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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슬립 님의 서재입니다.

사관학교의 꼽추 하이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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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슬립
작품등록일 :
2021.05.12 22:45
최근연재일 :
2021.06.29 23:28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6,474
추천수 :
261
글자수 :
259,046

작성
21.06.29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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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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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2년차

DUMMY

“정녕 하실 생각입니까.”

“해야지.”


아게르의 거칠고 못난 손이 릴리의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할아범이 보기에 릴리가 이 지독한 저주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아티팩트의 기능과 꾸준한 관리, 릴리님의 의지와 개성이 조화를 이루면 십 년도 거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후에는?”


뒤틀린 이목구비가 노안(老顔)과 마주한다.


“스스로 가꾸어 나가야 할 시기를 잃어버린 릴리에게는 누가 보상해줄 수 있지? 내가? 헤일이? 가문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근심 걱정 없는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릴리를 바라보는 아게르의 눈빛에는 걱정과 애정이 묻어나왔다.


“···분명 릴리님이 알게 되면 실망하실 겁니다.”

“그 누구도 모르게 할 것이다. 이건 나와 할아범, 둘만의 비밀인 거야.”

“후우, 이 늙은이는 모르겠습니다. 과연 잘 하는 일인지.”

“이 길만이 나와 릴리, 그리고 가문의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건 분명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아게르가 관의 머리 방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웅-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저주해 마지않을 아버지에게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아게르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릴리의 몸과 관을 뒤덮었다.


마력의 충돌을 상징하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서서히 아게르의 팔에 비정상적인 핏줄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 각오하고 실행한 짓에는 결코 후회도, 자책도 하지 않는 그 이상하리만치 완고한 고집이지.”


손을 거두지 않으리라 직감한 주치의는 결국 한숨을 쉬고 관 형태의 아티팩트를 조작했다.


“이 늙은이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가야겠습니다. 이제 아게르님 같은 혈기를 감당할 체력이 되지 않는가 봅니다.”

“릴리가 깨어날 때까지는 봐주고 가지.”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2년. 어떻게 해서든 2년으로 줄여보겠다.”

“끄응, 이렇게 늙은이 부려먹으면 하늘이 노하십니다.”

“하늘은 죄 많은 아버지를 조지느라 정신 없을테니 걱정 마라.”

“그럼 저주는···.”

“내게 옮···, 대신 마···.”


치직-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이윽고 낯익은 향이 베인 방으로 되돌아왔다.


“끄윽···.”

“괜찮느냐?”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한 뇌에 과부하가 찾아왔다.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헤일은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정신을 가다듬거라.”


맑은 새싹 향이 콧속으로 밀려들며 머리의 지끈거림이 한층 가셨다.


“어째서···.”

“육체와 정신이 더 이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것이다.”


눈물 콧물을 쥐어짜는 헤일을 보살피며 스텔라는 생각에 잠겼다.


오로지 정신과 영혼만이 관여하는 심상 세계는 들어가기는 비교적 쉬워도 머무는 데는 큰 대가가 필요하다.


인과율의 결실인 인과의 연자를 복용했기에 이 정도지, 만약 조치 없이 무작정 끌고 갔다면 분명 몇 분 안 되어 백치가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 녀석이 규격 외인 게지.’


남매 모두가 시조를 따라 괴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왜인지 모르게 안도감이 드는 스텔라였다.


“하아, 하아.”


진이 빠진 헤일이 거의 드러눕듯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통에 혼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고생했다. 정신을 담금질할 기회는 흔치 않지.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도움이고 나발이고···!”


정신을 차린 헤일이 억울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정작 알아낸 게 없잖아요!”

“본인 그릇이 거기까지인 걸 누굴 탓하겠느냐.”


고통 때문인지, 혼란만 가중된 탓인지 유독 차를 마시는 스텔라가 얄미워 보였다.


“네 기억은 잘 받았다.”

“완전 사기야!”

“마냥 사기는 아니지. 이것 하나만은 알아내지 않았느냐.”


심신을 안정시키는 꽃잎 차를 내주며 스텔라는 눈을 흘겼다.


“네 오빠란 사람에게 답이 있다는 것. 정말로 간절하다면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윽.”


그게 정도(正道)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멱살 잡고 소리친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평범하게 대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과거를 들춘다? 난이도가 너무 높다.


“그래서, 그 두 개의 기억이 아게르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해요?”

“그렇겠지. 심상 세계의 판단이니까.”


진실인지 아닌지는 돌아가서 조사해보면 될 일. 본가의 숨겨진 공간을 찾는다면 환상 같던 심상 세계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쉬다 가거라.”

“됐어요.”


아직도 남아있는 잔 통증에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스텔라의 방을 나왔다.


아게르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엿보려다 거대한 음모의 일면을 마주한 기분이다.


온화하던 아버지와 어린 아게르 사이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릴리의 희생에 아게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씨이.”


괜히 눈물이 난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헤일은 방으로 돌아갔다.


“왔구나. 다들···, 울었어?”


하필 방에 아게르 혼자만 남아있다. 헤일은 가까이 다가오는 아게르에게 소리쳤다.


“오지 마!”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지금 대화를 나누면 당장 가슴 속에 차오르는 이 감정의 분출구가 될 것 같았다.


“당분간···, 혼자 있을 테니까 찾지 마.”


황망한 표정을 짓는 아게르를 뒤로하고 헤일이 자리를 피했다.



**


“그래서.”


굉음에 놀라 찻잔을 떨어트린 스텔라가 노려본다.


“동생 울렸다고 따지러 왔다?”

“말 돌리지 마라. 헤일이 왜 울었냐고 두 번 물었다.”

“하, 좀만 더하면 치겠어.”


고고한 표정으로 실수 현장을 수습한 스텔라의 기세가 변했다. 광활한 지역과 뿌리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정령계에 오직 넷뿐인 정령왕으로서의 위엄과 존재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감히 내게 명령을 해? 지금 여기가 어딘지 까먹은 건가?”

“세 번 물어야 되나?”

“건방진!”


스텔라의 손에서 뻗어 나온 넝쿨이 순식간에 전신을 옭아맸다. 강한 압력에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간만의 손님이라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더니,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마지막으로 묻는다. 헤일이 왜 울었는지 설명해라.”


대답 대신 스텔라의 표정이 학습된 분노로 물들고, 목에 감긴 넝쿨이 바짝 조여왔다.


명백한 살의. 나는 내 신체의 시간 괴리를 막고 있던 흑마력의 성질을 바꾸었다.


정령계의 압력에 봉쇄되었던 마력이 일시적으로 풀리자 곧바로 넝쿨을 통해 잿빛 마력을 전개한다.


스스-


“무슨···!”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격류에 넝쿨이 갈기갈기 쪼개졌다. 그 흉악한 싸이오닉 에너지도 찢어발기는 잿빛 마력인데, 그 흔한 정령력 따위야 가볍게 소멸시킬 수 있다.


“당장 그 위험한 힘 치워라!”


나는 말 없이 잿빛 마력의 총알을 날렸다.


핑-!

찌직!


순식간에 자라난 수 미터 굵기의 나무를 두부마냥 뚫고 지나간 총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스텔라가 경악해 소리쳤다.


“미친! 진짜 해보자는 건가?!”


봄의 정령이 사라지면 백류성이 허물어지고 돌아가기 전까지 온갖 정령들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며 돌아가서도 어그러진 기후에 생태계가 엉망이 될 테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정령왕은 또 생긴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한 살아남는 데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돌아가면 시간의 괴리감에 아사할 확률이 높겠지만, 시간이 적게 지나 구조대와 마주치거나 한다면 살아남을 확률도 적지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핑! 핑!


“정령왕을 죽이면 뭘 떨굴지 궁금하긴 하네. 퀘스트는 안 주나?”

“그만! 항복! 항복이니까 그만둬라!”


넝쿨과 나무 방벽을 거둔 스텔라가 양손을 든 채로 백기를 들었다.


“왜?”

“왜냐니! 소멸시키려 해놓고 뻔뻔하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스텔라의 태도에 마력을 거두었다.


“동생이 정상인 이유가 있었어. 네 놈이 모친 뱃속에서 나올 때 미친놈 인자를 박박 긁어 나왔구만.”

“말이 심하다?”


다시 손바닥 위에 생성되는 잿빛 구슬에 스텔라가 억울함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낯선 모습이었다.


플레이어 시절의 스텔라는 플레이어의 재능에 완전히 매료되어서 무슨 말을 하든 수용하는, 이른바 콩깍지 낀 상태여서 이렇게 의견이 대립하거나 반목하는 일도 없었다.


문득 정령도 화병을 드러누울 수 있나 확인해보고 싶은 못된 마음을 접고, 나는 본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헤일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울면서 나와?”

“인과의 연자를 먹였다.”

“뭘 보여주려고?”

“그건···.”


답지 않게 망설이는 스텔라의 말 끝에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미래의 헤일을 보여준 건 아니겠지?”

“아니다.”

“그게 아니면 울만한 일이 없을 텐데.”

“···꼭 알아야 하겠느냐? 엄연한 거래였고, 네 동생의 사적인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네가 이렇게 집요하게 알아내려 하는 걸 본다면 분명 싫어할 거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지금 상황을 전해 들은 헤일이 무슨 짓이냐고 따지면 마땅히 할 말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절대로 헤일에게 해가 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는 스텔라의 첨언과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정령의 선언까지 받아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거래로 헤일이 이상한 길로 빠져든다면 훗날에 찾아올 거다. 그때는 지금처럼 순순히 물러나지 않아.”

“마음대로 해라! 이 팔불출!”

“나 같은 경우랑 팔불출은 다르지.”

“하. 누가 사람이고 누가 정령인지.”


꿍얼대는 스텔라. 오랜 학습으로 익힌 인위적 반응임을 알고 있음에도 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럼 이 건은 넘어가고.”

“뭐, 또 할 말이 있느냐?”

“이제 나와도 거래해야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짜?”


잿빛 마력을 본 스텔라가 이번에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방금전은 내가 먼저 손을 쓴 결과라 순순히 물러났을 뿐이다! 강압적인 거래를 맺느니 차라리 소멸을 걸고 싸울 것이다!”

“아니, 싸우자는 게 아니라. 이 힘, 궁금하지 않나?”


정령왕의 농밀한 정령력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긴 미지의 힘이다. 정령의 근원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알아내려 하는 게 정상이다.


“됐다. 오늘은 더 이상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구나.”


명백한 축객령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스텔라의 칩거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리고 우리의 정령계 생활 또한 어느새 일주일을 돌파했다.


“완벽했지?”

“부족해.”


나는 아몬의 검을 받아 다시 천천히 검무를 펼쳤다.


스텔라에게 시조에 관련된 힌트를 얻은 후로, 아몬의 검술에 대한 갈망은 극에 달했다.


시조의 검술을 익힌 아몬이 전에 보여준 스물여섯 종류의 검술을 배우려 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봤지?”

“···도대체 뭐가 다른 건가?”

“호흡이 흐트러지잖아. 검로도 미세하게 어긋나고.”


아몬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한다.


“···일단 알겠다. 또 막히면 부탁하지.”


일정 수준에 이른 검술은 전부 심기체의 조화를 바탕으로 짜여져 있다.


때문에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제 위력을 못 내는 경우도 존재하고, 아몬처럼 배우는 입장에서 미묘한 괴리감을 느끼는 경우도 흔한 사례였다.


몸의 흐름을 늦추는 것과 다양한 검술을 익히는 게 같은 방식의 수련인 이유가 여기서 나타난다.


두 방법 모두 점차 상승하는 신체능력과 실제 움직임의 괴리감을 야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 3의 수단인 마력의 발현을 자연적으로 촉진한다.


더욱이 마력이 아예 봉쇄된 상태인 정령계에서의 수련은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니,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을 개화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다시 천천히 검로를 점검하는 아몬을 두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정령계로 같이 떨어진 파티원 모두 훗날 메인스트림에 영향을 끼치는 네임드 인물들이다.


이들의 활약이 있어야 예정된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에, 시간을 들여 이들의 수련을 돕는 중이었다.


“벌써 제 차례에요?”


디안의 수련은 아몬과 달리 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술적으로 이미 완성되어있는 암살자에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방법 뿐이다.


“한 자루 단검을 떠올리는 데까진 성공했어요.”

“빠르네. 그럼 이제 그 단검에 검집을 덧씌우는 것까지 해보자. 중요한 건 검집과 동시에 살의도 가두어야 한다는 거야.”

“으음, 해볼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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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차 21.06.29 57 5 13쪽
42 2년차 +2 21.06.26 57 2 13쪽
41 2년차 21.06.24 62 3 14쪽
40 2년차 21.06.23 66 2 13쪽
39 2년차 21.06.21 70 4 13쪽
38 2년차 21.06.20 65 5 14쪽
37 2년차 21.06.19 76 4 13쪽
36 2년차 21.06.16 82 6 13쪽
35 2년차 21.06.15 87 5 15쪽
34 2년차 21.06.14 95 6 14쪽
33 2년차 21.06.13 101 7 16쪽
32 2년차 21.06.12 111 5 15쪽
31 꼽추 아게르 +3 21.06.11 117 9 13쪽
30 꼽추 아게르 21.06.10 101 5 17쪽
29 꼽추 아게르 21.06.09 106 8 15쪽
28 꼽추 아게르 21.06.08 104 7 13쪽
27 꼽추 아게르 +2 21.06.06 108 5 12쪽
26 꼽추 아게르 +1 21.06.04 113 7 12쪽
25 꼽추 아게르 21.06.03 116 7 14쪽
24 꼽추 아게르 21.06.03 119 6 13쪽
23 꼽추 아게르 21.06.01 127 6 14쪽
22 꼽추 아게르 21.05.31 131 8 14쪽
21 꼽추 아게르 21.05.30 133 7 14쪽
20 꼽추 아게르 +1 21.05.29 173 5 14쪽
19 꼽추 아게르 +1 21.05.27 170 6 14쪽
18 꼽추 아게르 21.05.26 146 8 13쪽
17 꼽추 아게르 +3 21.05.25 152 8 13쪽
16 꼽추 아게르 21.05.24 152 7 12쪽
15 꼽추 아게르 21.05.23 151 6 13쪽
14 꼽추 아게르 21.05.22 158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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