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823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08.03 02:52
조회
137
추천
6
글자
19쪽

착석 (13)

DUMMY

시노드 회의장은 몇백 명 정도는 우습게 수용 가능한 크기였다.

다만, 실제로 회의장에 있던 것은 고작해야 스무 명 정도 되는 인간들이었다.

스칼과 스니블이 회의장에 등장하자 시노드장에 앉아있던 인간들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것들은 전부 하나같이 엄중하고 진지한 눈빛들이었다.

담력이 약한 사람의 경우 주눅이 들 법한 시선이었지만 두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스칼과 스니블은 자신들을 주목하는 시선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단상을 향해 움직였다. 단상은 입구의 맞은 편 끝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시노드장의 중심을 완전히 가로질러야 했다. 밟고 다니기가 미안할 정도로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카펫 위를 걸으며, 스니블은 자신이 마지 극단의 배우나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시노드장은 극장과 비슷한 상당히 모습이기도 했다.

문에서부터 단상까지 쭉 이어진 붉은 카펫이나, 어느 위치에서나 단상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층계별로 둥글게 놓인 수백 개의 의자가 그랬다.

스니블은 그것이 아마 의도적인 배치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노드는 회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자유롭게 의제가 오가는 분위기는 아니다. 시노드는 보통 대주교의 권고 비슷한 명령이나, 교훈 비슷한 질책을 듣는 자리다. 아무래도 참석자가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주눅 들어 있는 편이 진행하기 수월하다.


느릿한 걸음걸이로 단상을 향해 걸어가면서, 스니블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곳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익숙한 면면들이었다. 물론 그중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극장으로 치면 관객석에 앉아있는 그 인물들은 전부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뚜렷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 지을 수 있는 가장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기경과 몇몇 주교들의 그 속 보이는 엄숙함에 스니블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아마 제 나름대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겠지만, 저만큼 속내가 드러나면 우스운 꼴밖에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은 시노드의 결과에 따라 태도가 바뀔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적대적이지만 만약 자신이 득세한다면 언제고 호의적으로 바뀔 위인들이었다.


'당장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추기경이자 관객 그리고 동시에 배심원에 해당하는 남자들을 관찰하던 스니블은 다시 단상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걸었다. 바로 옆에 있던 스칼은 이런 일은 딱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죽대며 걷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카펫 끝자락에 도달했다.

두 사람의 눈 앞에 지나치게 높은 단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선 파스토르가 준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니블은 잠깐 대주교에게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파스토르는 어떤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파스토르는 그저 사무적인 표정으로 일관했다.


"늦었군. 시간을 엄수하라 경고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파스토르 대주교님. 제 회중시계가 조금 어긋나 있었나 봅니다."


그때까지 무심하게 대화를 듣던 스칼은 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자마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뀌었다. 스칼은 '분명 호르체 한 잔을 걸쳐도 될 만큼 시간이 널널하다고 말하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친구의 의문에 스니블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니블은 굳이 스칼에게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애초부터 조금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스니블은 슬쩍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수의 추기경들이 불쾌한 얼굴로 저들끼리 쑥덕대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그중에서도 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추기경들은 여기까지 들릴 만큼 크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스니블은 그 장면을 보며 다시 조소했다.

회의장을 들어올 때, 스니블은 그 거대한 문을 일부러 닫지 않은 채로 놔두었다. 회의장 안으로 눈이 빗발쳐 들어오고 있으니 누군가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한다.

물론 그 누군가는 스니블이나 스칼이 될 수 없다. 시노드는 어디까지나 엄중한 회의이며, 이미 단상 앞까지 도착한 두 사람이 고작 문을 닫기 위해 다시 입구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방정맞은 일이다. 따라서 본래 시종들이나 해야 할 문을 닫는 임무는 고스란히 추기경들이 떠맡게 되었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스니블은 선웃음을 흘렸다. 아마 지금 문을 닫고 있는 두 추기경은 자신들이 이 시노드의 조연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을 것이다.

단상에 선 파스토르는 회의장의 입구와 스니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파스토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스토르는 훈계하듯 낮게 말했다.


"너는 저들을 놀려 먹는 것을 일종의 여흥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타인을 불쾌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기쁨을 느끼는 것을 우리는 보통 악취미라고 부르곤 하지."


"청빈한 수도원 생활에는 즐길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주교님께서도 파란만장했던 사제 시절이 있었으니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수도원 생활이 지루하다는 말에는 백 번 동의하마. 하지만 추기경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는 어떤 이득도 없지 않느냐. 네가 시노드에서 표를 얻으려면 결국 저들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가끔 보면 너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 같구나."


단상 바로 앞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객석에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니블은 웅성대는 추기경들을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파스토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득이 완전히 없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제 자신이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극히 생산적인 활동이니까요. 그리고 저 치들이 대주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이유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당신께서 대주교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저들이 존경하는 것 또한 대주교라는 직책일 뿐입니다."


"물론 권위를 위해 권위를 추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나 역시 그것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저들 중에는 사제 시절부터 사귀었던 친구들도 여럿 있는데."


"과연, 그래서 매수하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이군요."


스칼이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파스토르와 스니블은 마치 일용직 노동자들이 펍에서 떠드는 것과 비슷한 태도로 대화하고 있었다. 물론 과장이 약간 섞인 표현이지만 아무래도 엄중한 시노드에서 나누기엔 경박한 대화였다.

대주교와 스니블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문득 스니블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회의실에서 재밌는 말씀을 하셨지요. 비가 오면 물이 고이고 사람이 모이면 말이 고인다... 그리고 둘 모두 고인 후에는 그저 썩어버린다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스니블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파스토르는 그저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스니블은 도전적인 시선으로 파스토르를 응시했다.


"그건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셨습니다. 랑그도 박수 칠 만한 훌륭한 비유였지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도 그 비유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대주교님 말처럼 고인 말이 썩어버려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라면, 저는 고인 권력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고인 권력은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절대 자정되지 않습니다."


스니블은 파스토르를 화나게 할 작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대주교는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스니블은 그것이 가장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했다. 주교와 대주교가 큰 소리로 설전을 벌이는 일은, 아무래도 대주교 쪽의 체면이 상할 가능성이 높다.

문득 스니블은 자신이 대주교의 나이를 모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스니블이 처음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와 거의 비슷하게 늙어 있었다. 물론 늙었다는 사실이 개인의 현명함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지는 않지만, 확실히 대주교는 그의 바둑 기풍 만큼이나 진득했다.

돌연 파스토르가 의사봉을 들어 올렸다. 이어서 회의장에 의사봉이 나무판에 부딪히는 탕-하는 청명한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울렸다. 파스토르는 회의장이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새로운 대주교 선출에 관한 네 번째 시노드를 개최한다!"


파스토르의 말이 울려 퍼지자마자 소란스럽던 시노드장이 삽시간에 엄숙해졌다.

여태 지루하다는 듯 삐죽대던 스칼은 앞으로 벌어질 무수한 정치적 논박을 예상한 듯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한편 스니블은 마음속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기 전 스칼에게 했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계획을 시행하자면 우선 사기꾼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스니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재 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북부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사기꾼을 가만히 응시했다.



***



펍의 먼지 낀 나무 탁자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앞이 풀어 헤쳐진 하얀 셔츠, 허벅지 품이 넓고 큰 검은 바지, 그리고 손에는 달라붙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술집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 남자를 주목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차림은 극장의 배우들이나 할 법한 차림새였다. 그와 더불어 남자의 피부가 하얗다는 사실은 남부에서 주목 받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펍의 사내들은 모두 힐끗대며 그 남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스라바는 사방에서 보내오는 파렴치한 시선들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스라바는 시선을 무시한 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무 잔에 담긴 맥주는 미지근했고, 그 탓인지 맥아향이 기분 나쁠 정도로 입 안에 들러붙었다.

물끄러미 남은 맥주를 바라보던 스라바는 이내 그것을 테이블 한 켠으로 치워버렸다.

스라바는 그 싸구려 술을 매일 같이 마셔 대는 남부인들이 경멸스러웠다.

스라바는 북부가, 정확하게 말하면 호르체가 그리워졌다.

그 술은 남부의 더러운 맥주와 달리 입에 남는 법도 없으며, 취하기 위해 너저분하게 몇 잔이나 마셔댈 필요도 없다.

스라바가 생각하기에 남부의 인간들은 항상 한 가지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집어 넣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방금 전 마신 맛없는 맥주가 그렇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긴 귀족들의 이름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지금 천박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오는 술집 주인 또한 그랬다.


"혹시 자네 북부에서 왔나?"


그때까지 생각에 골몰해 있던 스라바는 술집 주인의 말을 한번에 알아 듣지 못했다.


"북부에서 왔냐니까?"


주인이 보다 큰 소리로 던진 두 번째 질문은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스라바는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시비를 거는 투였고,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어서 스라바는 침묵을 고수했다.

스라바는 여태 그랬듯 생각에 잠긴 채 바스툴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술집의 주인은 그 모습을 유약한 남자가 보일만한 태도라고 오해해버렸다.

스라바의 대답이 없자 술집 주인은 갑자기 의기양양해졌다.

아마 눈치가 조금 없는 자라 할지라도 주인이 스라바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술집 주인은 누가 봐도 웅건한 체형이었으며, 매일 같이 술꾼들을 상대해온 탓에 자연스레 사나운 분위기 또한 지니고 있는 듯했다.

반면 스라바는 지나칠 정도로 호리호리하고 하얬다. 스라바는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얇은 외모였다. 그래서 펍의 손님들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재미있는 일을 구경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질문을 묵살 당한 주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후 그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호기심에 작은 곤충을 막대기로 찌를 때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연 피부를 보니 북부인은 확실한 것 같군. 내가 예전부터 북부인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던 것이 있었는데 말이야."


반응하지 않으면 말을 섞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스라바는 그 뜬금없는 말에 결국 고개를 들었다. 주인은 조롱 섞인 투로 말을 이었다.


"북부인들은 겨울이 오면 자신이 기르던 카니쿨라를 잡아 먹는다더군. 그게 사실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혹시 자네도 먹어본 적이 있나?"


시끄러웠던 펍이 차분해졌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애초에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고, 몰래 힐끔대던 부류는 주인의 질문에 이제 대놓고 두 사람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죄다 단골이었으므로 주인장의 태도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스라바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펍의 분위기에 잠시 얼떨떨한 기분을 느낀 스라바는 그러나 곧 자신의 태도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을 전부 이해하자마자 스라바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라바는 천천히 바스툴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느긋한 움직임으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휘익-!"


가게 주인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에 평소 가게 주인에게 공짜 술을 얻어먹던 몇몇 사내들이 스라바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은 여차하면 그 험악한 사내들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 상황은 그들이 그동안 밀린 외상값을 없애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난잡한 가운데 어느 순간 스라바의 얼굴에 잔인한 빛이 맴돌았다.

스라바가 팔을 움찔거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불쑥 옆에 있던 한 노인이 끼어들었다.

먼지투성이 후드를 눌러 쓴 그 노인은 주인을 질타하고 나섰다.


"그만하게. 그 무슨 부끄러운 질문인가?"


갑작스러운 등장에 잠시 엉거주춤하던 주인이 사납게 대꾸했다.


"당신은 뭐요? 나는 저 북부놈과 대화 중이었으니 끼어들지 마시오. 아니면 설마 남부인이 야만인들의 편을 들겠다는 거요?"


"쯧... 목숨을 귀히 여길 줄을 모르는군. 나는 자네를 살려주려는 거야."


"살려주다니? 설마 이 북부놈에게서 말이오?"


스라바는 노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맥이 빠졌다는 듯 자리에 도로 앉았다. 주인은 그것 보라는 듯 비웃음을 띄며 당차게 말했다.


"이 북부 놈은 꼬리 내린 카니쿨라처럼 잔뜩 겁먹고 있소. 이런 놈이 내게 무슨 해코지라도 한다는 거요?"


스라바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스라바는 들고 있던 단검을 테이블 모서리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날과 테이블이 수직을 이룬 상태에서 스라바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스라바의 손길은 섬세했다. 스라바는 마치 붓을 다루듯 별 힘도 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테이블은 날이 닿는 부분부터 치즈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주인은 황망함을 느꼈다.

물론 있는 힘껏 내려치면 테이블을 부수는 일이야 건장한 사내라면 누구든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자라도 저런 식으로 검을 다룰 수는 없다. 주인은 방금 전 노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주인이 딴청을 피워대기 시작했다. 주인은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곧 일어섰던 남자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김이 샜다는 얼굴로 다시 그들만의 수다에 돌입했다.

어느 시점부터 스라바와 노인은 가게에서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됐다.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쳐다보는 일도 없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자 주인을 말렸던 노인이 작게 웃으며 스라바에게 말했다.


"뭐 감사 인사를 할 필요는 없네. 내가 원해서 나선 것이니까."


"감사? 감사를 해야 할 쪽은 네 덕에 목숨을 건진 미련한 남부인 쪽이지. 나는 네게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자네의 인간성을 지켜주었잖나. 또, 사소한 것이지만 세탁비도 아끼게 해 주었고 말일세."


노인은 상대방이 웃어주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스라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약간 머쓱한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소란스러웠던 펍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차분해졌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 둘 펍을 빠져나갔다. 최종적으로 스라바와 노인 그리고 주인만이 홀에 남았다. 객쩍은 분위기 속에서 노인이 일어났다. 노인은 별 말 없이 객실이 있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스라바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슬쩍슬쩍 스라바의 눈치를 보며 잔을 닦고 있던 주인은 결국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을 걸었다.


"...이제 가게를 닫을 시각이니 그쪽도 일어나 주셔야겠소."


주인은 축객령을 내렸을 뿐 술값을 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라바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로 향했다.

이 층의 객실은 복도를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스라바는 그 사이를 걸었다. 객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고함소리나 신음소리 같은 것이 양쪽에서 미세하게 들려왔다. 밖에서는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어느 방문 앞에 스라바는 멈춰 섰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더라도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동작으로 단검을 빼 들었다. 방문 앞에서 몇 번의 가벼운 손짓이 일어났다. 스라바는 손잡이를 통째로 떼어낸 후 방 안으로 들어갔고, 방문을 닫았다.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어떤 작은 소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어선 방은 어두웠다.

하나 있는 꾀죄죄한 침대 위에는 방금 전 소란을 말렸던 노인이 잠들어 있었다.

스라바는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잠시 노인의 얼굴을 관찰하던 스라바가 고개를 한번 갸웃거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스라바는 혹여라도 자신이 사람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라바는 침대 옆에 놓인 노인의 소지품을 뒤졌다.

배낭 속을 뒤지던 스라바는 이내 작은 증명패 같은 것을 발견했다. 마법사들이 소지하고 다니는 증명패였다. 증명패의 중앙에는 푸조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스라바는 안도했다. 사람을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표정 변화 없이 스라바는 몸을 일으켰다.

푸조는 깊이 잠들어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푸조를 살피던 스라바는 문득 약간의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푸조가 입고 있는 후드는 물론이고 그의 장비와 모든 것들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늙은 마법사치고는 너무 거친 여로를 지나왔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폴 영지에서 마법 연구에나 매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중요한 임무에 실패했으니 명예야 조금 실추되었겠지만,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이름 모를 펍에서 한밤중에 암살자를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라바는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그토록 호기심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스라바는 대부분의 경우 호기심이라는 것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아마 공작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 호기심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다.

자드의 부탁을 떠올리던 스라바는 다시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스라바가 단검을 치켜들었다. 스라바는 침대를 향해 단검을 내리 꽂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29 정판충
    작성일
    23.08.05 00:06
    No. 1

    재맜게 보고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개선문1946
    작성일
    24.06.20 15:58
    No. 2

    스바라가 평한 남부의 맥주와 인간들의 특징이
    제가 이 소설을 보는 시각과 비슷합니다.

    한 호흡에 너무 많은 것들을 집어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6 다면기 (9) 23.10.03 19 3 14쪽
75 다면기 (8) 23.09.28 31 3 13쪽
74 다면기 (7) +1 23.09.28 27 2 17쪽
73 다면기 (6) 23.09.24 55 3 13쪽
72 다면기 (5) 23.09.23 32 2 12쪽
71 다면기 (4) 23.09.21 37 3 12쪽
70 다면기 (3) 23.09.18 35 3 16쪽
69 다면기 (2) 23.09.17 36 3 18쪽
68 다면기 23.09.16 34 3 13쪽
6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3) 23.09.16 36 3 17쪽
6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8 4 12쪽
6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1) 23.09.09 39 3 16쪽
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63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9) 23.09.05 42 4 17쪽
62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8) 23.09.03 45 4 16쪽
61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7) 23.08.31 45 4 15쪽
60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6) 23.08.30 45 4 14쪽
59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5) 23.08.29 40 4 15쪽
58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6 4 21쪽
5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23.08.27 41 3 21쪽
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2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5 5 15쪽
53 착석 (14) 23.08.07 78 4 15쪽
» 착석 (13) +2 23.08.03 138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0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69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70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5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