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아르반의 메칼로 - 에필로그>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어이, 도련님. 준비 됐냐? 하선한다.”
선실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며 묻는 목소리에 로우벤은 챙겨뒀던 가죽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곧 육지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배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어서 멈춘 줄은 몰랐었다.
선실을 나서자 부르러 온 선원은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가고 알마스트에서부터 동행한 용병이 다가와 로우벤의 짐을 대신 들었다. 확실히 육지가 보였지만 아직은 멀었다. 헤엄쳐서 가려면 까마득하게 먼 정도였다.
그러나 배는 멈춘 상태였고 선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곳은 수심이 얕아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갈 겁니다.”
짐을 든 용병이 설명했다. 로우벤이 그를 따라서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익숙지 않은 사다리를 타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노를 저을 선원들이 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년을 받아주었다.
배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해안에 접근했다. 그들이 배를 댈 좁은 모래톱 외에는 좌우가 온통 절벽인 곳이었다. 성벽 같은 검은 바위가 끝없이 이어졌고 그 위에 짙은 나무들이 녹색 모피처럼 덮여 있었다.
모래톱 뒤편으로 좁고 구불구불한 암석투성이 길이 가파른 비탈을 타고 올랐다. 로우벤은 용병의 뒤를 따라 헐떡이며 걸었다. 용병은 로우벤의 짐을 들고도 산양처럼 날쌨다. 힘들게 비탈을 오르자 나무가 크고 수풀이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용병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을 한참동안 말없이 걸었다. 숲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 끝이 나고 갑자기 환한 빛이 들이닥쳤다. 로우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빛 속에 드러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을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숲에 동그랗게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텃밭과 울타리를 가진 수십 개의 집이 드문드문 박혔고 마을 한 편으로 작은 개울이 반짝거리며 가로질렀다. 노란 밀밭과 한창 푸른 옥수수밭,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자그맣게 보였다.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건가?”
로우벤이 용병에게 묻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여기가 목적지입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로우벤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어디 외딴 섬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배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면서는 인적 없는 깊은 숲의 신전에라도 찾아가나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떻게 봐도 멀쩡한 마을이었다. 얼핏 세어도 40 가구는 되어 보였다.
“마을 안에서 말인가?”
목소리 때문에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로우벤이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 마을 안에 있잖습니까.”
적어도 마을에서는 좀 떨어진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물었으나 용병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그럴 수도 있다. 로우벤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나몬의 각인자라는 것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원들은 아예 로우벤의 신분을 몰랐고, 같이 온 용병은 들은 것이 있는지 태도가 정중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누구신지 잘 알지요.”
용병이 조금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당황한 로우벤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아직 이 마을의 이름을 알려드리지 않았군요. 여기는 나몬입니다.”
뭐······?
로우벤은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악신의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용병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을이 악신의 이름으로 불려서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 나몬의 백성이니까요.”
“모두······?”
저 많은 집에 사는, 금방 계산해 봐도 이백 명은 될 사람들이 모두?
“나몬의 백성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까요.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기일 때부터 이곳에서 지내니 여기를 고향으로 여기고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나몬의 백성을 따로 모아서 관리하고 있다는 건가?”
그제야 알아듣고 로우벤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과연 나몬의 백성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면 누가 해를 입을 걱정은 없었다.
“테리아에서는 봉인된 신들의 성물을 버리지 않았으니까요. 신들이 가두어졌어도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꼬박꼬박 확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악신이 봉인된 것은 이미 2백 년 전이다. 그 동안에는 나몬의 백성이 태어나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 신들이 갇히면서 나몬의 백성이 태어나지 않아 이 마을도 100년 쯤 비어 있었지요. 새로 집을 짓고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지는 30년이 조금 못 됩니다.”
그렇다면 봉인에 문제가 생긴 것은 30년 전의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알리지 않았다는 말인가?”
로우벤이 저도 모르게 힐난하듯 물었다. 봉인에 문제가 생긴 것을 30년 전에 알았더라면 분명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뭔가 대책을······.
‘아아······.’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어떻게 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이미 효과를 확인한 확실한 방법을 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봉인을 관리하는 북 올드레인의 대신전에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악신의 백성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자 곧 그곳에 알렸으니까요. 그것을 전하러 간 사람이 지금의 헬리온 폐하십니다. 아직 왕자셨을 때의 일이지요. 대신전에서 그 사실을 공포하지 않은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설명한 다음 용병은 얼굴에 쓴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신들을 봉인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차피 결국에는 알려지겠지요.”
그리고 앞장서서 언덕을 내려갔다.
“이곳은 숲이 깊어서 야생짐승도 많습니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위험하니 되도록 사람들과 함께 돌아다니고 밤에는 집에만 있도록 하십시오.”
그가 안내인으로 돌아가 마을에서의 생활에 관해 하나씩 알려주었다.
뭐가 필요할 때는 어디로 가면 된다든지 어떤 문제에는 누구를 찾아가야 한다든지 시시콜콜 설명하는 것을 듣다 보니 어느새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힐끔거렸으나 말을 붙이는 이는 없었다.
“여기에 새로 오는 사람이라야 갓 태어난 아이 정도입니다. 이방인을 보기 힘든 곳이니 처음에는 사람을 사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용병의 설명에 본래도 사교적인 편은 아닌 로우벤이 난처한 듯 웃었다.
마을 가장자리에 세워진 작은 집 앞에 도착하자 용병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계실 곳입니다. 아르반을 떠나면서 연락했으니 필요한 것들은 대략 갖추어졌을 겁니다.”
작지만 벽돌을 꼼꼼하게 쌓아 만든 단단한 집이었다. 집 앞에는 누군가 일부러 심어놓은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용병이 짐을 정리하러 집안에 들어간 사이 로우벤은 활짝 핀 해바라기를 들여다보았다.
“그거 내가 심었어요.”
울타리 부근에서 어린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아 씨는 내 거에요. 오빠가 먹으면 안돼요!”
“씨? 꽃씨?”
해바라기 씨라고는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것 말고 본 적 없는 로우벤이 꽃과 접시 위의 해바라기 씨를 연결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오빠 감기 걸렸어요?”
여자아이가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니. 내 목소리는 원래 이렇다.”
“목소리 이상해.”
주근깨 가득한 콧잔등을 찡그리며 소녀가 말했다. 로우벤은 소녀의 말에 화내는 대신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도자기 새였다. 백토 위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깃털을 그린 예쁜 모양을 보고 소녀가 눈을 반짝였다.
“이것은 흙으로 만든 새다. 내 목소리는 이상하지만 이 새는 예쁜 소리를 낸다.”
“거짓말.”
소녀가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흙으로 만든 새가 소리를 낸다니 당연히 거짓말이다. 로우벤이 말없이 새의 머리에 입술을 댔다. 바로 그때였다. 하얗고 알록달록한 도자기 새가 놀랍게도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 것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맑고 묘한 소리였다. 낙원의 새가 노래하는 것 같은 그 소리에 소녀는 입을 벌리고 로우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나 밭을 매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하나둘 다가왔다.
로우벤의 주위로 동그랗게 청중이 모였다. 진흙 새의 아름다운 노래는 사람들의 귀를 스치고 나몬의 숲 위로 높이, 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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