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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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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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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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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8)

DUMMY

토비가 사람들 앞으로 성큼 나서자 가장 먼저 리버가 어이없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토비?"


모로 봐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서재의 인간들 역시 리버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필립의 말을 멈춘 토비는 그런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중심에 선 토비는 한 손으로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의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세웠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토비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으므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순간 토비의 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숨죽인 채 토비를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토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길버트에게 물었다.


"이봐 길버트. 혹시 이 저택에 우리들과 두 영감 말고 다른 사람들이 더 있나?"


"다른 사람이라면 백작 부인이 계시긴 합니다만. 아마 지금은 침소에 드셨을 겁니다."


"그럼 아니겠군. 지금 들리는 건 애초에 인간 여자의 발소리가 아니니까 말야."


"발소리? 밀러와 하멜이 돌아온 겁니까?"


"아니, 그 두 명의 발소리는 이제 완전히 구분할 수 있다. 잠시만, 조용히 해봐. 소리가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수가 꽤 많아. 무스들처럼 아주 옅은 발소리야. 의식적으로 소리를 감추려는 모양이군. 이거 수상쩍기 그지 없는데?"


잠시 후 길버트와 리버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시에 루나가 입을 열었다.


"카니쿨라들이군."


"카니쿨라? 무슨 말입니까 루나양."


"자드가 기르는 놈들이야. 저 주교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저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지목 당한 필립이 억울한 듯 물었다.


"그래,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다른 인간들도 이제 영지에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이겠지. ...네 입장에선 반대겠지만 이 경우엔 운이 나빴군. 저것들이 며칠 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숲 속에서 사라져버렸을텐데."


필립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루나는 그 반응을 무시한 채 인상을 구기며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때쯤 길버트는 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식당에서 리버가 들려줬던 얘기와, 방금 전 필립이 전달한 서신의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자드의 손은 대륙 전역에 뻗쳐 있으니 이런 시골 영지에 추격자들이 찾아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길버트가 다급한 어조로, 그러나 지극히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 놓았다.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습니다. 당장 떠나야 하는 상황이군요. 저쪽에 작은 뒷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필립 주교님."


"예."


"서신을 전달한다는 역할이 끝났으니 주교님은 이제 무벤으로 돌아가시겠지요."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당분간은 이 영지에 숨어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장소에서 벗어나면 아무 민가에나 들어가 숨어 있으십쇼. 저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신도 위험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이 일의 전모를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필립은 설명을 요구했지만 길버트는 묵살했다.

종단에서 한번도 지금과 같은 취급을 받은 적 없던 필립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길버트가 토비에게 눈짓을 보냈다.

토비가 성큼성큼 필립에게 다가갔다.

곧 필립 주교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우아악-!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내려 놓으십시오!"


"조용히 좀 해라. 네 발이 되어주려는 거니까."


토비는 필립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단단히 껴 안았고, 그 행동을 확인한 길버트는 서둘러 서재의 뒷문을 향해 움직였다.

곧 서재의 모든 사람들이 길버트의 뒤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뒷문을 통과해 서재를 벗어나자마자 옆구리에 매달린 필립이 질문해왔다.


"자...잠시만요!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지금부터 세 분은 무벤으로 가시는 겁니까?"


질문하는 필립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리버와 루나는 얼마 전 성벽 앞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기에 필립의 괴로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마 필립은 토비의 발걸음마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일 것이다.

루나가 약간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맞아. 우리는 이대로 무벤으로 갈 거야. 이 영지까지 온 너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에게 굳이 서신을 전달할 필요는 없었어. 우린 처음부터 무벤으로 가려 했으니까."


"예?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래, 이 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특수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우린 며칠 전에 벌써 무벤으로 이동하고 있었을 거야. 이제 이곳의 문제가 해결됐으니 지체할 것도 없겠군. 뭐 지체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그때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길버트가 자리에 멈춰 섰다. 식당 근처의 복도였다.


"토비군, 여기서 필립 주교님을 내려주십쇼."


토비가 팔을 풀었고, 마침내 해방된 필립이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버트는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하다가 일단 리버 일행에게 마구간의 위치를 일러주었다.

리버와 토비 그리고 루나는 길버트의 설명을 듣자마자 즉시 저택의 한 지점으로 달려갔다.

그 후 필립과 둘만 남은 상황에서 길버트는 주교를 향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리도 여기서 헤어집시다. 이 복도를 따라 쭉 나가면 저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교님은 조금 전에 제가 말한 대로 며칠 동안은 민가에 숨어 있어야 할 겁니다. 혹시 잠겨 있다면 헛간이라도 찾아 들어가십쇼. 그리고 추격자들이 영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베릴 주교와의 접촉도 당연히 안됩니다."


"어...어째서 그렇습니까? 설명을 해주십시오. 어차피 저들이 노리는 건 무녀님들의 일행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필립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길버트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당신들은 자드와 북부의 머리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자드는 자신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흘릴 만큼 덜떨어진 인물이 아닙니다. 아마 당신들이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면 자드 역시 교단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을 겁니다."


길버트의 설명을 듣던 필립이 미심쩍은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고작 방금 전에 모든 내용을 들었을 뿐인데 당신은 거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만 알 뿐입니다. 따라서 방금 드린 것들은 전부 제 개인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을지 말지는 당신의 문제입니다."


길버트는 추측이라 말했지만 필립은 그 말에서 묘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중년 남자의 말투에는 그것을 믿게 만드는 그런 힘이 실려 있었다.

문득 필립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필립은 길버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면 이 길버트라는 남자는 너무 친근하게 대륙의 인사들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대륙에서 자드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없다.

그는 명실상부한 대륙 최고의 권력이니까.

다만 길버트의 어투는 아득한 곳에 있는 정치가를 말하는 투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길버트의 어조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을 말하는 쪽에 가까웠다.

유심히 길버트를 관찰하던 필립의 눈이 다음 순간 가늘어졌다.

필립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이런 상황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퍽이나 이상하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겠군요. 그러니까 이제 보니 당신은, 제가 아는 어떤 분과 아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맞습니다."


"그렇지요? 역시 제 터무니 없는 상상이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시골 영지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예? 맞다니요. 지금 맞다고 하신 겁니까?"


길버트는 필립의 눈을 마주 보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필립의 눈이 그보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


세 사람은 약간 헤맨 뒤에야 마구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택의 내부는 복잡했고, 귀족 저택의 건축 양식에 대해 무지했던 세 사람은 길버트의 설명 만으로 곧바로 마구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경우엔 토비의 활약이 컸다.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토비는 말과 건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 냄새를 쫓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간이 나타났다.


마구간의 문을 열자 야밤의 방문에 놀란 듯 말들이 울어 댔다.

주변에 추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루나와 리버는 일단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쯤에서 다시 토비가 활약했다.

토비는 말들을 향해 낮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친절하게 달랜다기보다 위협하고 겁박하는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비록 종족은 달랐지만 말들은 토비의 뜻을 기가 막히게 이해한 듯 곧장 얌전해졌다.


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거의 다 야위어있었다.

다만 애초에 품종이 좋은 녀석들이었는지 덩치 자체는 상당히 컸다.

가장 먼저 토비가 마구간 내에서 제일 큰 녀석을 골라 잡았다.

루나 역시 그 뒤를 따라 한 녀석의 고삐를 쥔 후에 훌쩍 뛰어 올랐다.

다행히 말 등에는 안장이 메어져 있었다.

토비와 루나가 그대로 마구간을 나가려 했을 때 뒤에서 리버가 작게 소리쳤다.


"자... 잠깐만! 나는 말을 탈 줄 모르는데..!"


"...가지가지 하는군. 토비! 리버를 내 등 뒤에 올려."


말에서 뛰어내린 토비가 리버의 허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리버는 루나의 등 뒤에 안착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리버의 앞에서 루나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잡아. 떨어지면 버리고 갈 테니까."


그 뒤 예고도 없이 가한 박차 탓에 리버는 거의 떨어질 뻔했다.

균형을 잃을 뻔한 리버는 당황하며 루나의 목에 양 팔을 감았다.

그리고 가슴을 루나의 등에 붙이고 양 팔을 단단히 죄었다.

당연하게도 앞에서 잔뜩 화난 루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멍청한...! 날 목 졸라 죽일 셈이야?"


"바... 방금은 꽉 잡으라면서?"


"허리를 잡아 이 멍청아! 그리고 네 허리는 펴! 허벅지에 힘을 주고 반동에 거스르려 하지 마. 위 아래 흔들림에 맞춰서 몸을 그냥 내버려둬!"


리버는 그 조언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도 리버의 승마술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버가 몇 번 더 낙마의 위기를 겪고 난 뒤, 결국 처음에 습보로 저택을 벗어나려 했던 루나는 포기한 채 속보 정도로 속도를 조정했다.

자칫하면 리버에게 휘말려 자신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토비가 뒤엉킨 두 사람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말을 타고 얼마간 이동한 세 사람이 마침내 영지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대륙을 향해 있는 영지의 정면에는 뒤 편보다 훨씬 거대한 성문이 있었다.

아직 추격자들이 따라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토비가 성문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거 어떻게 여는 거냐?"


리버와 루나 역시 건축학에 유별난 소질은 없었으므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시각은 꽤 늦은 밤이었다.

평소라면 시간과 상관없이 문지기가 있었을 테지만 하필 축제가 열리는 바람에 성문엔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이 성문 앞에서 우물쭈물대고 있었을 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세 사람 곁으로 불쑥 다가왔다.

토비가 거의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려던 순간 인영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토비군! 접니다!"


"응? 길버트?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성벽의 그림자 속에서 말에 탄 길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버트는 왠지 모르게 겸연쩍어 하면서 토비의 의문에 대답했다.


"...저도 무벤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런 것이지만... 아무튼 이 얘기는 일단 영지를 벗어나고 난 후에 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요."


확실히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길버트는 리버 일행이 성문 앞에 멈춰서 있던 이유를 곧바로 알아채고서 두 사람을 향해 지시했다.


"양 쪽에 있는 도르래를 동시에 움직이면 됩니다. 토비군이 혼자 오른쪽을 맡아주십쇼. 저와 리버군이 왼쪽을 돌릴 테니."


토비는 재빠르게, 리버는 엉거주춤하게 말에서 내렸다.

각자 위치에 선 뒤 도르래를 돌리자 드르륵-소리와 함께 성문이 올라갔다.

도르래가 풀리지 않게 고정한 뒤 네 사람은 서둘러 다시 말에 올라탔다.

네 사람은 망설일 것 없이 서둘러 성문을 빠져나갔다.

영지 뒤 쪽과 달리 정면에는 잘 포장된 도로가 있었다.

말이 걷기 적당한 길이었고, 그 덕에 네 사람은 빠른 속도로 영지와 멀어질 수 있었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다그닥거리는 말 발굽 소리 만이 한참 동안이나 울렸다.

마침내 성벽이 저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멀어졌을 때, 루나의 뒤에 매달려 있던 리버가 길버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길버트씨 두 영감님에게 아무런 얘기도 없이 이렇게 떠나도 괜찮은 건가요?"


리버의 말에 길버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파묻힌 듀라트 영지에서는 아직 축제가 끝나지 않은 듯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장엄하고 고고한 성벽을 보며 길버트는 몇 년간 영지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머릿속에 차례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황궁에 있었다면 절대 겪지 못했을 경험들과, 사람들이었다.

멀거니 영지를 바라보던 길버트가 이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길버트가 다분히 미련 섞인 투로 대답했다.


"두 영감님은 아마 상당히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평소에도 얘기했던 것이지만 그분들은 오히려 제가 영지에서 떠나길 바랐으니까요."


"길버트씨가 떠나길 바랐다구요?"


"예. 그분들은 제가 이런 시골에서 머무르기를 원치 않더군요. 그러니까 내일 아침, 제가 완전히 떠나버린 것을 알면 웃으며 축복해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리버는 무의식적으로 지하수로에서 에이튜와 작별했던 일이 떠올랐다.

길버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리버가 생각에 빠지자 이번에는 루나가 무감정한 말투로 질문했다.


"너는 무벤까지 우리를 따라올 셈인가?"


"일단 그럴 작정입니다만, 혹시 안됩니까?"


"안될 건 없지. 하지만 영감들의 말대로 너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텐데. 우리의 여로는 썩 쾌적하지 않아. 특히 황태자가 겪기엔 지나치게 다사다난한 일들이 될 확률이 높지."


"글쎄요, 대륙의 어떤 다사다난한 일이라도 듀라트 영지의 정오보다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확실히 동의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루나는 다음 말이 궁색해졌다.

그래서 루나는 약간 멋쩍은 투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무벤으로 가는 거지? 성물을 흡수했기 때문인가?"


"저는 폐위되었지만 황태자였습니다. 남북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남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리고 서신에 적힌 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무벤에선 반드시 전쟁의 징후가 나타날 겁니다. 그걸 확인한 뒤에는 당신 말대로 황궁으로 갈지도 모르겠군요."


길버트는 잠시 침묵한 후에 덧붙였다.


"여행길에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저는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신분도 확실히 보장되어 있으니까요. 오히려 당신들의 여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그것이 암묵적인 동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내 토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될 건 없지 같이 가보자고. 우린 이미 전우잖냐. 그보다 길버트."


"예."


"영지를 구해 달라는 의뢰를 완수했으니 말인데. 혹시 나에게 지급할 수주비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길버트는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무벤에서 돈을 차용한 뒤에 반드시 지불하겠습니다."


토비가 다시 기분 좋게 웃었고, 그 웃음은 점점 옆으로 전파됐다.

은색 달빛을 받아 비단 같이 변해버린 도로 위에서 네 사람은 미끄러지듯 무벤을 향해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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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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