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 포작(鮑作)과 잠녀(潛女)
020화 - 포작(鮑作)과 잠녀(潛女)
이운룡은 편지에서 나라에 대한 근심과 더불어 원균과 북병사 이일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 * *
이일 병마사는 조정에 보고 없이 병졸을 참수한 일 때문에 탄핵당하여 파직되었으나, 함경감사 권징의 탄원으로 파직이 철회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나, 왜변이 걱정되는 작금을 정세엔 그가 북방에 남아 있는 되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마음 같아서는 한달음에 전라좌수영으로 달려가 장군을 뵈옵고 싶지만, 나라의 명을 소홀히 할 수 없는바. 옥포의 군기를 정돈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면서 이만 두서없는 글을 줄이겠습니다.
* * *
이운룡 그가 오고 있었다. 전라좌도에 바로 붙어 있는 경상우수영 옥포만호로 말이다.
임진왜란 개전초 중요한 승전 중 하나인 옥포 해전의 바로 그곳에 이운룡이 자리 잡은 것이다.
왠지 이충무공의 어벤져스가 하나씩 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운룡, 이억기, 나대용, 권준······.
전라좌수영 본영의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이제 관할 지역의 순시를 계획했다. 각 포구의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수령의 인물됨을 확인하기 하고자 했다.
때마침 순천부사 권준이 서찰을 보내왔다.
* * *
좌수사 영감 보시오.
······
부임하신 이후로 하루도 쉬지 못하고 군무에 매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여독을 풀지 못하면 병을 얻는 법이옵니다.
미루어 짐작건대 관내 포구를 순시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길의 시작이 백야곳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백야곳의 경치가 제법 볼 만합니다. 순시를 떠나기에 앞서 그곳에서 답청(踏靑, 봄맞이) 하시면서 여독을 푸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영감이 허하시오면, 준비하여 백야곳으로 마중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본관의 아우가 영감의 명성을 듣고 꼭 뵙기를 고대하고 있으니 거절치 마옵소서.
* * *
권준의 인물됨은 익히 확인하였고. 전라도의 사정을 잘 아는 그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어,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전갈을 보냈다.
백야곶에 이르자 한눈에 펼쳐지는 경치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권준이 그의 첫째 아우인 권숙과 함께 미리 와서 답청(踏靑) 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군막과 음식은 물론 시중들 기생도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준이 직접 잡았다는 꿩과 노루 고기에 그의 안사람이 빗었다는 추로주(秋露酒)가 놓였다.
권준과 그의 동생 권숙 모두 그 학식과 인물됨이 명문가의 자제임을 짐작게 할 만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권율도 한 집안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꽃피는 봄 경치가 바다 빛과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강토를 꼭 지켜 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좌수사 영감.”
“말씀하시게.”
“여흥으로 활쏘기 시합을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무인으로서 마다할 일이 아닌 것 같소.”
권준과 그리고 자청한 군관 한 명과 함께 한 순(5발)씩 돌아가며 활을 쏘아, 진 사람이 벌주를 마시기로 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만 보아도 권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질세라 혼신을 다해 신중히 쏘았다.
- 명중이오~
- 지화자~ 좋구나!
동석한 기생들이 권준과 나 사이에 편을 갈라 추임새를 넣으면서 흥을 돋웠다.
서로의 실력이 막상막하, 백중지세라 할 만했다. 마지막 한 발이 남은 권준이 시위를 겨누었다.
어쩐 일인지 그의 마지막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
“영감! 제가 술이 마시고 싶은가 봅니다. 하하.”
그가 겸양으로 한발을 실기한 것이라, 생각해서 나도 나머지 한 발을 과녁 밖으로 쏘았다.
“이렇게 되면, 술을 드시지 못하게 되셨소. 하하하.”
“하하하.”
그렇게 술은 시합을 자청했던 군관만 두 잔을 마시게 되었다. 이를 본 기생 하나가 끼어들었다.
“좌수사 나리의 외양은 단아한 선비 같으시온데. 활을 잡은 모습은 용력이 넘치시오니······.”
이 모양을 본 권준이 말을 이어붙였다.
“허허허. 네가 장군의 모습에 춘심(春心)이라도 동하는 모양이구나.”
권준의 농에 얼굴이 붉어진 기생의 얼굴이 봄날의 경치와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흥겨운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좌정해서 권준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좌수사 영감. 듣기로 다가올 전란에 대비해서 많은 일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무관으로서 항상 사변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영감께서 녹둔도에서 수십의 병사로 1천의 여진 기병을 물리친 것도 대비를 철저히 하신 결과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때 북병사가······ 아, 아니오.”
“영감,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군무를 겪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오. 여튼, 왜 변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저 풍문이라 할지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감입니다. 저 또한 영감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청이 있사온데······.”
“말씀하시지요.”
“제 아우들을 영감이 부리셨으면 합니다.”
“부리다니요?”
“제게 아우가 셋 있습니다. 그중 권숙, 권위가 이제 장성하여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하여,”
“······.”
“순천보다는 전라좌수영에서 장군의 막하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 무에 어려운 일이겠소. 권 부사와 아우 권숙의 인물됨을 볼 때 둘째 권위도 장부란 것에 의심이 없소이다.”
“감사합니다. 좌수사 영감.”
권준은 후일 당포해전에서 적장 도쿠이 미치유키를 저격하는 공을 세우고, 경상 우수사가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사직하게 된다.
아무튼, 원균이 빌런이다. 그를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조정의 인맥을 이용해 탄핵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만 답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유재란 당시 선조의 부산포 진격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압도적인 수군 전력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였다.
1,000척의 적선과 곳곳의 왜성에서 쏘아 대는 화포를 이겨낼 수 있는 전함과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 상황에 대처할 예비 전력을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권준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권 부사!”
“네. 말씀하시지오.”
“후일, 혹여 경상도 바다가 뚫릴 것에 상황에 대비하였으면 하오.”
“그야, 마땅히 전라도의 바다를 물길을 든든히 방비하도록 돕겠습니다.”
“아, 그 뜻이 아니오”
“?”
“만약, 왜적이 상륙해서 육전에 나선다면, 육지에서 호남을 지켜야만 수군도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이오.”
“아······.”
“혹여, 수군이 출전한 다음 왜적이 육로로 수영의 덮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군은 돌아갈 곳을 잃으니 자멸할 것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순천이 좌수영의 배후가 되는 고을인 만큼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만약, 통일한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다면 왜구들처럼 1, 2만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오. 즉, 호남의 병력과 물자가 태부족할 것이 분명하오.”
“······.”
“그러니, 적은 병력으로 그것을 막기 위한 방략을 미리미리 준비해야만 이 땅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
“장군의 뜻을 받들어, 지세를 관찰하고 파발과 군적을 점검토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적은 병력으로 적을 물리치려면 화력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큰 방책이 될 것이오. 그러니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화차와 신기전도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소.”
“장군 그런데 화차는······.”
“화약의 소모는 많은데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적은 병력으로 적을 일시에 제압하려면 화차만 한 것도 없소. 화약의 수급은 내 어찌 해 볼 터이니, 준비해 주시구려.”
“네. 알겠사옵니다.”
권준은 과연 명문가의 자제답게 바른 몸가짐과 학식을 가진 자였다.
또한, 부질없는 예의나 허세 없이 소탈하였고. 문반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으나, 무인의 길을 택한 것이 나와 같았다.
그런 명징한 성품 덕에 편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화창 봄날에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의기를 확인하니 그간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였다.
푸른초 목과 붉은 꽃들 그리고 남해의 풍광이 달리 보였다.
감회에 젖어 바다에 시선을 돌리자, 작은 배 한 척이 제법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권 부사, 저 배는 어떤 배이오. 어선도 관선도 아닌데 제법 빠르구려.”
“아마도 포작(鮑作)의 배인 것 같습니다.”
“포작?”
“네. 역(役)으로 전복과 물고기를 잡아 진상하는 자들이온데, 배를 잘 몰고 물길을 잘 알기는 하나.”
“······.”
“제주에서 출래(出來)한 자들도 있고, 거주지가 일정치 않거나 더러 배 위에서 사는 무리도 있습니다. 때론 도적이 되는 예도 있습니다.”
“배 위에서 산다니······. 그건 그렇고 도적이 되다니 그 무슨 말이오?”
“그게······.”
“권 부사의 가감 없는 의견을 듣고 싶소.”
“일부 수령이 포작(鮑作)과 잠녀(潛女:해녀)를 왜구나 다름없게 취급하는지라······.”
“아니,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역을 진다면 저들도 조선의 백성일진대 어찌 그런 취급을 한단 말이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포작과 잠녀가 바치는 공물은 스스로 바친다기보다 수령과 아전이 빼앗다시피 하니······. 저들도 그것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아······.”
“하여, 그 정도가 심한 수령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에 항거하다 도적으로 몰리기도 실제 도적이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알겠소. 적어도 우리 전라좌수영에서는 포작인을 핍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그런 폐단을 알고 난 이후로 군관과 향리를 단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작들이 저리도 배를 잘 몰고 물길을 잘 안다고 하면, 차후. 수군의 향도(길잡이)와 탐망을 위해 저들의 도움이 필요한바.”
“······.”
“병적에 올리진 못하더라도 저들의 숫자와 소재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오.”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좌수사영감.”
······
그렇게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정읍전장을 관리하는 김 천손에게서 전갈이 도착했다.
* * * * *
장군 보소서.
정읍전장에서 첫 초토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김화토 염초장이 만든 화약 90냥을 보내오니 시험해 보시길 바라옵니다.
더불어 정읍전장의 상황을 보고해 올리오면.
염초 밭을 7결(약 23,000평) 조성했으며, 치는 닭은 5,000마리로 불어났습니다.
닭똥은 염초의 재료로 쓰고 닭알은 일부 장터에 내다 팔고, 꾸준히 좌수영으로 보낼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염초밭을 더욱 늘릴 계획입니다. 초토 1,600근(1톤)을 침출하여 나오는 염초가 6근이 채 되지 못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인 것은 김화토 염초장이 염초밭을 묵히는 기간을 절반으로 줄여 반년이면 초토를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강건하시길 빌며 이만 줄겠습니다.
김천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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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로주(秋露酒) : 가을 이슬을 받아 빚는다는 술. 선비의 술로 알려져 있다.
* 출래(出來) : 안에서 밖으로 나옴. 인물이나 물건 따위가 세상에 나옴. 조선 시대 제주도 사람은 관의 허락 없이 뭍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출륙금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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