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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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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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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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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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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기 (2)

DUMMY

"돈이요?" "돈이라구?"


리버와 토비가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두 사람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길버트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예 돈입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그 돈으로부터 비롯되지요. 항상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아, 이건 종교적 대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당연히 종교는 중요합니다.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윤리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고, 그런 가치가 없었다면 지금 대륙은 훨씬 더 야만스러운 상태였겠지요. 그리고 그 외에도 전쟁의 원인을 따질 때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기는 합니다. 가령 민족주의, 종교적 갈등, 지배권의 대립, 도시별 관세, 지역적 요인, 권력 관계, 사상, 지하 자원 등이 그렇습니다. 다만 그중 가장 큰 요인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돈입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 토비가 팔짱을 끼고서 킁-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물론 팔짱을 낀다는 건 승마 도중에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 장면을 봤다면, 양 손을 놓고 말을 타는 그 기막힌 승마술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비가 고삐를 쥐지 않고도 평탄하게 말을 몰 수 있었던 건 그의 탁월한 승마술 때문은 아니었다.


길버트와 루나가 고삐를 쥐었다 놓으며 평범하게 말을 조종하고 있었다면, 토비는 말이 투정을 부릴 때마다 사납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것을 승마술이라고 봐야 할 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효과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말은 토비의 협박을 몇 번 듣고 나서는 그 후로 어떤 투정도 부리지 않게 됐다.

더불어 길잡이인 길버트가 말의 체력을 고려해 평보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토비는 양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토비가 팔짱을 낀 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남부의 인간들이 고작 돈 때문에 북부와 전쟁을 벌였다는 거냐?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데. 내가 알기로 북부는 언제나 가난했고 남부는 부유했잖냐. 길버트 네 말대로라면... 그래,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가장 가난한 인간들의 것까지 탐 내다가 결국은 전쟁까지 일으켰다는 말이 되겠군."


길버트는 인간으로서 어쩔 도리 없는 난처한 기분을 받으며 토비의 의문 섞인 눈빛을 외면했다.

길버트는 먼 곳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토비군. 솔직히 말하자면 아돌프인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부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수의 인간들이 실제로 당신의 말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차마 부정할 수도 없겠군요. 그렇지만, 일단은 저도 인간인 만큼 종 차원의 변호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각종 추악한 행위는... 그래요, 인간이라는 종족이 터무니없이 나약하기 때문일 겁니다. 토비 당신도 잘 알겠지만 우리는 당신들처럼 강하지 않으니까요."


애매모호한 말이었지만 토비는 어느 정도 길버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토비가 말했다.


"글쎄. 너희를 한 놈씩 따로 떼어 놓고 보자면 물론 그렇겠지. 내가 어떤 인간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대신 너희는 무스들처럼 무리를 이루고 살잖냐. 보통 그렇더군, 인간 한 명을 건드리면 그 인간의 가족이나 친지들, 심지어 같은 영지에 살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 인간을 돕기 위해 우르르 몰려오더라고. 그걸 보고서 생각했지. 너희들은 하나하나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다고 말이야. 최소한 한 가정 정도는 하나의 단위로 보는 게 맞겠지. 그리고 그런 거라면 너희들이 다른 종족에 비해 그리 약하다고 할 수도 없어."


토비는 위로할 셈으로 건넨 말이었다. 길버트가 자신의 종족을 비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버트는 위로 받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길버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통찰은 아주 정확합니다. 인간은 헤르바 풀 같은 존재입니다. 너무 나약하기 때문에 집단을 이루지 못하면 살 수 없지요. 그러나 토비, 나약함이란 말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볼썽사납고 고약한 속성입니다. 저는 비단 육체의 나약함을 집어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쿠니들이나 무스들은 대개 신체를 단련한 인간 남성보다 약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강하고 현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 정신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의 가장 큰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예. 인간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신은 나약하면서도 자의식은 그에 비해 너무 비대하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이 그 어떤 종족보다 권력이나 돈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권력과 돈은 타인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효과가 있습니다. 타인을 통제하는 상황이란 자신이 그 타인보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해주지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통제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시민이 귀족을 통제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속성 때문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돈을 가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돈은 곧 권력이며, 인간은 권력으로 타인을 통제할 때 자신들의 자아가 타인보다 더 우월해진다고 믿으니까요."


"흐음."


토비가 알듯 말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앞 쪽에서 루나의 허리를 잡은 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버가 의문스러운 듯 질문했다.


"그럼 길버트씨는 남부도 그런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전쟁을 벌였다는 말인가요? 방금 길버트씨의 말처럼 고작 북부의 위에 군림하고 싶다는 이유 만으로요?"


리버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길버트는 자신이 현재 대화에 너무 심취해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콜텐 대학이 아니며, 말을 탄 두 사람은 학구열 넘치는 대학생들도 아니었다.

길버트는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제 버릇 탓에 얘기가 쓸데없이 헛돌았군요. 본론을 말하자면 제가 전쟁의 원인을 돈이라고 말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마 리버군은 장사를 해봤으니 이해가 더 쉬울 겁니다. 자, 다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리버군이 주전자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쳐보겠습니다. 만약 리버군이 자신의 가게를 더 크게 키울 생각이라면 어떤 방법을 취하겠습니까?"


"음... 가게를 키우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니,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죠. 그리고 돈을 더 많이 벌자면 주전자를 기존보다 싼 값에 더 많이 팔거나, 반대로 아예 더 비싸게 받고 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판매하는 입장에서 더 큰 수익을 얻자면 사실상 그 두 가지 경우 밖에 없지요.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손님들은 리버군이 부자가 되는 일이나 고급스러운 주전자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까요. 소비자들은 단지 싼 값으로 오래 쓸만한 튼튼한 주전자를 구매하고 싶을 겁니다."


"그럼 싼 값에 많이 팔아야겠죠?"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좋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리버군. 그럼 이번엔 이런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싼 값에 주전자를 판 덕분에 영지 내 모든 시민들이 주전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전자라는 물건은 몇십 개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물건은 아니지요. 차를 끓여 먹기 위해 한 두 개면 충분합니다. 자, 모든 가정에 주전자가 보급되고 난 후에 당신의 가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업종을 바꾸지 않으면 금방 망할 것 같은데요? 더 이상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요."


리버는 순진무구하게 대답한 후에, 생각에 잠긴 듯 루나의 뒷어깨 부근에 깊게 뺨을 묻었다.

길버트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비는 어느 순간부터 딴청을 피우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심이 떨어진 아돌프의 모습에 한 번 피식 웃은 길버트는 이내 리버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로 했다.


"맞습니다. 그런 경우엔 금방 가게가 망해버리겠지요. 그럼에도 당신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주전자 밖에 없다면, 결국 리버군은 다른 영지로 가야 할 겁니다. 그리고 주전자가 없는 시민들을 상대로 다시 장사를 시작 해야겠지요."


"맞아요! 딱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어요. ...그런 표정으로 웃지 마세요 정말이니까. 그보다 저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만약 새로 옮긴 영지의 시민들도 주전자를 다 구입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요. 그렇게 되면 저는 또 다른 영지로 가게를 옮겨야 될 테고 그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라..?"


대답 끄트머리에서 리버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리버는 다시 루나의 뒷목 부근에 얼굴을 기댔다.

길버트는 차분하게 리버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어느 순간 리버가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설명했다.


"이해한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영지를 떠돌다가, 이윽고 남부의 모든 가정에 주전자가 보급된 후에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습니다. 가게를 포기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구매자를 찾는 일입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설명하자면 종교 전쟁의 가장 심층적인 이유는 결국 새로운 소비자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북부인을 계몽하고, 가치관을 보편화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남부의 결속을 다진다는 그 모든 원인은 표면적이며 부가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아까 토비군의 말처럼 남부는 언제나 부유했습니다. 온화한 기후는 농사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곡물들을 과할 만큼 잘 자라게 해주니까요. 그렇게 먹을 것이 해결되면 인간들은 온갖 것들을 쉼 없이 생산해내지요. 하지만 팔 사람이 없다면 과잉 생산된 제품은 동일한 무게의 쓰레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남부는 새로운 소비자를 찾기 위해 위 쪽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필요한 것이 많은 법이고, 마침 북부는 지독하게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리버가 고민에 빠진 듯 미약한 신음 소리를 냈고, 길버트는 그런 리버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무렵에 갑자기 리버가 타고 있던 말이 자리에 멈춰 섰다.

멍하니 산을 바라보던 토비가 약간 당황하며 급하게 고삐를 잡고 말을 멈췄고, 길버트 역시 황급히 고삐를 잡아 끌었다.

모두가 멈춰 선 가운데 루나가 풀썩 말에서 뛰어 내렸다.

루나는 말 위에 혼자 남겨져 어쩔 줄 몰라하는 리버를 뒤로 한 채 길버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흥미로운 강의지만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군. 여기서부터 우린 숲으로 이동할 거야."


"벌써 말입니까?"


길버트는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반나절도 더 남은 시점이었다.

야영 준비를 하기엔 너무 일렀고, 게다가 굳이 요괴나 동물이 있는 숲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길버트가 눈빛으로 의문을 표시했지만 루나는 숲 쪽으로 몸을 틀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낮에 마차와 부딪힐 뻔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루나는 망설임 없이 고삐를 쥐고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마 그것이 설명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길버트는 황당한 심정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리버와 토비는 어느새 말에서 내렸는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루나의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고, 그 상태로 잠시 시간이 흐르자 길버트는 홀로 남겨진 모양새가 됐다.

결국 길버트는 말에서 내렸다.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길버트는 황급히 세 사람을 쫓았다.


길버트가 루나의 설명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던 건 숲 속에서 야영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더 정확히는 리버와 루나가 움막을 짓고, 그 사이에 토비가 사슴 한 마리와 야생 닭 두 마리를 잡아오고, 길버트가 말들의 식사를 전부 해결했을 시점이었다.


길버트는 조금 어이없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점검해 보았다.

낮에 마차가 지나갔다. 마차의 방향은 듀라트 영지였다.

추적자들이었다면 한가하게 고급 마차를 몰며 이동할 리 없으니 그들은 단순한 여행객들이다.

여행객이 듀라트 영지에 방문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들은 남부에서 수배된 처지다.

따라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편이 바람직하며, 그러기 위해선 이제부터 숲으로 이동해야 한다...


해석을 끝마친 길버트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긴 말은 지루한 데다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그것은 어이없을 정도의 축약이었다.

루나의 설명은 지나칠 정도로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고, 또 불친절했다.


길버트는 주섬주섬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루나의 말에 대한 해석이 옳은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어째서 리버와 토비가 그녀의 말에 군말 없이 따랐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영과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동시에 해도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만약 루나가 도로에서 조금 더 늦게 숲으로 진입했다면, 야영 준비를 하기 전에 해가 졌을 것이다.

그야말로 정확한 시간 분배였다.

문득 길버트는 세 사람이 이전에 롭스 산맥을 가로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길버트는 그때의 여정이 아마 지금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거라 확신했다.


"길버트? 빨리 먹고 쉬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식사고 뭐고 빨리 드러눕고 싶다구요."


멍하니 세 사람을 관찰하던 길버트에게 리버가 잘 익은 닭을 접시에 담아 건넸다.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는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졌다.

식사 예절로 말하자면 루나는 우아했고, 토비는 거칠었고, 리버는 그 중간쯤 어디엔가 있는 듯했다.

석양을 받아 붉어진 숲 속에서 한동안 말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길버트가 더없이 적절하고 알맞은 간 조절에 감탄하며 다리 뼈를 내려 놓았을 때, 문득 나비 한 마리가 모닥불 근처로 날아들었다.

짙은 파란색 날개를 가진 나비였다.


파란 날개를 가진 나비는 모닥불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리버는 나비가 모닥불 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할까 걱정된다는 듯 손을 몇번 휘휘 내저었다.

그 동작에 나비는 모닥불을 벗어나긴 했지만, 다시 숲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비는 네 사람의 주변을 크게 맴돌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들이 있는 곳은 숲이었고, 그것은 평범한 나비였다.

크게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길버트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길버트가 의아함을 느낀 것은 스물 네 번째 나비가 자신의 주위로 날아든 시점이었다.

하나같이 진하고 현란한 색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나비들이었다.

라비는 루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주변을 맴도는 나비를 관찰하던 길버트는 묘한 기분을 받으며 토비를 쳐다보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이렇게 많은 나비들이 날아들다니. 혹시 당신들 소지품 중에 꿀이라도 있습니까?"


길버트의 질문에 토비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가? 하지만 나도... 못했다. 일단... 뒤에.... 하자고."


그리고 이어진 토비의 대답에 길버트는 혹시 오늘 하루 벌였던 여정이 생각보다 자신을 훨씬 지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길버트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떴다.

그 뒤에 이번에는 리버를 향해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음. 리버군, 터무니 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혹시 지금 제가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까?"


리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들려요! .....처럼... 혹시.... 루나!"


리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길버트는 자신의 청력 쪽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리버와 토비 역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명백히 당황한 모습으로 저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일행 중 오직 루나만이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얌전히 자신 앞에 놓인 그릇에 집중하고 있었다.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길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가 다시 한 번 리버에게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버군?"


리버가 무슨 대답을 할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물론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에 뻐끔거린 것이 입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정확하게는 얼굴에서 입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부분이 뻐끔뻐끔 움직이고 있었다.

길버트는 의식의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숲 안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숲 역시 일그러져 있었다.


뒤틀려버린 시야에 현기증을 느끼던 길버트는 어느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잔뜩 일그러진 사물과, 식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일그러지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루나와 나비였다.

루나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모닥불 앞에 앉아 얌전히 식사에 치중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날개를 가진 수 십 마리의 나비들이 끊임없이 길버트의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길버트는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비 한 마리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가 낮아지며 동시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쿵-


뺨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으로 길버트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졌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거나 눈을 뜰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은 물에 떨어뜨린 먹물 방울처럼 투미해졌고, 사고는 구름처럼 흩어졌다.

가까스로 남은 이성이 위험을 경고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길버트는 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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