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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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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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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착석 (12)

DUMMY

『...제 이웃의 것을 탐하던 돼지들은 더 이상 좁은 우리에서 저들끼리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북부로 눈을 돌렸다. 남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의 원인은 자원의 분배에 관한 것이었다. 북부에는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원이 무궁무진했다.

...그로써 도저히 단결할 수 없을 것 같던 남부는 진응왕 20년, 마침내 종교 전쟁으로 하나가 되었다.

사실,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사건이었다. 워낙 신속하고 급하게 마무리된 탓에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골목에서 힘 깨나 쓴다는 잡배들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교정 행위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


-수잠의 '종교 전쟁 회고록' 중-



***



남부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만이 지기를 기다린다면 북부에선 정반대로 불안함이나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기다리는 편이다. 마지막 만이 져버리고 나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며, 북부의 겨울이란 필수적으로 눈보라, 동상, 식수 부족, 기아, 교통 단절, 크레바스 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고, 따라서 수도원의 추기경들은 일반적인 북부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추워지는 날씨에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몇몇 사제나 신도들의 경우엔 추기경들과 달리 불안함이 아닌 허탈함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선 큼지막한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사제와 신도들이 나리는 눈을 보며 허탈함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있는 수도원은 기본 구역 외에도 수 많은 세속 구역들이 있다. 그 때문에 수도원은 웬만한 대학 부지보다 훨씬 넓다. 그리고 그 넓은 수도원의 눈을 치우는 일은 오로지 신도들과 사제들이 수행해야 할 몫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원이 있는 지역에서 눈을 치우는 행위란 바다를 손으로 퍼내 없애려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한 구역의 눈을 말끔하게 치운 뒤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면, 그 사이에 치워 놓았던 곳이 다시 눈으로 덮여있는 식이다. 허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제설 작업은 사제들과 신도들의 불만과 원성을 사기에 충분한 작업처럼 보인다. 어떤 성취감도 없는 일에 열성적으로 임하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제들과 신도들은 눈을 치우는 일에 조금의 불만도 제기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그들은 대개 기쁜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곤 한다.

추기경들이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제설 작업을 신성한 노동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이다.


추기경들의 논리는 이런 식이다.

요컨대 수도원의 복음적인 삶이란, 곧 신에게 감사드리는 마음가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그 지긋지긋한 제설 작업에 신성함을 부여했다. 그날부터 제설 작업은 신성한 노동이 되었고, 신성한 노동이란 그 자체로 신께 감사드리는 복음적인 삶이 되었다. 이제 북부의 머리에서 제설 작업이란 기도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행위로 인식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세뇌 비슷한 것은 추기경과 신도들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움을 주었다. 신도들은 눈을 치움으로써 스스로의 신앙심을 증명할 수 있었고, 추기경들은 수도원에 눈이 쌓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렇게 지상에서 사제들이 제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수도원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서도 몇몇 인간들이 어떤 작업에 몰두하며 땀을 빼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지상의 사제들처럼 신성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그 작업에 임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보다는 좀 더 건설적인 마음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이쪽이 더 길잖아 이 멍청한 놈아! 답답하긴, 그냥 이리 내! 여길 더 잘라내야지 이렇게!"


작업 현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스칼은 부하들을 다그친 후에, 결국 한 남자가 쥐고 있던 톱을 잡아 챘다. 그러고선 옆에 있던 인부들에게 보여주듯이 직접 톱질을 시작했다.


"끄아아악!"


한번의 톱질이 끝나자마자 지하 공동에 남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칼은 개의치않고 다시 톱을 움직였다.

냉정하게 보자면 스칼의 작업 방식은 꽤나 섬세했다. 스칼은 실력에 자부심 넘치는 장인이 가구를 재단하거나, 혹은 조각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매만지는 것처럼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종류의 섬세함은 목재나 석고상을 다루는 경우에나 어울린다.

이 경우 스칼이 조율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다리 길이였고, 그래서 스칼이 보여주는 섬세함은 그와 동등한 급의 끔찍함으로 바뀌어버렸다.


"끄윽... 끅.."


남자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남자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마지막에 가서 남자는 거품 무는 소리를 내며 온 몸을 비틀어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스칼은 남자가 어떤 부분에 불만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스칼은 손을 탁 치며 남자의 한쪽 다리를 가리켰다.


"알았다! 이쪽이 더 짧아서 불만인 거지?"


꼼꼼한 지도 아래 다시 섬세한 톱질이 시작됐다. 남자의 비명이 한참 동안 공동 안에 메아리친 후에 톱질이 멈췄다. 스칼은 작업 부위를 살펴보다가, 이내 진심을 담아 남자에게 사과했다.


"젠장 이번엔 이쪽이 더 짧아져버렸잖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물론 내가 이 작업에 베테랑은 아니지만 네 잘못도 있다고. 네가 발버둥 치는 바람에 제대로 자를 수가 없었다고."


끓는 비명을 내뱉으며 남자는 자신의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다리는 발목부터 그 밑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남자는 오열했다. 한참 동안 꺼억꺼억 울어 대던 남자의 눈에 어느 순간 독기가 서렸다. 남자는 죽일듯한 눈으로 스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스칼은 남자의 반응에 흥미를 느꼈다.

분명 작업의 시작단계부터 방금 전까지, 남자가 표출한 감정은 오직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자는 두려움이 아닌 분노를 내비치고 있었다. 스칼은 어쩌면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같이 흘려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미신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스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남자가 발악하듯 외쳤다.


"이... 미친 놈들 같으니라고! 신이 두렵지도 않느냐? 이것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음.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여긴 디스토니아 교단의 총본산이고, 나는 디스토니아의 주교지. 그러니 내 행동은 지극히 신의 뜻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무심한 대답에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스칼은 빙긋 웃으며 다시 톱을 쥐어 들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분노로 일렁였던 남자의 눈빛이 거짓말처럼 누그러졌다.

스칼이 다시 톱질을 시작하려던 순간, 지하 공동의 한 구석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쯤 해둬 스칼."


스니블의 목소리에 스칼은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스니블은 착- 하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책을 덮었다. 스니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칼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하고 올라가자."


스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의 발목과 자신의 손에 들린 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스칼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동시에 다소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스니블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았어. 이 가엾은 놈을 봐. 양쪽 다리 길이가 다르다고.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이 녀석이 생활하는데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스니블은 물끄러미 남자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긴 하군. 하지만 스칼, 이제 곧 시노드가 열릴 시간이야. 나머지 작업은 회의가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스니블이 회중 시계를 꺼내며 덧붙이자 스칼이 그제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얘들아 정리해. 발은 썩지 않게 잘 보관해 둬. 구더기가 꼬이면 받는 인간도 기분이 나쁠 테니까."


지시가 끝나자 스칼 근처에 있던 사제가 작업대 밑에 있던 남자의 두 발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두 발이 타인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복숭아뼈 근처에 작은 문신이 새겨진 남자의 발에선 아직까지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로 일거에 절단한 것이 아니어서 절단면은 흉측하게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사제 한 명이 발 사이즈에 꼭 맞는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상자 내부에는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발을 들고 있던 사제는 명백히 구역질을 참는 얼굴로 그 액체 속에 남자의 발을 깊숙이 파 묻었다. 현황을 관망하던 스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걸 받게 될 인간들은 아무튼 고귀하신 분들이니까 포장에도 꼼꼼히 신경 써두라고."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스칼은 옆에 있는 수건을 집어 들었다. 스칼이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을 때 스니블은 지하실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스칼은 수건을 내팽개치고서 얼른 스니블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수도원의 지상에 스니블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니블은 폐 속을 헤집었다 나가는 차가운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셨다.

지하의 공기는 눅눅한데다 너무 답답했고, 더불어 방금 전 이루어진 일련의 작업으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 냄새가 폐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래서 스니블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희미한 비 냄새가 폐를 씻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있자 뒤에서 불쑥 스칼이 나타났다.

스칼의 등장을 확인한 스니블은 지체 없이 목적지를 향해 발을 뗐다. 스칼은 자연스럽게 스니블 옆에 붙어 걸었다.


얼마간 걷던 도중 스니블이 품속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스니블은 익숙한듯이 보행과 독서 두 가지를 능숙하게 해냈지만, 책에 신경을 쓰느라 아무래도 발걸음이 더뎠다.

스칼이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은 몇 개의 기둥을 더 지나고 난 후였다. 스니블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고, 그 모습은 스칼의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스칼이 약간 초조한 투로 질문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거야? 조금만 늦어도 그 늙은이들이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을 텐데."


"그럴까봐 조금 빨리 나왔어. 호르체를 한 잔 마셔도 될 만큼 여유로워."


스니블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리고 스니블이 대답하자마자 스칼의 의문과 고민 그리고 걱정 같은 것은 전부 사라졌다. 스칼의 믿음은 확고했다. 스칼은 언제나 그랬듯이 복잡한 일과 머리 쓰는 일은 스니블에게 전부 맡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스니블은 한 번도 계획을 그르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옆에서 괜히 덩달아 고민하는 것은 정신력 낭비일 뿐이다.

수도원은 넓었고 시노드가 열리는 회의장까지는 멀었기에 두 사람은 아직 한참 걸어야 했다. 무료함을 참지 못한 스칼은 결국 스니블이 읽고 있는 책에 머리를 디밀었다.


"이번엔 또 뭘 읽고 있냐?"


"수잠의 종교 전쟁 회고록."


스칼의 얼굴 한쪽이 비틀렸다. 스칼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말했다.


"현기증 나는 제목이군. 그 따위 지루한 책을 스스로 원해서 읽고 있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해도, 가끔 네 취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니까."


"새삼스럽긴. 너도 다 읽기는 했잖아."


"나야 필사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읽은 거지. 사실 그 교육은 나에게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고. 네 덕택에 주교가 되어서 망정이지, 만약 사제에 계속 머무른 채 교육을 받아야 했다면 난 아마 진작 수도원에서 도망쳤을 거야."


스칼의 과장된 엄살에 스니블은 피식 웃어버렸다. 다시 말 없는 걸음이 이어졌다. 휑하니 뚫린 복도 양 옆으로 끊임없이 눈이 들이치고 있었다. 손바람으로 떨어지는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스칼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드는 걸. 그러니까, 언젠가 네가 했던 말 말이야. 뭐였더라? 아무튼 네가 책에 대해 내린 평가였는데... 맞아, 너는 분명 어려운 책이라는 건 대부분..."


"어려운 책은 대부분 사기꾼들의 모략 모음집이라고 했던 것 말이군."


"맞아! 그런 말이었지. 그런데 그럼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그때 네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네가 그렇게 어려운 책들만 골라 읽는 것이 말이야. 대체 왜 그 따위 책만 골라 읽는 거야? 네가 사기꾼들의 모략에 걸려들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는데."


스니블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책을 덮었다. 스니블은 마치 신도들에게 강론하는 사람처럼 스칼에게 설명했다.


"아주 간만에 좋은 지적을 하는군 스칼. 먼저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지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 이런 종류의 책은, 역시 사기꾼들의 모략 모음집에 불과하지.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내가 이런 종류의 책을 골라 읽고 있는 거야."


"그 점 때문이라니? 사기꾼들의 모략 모음집을 읽는 게 네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도움이 돼. 그것도 아주 많이. 우선 이 사실을 알아야 해 스칼. 어느 시대건 세상을 지배하는 건 당대 최고의 사기꾼들이었어.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봐. 만약 누군가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면, 그 누군가는 사기꾼들의 교양에 대해서 가장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스칼이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스칼은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 당대 최고의 사기꾼이 이번 세대에선 네가 될 거라는 말이군. 하지만 말이야 스니블, 그 최고의 사기꾼이라는 녀석도 배에 바람 구멍이 나거나 목이 제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거나 하면 결국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죽어버리는 거겠지?"


"물론이지."


"그렇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네 말대로 만약 최고의 사기꾼이 대륙을 지배하는 거라면. 난 그 녀석의 목에 칼을 겨누고서 그 사기꾼 녀석을 조종하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사기꾼을 통제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울 것 같거든."


이번에는 스니블이 크게 웃었다. 스니블은 애정 어린 눈으로 스칼을 바라보았다. 스칼은 그저 흘리듯 한 말이었겠지만, 스니블은 자신의 친구가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아무튼 스니블이 바라는 것은 유일무이한 위치와 압도적이고 무구한 권력이었다. 스니블은 전형적이고 그저 그런 사기꾼들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스니블은 스칼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스칼이 세상에서 자신을 제외한 사기꾼들을 몽땅 제거해주기를.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마침내 수도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도달했다.

두 사람 앞에 복잡한 양각이 새겨진 지나치게 화려한 문이 나타났다.

스니블은 경외스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문을 쳐다보았다.

문의 저편은 일부 추기경들과 주교들 외에는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스니블은 고작 이 문 하나를 열기 위해 바쳤던 간난한 세월을 떠올리다가 약간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앙을 느낀 스니블은 마음을 추슬렀다.

문 앞에서, 스니블은 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러다 스칼의 손목에 있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스니블의 지긋한 시선을 따라 스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손목 부근을 본 스칼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듯했다.

다음 순간 스칼이 손목 안쪽에 묻어 있던 피를 낼름 핥았다.

어떤 망설임도 없는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스니블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피를 핥아 먹는 스칼의 행동은 야만스러웠다. 하지만 야만스럽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의미일 것이다.

지나칠 만큼 솔직한 친구의 모습에 스니블은 긴장감이 적잖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스니블은 손잡이에 손을 올려 놓았다. 스니블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서서 스칼을 쳐다보며 말했다.


"스칼. 방금 전에 너는 직접 사기꾼이 되기 보다는 사기꾼을 때려잡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했지."


"응? 아, 그렇지 맞아. 그게 왜?"


"개인적으로 네가 꼭 그렇게 해주길 바라지만 말야. 그걸 이루기 위해선 우선 여기 있는 사기꾼들부터 전부 처리해야 할 거야."


스칼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음. 글쎄, 이건 네 역할이 아니겠어? 내가 이 방면에는 통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억울함을 토로하는 친구를 보며 스니블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곧 스칼이 반대쪽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이 힘을 가하자 육중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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