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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님의 서재입니다.

천사가 사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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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작품등록일 :
2021.07.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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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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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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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7. 작은 날개

DUMMY

"너희 세계에는 중개 사무소란 곳이 없나 보군. 아무래도 우리 세계와 다르게 자원이나 땅이 한정적이지 않으니 그런 거겠지."

"... 그... 그런가요?"

"당연한 이야기다. 내가 파악한 바로는, 너희 세상에선 대부분의 나라가 살아갈 집을 개인이 정할 수 있다고 하지?"

"네... 맞아요."

"우리 세상의 집과 토지는 개인이 가질 수 없다. 그건 어떤 새장에서든 마찬가지야. 새장은 너도 알다시피 땅이 한정되어있거든. 한 마디로, ‘관리’가 필수적이란 거지."

"그럼... 땅은 그렇다 쳐도, 집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증명’해야 한다. 필요 없는 인원을 굳이, 새장에서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지. 고로,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장에 증명해야 해."

"증명이요?"

"증명은 그 어떤 거로든 가능해. 글을 잘 적으면, 글을 써서. 저축한 돈이 많으면, 돈을 지급해서. 가진 기술이 있으면, 그 기술로 사회에 이바지해서. 여러 가지로 증명할 수 있지. 그러면 그 증명된 거로, 살 곳이 정해진다."

"그거 꽤 합당한 이야기처럼..."

"아니."



박사는 길을 걷다 말고, 서진수에게 하얀 가면을 드리웠다.



"방금 내가 말했던 증명이란 방법은 매우, 모호하고도 문제점이 많아. 대표적으로, 자원과 땅이 한정적인 새장에서는 특정 기술이 ‘적당’하게만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기술이라도 딱히 많이 필요로 하진 않지. 문제는 여기서 발생해. 특정 기술을 우대해 주자니, 그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인원이 쓸데없이 많이 늘어나고. 그렇다고 우대해 주지 않으면 특정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인원이 없어지겠지. 그래서 새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특정 기술을 딱 몇 명까지 배울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지만, 이런 규제는 곧 특정 기술을 가진 사람의 ‘권력’으로써 작용하게 돼. 결국, 특정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 기술을 불필요할 정도로 어렵게 발전시키거나, 더 나아가 세속화하여 남이 배울 수 없게 만들고 있지. 그야말로, 새장 속에 자신들을 가두고 있다는 거야."



길고도 장황하게 논변을 늘여 놓는 박사.


서진수는 박사의 하얀 가면을 반쯤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가 왜 박사라고 불리는지 알 거 같다고, 앞으로 질문을 가려가면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보다, 벌써 ‘중개 사무소’에 도착했군."



서진수는 박사의 말을 나름대로 경청하느라 흐릿해진 시야를 바로잡고 주변을 훑었다.



"여기가... 중개 사무소?"



높다란 지붕을 받친 채 다양한 문양이 조각되어있는 거대한 기둥들.


그것들이 서진수 양옆에 진열되어 중개 사무소의 출입문을 안내하고 있으니,


서진수는 유럽풍의 박물관 같기도 한 ‘중개 사무로’의 앞마당을 두리번거리면서 박사를 뒤따랐다.



----------



"마지막으로 ‘천사의 기술력’이 가미된 물건은 바로 이 ‘갈가노의 검’입니다. 원래는 세난 왕국에서 보관 중이다가, 천사 사태가 터진 직후 급하게 우리 ‘제국의 새장’으로 옮겨진 검이죠."



태웅이 안드레이에게 안내한 작은 빛.


그 빛은 우뚝이 솟아난 험준하고도 가파른 바윗덩어리 위에서 빛나고 있으니.


빛은 곧, 바위 위에 꽂힌 하나의 양손 검으로 자태를 변모했다.



"이 ‘갈가노의 검’은 현재까지 밝혀진 천사의 기술력 중에서 가장 안정화 되어있는 거로 유명하죠. 만약, 평범한 ‘천사의 기술력’을 ‘갈가노의 검’ 만큼 안정화할 수 있다면, 우리 ‘제국의 새장’의 기술을, 향후 1000년은 앞당길 수 있어요."



1000년... 그래. 태웅의 말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갈가노의 검.


역사책이나 전문 서적에 등장하는 그 검이 지닌 의미는, 안드레이에게 크나큰 삶의 목적을 지니게 해주었다.


그 검은, 태웅도 말했다시피 ‘천사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가장 ‘안정화’된 것으로,


만약 이런 ‘안정화’의 원인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제국의 새장’의 기술을 1000년... 어쩌면 더, 앞당길 수 있었다.



"... 다만... 아바마마께선 그리 좋아하는 검은 아니지."



이 ‘갈가노의 검’을 주력으로 연구한다면,


‘천사의 기술력’으로 이뤄지는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도 끝낼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왕족들은 공통으로 이런 ‘갈가노의 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혹시나 평범한 사람이 ‘천사의 기술력’을 습득해 권력을 쟁취하진 않을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이건 우리 제국의 새장뿐만 아닌, 여러 권위 있는 새장에서도 우려하던 사항으로


모든 권력자는 ‘갈가노의 검’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연구가 최소한으로 이루어지며,


그저 의미상으로만 지니고 있던 검이었다.



"그런 점은 조금 아쉬울 따름이죠. 이 검이 지닌 가치는 그야말로 ‘모든 새장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굉장한데. 연구를 못 한다니..."



태웅은 그저 순수하게, 아쉬운 듯이 웃었다.



"그래도... 이런 검을 실제로 보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야."



‘새장의 그림자’마저 단칼에 가를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선 채 바위에 박혀 있는 ‘갈가노의 검’.


이 검만 있다면, 새장이 지녀야 할 모든 고통과 슬픔을 해방할 수 있을 텐데...


안드레이는 약 1년 전 ‘새장의 그림자’ 중 한 곳인, ‘고아들의 새장’에 갔을 때가 기억났다.


이유는 시설 증축을 위한, 간단한 인사 감사.


아바마마가 차기 황제로서 미리 경험을 쌓아 두라고,


원래는 고등학생 정도의 나잇대에 가는 것을, 천재라는 이유로 벌써 체험하게 한 것.


물론, 어마마마의 반대로 고아들의 새장 그 입구만을 구경했지만...


실상은 입구만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고아들의 새장’에선 아이들을 남/녀로 성별을 나누어 ‘넓은 구역’에 그냥 내버려 둔다.


식사나 식수 배급은 하루에 한 번.


집은 판자를 던져주면, 알아서 지어야 한다.


유일하게 ‘넓은 구역’에 있는 시설은, 새장에서 직접 관리하는 몇 개의 화장실뿐.


이것도 위생상의 문제로 전염병을 돌까 봐 지어둔 거로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안드레이는 책에서나 보았던 ‘새장의 그림자’를 실제로 마주하니, 아무리 정신은 성인이었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설마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대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안드레이 황자님. 이 검, 뽑아보시겠어요? 지금까지 이곳에 온 형제분들과 폐하께서도 도전했지만, 실패하셨습니다. 과연 안드레이 황자님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태웅은 반쯤 농담 섞인 어조로 말하는 듯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사뭇 들뜬 채, 갈가노의 검이 꽂힌 거대 바위 위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바위 채로 옮기느라 참 고생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옮겨 놓으니 뿌듯하더군요."



태웅은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검을 잡아당겼다.



"... 후... 천사의 기술력이란 건 참 연구하면 할수록 참 신기하다는 말이죠.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런 검이 바위에 박혀 있는 건지, 또 바위에 박혀 꿈쩍도 하지 않는 건지 알면 알수록 기본적인 상식과 동떨어져 있어요."



태웅은 검이 뽑히지 않자, 바위를 발로 툭툭 치며 엄한데 화풀이했다.


안드레이는 그런 태웅 곁으로 다가가, 검 앞에 섰다.


칼날에도, 손잡이에도, 무늬 하나 없는 단조로운 양손 검이었지만,


안드레이의 앳된 얼굴과 연갈색 머리칼이, 거울처럼 다듬어져 있는 검의 칼날에 부딪혀 한 평의 그림으로 승화되었다.



'할로와 비슷한 느낌이야.'



안드레이는 검을 살며시 두 손으로 잡았다.


‘할로’가 눈가를 푹신하게 감싸는 솜털 같았다면,


검의 손잡이는 마치 여인의 손처럼,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크... 역시 얼굴이 잘생겨야 검을 잡았을 때도 각이 사는군요. 저희 직원들은 그 검을 잡았을 때, 죄다 검이 아니라... 크흠... 쇳덩어리를 잡는 것 같았는데..."



태웅은 안드레이가 양손 검을 잡은 모습을 보며,


아부라기보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걸 당기면...'



덜컥.


검이 흔들렸다.



----------



새장 속, ‘희망 고등학교’의 인근 도로.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져 있는 건물과 지붕이 내려앉은 자동차들.


그곳 주위로는 가시지 않는 피비린내만이 얼룩져 있어,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여흥처럼 맴돌고 있었다.



"... 멀쩡한 곳이 없네요..."



최지환은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생존한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상태가 양호한 아파트를 찾았지만,


역시 아파트 대부분은 겉보기로도 피투성이에다, 유리창은 죄다 박살 나 있어, 상태가 엉망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뒷정리하기 편한 아파트를 찾아야겠는데요..."



최지환은 앞서 걷던 로젤리나를 향해 말했다.



"... 아니면... 이 새장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어."



로젤리나는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건... 남은 학생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새장을 떠나 어디론가 간다...


최지환은 친구로 핑계 삼긴 했지만,


솔직히 본인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 새장에 있으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기에,


아직 전기도, 물도, 가스도 들어오기에,


‘희망’을 버리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 나도 언제까지 너희를 돌볼 수는 없고, 울란드씨의 말에 따르면 박사님도 이른 시일 내에 학생들의 치료를 끝내고 검은 가면을 쫓는다고 했으니, 슬슬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정리라뇨... 로젤리나씨가 도와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저희도 고등학생이니 저희 몸은 저희가..."

"아니, 너흰 내가 봤을 때, 아직 뭘 모르는 어린 애야..."



로젤리나의 눈빛이 굳어지며, 최지환을 향했다.


편견 없이 언제나 부드러울 것만 같던 그녀의 눈빛이,


꿋꿋하게 의지를 굳히니, 최지환은 조금 당황했다.



"미안...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데, 표현이 좀 그랬네..."



최지환을 바라보던 로젤리나의 시선이 핏빛으로 물든 이 적막한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이 세상에는 천사 말고도 위험한 요소가 많아... 부유선을 타고 다니며 새장을 약탈하는 해적이나 밴딧들도 있고... 꼭 그들이 아니라도, 모험가 도중에 이름 없고 약한 새장의 시민들을 납치하는 쓰레기들도 있으니까."



거리를 둘러보던 로젤리나의 시선은 어느덧 새장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회가 구축된 새장은 그야말로 아늑한 보금자리지만, 새장을 나가는 순간 무법천지가 돼버리지. 뭐...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안되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많기에, 더 배우기 전까지는 새장 안에서 날개를 길러야 해."



로젤리나는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최지환은 아기새처럼 로젤리나의 뒤를 졸졸 따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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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4 - 8. 선택받은 인간 22.09.05 45 0 12쪽
52 4 - 7. 승천자 22.09.04 45 0 12쪽
51 4 - 6. 승천자 22.09.03 43 0 12쪽
50 4 - 5. 전설 22.09.02 42 0 13쪽
49 4 - 4. 전설 22.09.01 40 0 12쪽
48 4 - 3. 선지자 22.08.31 41 0 14쪽
47 4 - 2. 고아들의 새장 22.08.30 43 0 13쪽
46 제 4장. 고아들의 새장 22.08.29 4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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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3 - 13. 맹세한 자 22.08.27 40 0 12쪽
43 3 - 12. 맹세한 자 22.08.26 36 0 12쪽
42 3 - 11. 세력 22.08.25 35 0 12쪽
41 3 - 10. 세력 22.08.24 3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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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 - 8. 날개 잃은 제국 22.08.22 3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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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 - 4. 천사의 기술력 22.08.18 2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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