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 경강(京江)
024화 – 경강(京江)
쾌륜선은 그 이름만큼 경쾌하게 바닷물을 가르고 있었다.
“나 군관, 그런데 가만 보니 배의 꽁무니에 붙은 외륜이 좀 특이한 것 같구먼?”
“아, 하하. 후미 외륜이 하나처럼 보이지만 사실 두 개입니다.”
“두 개?”
“그렇습니다. 처음엔 수차가 클수록 속도가 날것이라 생각해서 하나의 외륜을 크게 만들었으나······.”
“...”
“효율도 떨어지고 결정적으로 방향 전환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호!”
“그래서 배의 후미 양쪽에 각각의 수차를 달았고, 상황에 따라 한쪽만 돌리거나 각각의 수차 속도를 달리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키가 없어도 방향 전환이 될 수 있겠구먼. 거참, 신묘하네. 하하하.”
“두 개의 수차 사이에 키도 있습니다. 정밀한 조향을 위해 키가 있긴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발상은 제가 했지만, 그 복잡한 장치를 만든 건 모두 언복의 덕이옵니다.”
“그렇군, 자네와 언복 두 사람이 복덩이네 복덩이. 하하.”
“저도 가끔 언복이 어디에 도깨비방망이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하하.”
내친김에 부장들과 함께 쾌륜선을 직접 타보았다.
‘영차, 영차’ 하는 격군들의 소리에도 느릿느릿 움직이던 판옥선에 타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일순간에 뚫리는 것 같았다.
시원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모습에 비로소 군함다운 군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함대 기동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쾌륜선에 함께 승선했던 나대용이 입을 열었다.
“장군, 이 쾌륜선에 판옥을 올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에 판옥을 올린다는 것은 장대(지휘대)의미했다. 새로 만든 쾌륜선을 지휘관이 타는 기함으로 쓰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음,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나, 무릇 장수는 병사들과 함께해야 하지 않겠나?”
“하오나, 장군이 가장 빠른 배를 타셔야!······.”
“느리게 움직이는 판옥선 함대의 한가운데 쾌륜선이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내가 탄 배가 본대의 대열에서 이탈할 상황이라면,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군.”
“더 많은 쾌륜선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것은 보급과 통신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래도 속도가 빠르니 돌격선으로도 좋지 않겠습니까?”
“음, 그런 상황도 있겠지만. 본대가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무의미한 희생만 따를 뿐이네, 방어력 또한 기존 판옥선에 비해 크게 높다고 할 수는 없으니. 돌격선은 귀선이 해 주는 게 좋을 듯하네.”
“네. 알겠습니다. 총력을 기울여 귀선 건조에 매진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배다운 배인 쾌륜선을 타고 싶었지만, 모든 자원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쾌륜선은 빠른 속도를 이용해, 연락과 보급 그리고 전투 시 취약한 대열로 이동해 화력을 지원하는 용도로 한정 지었다.
그렇게 쾌륜선의 시험 운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영에 돌아왔다. 그리고 귀선과 더불어 쾌륜선의 추가 건조를 독려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자 현실을 다시 한번 직시하게 되었다. 이제 겨우 쾌륜선 한 척을 건조했을 뿐이었다.
이런 속도로는 전 함대를 증기선으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또, 그것이 현명한 판단은 아닌 것 같았다. 현존하는 자원과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앞으로 전라좌수군이 아닌 조선 전체의 해군전력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방안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백야곶에서 본 포작의 배가 떠올랐다.
‘맞아. 이충무공도 민간 전투 역량을 활용하셨지.’
감관과 향리에게 관할 내 포작과 잠녀들을 불러모으도록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좌수영 마당에 포작과 잠녀들이 모였다.
“영가암~ 관내 포작과 잠녀를 모두 불러모았사옵니다.”
“음, 그래.”
그들의 행색은 남루했으나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탓인지.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도 살아 있었다. 그중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자가 입을 열었다.
“나리~ 인사드리옵니다. 사도에서 물질하는 김말손 이옵니다.”
“오, 그대가 우두머리인가?”
“나리, 저흰 그런 건 없사옵니다. 다만 제가 고기 잡고 물질을 오래 해서, 다들 저를 어른 대접을 해 줄 뿐이옵니다.”
“그래. 내 오늘 자네들을 불러 모은 것은 앞으로 좌수군이 훈련할 때 그대들도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른 것이오.”
“아니, 나리. 수군 훈련이라굽쇼?”
“그렇네. 그대들이 물길을 잘 알고 배를 잘 다루니. 탐망과 연락의 소임을 주려고 하네.”
“나리, 그건 너무 황망한 말씀이시옵니다.”
“······.”
“쇤네들은 공물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해가 질 때까지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요. 나아리~”
노인의 눈빛엔 억울함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내 그대들의 고단한 삶을 모르는 바 아니오. 수군과 같이 훈련한다면, 그것은 신역을 지는 것과 다름없는바. 그 기간에 합당하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감해 줄 것이오.”
“그리해 주신다면야. 훈련을 하나 물질을 하나 다를 것이 없긴 하옵니다만······.”
“그대들의 근심 또한 내 짐작하고 있는바. 앞으로 신역을 치렀음에도 부당하게 공물을 요구하는 관리가 있다면.”
“······.”
“자네들이 내게 직보(直報)할 수 있도록 관아의 문을 열어둘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게.”
“그리만 해 주신다면······.”
“또한!”
“???”
“수군의 훈련에 동참한 포작과 잠녀에겐 공물을 감해 주는 것과는 별도로 곡식과 소금으로 보상하여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해 줄 것이네.”
“나아리~ 고, 고맙습니다요.”
포작과 잠녀는 훌륭한 예비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늘 말 위에서 생활했던 몽골이나 여진이 특별한 훈련이 없더라도 훌륭한 기병이 되듯.
배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들이야말로 뛰어난 수군 자원이었다.
“이방!”
“네. 나으리~”
“포작과 잠녀의 명부를 만들어서 감관에게 전달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군관 권숙!”
“장군, 하명하십시오.”
권준의 아우 권숙을 부관의 일종인 솔행군관(率行軍官)으로 삼은 터였다.
“방답 첨사 이순신에게 포작을 중심으로 탐망군을 조직하고 동원 및 훈련 계획을 수립하라 이르게, 자네도 함께 참여하여 내게 보고토록 하게.”
“명, 받들겠습니다.”
포작과 잠녀를 정규군에 편성하기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기에 상시동원 가능한 예비 전력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천손의 상단 첩보망에 더불어 포작으로 이뤄진 탐망군 그리고 입부 이순신에게 지시한 통신규식이 정립되면, 현대적이고 능동적인 수군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잡다한 공무를 마칠 즈음 서애 대감의 서찰이 도착했다. 기쁜 마음으로 봉함을 열었다.
* * * * *
여해 보시게.
자네가 전라좌수영에서 전란을 대비해 애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든든한 마음 이루 말할 길이 없다네.
조정에선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했으나, 반년째 소식이 없고. 곳곳에서 흉흉한 풍문이 나돌고 있으니 근심이 많다네.
일전엔 대마도 도주 종의지(宗義智, 소 요시토시)란 자가 조총이란 것을 바치며, 왜의 침략 위험을 알렸다네.
조정에선 주상을 모시고 조총의 시험 발사를 했다네.
그 조총이란 것이 방패란 방패는 모두 관통하고 그 정확성이 매우 뛰어나 분명 위험한 무기란 것을 직감했네.
하지만, 신립이 ‘장전 속도가 느려 각궁만 못하다’라고 폄훼하는 모양이 이자가 용맹 있을지 모르나 병법과 지략은 그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님에도, 조정에선 천하태평인 인사들이 널려 있기에 나만 애를 태웠다네.
다만 다행인 것은 주상전하께서 군기시에 명을 내려 왜의 조총에 대해 주밀히 살피라 명하셨다네.
자네에게도 조총을 보내 주고 싶은 마음 크지만, 종의지가 한 자루만 바쳐서 이렇게 필설로만 설명하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네.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들어가는 화약은 승자총통의 3분의 1이고, 탄환도 1발이라 우리 총통에 비해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50보 거리에서 숙련된 사수가 쏘면 엽전도 맞출 수 있을 만큼 정확도가 뛰어나서, 과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총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화기였네.
그리고 방아쇠란 것이 있어 원하는 때에 발사할 수 있는 것이, 명중률을 높이는 비결이라 짐작할 뿐이라네
내 조만간 조총을 한정 더 구하는 대로 자네에게 보내 주도록 하겠네.
그리고 자네가 하삼도를 방어할 방략에 대해 상소을 올리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드네, 이곳 조정에서 입만 살아 있는 대신들이 갑론을박 말싸움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네.
하여, 자네가 훗날 사변에 대비한 상소를 올려 주면 영명한 성상(임금)의 비답(批答)을 기다려볼 수 있을 것 같네.
여해 자네의 방비에 도움이 되고자 든 붓이었지만, 두서없이 쓰다 보니 또 자네를 위무하기는커녕 넋두리만 하게 되었네. 그려.
자네가 스스로를 더욱 아낄 것을 당부하며 이만 줄이겠네.
추신.
원균이란 자가 하삼도로 내려가는 것은 내가 잘 막고 있다네. 그리고 자네와 인연이 있던 이억기 영감이 전라우수사로 내려갔으니, 그와 협력하여 사변에 대비하길 바라네
* * * * *
녹둔도 전투에서 이운룡, 이경록과 함꼐 누명을 썼을 때, 구명을 위해 애써주었던 이억기 영감이 전라우수사가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찰을 곱씹어 읽고 나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충무공이 왜란 전 경상도 바다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으로 그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경상 우수사로 가면, 부산포로 상륙하는 왜군을 완벽히 막을 수 있을까?’
이제 겨우 쾌륜선 한 척을 만들었을 뿐인데, 적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을지언정 상륙 자체를 막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또, 만에 하나 내가 실패해서 전라도 바다를 내주면 전란 자체가 미궁에 빠지는 위험이 있었다.
‘혹, 명나라의 지원을 받지 않고 전란을 끝낼 수 있을까?’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말이 유행할 만큼, 명나라 군대의 참전은 조선에 득만큼 실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선조의 멘탈을 지켜 줘야 할 것 같았다.
훗날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과 고문을 당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선조의 멘탈 붕괴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립의 패전과 20일 만에 도성을 버리게 된 것이 가장 클 것이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지 않도록 할 순 없을까?’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살려면 선조가 조성을 버리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쾌륜선을 만들긴 했지만, 아직까지 나는 20여 척의 판옥선뿐인 전라좌수사일 뿐이었다. 신립을 도와줄 방도도 없고, 그렇다고 부산포를 지킬 여력도 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우선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도성까지 진격했다. 그 속도를 늦출 방책을 상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을 생각할 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비군은 태부족이고 그나마 한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란이 발생하면 인근 고을 백성을 모아의 군대를 조직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것을 잘 알았다.
진관 체제를 유지한다고 해도 판판이 깨질 것이 분명했다.
고민이 깊어가는 가운데 나대용이 찾아왔다.
“장군, 건의 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말해 보게.”
“선소를 추가하였으면 합니다. 선소가 배를 새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 배를 수리하는 데에도 사용되는지라.”
“음······.”
“아무래도 선소 2개로는 배를 만드는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선소를 짓도록 하게, 내가 자네에게 전권을 일임하지 않았나?”
“그게, 아무래도 석수들은 물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야 하는지라······.”
“아, 알겠네. 내 남상 대방(김천손)에게 일러 품삯을 치르고 백성을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장군.”
“아 그리고 귀선은?”
“네, 수추기(水推機)의 설계가 완료되었고. 언복이 제작하고 있습니다. 하여, 귀선도 제작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런데. 장군 안색에 근심이 있어 보입니다.”
“그것이 ··· 조정에 사변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는데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다네.”
“아······.”
“나 군관!”
“네. 장군.”
“만약, 자네라면 말이야.”
“네.”
“만약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왜군에게서 도성을 지켜야 한다면 어떤 방책이 가장 좋겠나?”
“아무리 극악한 왜병이라지만 어찌 도성까지 올라가겠습니까? 경상 좌, 우수영도 있고. 신립, 이일 같은 용장도 있으니 ...”
‘이 사람아 경상 수군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부산포는 하루 만에 떨어지고 신립도 패한단 말일세.’
마음의 소리일 뿐이었다.
“여튼, 그런 생각 말고 만약을 생각해서 자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네. 만약 왜군이 충주 조령, 탄금대까지 뚫고 올라갔다면 말이네.”
“음······.”
나대용은 잠시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장군!”
“어, 그래.”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강(京江, 한강)에 수군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아!!!”
뭔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장군, 순천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마포나루까지 갑니다. 그 말은 한강에서도 수군을 운용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그렇긴 하네.”
“경강을 건너지 못하는 왜군이 무슨 수로 도성을 점령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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