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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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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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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DUMMY

말콤은 자드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방문이 열리고 말콤이 빠져 나왔음에도 경비병들은 진한 연기가 코를 간질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말콤이 경비병들의 엄격함을 칭찬했을 때에도 역시 반응은 없었다.

말콤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선 황궁 밖으로 나섰다.


황궁을 벗어나는 동안 말콤은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대신들이나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정원사나 혹은 복도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용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콤은 그들의 앞날을 축복했고, 가정의 안녕을 빌었고, 심신이 평온하길 기도해주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황궁에 처음 출입하는 시골뜨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말콤은 지나치게 허리를 굽히며 다녔고, 또 굽신거린다는 말이 어울릴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둑이라는 취급은 억울하지 않아도, 만약 누군가 비굴하다는 말을 했다면 말콤은 상당히 억울해 했을 것이다.


말콤은 이런 자신의 태도가 더없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인사나 안부를 묻는 일은 정신력의 소모 외엔 어떤 부담도 없이 호의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심지어 익숙해지면 정신력도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

사실상 공짜로 타인의 호의를 사는 셈이다.

마침내 말콤이 황궁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거리로 나서면서 말콤은 다음 번 황궁에 출입할 때에는 적어도 경비병에게 붙잡혀 신원을 조사 받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콜텐의 시가지로 빠져나온 말콤은 거리를 걸었다.

목적 없이 떠도는 거리의 시민들을 바라보며 말콤은 소문이 자자한 자드의 방에서 방금 전에 이루어졌던 일종의 회합에 대해 상기했다.

기억을 되새기자마자 퍽이나 유쾌한 기분이 말콤을 휩쌌다.


자드 공작은 남북을 포함해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며 공작의 말처럼 자신은 일개 도둑놈에 불과했다.

그 메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자드는 자신에게 부탁해왔다.

유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부탁이란 적어도 동등한 위치나, 혹은 부탁하는 쪽이 더 낮은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니까.


"이런, 지나칠 뻔했군."


말콤은 자신이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원래 목적지에서 벗어나버렸다는 점을 알아챘다.

뒤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선 말콤이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두 사람 정도나 나란히 설 수 있을까 싶은 좁은 골목이었다.


골목 안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한 남자가 말콤 주위에 나타났다.

남자는 골목 한 켠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서는 말없이 말콤의 뒤에 섰다.

그리고 종내에는 말콤의 보폭에 맞춰 바로 뒤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남자가 등장하자 말콤의 인상이 미세하게 변했다.

입은 여전히 황궁에서처럼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사무적이라 부를만한 것이 되었다.

말콤은 익숙한 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족제비로군. 굳이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마스터. 그 낯 부끄러운 호칭은 제발 그만둬주십쇼."


남자의 투정에 말콤은 호쾌하게 한 번 웃은 뒤 대꾸했다.


"좋은 의미잖나 마르코. 길드원들 중에 돼지나 지렁이라고 불리는 놈은 네 별명을 부러워하던데?"


"많이 처먹거나 호리호리하다는 이유로 붙여진 별명보다야 발이 빠르다는 이유로 붙여진 별명 쪽이 낫긴 합니다만...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십쇼. 지금은 저희가 도둑 놀이나 하던 시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콤은 부하의 투정에 그저 웃으며 골목 안쪽으로 나아갔다.

마르코라 불린 남자는 한숨을 쉬며 따라 걸었다.

잠시 후에 마르코 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군요. 역시 예상대로 공작이 사업의 대가로 말도 안되는 것들을 요구했습니까?"


"아니. 정반대야. 자드는 황당할 정도로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더군. 고작해야 무벤의 피오 교단을 감시하라는 것 정도였어."


"예? 그게 답니까? 그럼 저희들의 예상과 달리 썩 변변찮은 사업이었겠군요. 자드나 되는 인물이라 어마어마하게 큰 사업이라 추측했습니다만 실망입니다."


"뭐, 섣불리 판단하지는 마. 사업의 규모가 작냐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거든. 사실 처음엔 나도 네 생각처럼 시시한 사업일 거라 생각했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확인해본 바로 그건 아니더군."


"확인이요?"


"서두르지 마. 다 왔으니 자세한 얘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지."


말콤의 말에 마르코는 어느새 자신들의 목표지에 도달했음을 깨닫고서 고개를 들었다.

두 남자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마자 척 보기에도 심하게 낡아 빠진 술집이 나타났다.

두 남자는 주저 없이 술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주점의 카운터에 붉은 머리 여자가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헝겊으로 잔을 닦고 있던 여자는 두 남자의 등장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말콤은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을 곱씹던 말콤은 그것이 자드의 방을 지키는 병사들과 단연 똑같은 반응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잠시 후에 말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저런 무심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킨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러니 아마 평소에는 감정을 닫아 걸어 놓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여자가 들었다면 어이없어 했을만한 사유를 끝낸 뒤 말콤은 무심하게 가게 안쪽으로 이동했다.

마르코는 여성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뒤를 따랐다.


두 남자는 가게 깊은 곳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속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간단한 가구들이 놓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자드의 집무실에 비하자면 초라했지만, 일반적인 사무실이라기엔 상당히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다만 조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탁자 위에 놓인 램프 하나였으므로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말콤이 익숙한 걸음으로 탁자까지 걸어간 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르코는 탁자 옆에 뒷짐을 지고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했다.


"도대체 어떤 사업이길래 자드 공작이 저희 같은 놈들의 손까지 빌리려는 겁니까? 자드의 방에서 이루어져야 할 만큼 큰 사업은 이제 남부에선 더 없을 텐데요."


"남부가 아니라 북부야. 엄연히 말하자면 무벤은 북부로 조금 더 치우쳐 있으니까. 사업 내용에 대해선... 그래, 차라리 이걸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낫겠군."


말콤은 자신의 윗도리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손바닥 만한 철제함이었다.

말콤이 그 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고, 하나를 더 꺼내 마르코에게 건넸다.

마르코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귀족들이 피는 니코티아나군요. 설마 이게 공작이 말한 사업입니까?"


"흐음, 네 얼굴을 보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겠군. 고작 담배나 팔자고 자드의 방까지 부르다니, 그것 참 시시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건 그냥 귀족들의 상비약 같은 것이잖습니까. 그리 비싸지도 않고요."


말콤은 대답하지 않고 탁자에 한쪽 팔을 올린 뒤 거기에 턱을 굈다.

그 후 연초를 문 채로 램프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치지직-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말콤이 숨을 한 번 내쉰 뒤에 방 안이 매캐해졌다.

말콤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오늘 자드의 방에서, 나는 회합의 대부분을 자드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 할애했지."


"예?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남부에서 그 남자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사업의 중요성을 알아보자면 그 방법밖엔 없었다고. 위험한 시도였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자리에서 경비병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흠씬 두들겨 맞은 뒤에 황궁 밖으로 내던져질 것까지 각오했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더라고? 나는 명백하게 투덜거렸고, 비꼬았고, 모욕했고, 도발했지. 그리고 내 행동에 대한 공작의 반응은 정말 가관이었지. 내가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자 공작은 오히려 이 사업에 관한 우리의 지분을 더 늘려주겠다더군."


마르코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콤은 부하의 얼굴을 보고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마르코가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연초를 가리켰다.


"일단 너도 거기에 불을 붙이고서 한 모금 빨아 봐."


마르코가 쭈뼛거리고 있자 말콤이 명령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르코가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모습으로 램프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다시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연초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여기 편하게 앉아서 피우라구. 이건 행복해지는 물건이거든. 서 있을 땐 행복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법이야. 행복을 느끼려면 적어도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아야 해. 가능하다면 아예 드러눕는 편이 제일 좋겠지만 그건 상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도저히 사양하기 힘들 만큼 단호한 눈빛이었기에 마르코는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마르코는 정말 괜찮겠냐는 눈빛을 보냈다.

말콤은 어서 피워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한껏 쭈욱 들이마신 뒤에 천천히 내뱉어.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라구. 행복해질 테니까 말이야."


마르코는 그 말대로 했다.

몇 번 연기를 들이마시고 뱉는 행위를 반복하자, 어느 순간 몸이 노곤해졌다.

마르코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온 몸의 긴장이란 긴장이 죄다 녹아내리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그 현격한 변화에 마르코는 놀란 표정으로 연초를 바라보았다.


마르코는 귀족들이 피는 이것이 몸과 정신의 이완 작용에 탁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코는 자신이 딱히 긴장하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말콤과 마르코가 있던 장소는 그들의 집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긴장하는 인간은 없다.

따라서 지금 피우고 있는 니코티아나가 단순히 긴장을 풀어줬기에 이런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르코는 몇 모금 더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고, 이내 어째서 말콤이 자신에게 앉아서 피기를 권유했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본심을 말하자면 마르코는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간 탓에 더 서 있기 힘들었다.

아마 여지껏 서 있었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을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그 모든 느낌이 결코 기분 나쁜 종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반대였다. 마르코는 그 단시간 동안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말콤의 말대로 이건 행복해지는 물건이 확실했다.


그때 의자 위로 녹아내리고 있는 부하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관찰하던 말콤이 말했다.


"정말 좋은 물건이야. 그렇지 않나?"


상관의 물음에 마르코는 얼른 정신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 예, 그렇군요. 저는 이것이 귀족들이 두통을 없애기 위해 피우는 독한 약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무튼 니코티아나 냄새는 옆에서 맡기에는 고약하고, 또 기침이 나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요.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기분 좋아지는 것인 줄 알았다면 진작 피워 봤을 텐데요. 뭐랄까요, 마치 세상 모든 고민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정확한 표현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안 팔릴 수가 없는 물건이겠지. 자드는 물론 사업가는 아니야. 하지만 이만큼 확실한 물건이라면 수완이 어지간히 나쁜 인간이라도 수지 맞는 장사를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시 의심이 드는데요. 어째서 공작은 성공할 것이 뻔한 이 사업을 우리에게 맡기려는 겁니까? 역시 무벤이 피오 교단의 총본이라 손을 쓰기 어려워서 그런 걸까요?"


부하의 어리숙한 질문에 말콤은 연초를 입에 문 채로 씨익 웃었다.


"마르코, 너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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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8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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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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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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