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 나들개
019화 - 나들개
나대용에게 유군장(遊軍將) 지위와 함께 병선조선장(兵船造船將)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좌수영 내 조선장(造船匠)을 모두 그에게 붙여 주었다.
그는 가장 먼저 기존의 선소(船所)를 보수하고, 새로운 선소를 짓는 일을 시작했다.
선소는 지금으로 치면 도크와 같은 배를 만들거나 보수하기 위해 있는 시설이다. 바닷가에 땅을 파고 축대를 쌓아 만든 C자 모양의 도크였다.
입구의 둑을 트면,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육지에서 건조한 배를 바다로 내보낼 수 있었다.
또, 사방으로 2배 크기의 배를 건조할 수 있는 대형 선소를 새로이 축조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영의 감관과 향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관내의 군정성책과 호구단자를 비롯한 관과 민의 기물을 정리한 첩, 책을 빠짐없이 모두 대령하라!”
* 군정성책(軍丁成冊) : 일종의 병적 기록부.
* 호구단자(戶口單子) : 주민등록부.
“전부 말입쇼?”
“못 알아들은 것인가?”
“영감, 아직 정리되지 못한 것도 있사옵고. 미처 등재하지 못한 사항도 있으니······.”
“어허! 일 획도 첨삭하지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 가져오라.”
“하오나······.”
“만약, 한자라도 고친 흔적이 발견되면. 치도곤(곤장 중 가장 큰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아, 알겠사옵니다.”
관련 문서를 일시에 가져오라 한 것은 불시 검열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편견 없이 현황과 업무의 대강을 파악하기 위해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서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한편으론 한숨이 나오고 다른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정병의 평균 나이가 44세였다. 15살부터 66세가 된 고령자도 정병에 포함되어 있었다.
수군은 고된 사실상 천역(賤役)이나 다름없어서 오래 세월 수군을 기피한 결과라고 짐작되었다.
하지만, 병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인구의 유동이 없고 반복적인 수군 복무로 전문가 집단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타지에서는 제승방략으로 소집된 군병이 신병교육대의 훈련병이라고 치면, 수군들은 죄다 고인물 부사관으로 편성된 군대라고 할 만했다.
그들의 겪어 온 삶의 궤적은 거친 바다와 같은 천대와 멸시 속을 관통한 길이었다. 손바닥에 박힌 못만큼 마음도 단단히 굳어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언복을 좌수영으로 불러들이면서, 좌수영 본영의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정읍전장에서 보내온 닭 200마리를 잡고 군량을 조금 풀어서 입번한 상번군과 관내의 노인들도 불러들여서 먹였다.
닭 한 마리에 흥겨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내심 뿌듯하고 흐뭇했다. 문득 전생에서 본 영화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 * *
동막골 사람들과 부대끼던 북한군 장교가 촌장에게 물었다.
“뭐 그리니끼니 고함 한 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을 휘어잡을 수 있는 ···.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뭡네까?”
촌장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먼 산에 두고 말했다.
“······ 뭐를 마이 맥여야지 뭐.”
* * *
그랬다. 먹는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면 이 군대를 이끌 수 없는 것이었다. 새삼 장군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아무런 도움 없이 해내었는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언복에는 정읍 대장간은 언복이 길러낸 야장들에게 맡기고, 더 크고 진보된 대장간을 여수에 만들라고 지시했다.
또, 증기기관을 활용한 목재소를 만들기 위해 대목장과 조선장을 붙여주었다.
일을 벌일수록 앞으로 충당할 재원이 부족할 것이 근심거리였다. 당장에야 별일이 없겠지만. 김천손이 이끄는 상단의 수익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할 구역의 순시는 조금 미루기로 했다.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5관 5포를 모두 순시하고 검열하셨지만, 지금은 나처럼 막 부임한 만호와 수령이 제법 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관내를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머릿속을 맴도는 문제들을 먼저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좌수영 바다를 거닐다가, 소금 굽는 광경을 목격했다. 염전에서 수분이 증발하여 농도가 높아진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졸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는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어차피 물을 끓이는 일인데······.’
증기기관과 소금가마를 결합하면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음에 언복을 찾아가서 떠오른 생각을 설명해 주었다.
“······ 그러니까 평상시 바닷물을 넣고 증기기관을 돌리다가, 그 물이 졸아붙으면 그게 바로 소금 아닌가 이 말일세.”
“그렇긴 하옵니다만, 매번 통을 열고 다시 조이는 게······.”
“어찌 방법이 없겠나?”
언복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허공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리,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그래. 어서 말해 보게.”
“보열로의 밑동에 발부를 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밸브를 발부(拔部)로, 보일러를 보열로(保熱爐) 부르기로 했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
“매번 증기 통을 열어서 아예 소금이 된 것을 긁어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니”
“······.”
“졸여진 진득한 바닷물을 아래에서 빼내고, 위에서 새로운 바닷물을 넣는 것이지요. 그러면 빼낸 물은 조금만 끓여도 소금이 될 테니 말입니다요.”
“그렇구먼, 역시 자네가 방법을 찾을 줄 알았네. 하하하.”
“하지만······.”
“?”
“아무래도 소금기가 증기에 포함될 수도 있으니, 배에서 쓸 기관에는 이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요. 여기서야 증기기관을 여벌로 만들어 청소하면서 쓰면 되겠지만···.”
“그렇지 그래, 뭐 배에서까지 소금을 구울 필요가 있겠나. 하여튼 한번 시도해 보세.”
“알겠습니다요. 나리.”
둔전에서 나오는 소출과 상단의 수익 그리고 소금을 구워 내면 함선을 건조할 비용을 얼추 마련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직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닌 좌수영만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일, 삼도의 수군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재원과 준비가 필요했다.
언복의 얼굴을 보니 테슬라 터빈의 완성도가 궁금했다. 그를 재촉하거나 다그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렇고, 언복!”
“네. 나리.”
“어떻게 증기기륜은 좀 소식이 있는가? 하하.”
“그러믄입쇼. 지금 정읍 대장간에서 새끼 야장들이 기륜을 다듬고 있습니다요.”
“오, 그래?”
“여기 여수 대장간과 목재소에서 쓰는 기기들은 증기기륜을 이용해서 만들 생각입니다요.”
“거, 좋은 생각이구만.”
“그리고, 좀 전에 소금 굽는 거 말씀하셨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아! 그래.”
“하하, 알아차리진 모양입니다요. 증기기륜은 기존의 증기기관에 비교하면.”
“······.”
“발브(밸브)의 숫자도 적고 나들개(피스톤)도 없는 단순한 얼개이니 소금기에 강할 뿐만 아니라, 청소도 수월할 것 같습니다요.”
“그렇지, 그렇지. 증기가 닿는 부분은 기륜(디스크)뿐이니 그곳만 보수하면 되겠구먼.”
“그렇습니다요. 실제 힘을 받는 기어 상자는 증기가 다다르지 않으니 적합할 것 같습니다요.”
기어박스를 톱니바퀴 상자라고 부르는 것이 번거로워서 기특하고 기이한 물건이란 뜻의 기어(奇於)라고 이름 지었다.
“하하, 이제 겨울에도 소금을 만들 수 있겠구먼.”
“아!”
“언복, 뭐가 또 있는가?”
“겨울엔 증기기관에서 남은 열을 구들로 보내는 장치도 만들고 있습니다요. 또, 기관에 배출된 따뜻한 증기를 모아 집안으로 들일 수 있게 했습니다요. 그러면 콧구멍이 마를 일도 없지요.”
“이야~ 언복 자네는 정말, 사물의 이치를 꿰뚫고 있구먼.”
“······.”
“소금을 굽고, 증기기관을 돌리고 남을 열로 온돌을 데울 생각을 하다니 ··· 그야말로 일거삼득, 일석삼조구먼. 하하하.”
“저도 그 생각을 진작에 못 했을까 했습니다요. 새끼 야장이 증기기관 옆에서 손을 녹이는 걸 보고는 퍼뜩 떠오른 생각입니다요.”
“그래그래, 그렇게 작은 것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자넨 공부했어도 출세했을 것이네.”
“하하, 소인은 머릿속으로 뭔가를 그리고 손으로 만드는 일이 좋습니다.”
“하하.”
“새로운 걸 만들 때마다 소가 새끼를 낳고, 자식이 늘어나는 기분입니다요.”
“난, 자네를 얻은 것이 자식을 얻은 만큼 기쁘다네.”
“소인도 저에게 새 삶을 주신 나리를 부모처럼 생각합니다요.”
사실 증기기관의 보일러로 동시에 소금을 굽는다는 아이디어 한쪽에는 의구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소금기를 포함한 증기가 피스톤과 밸브를 부식을 가속화할 것이고, 그렇다면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비용과 소금으로 얻어지는 이익 가운데 어느 쪽이 유리한지 가늠해 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언복이 테슬라 터빈을 이미 만들고 있다고 하니 그 고민이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테슬라 터빈이 완성되면 바닷물을 길어 오는 것도 단번에 해결된다. 증기를 흘려보내는 대신 디스크를 돌려주면 그대로 펌프가 되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으로 바닷물을 끌어 올리고, 그 바닷물을 끓여서 증기의 힘을 만들어 내면서도 동시에 소금을 굽는 자동화된 소금공장을 만들기로 했다.
소금은 제국의 산물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도 염전에서 시작하였고, 베네치아도 소금 무역을 독점하면서 융성했다.
전라좌수영에 소금공장을 만든다면 훗날 하삼도 전체의 군비를 조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다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상상 속에 빠져 있는 사이 동헌 아전이 날 찾고 있었다.
“여기 계셨네! 나아리 ~”
“어, 그래.”
“서찰이 당도했습니다요.”
이운룡의 편지였다.
그는 녹둔도 전투를 치르고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도 함께한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한 전우였고, 이후 시전부락 전투에서 공을 세워 복직된 역전의 맹장이자 지장인 바로 그 이운룡이었다.
기쁜 마음에 아전의 손에 들린 서찰을 빼앗듯이 낚아채어 펼쳐 보았다.
그는 위험이 앞길을 막았을 때 앞장섰고, 고민에 가득 찼을 때 길을 열어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운룡 역시 편지에서 그런 애틋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 * *
······ 장군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체통을 잊어버리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만나는 동문과 가족들에게 장군의 영전이 나라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더불어, 저도 경상도 옥포만호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지척에서 장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이고 한없이 기쁩니다.
그리고 녹둔도에서의 옥에 갇히고, 이일 병마사가 우리를 참형에 처하겠다고 주청했을 때. 구명에 앞장서셨던 이억기 영감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신다는 소식도 알려드립니다.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또 알게 된 사실은 장군께서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기 직전 원균이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균 그자는 거제 현령으로 있는 동안 무능과 악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대간의 탄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는 나라의 근심을 더는 잘된 일이지만. 소문으로는 원균이 조정 대신은 물론 종친에게까지 온갖 청탁과 선물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 소식이 저의 귀까지 흘러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 * * *
* 천역(賤役) : 천인에 해당하는 노비의 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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