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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님의 서재입니다.

천사가 사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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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딕
작품등록일 :
2021.07.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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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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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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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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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 - 17. 일상

DUMMY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만... 그간, 무탈하게 잘 있었던 것 같군."



용사.


태초의 새장을 처음으로 분열시킨 주인공.


이 녀석만 없었다면, 새장은 지금까지도 평화로웠을 것이다.


이 녀석만 없었다면, 나는 공주님과 행복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동화 속에 주인공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그런 인생을 보내다가,


늙어서 그녀와 함께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이런 감정들을, 느낀 적 있었다.



"아... 선택받은 녀석.., 눈 그만 깔지? 이 씨X놈이..."

"너를 보면, 내 ‘후회’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아."

"꼴값은 그만 떨고. 어떡할래? 함 뜰까? 새끼야."



용사, 그는 천사의 기술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천사의 기술력이라고 오해할만한,


‘먹어 치우는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육체...


모든 걸 자비로이 껴안아들 수 있는, 순수한 천사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용사가 전이된 곳은 다름 아닌, 천사의 육체 속이었으니까.



"너도, 천사도, 이번엔 확실하게 조져주지. 흐흐..."



용사는 나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꾹 다문 입을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야말로,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표정.



그것은 피식자를 보며 으르렁대면서도,


곧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행복이 가득한 짐승의 표정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다니..."



되도록 평화롭게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는데, 이 짐승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르와 울란드가 없는 이 시점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게 나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결론지을 참이었다.



"그만! 내 영토에서 싸움은 금지야!"



한 여자아이의 고함이 내 판단을 방해했다.



"용사! 네가 옛날처럼 유명인이 되고 싶으면, 이런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이면 안 돼! 내가 계약할 때 말했잖아?"



용사는 그녀의 말에, 주위를 쓰윽-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미 시내 거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은 나와 용사를 둘러싼 채, 요란히 웅성대고 있었다.



"용사는 날 따라와. 나와 이야기나 나누자."



나는 내게 말을 거는, ‘얼굴 앞에 얇은 천’을 걸고 있던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어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체구인데다가, 목소리도 아직 앳됨을 버리지 못한 것을 보니,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소녀처럼 보였다.



"칫! 운 좋은 새끼..."



용사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내게서 떨어뜨리며, 소녀를 뒤따랐다.



"오늘은 이 몸이 기분 좋으니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확실히 찢어버릴 거다. 알아서 몸 사려라. 선택받은 새끼..."



거만한 짐승이 이름 모를 여자와 함께, 우글대는 종족들인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용사가 종족인들 사이로 사라지는,


언뜻 옛날에 본 듯한 이 풍경을,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그는 이날처럼 붐비는 종족인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나를 스쳐 가며,


‘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시, 용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내 자리라니...


녀석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짐승을 길들일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 도망치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냥 넘어갔군요."



울란드가 갈비탕 집에서 슬그머니 나와 내 옆에 섰다.



"그는 욕심으로 뭉쳐진 짐승이니까 나름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녀석은 옛날에도, 용사라는 말을 퍼뜨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으니..."

"그럼 위험한 거 아니요? 이젠 그 옛날과 다르게 수많은 새장으로 세계가 나누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 회백 새장은 고립되어 있잖수? 욕심이 많으면 이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텐데요?"

"그의 과도한 욕심은 위험한 게 맞지만. 오히려 그 점을 ‘태초의 새장’ 강림에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태초의 새장으로 모든 새장이 하나가 되면, 일일이 새장을 찾아다니는 수고도 덜 할 테니..."



울란드는 팔짱을 끼며, 가뜩이나 거대한 몸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다만, 그건 그렇다 치고, 만약 용사가 우리의 말을 승낙하면 텔레우스와의 약속은 어찌 되는 거요?"



나는 한껏 부풀어진 울란드의 몸 위로,


늑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워진 그의 인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구름 같던 천사를 올려다보았다.



"텔레우스에게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그걸 위해서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이 육체에 남아 있었던 감정이, 내 목소리에 담겨 ‘미안함’으로써 입 밖으로 나왔다.


내 원래의 영혼은 이미 수많은 것들에 빠져 그 형체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텐데.


아직도 감정은 새장 속에 남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래도 전 박사님의 그런 모습이 좋군요..."



울란드는 조금 놀란 듯이 내 어린 몸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슬그머니 풀며, 날카로운 손톱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인간은 천사처럼 꼭 날개를 가지란 법은 없으니깐요. 어쩌면... 새장이 답답한 것은, 그저 우리가 그렇게 느껴서가 아닐까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많은 ‘새장의 그림자’들이 생겼어. 사람들은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하면서, 고통을 무시하고 있지. 나는 공주님의 새장을 이런 식으로 잘못되게 방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새장으로써의 한계....


새장 속에 갇힌 작은 새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높다란 철장.


이것들에 둘러싸인, 무시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새장의 그림자들은,


언젠간 확실히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다.



"... 뭐 말이 그렇다는 거요..."



울란드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갈비탕 집에서 나오는, 아르와 유라를 바라봤다.



"이 맛집은 C동에서 제일가는 곳인데 먹지 않다니... 나로선 이해가 안 된다고..."



갈비탕 집에서 나온 유라는 명색이 가드너인데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나를 향해 몸을 굽히며, 옷에 배긴 갈비탕의 구수한 향기를 풍겼다.



"애들은 많이 먹어야 키도 쑥쑥 커!"

"내 몸은 어린애가 아닌데... 그건 그렇고, 얼굴을 천으로 가린 여자를 알아?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인 것 같던데?"

"얼굴을 천으로...? 아! 이번에 ‘라티 구역’을 맡은 영주가 그런 독특한 패션을 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설마, 그녀가 이 거리에 있었어?!"

"방금 이곳에 있다가 갔는데..."

"아쉽다! 나도 그 영주를 보고 싶었는데..."



‘라티 구역’의 새로운 영주가 용사를 맡은 건가?


이 회백 새장을 맡았던 ‘또 다른 나’의 ‘정보’에선,


그녀에 대한 정보는 있지 않았다.


나는 용사 때문이라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할 것 같다고,


나를 보며 방긋 미소 짓고 있던 아르를 바라봤다.



----------



"시민들이 많이 모인 곳에 함부로 얼굴을 비추시면 안 됩니다. 어서 타시죠. 영주님."



거구의 남자가 ‘얼굴을 천으로 가린 소녀’를 보며, 검고 기다란 차 문을 열었다.



"고마워~"



소녀는 거구의 남자가 열어준 차 문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뒤따라오던 용사를 향해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차 안을 가리켰다.



"용사님부터 타."

"..."



용사는 소녀의 얼굴을 가린 얇은 천을 잠시 바라보다가,


옆에서 차 문을 열어준 거구의 남자를 한 번 쓰윽- 쳐다보고는,



"후... 재미없네."



라는 말을 남기며,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 팔짱을 끼면서,


그녀가 가리킨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용사가 차 안으로 들어가고서야,


거구의 남자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서, 작은 몸을 차 안에 실었다.


윙---


가뿐한 음색만을 남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부유 자동차’.


얼굴을 천으로 가린 작은 몸집에 그녀는,


어디서 꺼냈는 지 모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텔레우스가 말한 박사가 저 아이인 거지?”



탁다다다다. 그녀는 손끝에서 휴대폰 터치음이 빠르게 울리며, 말했다.


용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신기한 듯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 내가 앞으로 조질 녀석이지."



금방 질렸는지 자동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궁금한 게 많네? 넌 그냥 나를 유명하게 해주면..."

"요즘 사람들은 스토리를 중요시한다고. 네 가치를 올리려고 하면, ‘적당한 역사’를 만들어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하는데?"

"... 씨... 귀찮게..."



용사는 그녀의 얼굴 위 얇은 천을 향해 고개 돌리며, 목소리에 짜증을 실었다.



"녀석은... 그래, 아무런 재능도 능력도 없는 녀석이었는데 공주에게 잘 보였다고 출세한 녀석이지. 불공평하다고! 그딴 새끼는..."

"흐음~"

"원래 내 것이 되어야 할 것을 가져간 새끼... 그런... 새끼야."



용사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추억에 잠긴 사람처럼 점차 가라앉으면서, 자동차 창밖을 향했다.



"그 녀석을 만나면 지난번과 다르게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다짐했는데... 씨X... 왜 내가 망설였는지..."

"... 넌 내 말만 들으면 ‘선택받은 자’보다도 훨씬 대단해질 수 있어. 그러면 이 세상에 넌 ‘위대한 자’로 기록되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아?"

"위대한 자...?"

"그래! 나는 아직 ‘선택받은 자’가 네게서 무엇을 뺏어갔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일단 너도 유명해지고 싶잖아? 그러면 그 뺏어간 것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녀의 말을 들은 용사의 눈앞으로, 하늘에 떠 있던 천사 한 마리가 지나갔다.



"... 흐흐흐... 그래... 그것도 좋겠어. 흐흐..."



용사는 천사를 향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너! 이름이 뭐냐?"



용사는 옆에 있던 작은 몸집에 소녀를 향해 고개를 획-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스텔로웬. 로웬이라고 부르면 돼."

"로웬... 좋아. 당분간 네년을 이 몸께서 지켜주겠다. 넌 그 대가로 날 유명하게 해주면 돼!"



그녀 얼굴을 막아선 얇은 천으로,


용사의 순수하고도 난폭한 웃음이 부딪혀, 고독을 만들어 냈다.



----------



어느덧 해질녘이 되어 버린 새장 속, 붉게 물든 평화로움 밑에서,


유라, 아르, 울란드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고,


나는 그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늑한 광경이었다.


이 풍경에 다른 이들도 섞여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만한 그런 풍경이었다.



"... 박사는 나를 사용하면 모든 것이 편안하게 돌아갈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거지?"



하지만, 그런 풍경 속으로 길게- ‘흉터’가 그어져,


내가 왜 이런 평화로움을 바라지 못하는지,


이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지, 깨닫게 했다.



"꽤 빨리 왔네?"

"... 박사님이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건 오랜만이니까 빨리 찾아와야겠지?"



흉터의 그을린 말투가 내 죄악을 건드렸는지 몸속이 따끔거렸다.



"자... 그러면, 서론은 생략하고.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박사님의 의견을 들을게."



나지막하면서도, 달콤한 흉터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그야말로 폭력적인 유혹.


흉터만 사용한다면, 모든 일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녁노을 속, 그늘진 울란드와 아르를 바라봤다.



"일단 대기 해줘.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폭력은 최후의 수단.


흉터는 나의 지나친 대응이었기에,


나는 유혹을 뿌리쳤다.



"알겠어. 그러면, 내가 필요하면 불러. 언제든지 찾아올 테니까."



흉터는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펼쳐 들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되,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박사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괴로워하는 자’이니."



흉터가 중얼거리며 내게서 길게 이어져,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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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6 - 3. 쟁탈전 23.06.05 22 0 12쪽
85 6 - 2. 심해족 23.05.20 25 0 12쪽
84 6 - 1. 심해족 23.05.06 26 0 12쪽
83 5 - 19. 나무 23.04.22 35 0 13쪽
82 5 - 18. 일상 23.04.08 28 0 12쪽
» 5 - 17. 일상 23.03.26 32 0 12쪽
80 5 - 16. 일상 23.03.18 33 0 12쪽
79 5 - 15. 일상 23.03.04 35 0 13쪽
78 5 - 14. 서막 23.02.26 34 0 12쪽
77 5 - 13. 서막 23.02.18 36 0 12쪽
76 5 - 12. 날개 달린 것들 23.02.11 41 0 13쪽
75 5 - 11. 날개 달린 것들 23.02.04 39 0 13쪽
74 5 - 10. 날개 달린 것들 23.01.28 45 0 14쪽
73 5 - 9. 들판 23.01.21 41 0 13쪽
72 5 - 8. 들판 23.01.14 45 0 12쪽
71 5 - 7. 천사와 악마 23.01.07 55 0 12쪽
70 5 - 6. 천사와 악마 22.12.31 57 0 13쪽
69 5 - 5. 낙원 22.12.17 58 0 12쪽
68 5 - 4. 낙원 22.12.10 54 0 12쪽
67 5 - 3. 낙원 22.12.03 58 0 13쪽
66 5 - 2. 주인공 22.11.26 55 0 12쪽
65 5 - 1. 주인공 22.11.19 62 0 12쪽
64 4 - 19. 주인공 22.11.12 57 0 12쪽
63 4 - 18. 운명 22.10.29 5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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