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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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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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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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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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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DUMMY

"세 번째 신호에요 토비!"


리버가 외치자마자 그때까지 바위 위에 앉아 할 일 없이 숲을 관찰하던 토비가 벌떡 일어났다. 토비의 바로 옆에는 토비의 신장 세 배 정도나 되는 장대가 놓여 있었다. 토비는 그 장대를 움켜쥐고 바위에 섰다. 토비는 가슴팍 부근에 단단히 장대를 고정 시킨 뒤 장대를 휘저었다.

물론 장대는 아주 길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밤하늘의 별을 따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았고, 토비 역시 그 장대로 별을 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거의 20큐빗에 가까운 장대 끝에는 심지가 있었고, 그곳에 불이 붙어 있었다. 토비는 그 불로 차가운 공기 속에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이 마지막 신호였다. 첫 번째 신호에서 토비는 불을 좌우로 흔들었고 두 번째는 상하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인 지금 토비는 그 불이 원을 그리도록 휘젓고 있었다.

아마 인간이었다면 지금 토비와 같이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길이가 길이인 만큼 장대는 무거웠다. 일반적으로 장정 서너 명은 달라붙어야 겨우 들까말까한 무게지만 토비는 혼자서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한편 리버는 묘기를 부리고 있는 토비 앞에서 숲의 양 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토비처럼 장대를 휘두를 수는 없었던 리버는 대신 토비에게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길버트가 있던 숲 쪽에서 원을 그리던 불빛이 이내 멈췄다. 그리고 하멜이 있는 쪽 역시 짧은 답신 후에 멈췄다. 리버는 양 쪽 모두 더 이상 신호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토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신호가 멈췄어요. 이제 그만해도 돼요!"


고개를 끄덕인 토비는 밧줄을 잡아 끌듯이 장대를 당겨 회수했다. 토비는 불이 엄한 곳에 옮겨 붙지 않도록 횃불 바로 밑을 움켜쥐고 그것을 부러뜨렸다. 장대가 순식간에 짧아졌다.

토비는 그렇게 횃불처럼 짧아진 장대 끝을 들고 한 손으로 양 어깨를 번갈아 주물렀다. 아돌프에게 있어서도 그 긴 장대를 휘두르는 것은 꽤 과격한 노동이었다.

토비가 제 할 일을 전부 끝낸 것을 확인한 리버는 초조한 표정으로 토비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숲 안의 숲을 이루고 있는 원형의 가장 윗부분에 루나가 서 있었다.

리버는 루나를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태 무심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루나가 천천히 오솔길의 한 지점으로 움직였다.


오솔길의 꼭지점이라고 불러야 할 지점에 선 루나가 알 수 없는 말을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리버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토비에겐 그것이 똑똑히 들렸다. 그래서 토비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루나의 중얼거림은 예전 리버의 잡화점에서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을 때와 아주 흡사했다. 멀뚱하게 루나의 행동을 관찰하던 토비는 이내 리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리버, 우리가 산맥을 지나올 때 루나가 모닥불을 지피는 장면을 보기야 했다만 정말로 혼자서 저 넓은 구역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거냐?"


"이미 영지에서 길버트씨와 확인한 작업이에요. 처음엔 저도 의심스러웠지만 가능하던데요?"


두 사람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루나가 양손을 앞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루나는 그렇게 마치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어느 순간 루나의 발치에서 불쑥 자그마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루나는 앞으로 뻗은 양 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 손길에 호응하듯 한 곳에서 타오르던 불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휘유."


토비가 약간 경박스러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사이에도 불은 멈추지 않고 좌우로 계속 뻗어나갔다. 불길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뻗어나간 후에야 루나는 팔을 내렸다. 작업이 끝난 것처럼 보여서 두 사람은 루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토비는 초목에 옮겨 붙기 시작한 불을 보며 말했다.


"거참 실용적인 마법이군. 혹시 다른 곳처럼 기름을 마구 뿌려야 하는 건 아닐까 했는데 덕분에 잘 됐다. 기름 냄새는 딱 질색이라 말이지."


토비는 칭찬할 요량이었지만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묘한 표정으로 숲 아래를 응시할 뿐이었다. 토비는 적잖이 머쓱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 옆에서 리버는 싱긋 웃으며 루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길버트가 있는 쪽의 숲을 관찰했다. 길버트가 있는 쪽에서 불길이 화악 치솟았다. 중턱으로 신호를 보내자마자 그 지역에도 곧장 불을 놓은 것 같았다.

숲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탓에 새까만 연기가 무럭무럭 일어났다.

불길은 대지와 초목들을 천천히 핥는 듯이 움직였다. 저 멀리서 타닥타닥 하는 나무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어두운 숲을 밝히고 있는 불은 마치 태양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리버와 토비가 왠지 모를 아득한 심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 루나가 몸을 옆으로 홱 돌리며 발을 놀렸다.


"우리 역할은 끝났어. 내려가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루나는 시종일관 화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리버와 토비는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멀뚱히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루나는 계속해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리버는 일단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홀로 남은 토비는 이제 쓸모 없어진 불 붙은 장대를 오솔길 안 쪽으로 던져 넣었다. 이어서 곧장 두 사람을 쫓아 움직이려던 토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리에 멈춰 섰다. 숲의 한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던 토비가 짤막한 의문성을 내뱉었다.


"응?"


"왜 그래요 토비? 빨리 내려가죠!"


토비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루나를 따라가던 리버가 자리에 멈춰 서며 물었다. 토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숲의 좌우를 번갈아 주시했다. 토비는 의문 섞인 어조로 외쳤다.


"좀 이상한데. 저기 봐라 길버트네 쪽은 이미 저 만큼이나 불이 붙었잖냐. 그런데 두 영감 쪽은 아직 시작할 기미도 없는 것 같은데."


서 있는 위치에서는 반대편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리버는 토비의 옆으로 걸어가 바짝 붙었다. 토비의 옆에서 리버는 숲의 좌우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길버트네와 달리 두 노인이 있는 곳에선 아직 불길이 치솟지 않고 있었다.


"어라? 정말이네요."


"젠장 설마 신호를 확인하지 못한 건가? 그렇다면 낭패로군. 장대는 이미 부러뜨려서 불 속에 던져버렸는데."


토비가 뒤통수를 긁으며 불 속에 던져버린 장대를 힐끔 쳐다보았다. 리버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리가요. 그 정도로 흔들어 댔으니 못 봤을 리는 없어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신호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을 리도 없구요. 게다가 아까 분명 답신을 하는 것도 확인했는데..."


그때 리버의 머리 위에서 삐이익-하는 밤독수리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리버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밤독수리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배회하고 있었다. 리버는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멍하니 하늘을 주시했다.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는 어느샌가 루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루나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두 노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괴들이 깨어났군."


그 말에 토비가 펄쩍 뛰며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그 가루를 바르면 요괴들이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잖냐?"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저 부근의 요괴들은 이미 깨어났어. 심지어 전투 중인 것 같군. 수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어림잡아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아."


루나는 상관에게 보고하는 투로 담담하게 사실을 전달했다. 잠자코 루나의 말에 대해 생각하던 두 사람은 잠시 후에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두 노인이 있는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밀러는 적어도 베르미나 스퀼라의 구제 작업에 있어서는 듀라트 영지의 시민들이야 말로 대륙 최고의 베테랑일 것이라 확신했다.

결코 오만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연히 대륙의 어떤 인간들도 영지의 시민들만큼 그것들을 상대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밀러는 아마 제국군이라 할지라도 자신들보다 효율적으로 그 요괴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밀러는 그런 생각들이 꽤나 오만한 것이었음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한 곳으로 모여라!"


고함치며 병사들을 독려하던 밀러는 여태 자신들이 얼마나 유리한 전장에서 싸우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높은 성벽에 기댄 채, 멀리서 뛰어오느라 지친 베르미들을, 그것도 성채를 넘어선 녀석들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밤의 숲은 그렇지 않았다.

밀러는 빠르게 전장을 파악했다. 병사들은 궂은 날들로 단련된 실력을 채 십분 지 일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불의의 습격이었다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밀러는 그보다는 역시 시간과 환경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약 평소처럼 요괴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낮이었다면, 그리고 전장이 성벽 위였다면 상황은 그토록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깨어난 요괴들의 수는 병사들의 다섯 배 정도에 불과했고, 그 수는 단시간에 가뿐히 처리하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하지만 전투는 밀러의 바람과는 전혀 반대의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밀러는 노호했다.


"위에서 온다! 바닥만 쳐다보지 말고 위를 봐라!"


병사들은 평소에 그것들을 상대하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주시하고 있었다. 구조물이랄게 거의 없는 성벽 위였다면 상관없었을 테지만 숲에서는 그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나무를 봐!"


베르미들은 나무의 가지 위에서 병사들의 얼굴로 불쑥 불쑥 튀어 오르곤 했다. 그리고 바닥에서는 스퀼라들이 꼬리를 내세우며 착실하게 병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위, 아래, 옆을 동시에 경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와 더불어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문제였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횃불은 그야 병사들의 시야를 확보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빛은 숲 곳곳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그 음영 속에서 요괴들의 까만 외피는 그대로 일종의 보호색처럼 작용했다. 눈이 좋은 자라 해도 그 어둠 속에서 그림자와 요괴를 대번에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병사들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숲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었고, 병사들은 숲 자체에 잡아먹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차라리 병사들이 뭉쳐있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전의 특성상 병사들은 오솔길을 따라 넓직하게 산개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난전은 어떻게 보더라도 요괴들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곳곳에서 병사들이 털썩 대며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절망적인 소리 가운데에서 밀러는 어떻게든 사기를 북돋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한 곳으로 모여! 서로 등을 맞대란 말이다!"


타성적으로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밀러는 그 명령이 잘 시행될 것이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주변은 어두웠고 이미 병사들은 각자 고립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명확한 상황을 파악한 후에 명쾌한 지시를 내릴 계제는 아니었다.

사실 밀러는 스스로의 몸을 건사하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밀러는 지휘를 하는 도중에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베르미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기겁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불을 놓아야 하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와중 하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밀러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밀러는 코 앞의 베르미 한 마리를 베어낸 후 황급히 산 중턱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턱에 걸려있던 높은 불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직 세 번째 신호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불빛은 없었지만 이미 중턱 부근의 숲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신호를 보낸 후가 분명했다.

그런 식의 끊임없는 사고 도중에도 밀러는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있었다. 한 곳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르는 순간 곧바로 요괴들에게 포위되어버리기에 밀러는 계속해서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가야 했다.

아무렇게나 앞을 뚫던 밀러는 그러나 마지막으로 검을 한 번 휘두른 후에는 방향을 잡았다. 밀러는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달리면서 사방에 외쳤다.


"불! 불을 놔라 이것들아! 숲 안쪽에 횃불을 던지란 말이다 이 젠장 맞을 놈들아!"


밀러는 마지막쯤에 '설령 네놈들이 죽더라도 그렇게 하라'는 식의 조언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베르미와 스퀼라들 때문에 거기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겁에 질렸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단순한 이유다. 밀러는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애석한 일이지만 밀러가 그 귀중한 호흡을 명령에 소비한 것은 그리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어차피 밀러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이미 숲 이곳저곳에 불길이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의 승패는 이미 명확했고, 습격에 쓰러진 병사들은 산불 예방에 힘쓰느라 죽기 전에 횃불을 끈다는 도덕적인 행위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쓰러짐과 동시에 횃불을 놓쳤다. 그리고 불은 자신을 내던진 사람의 의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횃불에서 시작된 불길이 이미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밀러는 주변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며 안도했다.

불은 계획 구역이 아닌 원래의 숲에도 번지고 있었지만 밀러는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밀러는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차라리 산맥이 전부 불타버렸으면 싶은 유혹까지 느꼈다. 길버트는 사람 답지 않은 일이라고 했지만 그 순간 밀러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불의 주된 연료는 물론 미리 뿌려 놓은 기름이지만, 불은 그 외에도 요괴들의 시체나 병사들까지 잡아 먹으며 한층 더 기세를 올리고 있는 듯했다.

밀러는 불이 꺼지지 않고 잘 번져간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밀러!"


갑작스레 하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리에 우뚝 선 밀러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멜이 불기둥을 사이에 둔 채 저멀리서 소리치고 있었다.


"불은 충분히 붙었네!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단 말이야! 어서 거기서 빠져 나오게!"


대략 서른 마리째 베르미를 베어 넘기며 밀러는 하멜의 발언에 대해 고민했다. 빠져나간다니. 누가. 어디서. 몽롱한 정신 속에서 밀러는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작은 숲의 꽤 깊은 지점까지 들어와 있었다. 주변에 서 있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사위에는 노란 불빛에 물든 시꺼먼 것들만 가득했다.


"뭐하고 있나 밀러! 어서 나오지 않고서!"


"나를 보고 하는 얘기였군."


밀러는 어째서 하멜이 저토록 다급하게 외쳐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고 불길은 그야 높긴 하지만 뛰어 간다면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는 높이였다.


"기다리게! 곧 나갈 테니!"


밀러는 하멜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걸어가며 밀러는 천천히 호흡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 같은 것이 섞여 들어오고 또 섞여 나왔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밀러가 뚝 걸음을 멈췄다.

발목 부근에 뜨끈하고 끈적한 기묘한 느낌을 받은 밀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그곳에 성난 스퀼라 한 마리가 있었다. 성난 이유는 아마 집게발인 듯했다. 녀석은 집게발 한 쪽이 없었다.

밀러는 그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스퀼라의 집게발은 분명 양 쪽에 하나씩 있다. 그러니까 총 두 개다.


"하지만 너는 하나 밖에 없군."


밀러는 멍한 눈으로 스퀼라의 등 부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갑피를 쭉 따라 꼬리 부분까지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녀석의 꼬리는 건재했다. 녀석의 꼬리는 하나였고, 그 꼬리는 밀러의 발목 부근에서 보라색 액체를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이 늙은 영감아!"


다시 하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멜은 이제 거의 울부짖듯 토해내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무언가 대꾸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밀러의 시야가 낮아졌다. 이어서 풀썩- 하는 소리가 들린 후에 밀러는 스퀼라와 완전히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됐다. 녀석은 계속해서 밀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퀼라의 노란 눈을 들여다 보던 밀러는 불현듯 자신이 아주 외딴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삐익- 하는 밤독수리의 소리. 키익- 대는 베르미들의 질척한 소리. 수목과 풀 그리고 병사들의 살이 타는 냄새. 외피가 타지 않고 달궈지기만 한 탓에 외피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스퀼라의 체액이 내는 소리.

밀러에게 그것들은 완전히 낯선 어떤 것처럼 다가왔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낯선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단 한 가지 익숙한 것이 있기는 했다.


"밀러!"


집사의 노성에 밀러는 바닥에 누운 채 가볍게 미소 지었다. 밀러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 더는 확신할 수 없었다. 흐릿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정신 속에서 밀러는 과거를 회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의로 회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밀러의 정신이 제멋대로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시간 순으로 영사했다.

밀러는 기쁜 마음으로 정신의 단독행동을 받아들였다.

밀러는 종교전쟁 당시 자신이 명을 끊은 수 많은 북부인들을 마주했다. 밀러는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한 상태로 몇 년 간 사람을 피해 숨어 지내던 자신을 바라보았다. 밀러는 우연히 정착한 시골 영지에서 하멜을 만난 순간을 목도했다. 밀러는 영지에 성을 축조하던 때에 억지로 십장을 떠맡게 된 일을 회상했다. 그 외에도 밀러는 백작이 실종되던 날의 기억과, 요괴들의 첫 공습 당시 영문도 모르고 가루가 되었던 사람들을 관찰했다. 마지막으로 밀러는 길버트와 성벽 위에서 함께 보낸 몇 개월을 모조리 응시했다.

밀러의 얼굴에 순진한 웃음이 걸렸다.


"빌어먹을. 주마등이로군. 정말로 보이는 것이었군."


스퀼라는 여전히 밀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봐라 인석아. 피차 썩 보기 좋은 얼굴도 아니잖나."


밀러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돌렸다. 그리고 여태 마주하던 스퀼라 대신 하멜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야가 낮아졌고 또 불길에 가린 탓에 하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밀러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어쨌든 불길 바깥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듀라트 영지의 집사는 안전한 지역에 있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밀러는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하멜 쪽이 영지에 남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고지식한 영감은 쭉 영지의 재정을 관리해야 하며, 더불어 백작 부인을 보필해야 하는 천명 같은 것이 남아있기도 하다.

반면에 영지가 평화로워진 후에는 자신의 역할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평화로운 시기의 용병이란, 혼란스러운 시기의 성실한 양치기와 비슷한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불 속에 내버려진 것이 자신이라는 점이 밀러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썩 괜찮은 삶이었구만."


밀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약은 놈들이 몇 있기는 해도 주변에는 대체로 좋은 인간들 뿐이었고, 반평생 용병 놀음을 한 것 치고는 이렇다 할 잔병치레도 없었다. 다만 저택의 집사 몰래 숨겨둔 고급 포도주 몇 병을 진즉 마셔두지 않은 것 정도는 후회스러웠다.

밀러는 고개를 돌렸다. 집게발 한 쪽이 없는 스퀼라는 여전히 밀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밀러는 자신의 오른손에 아직 검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몇 번 휘두를 정도의 기력은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그시 스퀼라를 마주 바라보던 밀러는 그러나 잠시 후에 검을 내팽개쳤다.

밀러는 생에 마지막 순간에 살의를 품는다는 것이 죄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밀러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득해지는 사고 속에서 밀러는 며칠 전 한 아돌프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이름이 잘 기억나질 않는 그 아돌프는 분명 몸이 원한다면 몸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밀러는 이제서야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아돌프는 현명했다. 몸이 원하는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밀러의 육신은 어서 잠들기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밀러는 그대로 잠이 들면 아주 편안할 거라 생각했다.

밀러는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밀러 바로 앞에서 치솟고 있던 불길이 좌우로 갈라졌다.

얼굴을 강타하는 불길에 밀러는 의구심과 함께 다시 눈을 떴다.


"숨- 참아라-!"


흐릿한 시야 속에서 밀러는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해오는 토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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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7) 23.08.31 44 4 15쪽
60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6) 23.08.30 45 4 14쪽
59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5) 23.08.29 39 4 15쪽
»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6 4 21쪽
5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23.08.27 41 3 21쪽
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2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5 5 15쪽
53 착석 (14) 23.08.07 78 4 15쪽
52 착석 (13) +2 23.08.03 137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0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69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69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4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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