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58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58
“틀림이 없군. 그럼 잘 가시게나... 시간 되면 놀러 오시고.”
무진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일어선다.
“괜찮으십니까?”
태민이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는다.
“이 정도면 내 연기 실력도 쓸 만하지?”
무진은 멀쩡하다.
“피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건 비밀이다. 너도 내 나이가 돼 봐라. 그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그보다 빨리 들어가자.”
“혀..형님!”
“이걸 어떻게 제가...”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호란까지도.
“무 대협! 그건 무리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천년영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물도 완전히 소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진운자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다. 그가 이렇게 펄쩍 뛰는 이유는 무진이 방금 받은 대환단과 제갈보주를 제자들에게 줬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준 게 아니라 당장 복용하라는 것이다.
“이건 네 몫이야.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무진은 제갈보주 세 알 중에 두 알은 태운에게 주고 나머지 한 알을 진운자에게 건넨다.
“사...사조님!”
진운자는 놀란 나머지 무진을 사조라고 부른다.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죄..죄송합니다.”
“잔말 말고 무당을 살리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당장!”
이 말에 진운자도 더 이상은 말을 못한다. 하지만 태민 사형제는 선뜻 영단을 먹지 못하고 있다.
“니들은 왜 그러고 있냐?”
“이게 지난번에 먹었던 것들과 융화하지 못하면....”
그의 머뭇거린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도 과하면 안 먹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것도 마찬가지다. 여러 개의 성질이 다른 영약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 자칫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전 아직도 이전 것들을 다 소화시키지도 못했습니다.”
태운의 걱정도 마찬가지다.
“멍청한 놈들. 융화가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날 못 믿니?”
“형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몸에 들어 있는 게 보통 물건이 아니잖습니까? 일반 무인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 한 번 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것도 세 개씩이나.”
“그래서 배가 부르냐? 확 뺏어버릴까 보다.”
무진은 손을 내밀어 뺏는 시늉을 한다.
“치사하게 줬다가 뺏는 게 어딨소?”
“그러니까 당장 털어 넣어.”
“아..알았소. 하면 될 거 아뇨?”
그제야 두 사람은 대환단과 제갈보주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네 놈들이 예뻐서 주는 줄 아니?”
“그럼 뭐요?”
“배 터지게 먹여놓고 부려먹으려 거지, 뭐겠소?”
“당연하지. 안 그러면 그렇게 귀한 걸 네놈들에게 왜 먹이겠냐?”
태운의 말에 무진이 웃으며 동의한다.
“그럼 먹어야지.”
태민이 먼저 대환단을 먹는다.
“으잉? 먹은 것 같질 않네. 입에 넣자마자 사라져 버렸습니다.”
“호호호! 그러니까 영약이지.”
“누님껜 죄송해요. 지금 영약이 필요한 건 누님인데...”
“누님, 이걸 드세요.”
태민의 걱정에 태운이 제갈보주를 호란에게 건넨다.
“호호호! 정말 내가 동생들은 잘 뒀어요. 세상에 이렇게 착한 동생들이 어딨겠어요? 하지만 난 괜찮다. 상처도 이미 다 나았고, 몸속의 기운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넘친단다. 아마 니들이 몸속의 기운을 모두 다 흡수해도 내공은 나보단 약할 걸?”
“예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모두 정랑 덕분이지. 그 동안 치료하면서 혈도를 자극한 것이 모두 기운이 되어 전신에 퍼져 있다. 불과 일할도 소화하지 못했는데 이전보다 다섯 배는 더 강해졌단다.”
“아, 그래서 누님이 요즘 계속 운기조식을 하시는 거구나.”
“그래. 우리 내기할까? 영약과 몸속에 흩어진 기운을 제일 빨리 흡수하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좋아요.”
“전 자신 있어요.”
호란의 말에 태운도 제갈보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건방 떨지 말고 운기나 해. 내가 가르쳐준 대로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앞서 먹은 것들과 뒤엉키니까.”
무진의 말대로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운기조식을 시작한다. 호란은 그 옆에 누워 기운을 움직인다. 그걸 지켜보는 진운자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대체 넌 나이가 몇 갠데 허구한 날 눈물을 짜냐? 너 어릴 적 친구들한테 울보란 소리 들었지? 그치!”
“으하하하하! 울보면 어떻습니까? 제 제자들이 천하제일의 내공을 얻게 됐는데. 이게 모두 사조님의 은공입니다. 제자 진운자가 무당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진운자는 일어나서 무진에게 큰 절을 올린다.
“어떡하겠냐? 내가 무당에게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인 것을. 허허허허!”
< ...... 물론 신체 각 부문에 흩어진 기운은 단전에 모을 수 있는 것보다 수십, 수백 배 더 크고 많을 수 있다. 만약에 신체 각 부문 혈도의 크기를 단전처럼 키울 수만 있다면 그 양을 무한대로 키울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몸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몸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대자연의 공간보다 클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가능한 몸에 쌓인 내력은 비우고 대자연의 기운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물론 몸에 기운을 채우는 과정 없이 버릴 순 없다.
다시 말하면 채워야만 비울 수 있고, 그 비워진 그릇이 크면 클수록 대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양도 커진다. ...... 그릇이란 것은 비우고 나서도 키울 수 있다. 대자연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만 있다면 우주 만물 전체가 자신의 것이 된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 도(道)인 것이다. >
‘후후후! 말은 그럴싸하네.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논리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설득력도 있고. 문제는 이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건데.... 으음!’
무진은 오늘 밤도 무당의 비밀서고를 찾았다. 사실 그는 이백여 년 동안 자신의 신체를 분석하고 치료 방법을 연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선 내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얘기지만 오백 년 전 소림의 무애스님은 단전이 파괴되고도 당대 천하제일인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당시 정마대전에서 천마교주와 삼일 밤낮을 싸워서 이겼다. 무공은 천마교주가 한 수 위였으나 내력이 앞서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달마선사는 말년에 스스로 단전을 파괴하고도 솔잎 하나에 몸을 싣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당시 달마선사가 펼친 것이 바로 자연무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진이 무당의 비밀서고에서 발견된 책은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150년은 된 것 같다. 내 몸에 기운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 그땐 뭔지를 몰랐다. 그냥 수련을 하면 조금씩 몸속으로 이상한 기운들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움직이기만 해도 기운이 모여든다.
지금 내 몸속에 흩어져 있는 기운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작은 산 하나 정도는 너끈히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이걸 사용하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나 혼자 작은 산 전체를 벌거숭이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기만 하고 기운은 전혀 빠져나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너무 조급해서 그런가? 달마선사 이외에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인데 쉽게 될 리가 없질 않은가? 그래도 150년이라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지금쯤은 뭔가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고를 걸어 다니며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수십 바퀴를 돌다가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춘다.
‘빛이다. 여긴 밀폐된 곳이고, 저긴 그냥 벽일 뿐이다. 근데 불빛이 새어 나온다는 건 빈 공간이 있다는 건데....’
무진은 빛이 흘러나오는 벽면을 만지며 설치된 장치가 있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다.
‘완전히 별개의 공간인가? 건너편에 다른 공간이 있는 걸 모르고 서고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다. 부술 필요까지는 없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진은 벽을 부수려다 그냥 둔다. 더 이상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비밀서고를 나온 무진은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오늘도 자신의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지 못해 집으로 돌아오는 무진의 발걸음이 무겁다.
“세상사가 저처럼 평온하면 좋을 텐데. 무슨 욕심들이 그리도 많은지. 후후후, 내가 그런 말을 하니 쑥스럽네. 젊었을 땐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는 멀리 보이는 균현을 보며 옛일들을 생각한다. 새벽녘이라 마을은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다.
쒜에에엑! 피용!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솔잎이 날아가서 가지에 걸려 있는 메마른 잎사귀를 뚫고 사라진다. 그는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항상 이렇게 수련을 한다. 돌멩이나 큰 물체는 눈에 띌 수가 있기 때문에 주로 솔잎을 사용한다. 근데 오늘은 뭔가 좀 이상하다.
‘어라? 왜 이러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솔잎을 던진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어제 저녁만 해도 안 그랬는데... 뭐가 달라졌지?’
그렇게 집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형태의 수련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제 그릇이 다 찼나? 그래서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건가? 후후후, 이런 걸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거겠지? 떡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말이야.’
무진은 바위 위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며칠 지켜보자. 아니면 너무 간절하다 보니 몸이 마음을 따라서 움직인 건가?’
무진은 부정적으로 보려고 애쓴다.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면 아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으잉? 저건 또 뭐야?’
바위에서 일어나 몇 걸음도 옮기지 않았다. 수많은 돌계단 아래 아담한 통나무집이 보인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단순히 집 때문만은 아니다.
‘후후후, 균현에서 회합을 한다더니 고작 저런 짓을 꾸민 거야?’
집 주위에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무진은 그들의 움직임만 보고도 정체를 알아낸다.
‘팽가와 제갈세가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들 얘기를 믿지 않는 놈들만 온 모양이군. 어리석은 놈들, 고생 좀 해봐라.’
무진은 이번에는 주변의 큰 나뭇가지에 올라가 한 동안 지켜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쯧쯧, 중원의 명문대파란 놈들이 고작 일각도 못 버티다니...’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곧장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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