게 이곳을 청소하라고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짐작이지만 아마 지금 자신이 있는 지하 공간은 황궁을 몇 개나 집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클 것이다.


자드는 램프를 든 손을 몸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드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새에 이 계단이 하루에 몇 개씩 몰래 늘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지극히 미신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이 지하의 모든 것들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며, 자드는 방금 전에 있었던 도둑놈들의 수장과 벌였던 회합에 대해 생각했다.

그 비굴한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솟구치는 분노가 느껴졌다.


'연초를 피우는 건 들이마실 때와 내뱉을 때 모두 행복하다고?'


수잠의 말은 여러 해석이 있지만 자드는 말콤의 해석이 그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먹으면 행복해지고 뱉으면 불행해진다는 그 유명한 구절은 생산성에 대한 비유라고 봐야 한다.

수잠이 말한 먹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은, 생산적인 일이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말과 같다.


이건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평생을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식량이 곳간에 쌓여 있다면 인생 대부분의 고민은 그 순간부터 별 가치가 없어진다.

그리고 곳간에 식량을 쌓기 위해선 어찌 됐든 생산적인 일에 매달려야 한다.


반대로 뱉는 일은 비생산적이다.

다만 여기서 뱉는다는 것은 음식을 뱉는 일이 아니다.

이 경우 수잠이 뛰어난 역사 학자이자 언어 학자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뱉는다는 것은 말을 뱉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말을 뱉는 일은 무용하고 비생산적이다.

모든 오해가 말에서 시작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수잠이 주장한 행복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생산성을 끌어 올리거나 혹은 비생산적인 일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자드는 그 두 가지 일 중 후자의 일이라면 자신이 충분히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그저 입을 다물면 그만이며, 자드는 타인의 입도 쉽게 다물게 할 자신이 있었다.


지하는 어두웠고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지루했다.

그래서 자드는 그런 식의 온갖 형이상학적인 생각과, 또 사업에 관한 것,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움직였다.


잠시 후 어느 시점에 자드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다음 계단을 예상하고 있던 자드는 거의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바로 잡았다.

지하 바닥에 내려선 자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커다랗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장엄한 공동이었다.

자드는 우선 기름을 아끼기 위해 램프를 껐다.

공동 가장자리에서 나오고 있는 희미한 빛 덕에 바닥에서 사물을 분간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자드는 공동 한 편으로 걸어갔다.

멈춰선 곳은 다양한 크기의 문이 일렬로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가장 작은 문은 인간들의 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문은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점점 커졌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문의 경우엔 얼핏 보기에도 높이가 20큐빗쯤은 돼 보였다.


순간적으로 자드는 그 문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만 두기로 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시도해본 일이었고 큰 문은 언제나 열리지 않았었다.

자드가 열 수 있었던 건 가장 왼쪽의 가장 작은 문 뿐이었다.

자드는 작은 문 옆에 새겨진 마법진에 손을 올려 놓았다.

잠시의 번쩍거림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방 안은 쭉 뻗어 있는 복도와 비슷한 형태였다.

계단과 마찬가지로 그 복도 모든 곳에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다만 중앙 부분은 다소 먼지층이 얇았다.

이전에 자드가 몇 번이나 그 복도를 가로질렀던 흔적이었다.

자드는 복도의 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나치는 양쪽 벽에는 알 수 없는 그림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양 옆에 새겨진 그 그림을 전부 무시한 채 자드는 방의 가장 구석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침내 복도의 끝 부분에서 자드가 멈춰 섰다.

그곳엔 다른 벽면과 달리 꽤나 선명한 큰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자드는 손을 뻗어 벽화의 한 부분을 쓰다듬었다.

밝게 빛나는 성물을 치켜든 남자가 인간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기묘한 벽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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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8 4 12쪽
6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1) 23.09.09 39 3 16쪽
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63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9) 23.09.05 42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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