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43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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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43
“란! 잠시 누워 있어야겠소.”
“왜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놈들이 오고 있소.”
“놈들이라면.... 알았어요.”
그녀는 무진이 하는 말을 알아듣곤 다시 몸을 눕힌다. 그렇다고 그가 혈도를 짚진 않았다. 이젠 그럴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무진은 호란의 상태를 확인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야아아! 멋지다. 오늘 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네.”
그는 멀리서 달려오는 일단의 사람들을 보며 히죽 웃는다. 잠시 후, 다섯 명의 무당 제자들이 들이닥친다.
“당신이 무진이란 사람이오?”
“후후, 그런데?”
“우린 장문인의 명을 받은 정심원의 무사들이오.”
정심원은 장문인의 직속기관으로 무당제일의 권력기관이다.
“정심원의 무사분들이 이런 외진 곳엔 어쩐 일이신가?”
“장문인께서 명하셨소. 지금 즉시 무진과 그 일행인 호란은 장로회의에 참석하시오.”
“지금 즉시? 지난 한 달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서두르긴? 근데 어쩌나 우리 고명하신 아가씨께선 아직 기침을 안 하셨는데. 아무래도 좀 기다려야겠소.”
“당장 깨우시오!”
“감히 장문인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뜻인가?”
정심원의 무사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무진을 윽박지른다.
“글쎄,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니들이 깨우든가?”
“뭐라고? 새파랗게 어린놈이 감히 누구더러 깨우라 마라 씨불이는 거야?”
“깨우기 싫으면 기다려. 쟤는 한 번 잠들면 찬물을 부어도 안 깨어나거든.”
배 째라는 말이다.
“사형! 어떻게 할까요? 그냥 끌고 갈까요?”
“야, 너 못 들었어? 저놈이 덩치는 작아도 흑도 고수들이 저놈한테 맞고 다 나자빠졌대.”
“으음! 그럼 홍이 니가 부드럽게 잘 구슬려 봐라.”
“내가요?”
“그래. 목소리도 그렇고, 얼굴도 니가 제일 부드럽잖아?”
“흥! 이럴 땐 꼭 날 시키더라.”
“알았다. 그럼 다음 번 술심부름은 빼 줄게.”
“고작 한 번?”
“좋다. 두 번이다. 두 번!”
“후후후, 절대 잊지 마시오.”
정심원의 무사들은 귓속말로 얘기하더니 그 중에서 가장 착하게 생긴 제자가 앞으로 나선다.
“무 대협! 전 태운이 친구 태홍이라고 합니다. 무 대협이 이러시면 저희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만약 일각 안에 대청에 도착하지 않으면 장문인의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부디 선처해 주십시오.”
“후후후!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근데 말이야. 늙은이들이 날 왜 보자는 거냐? 지금껏 무시하더니.”
“그건 저희들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영웅청에서 삼 사숙과 막내 사숙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는 걸 보면 호란 낭자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홍은 말투도 공손하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래? 그럼 가봐야지. 란이는 내가 데리고 나갈 테니 앞장서라.”
“예, 무 대협.”
무진이 안으로 들어가자 태홍은 동료들에게 앞장서라고 눈짓을 한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호란을 등에 업은 무진은 대회의실인 영웅청으로 안내된다.
“장문인! 무 대협과 호란 낭자가 도착했습니다.”
“들라 해라!”
안에서 제법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커다란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무진을 안으로 인도한다.
“젊은이가 바로 무진이란 청년인가?”
장문인은 처음부터 다소 무시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그러니 무진의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그렇소만.”
일순 장내의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넌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이번에는 장로 중 가장 연장자인 진신자가 나선다. 그는 좀처럼 장로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 인물이다. 최근 장로회의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참석한 것이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저런 못된 놈을 봤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따위 망발을 하느냐?”
이번에는 오 장로 진형자이다. 그는 며칠 전에 중상을 입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해 보인다.
“후후후! 무당이 과거의 대무당이 아니란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망가졌을 줄은 몰랐네. 니들은 원래 손님을 불러놓고 이 따위 망발을 하니? 그게 너희들이 하늘처럼 모시는 원시천존의 가르침이더냐?
난 너희의 부탁을 받고 무려 삼 개월 동안 수십 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헌데 감사의 인사는 못할망정 뭐라고? 이런 확! 그냥 성질 같아서는 뒤집어 업고 싶지만 그래도 한 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늙은이 때문에 참는다.
니들의 태도를 보니 우리가 별로 필요 없는 것 같으니까 조용히 사라져주마. 그리고 약속된 돈도 안 받겠다. 니들 같은 몰상식한 인간들에게 그런 돈을 받았다간 체하거나 열 받아서 죽을 것 같다. 이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아냐? 더러워서 안 받는다고 하는 거다. 호랑말코 같은 도사놈들아! 퇫!”
무진은 대청 바닥에 침을 뱉고는 몸을 돌린다. 그때 진운자가 나선다.
“무...무 대협!”
그는 달려 나와 무진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영감탱이! 내가 뭐라고 했어. 이럴 줄 알고 안 온다고 했지?”
“죄송합니다. 제가 무당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진운자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진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인다.
“진운자,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무당을 대신해서 사과를 한단 말이냐?”
“오 사형! 그럼 수개월 동안 무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아니지. 나를 비롯한 무당의 일대제자들의 목숨을 지켜온 분에게 이렇게 대접하는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우리가 무당에서 배운 인간의 도리입니까? 그도 아니면 저를 비롯한 장문인의 명으로 강호로 나갔던 제자들이 죽었어야 했나요?”
진운자가 장로들을 노려보며 소리치자 아무도 말을 못한다.
“전 약전을 맡고 있는 진용자라고 하오이다.”
분위기를 바꾼 건 약전의 전주인 진용자이다. 그는 열다섯이나 되는 장로들 중에서 진운자의 바로 위인 십사장로이다. 이미 태정이를 치료할 때 무진과 만난 적이 있다. 비교적 온화한 성품으로 진운자와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다.
“무진이라 하오.”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자 무진도 그에 걸맞게 인사한다.
“오늘 우리가 무 대협을 뵙고자 한 것은 호란 낭자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해서 제가 진맥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야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가 무당에 온지가 한 달이 지났소. 근데 그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건....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호란 낭자의 아비는 원래 무당의 제자였소. 그런데 무림맹의 요구에 의해서 적마교의 간자로 들어갔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소.”
“그건 나도 들었소이다. 근데 그거와 진맥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소이까?”
“무량수불! 무 대협, 이건 무당의 비밀입니다만, 그 아이의 아비인 호명이 우리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에 의하면 적마교의 중요한 정보를 저 아이를 통해서 보냈다고 했소.”
“그러니까 란이에게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상태를 확인하겠다는 거요?”
“그렇소이다. 보기에 따라선 무당이 욕심을 낸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그 점은 나도 이해하오. 하지만 이 여인의 상태로 봐선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소이다. 그리고....”
무진은 말을 하다 말고는 영웅청에 모여 있는 장로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핀다.
“만약 이 여인의 상태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무림맹이 가만히 있겠소이까?”
“무림맹이 왜요?”
“방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여인의 부친은 무림맹의 요구에 의해서 적마교로 보내졌다고. 그럼 당연히 무림맹도 이 여인을 만나려고 하지 않겠소?”
무림맹이란 말이 나오자 장내는 일순 술렁거린다. 그들로선 예상치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무림맹에 파견을 다녀온 사람도 무림맹의 소유가 된단 말이오?”
“문제는 그게 아니고 무림맹에서 그런 주장을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거죠.”
장로들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약전의 전주 진용자가 다시 나선다.
“무 대협, 그 문제는 장로회의에서 따로 논의할 겁니다. 반대하지 않는다면 지금 호란 낭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소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럼 호란 낭자를 여기에 잠시만 눕혀주시오. 자, 자. 조심해서.... 감사합니다.”
진용자의 도움을 받아 무진은 호란을 한쪽에 마련한 자리에 눕힌다. 그리고 그는 잠시 한 발 물러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진용자는 무진에게 목례를 하더니 호란의 옆에 앉아서 진맥을 시작한다.
잠시 후.
‘허억!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지? 오는 내내 치료를 했다더니 그 때문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라고 해도 절대 이 상태로 일주일 이상 버틸 수 없다.’
진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걸 보던 장문인이 다그치듯 묻는다.
“전주, 그 아이의 상태가 어떤가?”
“장문인, 전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게.”
“사실 의약적으로 이 아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뭐..뭐라고?”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단 말인가?”
“그래도 가끔은 깨어난다고 하던데...”
“그래서 불가사의하단 말씀입니다. 지금껏 생명을 유지한 건 아마 이 아이의 의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그 아이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얘기를 들을 수 없단 말인가?”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으음!”
“에이! 좋다가 말았군.”
장문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로들이 실망한 눈치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이 있다.
“무 대협, 난 진무자라고 하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진무자는 십장로로 무당 제일의 두뇌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예, 말씀하세요.”
“혹시 저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소?”
“난 의원이 아니외다.”
순간 약전의 전주인 진용자의 눈이 반짝인다. 그는 다시 무진을 유심히 살핀다.
‘으음! 의원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의술이 나보다 뛰어난 인물이다. 정이가 중독된 독을 한 번 보고 알아맞혔다. 평생을 의술에 바친 난 짐작조차 못했는데.... 특이한 아이다.’
“그럼 혹시 저 아이에게서 적마교와 관련된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소?”
“들으셨겠지만 이 여인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에 취해 있고, 나머지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정신이 없소이다. 그런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소이까? 가만!”
무진은 말을 끝마치려다 진무자를 노려본다.
“그 말씀은 이 여인이 적마교에서 가져온 핵심 정보를 나보고 내놓으란 말이오?”
“그건 아니오. 그냥 저 아이에게 들은 것이 없나 해서 물어봤을 뿐이오.”
“장로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내가 알고 있을 것 같습니까?”
“으음!”
이렇게 되자 진무자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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