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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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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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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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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DUMMY


어디선가 페루스가 나타날 것만 같은 삭막한 밤.

듀라트 영지 뒤 편 상공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배회하고 있었다.

만약 조류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공중에서 선회하는 그 독수리에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독수리는 주행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독수리가 낮과 밤을 지독히 착각한 것은 아니다.

독수리는 대륙에 얼마 남지 않은 밤독수리였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녀석들은 주로 밤에 활동하곤 했다.

다만 밤독수리라는 점을 알고 보더라도 그 독수리의 선회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독수리들의 주된 활동은 주로 먹이를 찾거나 혹은 둥지를 짓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밤독수리는 먹이를 쪼기 위해 내려앉는 일도 없이 그저 숲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귀중한 에너지를 소모할 뿐인 그 비행은 그러나 밤독수리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밤독수리는 그 시점에 잔뜩 허기진 상태였고, 슬슬 둥지의 보수도 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감히 숲으로 내려 앉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날개를 최대한 넓게 펼치고 활강했다.

바람을 이용해 최대한 체력을 아끼는 자세로 밤독수리는 숲을 내려다 보았다. 숲의 풍경은 몇 분 전과 다름 없이 여전히 기이했다. 언제나 그가 머물던 숲 안에 또 다른 작은 숲 하나가 조성되어 있었다.

밤독수리는 몇 분 전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느낌을 받으며 더 낮은 고도로 활강했다.

가까이 내려가자 숲 속의 또 다른 숲의 정체가 드러났다.

숲 속의 작은 숲은, 갈색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얇고 긴 띠로 에워싸여 있었다.

더불어 그 흙바닥 위에는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인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밤독수리는 자연이 방종하다는 사실쯤이야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 때문에 잠시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며칠 동안 숲이 이 정도로 변화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밤독수리는 인간들이 만든 띠를 따라 숲을 한 바퀴 빙 둘러 날았다. 곧 그는 인간들이 저마다 빛나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에 밤독수리는 그것이 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당한 심정으로 밤독수리는 다시 고도를 높여 날았다.

사실 그에게 인간은 그리 낯선 동물은 아니었다. 보통 인간들은 흙과 돌을 이용해 높은 둥지를 만들고서 그 안에서 활동하는 종이 대부분이다.

밤독수리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밤독수리는 가끔 인간들이 숲의 나무를 베러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인간들은 주행성 동물이 분명했다.

밤독수리는 혹시 전혀 새로운 종의, 예컨대 야행성 인간들이 근처에 살게되었을 경우를 짐작해보았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상상은 밤독수리에게 썩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밤독수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야행성 인간이 등장했다면 상황은 다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그 문제란 서로의 영역이나 활동시간 혹은 먹이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이 겹치지 않는다면 인간이 얼마나 포악한 동물이건 크게 상관이 없다. 영역과 시간이 다르면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들끼리 낮에 살아가고 그는 밤에 활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들이 몸으로 경계선을 만든 그 작은 숲은 그의 영역이었고, 심지어 그의 활동 시간인 밤에 숲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지금 인간들이 만든 숲 속의 작은 숲에는 씨앗이 무더기로 있는 장소나, 맛 좋은 청설모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 모조리 포함되어 있었다.


적잖이 초조함을 느끼며 밤독수리는 다시 상공 위 편으로 날갯짓했다.

그는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비가 내린 탓에 며칠 동안 사냥을 하지 못했다. 사실 처음 비가 쏟아졌을 때 그는 기뻐했다.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숲은 항상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내어주곤 했다. 예컨대 땅을 뚫고 올라오는 통통한 지렁이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 비가 그쳤음에도 그는 숲에 내려앉지 못했다. 밤독수리는 다시 땅으로 파고들 벌레들을 생각하자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독수리는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인간들과 싸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성정이 지나치게 사나우며 언제나 무리를 지어 다닌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곳에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것도 그에겐 큰 부담이었다. 애초에 밤독수리가 독수리 중 유일한 야행성 종인 이유는 다른 개체보다 덩치가 훨씬 작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는 특히 덩치가 더 작았다. 그는 다른 독수리나 혹은 밤독수리와 영역을 놓고 다투는 일은 그닥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독수리들과 싸울 자신도, 그렇다고 인간에게 대적할 자신도 없었던 그는 결국 하루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물론 내일도 인간들이 여전히 밤을 밝히고 있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터전을 옮겨야 할 것이다.

활강하며 숲을 주시하던 밤독수리는 머리를 좌우로 한번씩 거세게 털었다. 그 바람에 깃털 몇 가닥이 숲 위로 떨어졌다. 밤독수리는 숲의 한쪽 구석으로 가만히 날아갔다.



*



길버트는 자신의 발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원래 맨들거렸을 숲의 바닥은 지금 보기 흉한 자국들로 온통 파헤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대지의 속살이 흘끔흘끔 들여다 보였다.

어쩌면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주변 지형을 봤다면 그곳을 짐승이나 요괴들이 다니는 오솔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이 5큐빗에 달하는 그리고 길이가 몇 천 큐빗에 달하는 오솔길을 만들자면 아마 성미 급한 페루스 다섯 마리 쯤은 필요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뜻 오솔길처럼 보이는 그 지역은 듀라트 영지의 모든 시민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고된 노동이었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노동이었다.


길버트는 벌거숭이처럼 드러난 맨 땅을 보며 화전민들을 생각했다.

화전민들은 특정한 구역을 태우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갈퀴 등으로 낙엽과 초목을 죄다 긁어 모으곤 한다. 소위 불금친다고 일컬어지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시민들이 해 놓은 작업은 불금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버트는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된 후에는 어쩌면 작은 숲 지역을 경작지로 활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숲의 재는 그대로 작물의 훌륭한 양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경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내년 이맘때쯤의 영지는 그럭저럭 풍요로운 겨울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답잖은 생각에 빠져있던 길버트는 생각의 그 지점에서 쓰게 웃었다.

영지의 다음번 겨울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그런 희망찬 미래는 작전이 전부 끝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저희들이 밤독수리의 사냥을 방해한 모양이네요."


월렛의 목소리에 길버트는 망상을 멈췄다. 어느샌가 길버트 옆에 다가와 있던 월렛은 약간 아련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월렛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그제서야 길버트는 월렛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 한 켠에서 밤독수리가 조용히 비행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저 독수리에겐 아마 우리들이 자신의 집을 태우는 방화범이나 다름없을 테지요. 차라리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작전 도중에 숲에 들어온다면 저 밤독수리는 랑그의 말처럼 이 숲의 묘비가 될 테니까요."


월렛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묘비요? 랑그는 저 신성한 동물을 묘비에 비유했나요?"


"밤독수리가 신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사실 그 전에는 정반대였지요. 밤독수리는 불길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랑그가 그의 수필에서 저것을 묘비라고 칭한 사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겠지요. 어찌 됐든 그는 대륙에서 가장 존경 받는 시인이고, 그런 시인의 심상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법이니까요."


"음..."


월렛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밤독수리의 꽁무니를 쫓던 월렛은 의문 섞인 투로 되물었다.


"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야 저렇게 우아한 생물이 또 어디 있단 말이에요? 심지어 밤독수리는 피오 교단을 대표하는 동물이잖아요? 랑그는 저도 존경하는 시인이지만 그 비유는 도무지 와닿질 않네요."


길버트는 잔잔하게 웃었다.


"랑그가 저 짐승을 묘비에 비유했던 이유는 당시 남부가 지독하게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예?"


"독수리는 예전부터 전서조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수도 콜텐에서는 지금도 이용하고 있지요. 물론 수 많은 제후들이 알력 다툼을 벌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월렛 당신도 알다시피 영지전이란 서로의 긴밀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행사입니다. 영지 사이엔 독수리 마를 날이 없었지요.

하지만 그중 다소 폭력적이거나 신사 답지 못한 내용의 편지들은 낮독수리들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후들은 차마 낮에는 보낼 수 없는 내용들의 편지는 밤독수리를 애용하곤 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쇼. 자는 사이에 머리맡에 놓여 있는 끔찍한 내용의 편지는, 꼭 무덤 머리맡에 놓인 묘비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상상에 빠진 듯 잠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월렛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설명을 이었다.


"편지 내용이 묘비의 내용처럼 언제나 불길하다는 점과, 침대와 묘지 양쪽 모두 인간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는 점도 닮아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퍽이나 훌륭한 비유지요. 과연 세기의 시인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비유입니다."


월렛은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를 듣는 아이 같은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과, 하늘과 숲 위에 흩뿌려진 불빛은 사색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 뒤에도 곰곰이 어떤 생각에 빠져있던 월렛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길 아저씨... 아.."


월렛은 말하던 도중 흠칫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러고선 길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월렛의 걱정과 달리 길버트는 부하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다. 사실 지적하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월렛의 태도는 이미 한참 전부터 상관을 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버트는 그저 인자하게 한번 웃어주었다.


"괜찮으니 편하게 부르게. 어차피 이 작전이 끝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백인장이 아니게 될 테지. 만약 성공하는 경우에 나는 백인장에서 다시 평범한 영지의 시민으로 돌아갈 테고, 실패하는 경우엔 땅의 거름이 되겠지. 그러니 편히 부르게, 호칭 따위야 사실 아무 것도 아니잖나."


"하지만 아직 백인장이시잖습니까. 적어도 그 요괴 놈들을 전부 해치울 때까지는 상관으로 모시겠습니다."


길버트는 좋을 대로 하라는 식으로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월렛은 자신의 실수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계속 떠들었다.


"그보다 백인장님 정말 이 구역만 태우면 요괴들을 싸그리 없앨 수 있는 겁니까? 혹시 저희들이 포위하고 있는 이 부근이 사실 베르미와 스퀼라들의 서식지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이면 어떡합니까."


여태 월렛의 충실한 말벗이었던 길버트는 그러나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산 중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중턱에는 작은 불빛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불빛의 위치를 가늠한 길버트는 리버 일행이 정확한 지점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 놓았네. 그러니 남은 일은 피오 신께 맡기는 수 밖에 없겠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평소부터 기도를 많이 해 놓을 걸 그랬습니다."


길버트는 부하의 농담에 한번 웃어준 뒤 다시 산 중턱을 응시했다. 길버트는 그곳에 있을 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이 영지에 나타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체감했다.

토비의 경우엔 그를 발견하자마자 떠올릴 수 있었다. 아돌프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영지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 작은 소녀가 이토록 큰 도움을 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밤의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길버트는 어제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



작업의 시작 단계에서 길버트는 흥미로운 관찰자에 가까웠다.

아무튼 무녀가 성물을 탐색하는 과정은 누구도 한 평생 볼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더불어 길버트는 그 작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드물게도 적잖이 흥분한 상태로, 또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채 숨기지 못한 상태로 루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시작할 테니 가만히 있어. 긴장할 필요는 없어. 가벼운 산책을 하는 마음가짐이면 돼."


루나는 주의사항을 말한 뒤 지도 위에 한손을 올렸다. 곧바로 그녀의 앞머리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길버트는 그 빛이 루나의 이마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머리카락에 가려진 탓에 문양이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루나를 바라보던 길버트는 이번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탁자 위에 놓인 대륙 지도. 그리고 루나의 손은 그 지도 위를 훑고 있었다.


이후 루나가 수탐이라고 명명한 그 작업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오히려 너무 잠잠한 탓에 무료함이 들 지경이었다. 그때쯤에는 관찰을 멈추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길버트는 그러나 다음 순간 손에 이질감을 느끼고서 다시 루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버트는 어느샌가 루나에게 붙들린 자신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음을 깨달았다. 루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헐떡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루나양...!"


갑작스러운 상황에 길버트는 손을 빼려 했다. 그때 리버가 길버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이어서 리버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 앞에 곧게 세웠다.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유서 깊은 행동이었으므로 길버트는 입을 다물었다.

진땀을 흘리던 루나는 어느 시점에 지도 위 한 점에서 손을 완전히 멈췄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버트는 루나의 손이 멈춘 곳의 지명을 중얼거렸다.


"무벤."


중얼거림을 끝으로 탐색은 완전히 끝난 듯 싶었다. 루나는 맥이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드러누웠다. 서재에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헐떡이던 루나의 호흡이 안정됐다. 루나는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태도로 돌아와 탁자 위를 정리했다. 지도를 반듯하게 접은 후 루나가 쌀쌀한 투로 말했다.


"탐색은 끝났으니 이제 그만 손은 놓지 그래."


길버트는 황급히 손을 빼냈다.


"네 덕에 성물의 위치는 확인했어. 멀리 있군."


"혹시 다음 성물은 무벤에 있는 겁니까?"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어. 도시 안에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도시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지도 모르지."


루나는 접은 지도를 리버에게 건넸다. 그러고선 길버트를 응시하다가 이내 마지못해 꺼낸다는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널 도와주겠어."


길버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장난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루나양은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손에 넣게 해주었잖습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쇼. 저와 영감님들은 당신을 말릴 권한이 없습니다."


"남자들은 항상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군."


"예?"


뜬금없는 대답이어서 길버트는 다소 바보 같은 의문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루나는 길버트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루나는 탁자 한 편으로 밀려난 서류들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다. 소파에 앉은 루나는 그 서류를 하나하나 훑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남자들은 대개 그렇지. 여자들이 조금만 친절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을 애정으로 착각해버려. 그런데 반대로 여자들이 가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면 그 순간 버림받은 카니쿨라처럼 행동하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루나양?"


"그런 남자들처럼 너도 착각에 빠져 있다는 말을 하고 있어. 이걸 봐."


루나는 들고 있던 헤르바지를 길버트의 얼굴 앞에 디밀었다. 그러고선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이 계획은 전부 엉터리야. 계획이 아니라 소설에 가깝지."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화전을 일구는 것처럼 숲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는 좋아. 하지만 너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분리한 숲 안에 모든 요괴들이 잠자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거지? 만약 그것들의 서식지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다면 이 계획은 전부 수포로 돌아갈 텐데."


길버트는 그 지적에 대해 차분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루나의 말처럼 세부적인 모든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선 요괴들의 구역을 재단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전혀 엉뚱한 곳에 불을 지르는 것은 그녀의 말처럼 일종의 희극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인정함과 동시에 길버트는 억울함을 느꼈다.


"합당한 지적입니다만, 어차피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숲의 어느 구역을 태워야 할지 알기 위해서 요괴들이 자고 있는 땅을 전부 헤집어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럴 시간도 인력도 없습니다. 제 무능을 탓하려면 실제로 구역을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불가해한 느낌을 받으며 길버트는 말을 멈췄다. 길버트는 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나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당신은...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


확고한 표정으로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과 함께 길버트의 눈이 둥그래졌다. 곧 루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루나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무녀의 답례는 상당히 비싼 편이야. 그래서 우리들은 도움 받기를 꺼려하지. 그것을 몇 배로 갚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원칙이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방금 네가 수탐을 도와준 것은 작은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나는 갚아야 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루나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네 도움의 답례로 나는 이 암울한 영지에 미래를 선물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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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3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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