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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님의 서재입니다.

천사가 사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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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작품등록일 :
2021.07.26 19:45
최근연재일 :
2023.11.09 16:15
연재수 :
92 회
조회수 :
3,825
추천수 :
5
글자수 :
501,857

작성
22.10.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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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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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 - 17. 운명

DUMMY

"일어나셨군요."



부스스 눈을 뜨는 라프 옆에 앉아 있던 아르가,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며 라프에게 방긋 미소지었다.



"하음~ 박... 박사는 어디 갔... 어? 라프..."

"박사님은... 다른 ‘부유 기구’에 볼일이 있어 그곳으로 가셨어요."

"부, 부유 기구...?"



라프는 눈을 비비적대며 아르의 보랏빛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누워 있던 소파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간다... 라프"



라프는 짐승처럼 4개의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달려나가려고 했지만,


아르가 다급히 라프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안돼요! 부유 기구는 하늘에 떠 있어서 위험해요! 아무리 공주님이라도 날개가 없으면 그곳으로 가기 힘들어요...!"

"... 날, 날개...? 날개라면 아르에게 있잖아. 라프..."

"그걸 어떻게..."



아르는 라프의 몸을 슬며시 놓으면서,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손가락끼리 맞댄 뒤 라프를 흘끔거렸다.



"아르의 날... 날개로 박사에게 가면 안 돼? 라프..."



라프의 순백의 털이 아르에게 닿을 듯 말 듯 하게 다가오니,


그 순수한 마음씨를 대변하는 작은 애달픔이 되어, 아르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안... 안 돼요... 전 박사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해서..."



순진무구한 작은 공주님.


그렇기에 아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연하게 떠오르면서 작은 아이의 흔들림을 더했다.



"밖... 밖에 소년이 있다... 소, 소년은 갈등하고 있다. 라프..."

"소년이 갈등하고 있다고요...?"

"빨... 빨리 라프가 박사에게 알려줘야 한다. 라프..."



아르는 다급히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라프의 이끌림에,


작은 몸이 파도에 휩쓸리듯이 라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컴컴한 공간 속,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정태연과,


그 앞에 서 있던 미카엘 사이로,


가라앉은 공기가 차분히 대지를 짓눌렸다.



"그 이야기는 너희들의 ‘믿음’ 같은 건가?"



미카엘은 정태연을 향해, 차갑고도 건조한 눈을 곤두세웠다.



"믿음이라... 그래요. 전, 교주로서 이곳에 있는 거라, 그렇게 보일 수 있겠죠. 하하하..."



정태연은 볼에 흐르는 검은 눈물을 바닥으로 툭툭 떨어트렸다.


미카엘은 정태연의 검은 눈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질끈 이를 깨물었다.



"젠장..."



한 공주와 소년의 이야기.


경험이 풍부한 모험가라면,


새장을 여행하면서, 천사의 기술력을 살펴보면서, 이름 없는 새장을 탐험하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그 옛날 그 전설...


전설이란, 세상은 ‘대부분’ 하나의 ‘초거대 새장’... 정태연이 말하길, ‘태초의 새장’이란 것에서 시작되었고,


‘태초의 새장’ 안에서 일어난 ‘공주와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전설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여기에 온 사도라는 것이 ‘태초의 새장’을 다시 불러드리려 한다고? 그런 신화 같은 걸 무슨 수로...?"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웃고 넘겼을 ‘태초의 새장’은,


자신도 어렸을 적에는 한낱 ‘지나가는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모험가로서 여러 이름 없는 새장을 탐험할수록,


그건 단순히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님... ‘태초의 새장’의 공주님이 지금 박사 곁에 라프라는 소녀로 있답니다."

"...?"



어언- 몇백 년 전의 이야기 속 공주님이 살아 있다고?


미카엘의 차가운 시선에 의구심이 더해져, 정태연을 바라봤다.



"당신이 믿고 믿지 않고는 차후 조사하면 될 것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태초의 새장’이 이 세상에 도래할 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예상은 되시나요?"

"그야 ‘거대 새장’들이 ‘태초의 새장’에 묻힌 ‘천사의 기술력’과 ‘희귀한 자원’을 노리고 인력을 투입하면서 혼돈의 도가니..."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군요... 죄송하지만, 거대 새장들은 태초의 새장이 등장하는 시점으로 없어질 겁니다."

"그게 무슨..."

"제게 주어진 ‘원래의 운명’은, ‘제국의 새장’을 멸망시키는 것. ‘천사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두 마리의 괴물’과 ‘저를 믿는 이 광신도’들을 이용해, 때에 맞추어 제국의 새장 모든 이들을 죽이는 것이었답니다."



정태연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은 미카엘은,


인형 같던 차디찬 눈을 풀면서,



"큭..."



헛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넌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미카엘은 왠지, 이 빌어먹을 정태연 교주에게서, ‘동정심’이란 게 느껴졌다.


그의 기도하는 손과,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검은 눈물은,


정해진 것에 발악하는 인형으로서,


한때 자신이 그랬던 것과 겹쳐져, 기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 제 목숨은 만들어진 가짜. 전설 속 ‘소년의 기억’을 담은 인형이죠... 하지만 전, 단지 저만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정태연이 앉아 있던 의자 양옆으로,


천사처럼 생겼지만, 더 튼실한 몸에 머리 대신 할로 떠 있던,


두 마리의 괴물이 새하얀 날개를 펄럭대며 내려왔다.



"자... 그러면, 사도가 곧 이곳으로 찾아올 겁니다. 미카엘은, 아까 당신을 안내해주었던 제 신도를 따라 이 ‘부유 기구’에서 나가시면 됩니다. 그럼... 부디 이 사실을 다른 새장에게 알려주시면 좋겠군요."



띠링-


정태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카엘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 마지막으로, 그 사도란 자식은 대체 왜 그런 학살을 하려고 하지?"



정태연의 검은 눈물 사이로, 미카엘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정태연은, 앉아 있던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천사는 날개를 먹어 하늘로 날아가야 한다... ‘급변해버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면, 구시대 유물들은 뒤로 물러나야 하는 법, 모험가 대표 장길수도 전 대표의 희생을 발판삼아 전성기를 맞이했듯, 변화에 다소 희생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죠... 다만, 여기에 ‘인위적인 움직임’이 가미 되었을 뿐..."

"..."



... 자연의 이치.


미카엘은 정태연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순 없었다.


변화란 것은 항상 어느 정도의 희생을 동반한다.


그것이 현실이자 자연스러움으로,


그것은 마치 자신이 이곳에서 희생시킨 신도들과 같은 것으로,


지금도 이 세상에서는, 부분적으로 아니면 크게,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누군가가 희생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놈이야..."



하지만 정태연이 말한 ‘인위적인 움직임’은, 지금껏 자신이 경험해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미카엘은 두 팔을 펼친 정태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나는 이상향을 꿈꾸고 있다.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몇 명만큼은,


‘이상향과 현실이란 것에 타협’하면서 살아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이상향이다.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희망이란 것을 품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을 만들자고... 천사는 날개를 먹어 하늘로 날아가는 법이니까.



"사도님!!!"



박사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신도들을,


몸통만 한 거대한 꼬리를 이용해 저기 멀리 쳐 냈다.



"저도 죽여주세요! 사도님!"



또 한 명의 신도도,



"저도!!!"



또 한 명의 신도도,


박사는 계속해서 멀찌감치 쳐내며,


승천자 ‘부유 기구’의 빨간 복도를 더욱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때,



"라, 라프. 조금만 천천히 가주시면 안 되나요...? 저... 저 멀미 날 것 같아요."



새빨간 복도 사이로 아르의 목소리가 퍼져왔다.


박사는 발걸음을 멈추며, 아르의 목소리가 뻗어오는 기다란 복도로 시선을 돌렸다.



"박사, 찾... 찾았다. 라프"



어떻게 보면, 순백의 소녀.


또 어떻게 보면, 소복이 쌓인 눈으로 만들어진 백색의 짐승.


그것이 4개의 팔 중, 커다랗게 변한 한 개의 팔로 아르의 몸을 쥔 채,


복도의 레드 카펫을 밟으며 짐승처럼 달려와 박사의 하얀 가면 위로 올라갔다.



"여... 여기에 소년이 있... 있다. 라프..."

"죄송해요. 박사님... 제가 말렸지만 라프가 무리하게 오려 해서..."



라프는 박사의 어깨를 커다란 손톱으로 흔들면서 다급하게 말했고,


아르는 라프의 팔에 들린 채로 몸이 축- 처져 기운 없이 말했다.



"흠..."



박사는 라프에게 들려있던 몸이 축- 쳐진 아르를 두 손으로 받아, 사뿐히 바닥에 내려두었다.



"이왕 이렇게 온 거 어쩔 수 없겠군. 함께 소년을 만나보도록 하지."



박사는, 말하는 중에도 달려드는 신도를 꼬리로 쳐내면서,


아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르는 박사의 느긋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주눅 든 인상을 곱게 피워 내며, 머쓱한 듯이 작게 미소지었다.



"나... 나도. 쓰담쓰담 라프..."



라프는 그런 박사의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박사의 하얀 가면을 커다란 손톱으로 툭툭 치며, 부러워했다.



----------



윙---


미카엘은 잔잔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새장보다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거 처음에 내가 탔던 층수를 지나쳐 갔는데?"



미카엘은 팔짱을 슬그머니 풀며, 옆에 있던 신도를 곁눈질했다.



"지금 저희가 가는 층은 ‘비상 탈출선’이 있는 층으로, 원래는 저희 교주님께서 이용하고자 만든 층이지만 지금은 당신이 더 중요하기에 이렇게 데려가는 겁니다."

"...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내게 맡기는 거지? 너희라면 충분히 다방면으로 이 사실을 퍼뜨릴 수 있을 텐데?"



광신도들을 이용해 소문을 퍼뜨리는 것쯤은 아주 간단할 일일 것이다.


신도들을 고문해본 결과, 이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어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태연은 애초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이유가 분명할 거라고,


미카엘은 진작에 몇 가지의 추론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상태였지만,


일단 옆에 있던 신도를 떠봤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사도분이 이곳으로 온 이상 승천자들은 전부 제거될 겁니다."

"... 그러면 그런 운명이란 건 누가 정한 건데?"



신도를 한 명쯤 확보한다면, 앞으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


심지어 확보한 신도가 정태연을 보좌하는 신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기에,


미카엘은 일단 이 신도를 떠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운명이란 건, 제가 믿는 성서에 새겨져 있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가 믿는 이 성서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전 이 성서로 구원받았으니까, 어쩌면 이것을 ‘감사’라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신도는 주섬주섬 걸치고 있던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작은 책자를 꺼내 미카엘 앞으로 내보였다.



"그럼 그 감사 때문에 너는 사도에게 희생될 거라는 소리인가?"

"네! 어쩔 수 없죠."

"... 아니, 내가 생각하는 건 좀 다른데."



미카엘은 아직 앳된 소년의 목소리를 풍기는 이 신도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정태연 교주는 내게 이 세상에 진실을 전파하라고 부탁했거든~ 그런데 나는 딱히 그런 귀찮은 일을 하기 싫은 데 말이야."



차갑고 시린 인형처럼,


음흉하고도 매끄럽게 더듬는 그녀의 목소리가,


신도의 뒤집어쓴 후드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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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17. 운명 22.10.22 56 0 12쪽
61 4 - 16. 운명 22.10.15 54 0 13쪽
60 4 - 15. 사도 22.10.08 76 0 12쪽
59 4 - 14. 사도 22.10.01 58 0 12쪽
58 4 - 13. 지켜보는 자 22.09.24 49 0 13쪽
57 4 - 12. 지켜보는 자 22.09.17 55 0 12쪽
56 4 - 11. 두려워하지 말라. 22.09.10 50 0 13쪽
55 4 - 10. 두려워하지 말라 22.09.07 55 0 12쪽
54 4 - 9. 선택받은 인간 22.09.06 48 0 13쪽
53 4 - 8. 선택받은 인간 22.09.05 45 0 12쪽
52 4 - 7. 승천자 22.09.04 45 0 12쪽
51 4 - 6. 승천자 22.09.03 43 0 12쪽
50 4 - 5. 전설 22.09.02 42 0 13쪽
49 4 - 4. 전설 22.09.01 40 0 12쪽
48 4 - 3. 선지자 22.08.31 41 0 14쪽
47 4 - 2. 고아들의 새장 22.08.30 43 0 13쪽
46 제 4장. 고아들의 새장 22.08.29 44 0 12쪽
45 3 - 14. 맹세한 자 22.08.28 37 0 13쪽
44 3 - 13. 맹세한 자 22.08.27 40 0 12쪽
43 3 - 12. 맹세한 자 22.08.26 37 0 12쪽
42 3 - 11. 세력 22.08.25 35 0 12쪽
41 3 - 10. 세력 22.08.24 35 0 12쪽
40 3 - 9. 날개 잃은 제국 22.08.23 24 0 12쪽
39 3 - 8. 날개 잃은 제국 22.08.22 30 0 13쪽
38 3 - 7. 작은 날개 22.08.21 25 0 11쪽
37 3 - 6. 작은 날개 22.08.20 29 0 11쪽
36 3 - 5. 천사의 기술력 22.08.19 30 0 12쪽
35 3 - 4. 천사의 기술력 22.08.18 25 0 12쪽
34 3 - 3. 제국의 새장 22.08.17 24 0 13쪽
33 3 - 2. 제국의 새장 22.08.16 3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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