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기억(2)
거짓말이야.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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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문소리와 함께 방안에 들어온 타니엘의 모습은 결혼예식을 위해 치장한 신랑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자 과할 정도의 향수냄새까지 풍겼다. 패트로스는 손수 창문을 여는 것으로 불평을 대신했다.
젊은 기사단장은 평소의 여유를 찾아볼 길 없는 얼굴이었다. 가까이 부르자 곧장 용건으로 들어가 보고를 시작했다.
패트로스는 그가 말하는 동안 질문이나 맞장구 없이 듣기만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왕의 죽음에 의문을 표하는 의견을 들을 때는 타니엘이 마음속으로 지목한 범인이 왕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호통을 참아야 했다. 류드밀의 베쉬킴 가문 이야기가 나올 때는 정말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모든 보고를 듣고 나자 타니엘은 끝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모두 장담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거나 제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제부터는 명확한 근거를 대기 힘드나 장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장담할 수 있으나 증거를 댈 수는 없다. 타니엘 본인의 확신 외에는 믿을 데가 없는 주장을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패트로스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타니엘은 보고할 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쌍아궁 축제 때로 거슬러 가, 그 당시 수도를 헤집고 다니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뒷골목 세력과 접촉하며 테리아 용병들을 궁지에 몰았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뒤를 정리하거나 직접 테리아 인들과 싸웠습니다. 이들이 베쉬킴 가문에서 추방된 두 형제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배후는 모후이거나 그노스 백작입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공주입니다.”
타니엘이 하려는 말은 섭정공도 알았다. 배후가 모후나 그노스 백작이라면 공주가 공격받은 일을 설명할 수 없다. 모후에게도 그노스 백작에게도 그럴 이유가 없다. 만일 이유가 있다고 하면 그들의 지위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어야만 했다.
모후에게는 친딸이며 국왕에게는 쌍둥이 동생. 동부 귀족의 입장에서는 외국의 왕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제물. 이런 공주를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공주 때문에 저는 최근까지도 이 일의 배후가 모후는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 관련이 있다 해도 그노스 백작의 과잉충성이 낳은 결과일 거라고······. 그러나 오늘 보고받은 내용 가운데 몇 사람의 이름이 뜻밖의 명단과 겹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타니엘은 몇 사람의 이름을 읊었다. 섭정공도 모두 아는 이름이었다. 대부분 아르반의 귀족이자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나이가 지긋하며 선왕 에듀아드 코스탄딘과 호의적인 관계였다.
“하코브 네르세스는 아르반을 떠나기 직전 이들을 모두 만나고 다녔습니다. 최대한 조사해 보았지만 평범한 사교상의 만남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에게도 숨기거나 거짓말 하는 기색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정전에 출입할 수 있으며 파벌을 이끌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귀족이고 과거에는 그노스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타니엘이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점은 아마 마지막 조건이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그노스 백작을 싫어했던 귀족들. 거기까지 들은 섭정공도 알아차렸다. 에듀아드 코스탄딘은 그노스 백작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귀족들도 몰랐다. 알았다면 지금까지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르반의 대귀족들을 끌어들이면서 그토록 철저히 비밀에 붙인 일. 그노스 백작이 알면 안 되는 일. 그 사실을 알자 그노스 백작이 공주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일.
여기까지 생각하면 명백했다.
“로우벤 코스탄딘입니다.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주를 버려서 지켜야 할 대상은 왕자뿐입니다.”
타니엘이 단언했다. 그는 조금 창백해진 섭정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주가 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왕자에게 위험한 상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왕자에게 있어 공주가 위험한 경우는 단 하나뿐입니다. 공주가 왕위를 위협했다······. 바꾸어 말하면 로우벤 코스탄딘에게 왕위를 계승하기 힘든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아르반에서는 여성이 상속을 인정받지 못한다. 왕위도 재산도 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혼할 때 가져갈 지참금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공주가 왕위를 잇기 위해서는 국왕 생전에 대신들의 동의와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
“물론 그런 정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왕께서 귀족들에게 그 비슷한 말씀을 꺼내셨다는 이야기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 하에서 생각하면 지금까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쉽게 설명됩니다. 건장했던 에듀아드 코스탄딘은 왜 갑자기 죽었는가. 하코브 네르세스를 죽일 정도의 비밀이 무엇인가. 공주는 왜 습격 받았는가.”
타니엘은 말하다 말고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패트로스도 편치 않았으나 말하는 타니엘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 치명적인 결함이 뭔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타니엘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의 말은 추리나 혹은 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진실은 누구도 몰랐다. 하지만 패트로스는 그 망상에 가까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타니엘을 믿었는지, 아니면 그의 말이 자신도 모르는 곳에 감춰져 있던 왕관에 대한 욕망을 건드렸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로 패트로스 바그랏트는 전쟁을 결심했다.
그것이 고작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패트로스는 타니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했다. 그리고 대화의 마지막이 지금 코앞에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 로우벤 코스탄딘이었다.
패트로스는 군막 안에서 적장과 포로의 관계로 만난 조카를 말없이 쏘아보았다.
우미트 성을 봉쇄하고 있는 그의 군대로 무장한 다섯 명이 접근했으며, 그들의 지휘자가 메칼로라는 보고를 들은 지 거의 반 시간 후였다. 메칼로는 로우벤 코스탄딘의 대리자로서 섭정공과 대면하기를 원했다.
섭정공의 군대가 포위를 시도했지만 어중간한 수로 섣불리 건드려봐야 피해만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군대가 움직일 기미만 보여도 근처의 주택가로 숨어들어 뒤쫓아 오는 병사들을 조용히 해치워버렸다. 그렇다고 우미트 궁 안에 우글거리는 병력을 생각하면 많은 수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반 시간 동안 패트로스의 군막 안에서는 이것이 동부측의 함정일 거라며 다섯 명 따위는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메칼로와 접촉했던 기사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 패트로스는 그들의 요구대로 무장한 채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장소는 우미트 궁과 주택가 사이의 작은 숲이었다. 거기에 군막을 치고 소수의 기사들만 대동한 채 패트로스 바그랏트가 직접 나왔다. 다섯 명 중 군막으로 온 사람은 단둘이었다. 한 명은 메칼로가 분명했지만 다른 한 명은 깊게 내리썼던 후드를 걷어 올릴 때까지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다.
심지어 기사가 가져온 물건, 로우벤 코스탄딘의 인장 반지를 본 패트로스조차도 그가 직접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기사들이 두 사람을 에워쌌고 그들은 저항 없이 붙잡혔다.
국왕을 손댈 수는 없었으므로 메칼로만 무기를 뺏기고 결박되었고 로우벤은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는 채로 패트로스와 마주했다.
국왕과 섭정공, 숙부와 조카의 관계였으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7년 동안 그들이 얼굴을 마주할 일은 별로 없었다. 패트로스는 늘 두꺼운 옷에 파묻혀 의자에 앉아있던 조카가 가벼운 차림으로 선 모습을 보고 오래 된 기억을 떠올렸다.
로우벤은 에듀아드 코스탄딘의 어릴 적과 똑같았다. 패트로스가 동경하면서도 질투했던 형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에듀아드는 가장 왕성한 순간 최고의 자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늙지도 추해지지도 않은 채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고 패트로스는 변하지 않는 그와 죽을 때까지 비교당할 터였다. 그것을 새삼 떠올리게 만드는 조카가 마치 형처럼, 두려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섭정공은 속이 뒤틀렸다.
귀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의심받고 있는 모든 정황이 사실이며 그것을 인정한다고 말할 때는 기쁨보다 불쾌감이 먼저였다.
동부측의 심장이자 약점이라고 할 로우벤 코스탄딘이 손 안에 있다. 그가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이 전쟁은 패트로스의 승리로 끝난다. 이 명확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태가 잘못 돌아간다고 느꼈다. 패트로스는 자신의 느낌을 따라 사실과 정황을 파고들었으며 곧 이유를 찾아냈다.
어디에도 로우벤 코스탄딘이 왕위를 계승하기 힘든 치명적인 약점이 없다.
세다의 각인자라는 것은, 인식이 안 좋을 뿐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왕이 세다의 각인자라서 싫어한다면 그 정도의 가호는 버리면 그만이었다. 병을 일으키고 죽은 사람을 잠시 살려내는 권능은 국왕에게 필요 없었다.
몸이 허약한 것도, 그래서 자주 감기에 걸리는 것도 약점이 될 수는 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에듀아드는 아들 대신 딸로 왕위를 잇게 할 결심을 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로우벤은 세다의 가호를 버리지 않고 유지했을까. 뭔가 하나가 빠졌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할 가장 중요한 조각이 비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우벤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섭정공을 돕는 대신 공주와 모후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것이 로우벤의 조건이었다.
이 전쟁의 끝은 지는 쪽이 탑에 갇혔다가 독살되거나 목이 잘려 걸리게 된다. 과정은 지난하겠으나 패트로스와 로우벤, 둘 중 하나는 분명 죽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점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로우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승리를 넘겨주겠다니 거절할 리 없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너는 이미 내 포로다. 네가 협력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유리하다.”
패트로스가 슬쩍 밀어내는 말을 했어도 로우벤은 꿈쩍하지 않았다.
“세다의 각인자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놀로파의 사제가 충분합니까?”
그의 대꾸에 칼을 겨누고 있던 기사들이 움찔 떨었다. 패트로스도 자신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세다의 각인자이므로 동시에 세다의 신자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려 군막 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질병이 전염병이라면 더 골치 아파진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이지만 위협에 겁먹지 않고 받아치는 로우벤을 보고 패트로스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협력하겠다는 네 말이 진심이라면 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말해줘야겠다. 로우벤 코스탄딘, 에듀아드가 너를 후계자로 삼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 작가의말
17시간 44분 지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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