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스(7)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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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이런 때에······ 어렵다는 걸 당신도 알잖나.”
거절하는 남자의 표정이 난처하게 굳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 밑에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
“정말이에요? 상의사(尙衣司) 주임관(奏任官))인 당신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땀과 기름으로 미끄러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흰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동시에 여자의 허리가 파도치듯 출렁여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제, 제이나······.”
“고작 하루예요. 어차피 하녀는 필요하잖아요.”
“서향 기사단······과 서부 귀족들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으윽, 알면서······.”
“아무도 나인 줄 모를 거예요. 나를 보내주기만 하면 그 후로 당신이 감당할 일은 없어요.”
“모를 리가 없잖나. 당직 기사가 당신 얼굴을······.”
“모를 거라고 했잖아요.”
제이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남자는 자신의 허리에 걸터앉은 제이나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쾌락과 질투가 뒤섞인 채로 일그러졌다.
“이미 손을 써뒀나? 여기까지 오기 전에 몇 놈이나 당신과 뒹굴었지?”
“정말 알고 싶어요?”
붉은 입술을 당기며 제이나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움찔거렸다. 제이나의 손이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화내도 좋아요. 내 사랑. 내가 나빴어요. 나를 벌주고 싶은 거지요? 허락할게요.”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뭐? 정말······?”
조금 전까지의 모든 감정들, 난처했던 것이나 질투했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가 번득이는 듯한 기대에 차서 물었다. 제이나는 적이 흥분해 붉어진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몸이 열망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제이나가 남자에게 속삭였다.
“나를 공주의 거처로 보내줄 거죠?”
욕망으로 흐려진 남자의 눈이 제 빛을 되찾았지만 잠깐이었다. 홀린 것 같은 얼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를 밀어젖혔다.
침대에 쓰러진 그녀의 몸이 거칠게 짓눌렸다. 배려 없는 손이 몸 이곳저곳을 할퀴는 동안 제이나는 커튼 사이로 드러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가까워서 초승달이 꽤 기울어 있었다.
감금된 공주가 지금쯤 잠들었을지 아니면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늘 밤 알마스트의 귀족 가운데 편히 잠들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베디스 루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녀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제이나는 모후의 시녀였지만 주로 연락과 정탐을 맡아 거의 궁에 있지 않았으므로 모후가 감금되었을 때 함께 갇히지 않았다. 정전에서의 일을 듣자마자 그노스 백작을 찾아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아베디스 루신이 지켜야 할 세 사람 가운데 공주가 마지막 순번이라는 것은 제이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국왕이나 모후에 비해 공주는 정치적으로나 아베디스 자신에게나 가장 멀었다. 하지만 설마 그녀를 버리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이틀 동안 알마스트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그일 테니까 만나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명령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은 불길했다. 그녀에게 연락이 없다는 것은 그가 공주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먼저 접촉해 온 쪽은 테리아 인들이었다. 제이나는 이런 상황에 그들이 알마스트를 떠나지 않고 남은 것에 놀랐다.
테리아 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폭풍이었다. 포고스 백작과의 우정인가? 아니면 테리아 국왕에 대한 충성인가. 그러나 신의나 충성에도 정도가 있지, 이런 일에까지 함께 휩쓸릴 이유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니 남아준다면 기쁜 일이었으나, 막상 메칼로가 떠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는 잠시 답답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에서 공주의 안전과 그의 안전을 저울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의 감정이 떠오르자 제이나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공주를 섬기기로 했을 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자신이 다른 어떤 것도 남자에 대한 마음과 저울질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었다. 칼을 내려놓고 몸을 가꾸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마음먹었으며, 값싼 정보를 대가로 순결을 팔았을 때 다짐했고, 수없는 남자들을 만나며 그 생각을 굳혔다.
메칼로는 그녀가 만난 수없는 남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서로를 이용했고 그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좋은 거래를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 감정은 동업자에 대한 호감인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이런 때에 공주를 위한 마음을 누군가와 나눌 수는 없었다.
제이나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자신을 공주에게 데려다 줄 남자의 헐떡이는 몸에 집중했다.
원하지 않는 밤은 길었다. 그러나 결국 끝이 왔고 제이나는 그 시간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날이 밝자 그녀는 병사의 감시를 받으며 공주의 거처로 출발했다. 헐렁한 옷으로 몸매를 감추고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분칠과 숯으로 혈색을 없애고 아픈 듯이 꾸며서 조금 드러난 얼굴을 누가 봤어도 그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공주에게 가져갈 바구니에는 빵과 과일이 있었으나 처소의 1층에서 병사들에게 모두 뺏겼다. 겁먹은 체하는 그녀를 병사들이 둘러싸고 잠시 희롱했지만 기사의 참견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2층으로 가자 텅 빈 복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바로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시녀들이 소곤대거나 웃으며 수를 놓던 방이 못질되어 막혀 있었다. 바로 옆인 유모의 방은 안에서 잠겨 열리지 않았다.
제이나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유모가 숨죽인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마리암, 저예요. 제이나.”
이름을 밝혔는데도 문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충혈되어 붉은 눈을 한 유모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더니 이윽고 제이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그녀를 끌어들였다.
“세상에 제이나.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국왕님이 여기 일을 알고 계셔? 모후마마는? 저 병사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공주님은 어제 점심부터 지금까지 다 으깨진 과일 몇 조각 말고 아무 것도 못 드셨어. 저 천벌 받을 놈들이 새벽까지 옆방에서 못질을 하는 바람에 불쌍한 공주님은 한 숨도 못자고······.”
유모가 문을 걸어 잠그자 참았던 말을 토하듯 쏟았다. 제이나는 그녀에게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공주 전하는요?”
“방에 계셔. 어젯밤부터 한 마디도 안 하셔서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야.”
“제가 가볼게요.”
제이나는 유모를 남겨두고 공주의 방으로 갔다. 문밖에서 들어가겠다고 고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튼이 내려져 어둑한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주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창에서 먼 벽까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방문객이 왔을 때나 보이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방에 들어오는 제이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두려움도 초조한 기색도 없었다.
제이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공주 전하, 제이나입니다.”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으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나를 힐끗 본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가 도로 올라갔다. 그제야 제이나는 자신이 아직 변장한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재빨리 모자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분과 숯으로 분장한 것을 지울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번져서 괴상한 모양을 만들고 말았다. 공주는 얼룩덜룩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상한 것을 보는 눈이었다. 그 눈은 유모처럼 충혈되지도 않았고 울어서 붓지도 않았다. 소녀의 무감정한 시선에 제이나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제이나는 얼굴을 닦던 것도 그만두고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갔다.
“공주 전하.”
제이나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아무 변화 없는 소녀의 얼굴에 절망했다.
겨우 하룻밤인데······. 겨우 하루 동안 지키지 못했을 뿐인데.
“전하······.”
제이나가 속삭였다. 목이 졸린 것처럼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았다.
‘좀 더 큰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공주님을 깨우려면······.’
제이나는 안타까웠다. 좀 더 큰 소리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게. 그러나 마치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좀처럼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공주님, 제가 왔어요.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위험에 빠지면 누구보다 먼저 구하러 오겠다고.’
공주는 괴로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이웃 나라의 왕자가 오기도 전에·········.”
제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크게 뜬 눈에 무표정하던 공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감정 없이 흐렸던 눈에서 눈물이 왈칵 넘쳤다. 공주가 벌떡 일어나 제이나에게 달려들었다. 부딪치듯이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매달려서, 공주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제이나의 가슴에 파묻은 얼굴에서 비명 같은 울음이 쏟아졌다. 고함치듯이 울면서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제이나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달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울 수 있다. 울 수 있는 동안에는 괜찮았다. 늦지 않았다.
그것에 감사해서 그녀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 하루 동안 네 명의 남자 앞에서 다리를 벌려야 했던 것도 밤새 시달린 몸이 상처투성이인 것도 모두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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