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 염초장(焰硝匠)
013화 - 염초장(焰硝匠)
언복은 증기기관의 혁신성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대장장이로서뿐만 아니라 살면서 수많은 부역과 노동에 시달려 왔으니, 체감의 크기가 다른 것 같았다.
“언복, 자네라면 이 증기기가 완성되면 뭘 할 수 있겠나?”
“곡식 빻는 방아부터······ 아! 베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복은 역시 총명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자동 베틀이면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방직 기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란을 몇 년 앞둔 이 시점에서 방직 기계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베틀도 좋겠지만, 시일이 오래 걸릴걸세.”
“그럼 무엇부터 만드는 것이······.”
“우선은 대장간 망치와 나무를 썰어 내는 톱부터 만드는 것이 순서가 될 것이야. 그래야 다른 것을 만드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거야.”
언복은 뭔가 번득였는지 눈이 동그래지며 말을 이었다.
“나으리!”
“왜 그러나?”
언복은 신이 나는지, 땅바닥에 무언가 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톱날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증기기로 돌리면, 사람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언복은 현대의 테이블 쏘(전기톱)와 같은 구조의 톱을 그리고 있었다.
“오! 그런데 동그란 톱날을 만들 수 있겠나?”
“공이 많이 들기로 하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요.”
“그래그래. 그러니 이제 한번 만들어 보세나. 이 부분은 무슨 쇠를 쓰면 좋을 거 같은가?”
나의 손은 증기기관의 도면에서 보일러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음······ 철은 안 될 것 같습니다요.”
“어째서 그런가?”
“무쇠솥처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복잡한 모양을 만들기도 간단치 않을뿐더러. 녹이 슬 수도 있고. 또, 증기의 힘 때문에 깨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요.”
“음, 그럼?”
“구리가 좋긴 하지만······ 이것저것 따져 보면 놋쇠(청동)가 좋겠습니다. 방짜 유기 장인에게 부탁하면 작은 것은 금세 만들어 줄 겁니다요.”
“좋네. 그럼 작은 크기의 증기기관을 먼저 만들어 보도록 하게.”
“어느 정도 크기를 생각하시는지······.”
“처음이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맷돌이나 숫돌을 돌릴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 숫돌만 돌릴 수 있어도 병장기를 연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나?”
“네. 나으리 해 보겠습니다요.”
“언복!”
“네?”
“내 장담은 못 하지만 서두, 훗날 자네를 면천 시킬 방도를 찾아보겠네.”
“아이고~ 나으니.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백골난망이옵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면천은 바라지도 않사옵니다.”
“?”
“나으리 은혜에 보답하고자 온 힘을 다해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하하. 자네 이제 문자도 쓰는구먼.”
“이방과 형방에게 배웠습니다요.”
“하하하.”
언복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또, 나의 임지가 바뀌더라도 그가 주변의 방해 없이 일할 수 있어야 했다. 궁리 끝에 사비를 털어 정읍 외딴곳에 대장간을 세웠다.
하루빨리 증기기관을 만들어 임진왜란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 생각이었지만.
언복이 이야기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베틀을 만들면, 조선을 산업혁명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라······.’
조선 시대엔 면포가 실질적인 화폐 역할을 했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내가 노량에서 죽지 않아야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고 나서 가족들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이때가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 가족도 중요했지만. 먼저 간 두 형의 가족들도 챙겨야만 했다.
내 자식보다 먼저 조카들의 혼처를 알아보고 모두 혼인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아들로서, 집안의 가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하나 싶었는데 또, 그놈의 억까(抑苛)가 시작되었다.
임지에 가족을 많이 데리고 온 것을 트집 잡아 남솔(濫率)이라며 탄핵을 운운하는 자들이 나왔다.
이에.
‘아비가 죽어 천하에 의지할 곳 없는 조카들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효이자 인륜(人倫)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유지해야 할 관직이라면 언제든 사직하겠다.’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관직을 버려서라도 효를 택하겠다는 말에 나의 탄핵을 입에 올린 자들도 잠잠해졌다.
그러자 개중엔 태도를 바꾸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가 어찌 나라를 지키겠는가?’라며 날 두둔하는 사람도 나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조선의 가장 큰 윤리인 충효의 효를 방해한 행위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묵묵히 나의 소임만을 다했다.
두 고을의 현감으로서의 직무와 가장으로서의 책무 그리고 훗날 변란을 대비하는 일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또, 그 일과를 기록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작은 기록 하나하나가 자신을 발전시키는 일이기도 했지만,
일기는 종이 위에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렇지만, 일기를 쓰는 일은 철저하게 이순신의 정체성에서만 쓸 수 있었다.
이젠 해군 장교였던 기억과 이충무공으로 살아가는 지금과 기억 속의 현생에 대한 정체성이 혼재된 것에 익숙해졌다.
기억 속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생긴 답답함과 결핍은 미래의 지식을 조금씩 실현하면서 풀고 있었다.
휴대용 필기구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김천손에게 대나무 촉 만년필을 만들어 주었다.
쉽게 생각했다가, 잉크(먹물)를 보관하고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지금의 기술로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여, 대나무 속을 솜으로 채워서 적당히 먹물을 머금게 하였고, 뚜껑을 밥풀로 밀봉해서 내부의 먹물이 마르지 않게 하였다.
말하자면 일회용 먹물펜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묵필(墨筆)이라고 불렀다.
김천손은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했다. 만들기도 어렵지 않아 그것을 여럿 만들어 품에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글과 숫자에 익숙하지 않은 언복에게 숫자 0의 개념과 기초적인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자로 숫자를 표기하려면 단위마다 다른 글자를 외워야 했고, 계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라비아 숫자를 알려 주진 않았다. 단지, 한자 令(하여금 령)자를 숫자 0에 대입해서 쓰도록 알려주었다.
一令은 10이고 -令令令은 1,000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언복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令을 쓰기 편하도록 ㅅ 으로 대체해서 쓰고 있었다.
게다가
1할을 ㅅ.一 (0.1)
1푼을 ㅅ.ㅅ一 (0.01)
바꿔 쓰는 것으로 보고 깜짝 놀랐다.
소수의 개념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다.
그런 언복을 보면서 ‘이런 친구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면 다빈치 같은 인물이 되었겠구나!’라고 혼자 되뇌었다.
사실 증기기관을 건너뛰어서 증기터빈을 만들려고 했었다.
함선을 움직이기엔 더 강력하고 효율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훨씬 단순했다.
하지만.
수천 개 이상 들어가는 터빈의 블레이드 정도아 손으로 두드리는 단조로 만들 순 있을 것 같았지만,
케이싱(casing)의 기밀을 유지하고. 정밀도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적 완성도를 갖추긴 힘들 것 같았다. 조선 시대의 기술적 환경으론 아무래도 무리였다.
대안으로 삼은 고전적인 증기기관을 만들기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대로 된 선반은커녕, 자동 망치나 그라인더도 없는 상황에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력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했기에 언복에게 야장 몇 명을 더 붙여 주었다.
일단은 그렇게 그에게 증기기관을 맡겨 두고 다른 것을 준비해야 했다.
전생의 기억에 이충무공과 조선군은 항상 화약 부족에 고생한 것이 인상 깊었고 안타까웠다.
가장 큰 대포인 천자총통이 화약을 많이 쓴다는 이유로 폐기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였다.
김천손을 찾았다.
“나으리, 부르셨습니까요?”
“약장을 좀 찾아 주게?”
“네?”
“화약장 말일세.”
김천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천손, 왜 그러는가? 어려운가?”
“그게 아니옵고, 약공(藥工)이 흔치도 않지만. 나라에서 관리하는지라······.”
“그래, 자네 의견을 말해 보게나.”
“말씀 올리옵자면. 약공(藥工)은 재료를 섞어 화약을 만드는 합약장(合藥匠), 필요한 흙을 모으는 취토장(取土匠), 염초를 만드는 염초장(焰硝匠)으로 나뉩니다요.”
“음, 그래서?”
“합약장, 화포장은 민가에서 쉬이 찾기도 어렵지만. 군기감(軍器監)에 등록되어있으니······.”
“...”
“사사로이 합약장을 찾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하여 나리께 누가 될까 저어됩니다.”
“그렇군, 자네 말이 일리가 있네. 하지만, 내가 화약장을 찾으려는 연유는 훗날 나라에 전란이 올 것에 대비하려는 것이라네. 어쩌면 좋겠나?”
“그러시다면······ 염초가 부족한 것이 문제이지, 비방을 몰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아옵니다.”
“음.”
“그러니, 취토장과 염초장 찾아 거느리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화전민 중에서도 염초 만들 흙을 취토하여 파는 자들이 있사옵니다.”
“그래? 그럼 그 일을 맡을 만한 자를 찾아 주게.”
“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그런데. 자넨 어찌 그런 것이 이리 소상히 알고 있나?”
“쇤네야 체탐인으로 사람 사이의 일들을 보고 풍문을 듣고 진위를 가리는 것이 일이라······.”
“알겠네. 내가 인복이 있구먼. 하하하.”
한때, 이충무공의 불가사의한 전승 기록을 보면서. 통신수단도 마땅치 않은 시대에 정확한 정보와 정교한 전술을 구사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장군은 분명 체계적인 정보 조직을 운영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김천손과 그를 따르는 체탐인들을 조직해서 정보 조직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를 정읍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나리.”
“그래 할 말이 남았는가?”
“소인이 사람을 부리는 걸 허락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사람이 필요하면 쓸 수도 있는 게지.”
“그런게 아니옵고, 소인이 나리께 도움이 되려면 여러 고을과 사람을 주밀히 살펴야 할 터인데.”
“?”
“제가 부리는 사람마다 나리를 뵙게 하면 불필요한 오해도 살 수 있을뿐더러, 사람을 부리는 데도 번거로운 부분이 있어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으면 하옵니다.”
김천손이 말하는 속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노출되지 않는 점조직을 만들고 싶은 것이었다.
“알겠네. 자네가 내 눈이고 귀인데, 내가 내 눈과 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겠나? 뜻대로 하게.”
“감사하옵니다.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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