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은 하나 둘씩 만들어지고 - 2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명분은 하나 둘씩 만들어지고 - 2
다음 날 아침.
객잔의 1층 주루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가장 먼저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들어선다. 모두 소림의 일대제자를 위시한 구파의 후계자들이다.
“저기가 좋겠어요.”
화산파 장문인 청수자의 여제자 호령이 일행을 창가 자리로 안내한다.
“일단 따뜻한 차와 간단히 요기할 걸 준비해라. 스님 건 따로 준비하고.”
일행 중 홍일점인 그녀가 모든 걸 알아서 한다.
“예.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점원은 직각으로 인사를 하곤 달려간다.
“조금 어수선하긴 해도 주루는 잘 선택한 것 같아요. 깔끔하고 점원도 친절한 것이 음식도 맛있을 것 같아요.”
“호령 낭자가 좋다니 다행이오. 식사를 한 다음 객실로 가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그렇게 합시다. 며칠 노숙을 했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피곤하구려.”
점창파의 대제자 풍진의 말에 소림 일대제자 법문이 동의한다.
“그나저나.... 대체 누구 손에 넘어갔을 까요?‘
호령이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벌써 다섯 번이오. 이러다 영영 놓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진아!”
풍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 앉은 곤륜파의 대제자 장풍이 경고한다. 두 사람은 연배도 같고, 어릴 적부터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어 친구처럼 지낸다.
“미..미안. 내가 좀 흥분했네.”
“괜찮아요. 사람들도 별로 없는 걸요 뭐.”
“하긴 우리가 그 물건을 가진 것도 아니니 지나치게 조심할 필요는 없지요. 소승의 생각으론 우리가 조금 성급한 면이 있는 것 같소.”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호령이 눈을 반짝이며 법문을 쳐다본다.
“이런 일에는 온갖 정보가 난무하기 마련이오. 그럼 당연히 옥석을 가려야 하는데 우린 그렇게 하질 못했소.”
“그래요. 잘못된 정보를 쫓다 보니 정작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갔을 땐 한 발 늦곤 했죠.”
얘기를 종합하면 이들은 지금 어떤 중요한 물건을 쫓고 있다. 지난밤에도 누군가를 추적하다 실패하고 여기를 들어온 것이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사대세가 쪽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사대세가?”
“그럼 곤란한데.”
장풍의 입에서 사대세가란 말이 나오자 모두 긴장한다. 현재 무림에선 구파일방과 사대세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다.
“장시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법문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한다.
“우리가 그 물건의 추적을 시작했을 때부터 사대세가가 있었소이다. 지난 두 달간 항상 그랬습니다. 헌데 최근 일주일 사이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적극적이던 자들이 말입니다.”
“으음!”
장풍의 설명에 모두 표정이 굳어진다.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이의가 없다면 이후 우리의 행보는 사대세가 인물들을 찾는 것으로 합시다.”
법문이 간단하게 입장 정리를 한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추적만 할 겁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점창 대제자인 풍진의 말에 호령이 되묻는다.
“우린 지금까지 그 물건이 영물의 내단이라는 것만 들었을 뿐 그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오. 나중에라도 거짓이란 게 드러나면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라는 우리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호호호! 난 또 무슨 얘기라고. 풍 소협은 체면이 중요한지 모르지만, 전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설사 창피를 당하더라도 강호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으음!”
호령의 말에 풍진이 얼굴을 붉힌다. 괜히 나섰다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물근성을 보인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린 것이다. 여기에 소림의 법문이 불을 지른다.
“그렇소. 우린 정파의 후기지수로서 강호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출도 했소. 실패면 어떻고, 성공하면 어떻소? 이번 사건에 참가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자산이 될 거요.”
‘으음! 이 연놈들이 짜고서 날 창피를 주시겠다고? 흥! 두고 보자. 언젠가는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풍진은 호령과 법문, 두 사람이 자신을 고의적으로 골탕 먹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반발은 못하고 속만 태운다. 이때 좋은 먹잇감이 나타난다.
막 점원이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어린 거지 한 명이 들어온다. 대충 십대 중 후반 정도로 행색은 남루하지만 걸음걸이나 생김새로 봐선 개방도가 분명하다.
풍진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지금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야수의 심정이다. 그것도 며칠 굶은 맹수의 눈빛을 한 하이에나다.
“야, 점원!”
“예, 손님!”
“여긴 아침부터 거지새끼를 들이냐? 밥맛 떨어지게.”
“그러게. 아휴! 냄새가 장난이 아니에요. 야, 점원. 난 주위가 지저분하면 밥을 못 먹는단 말이야. 당장 내보내. 어서!”
호령은 한 술을 더 떠서 아예 축객령을 내린다. 심지어 승려인 법문까지 합세한다.
“이보시오. 시주! 여긴 시주가 들어올 곳이 아니오. 그냥 밖에서 기다리다가 나중에 주방에서 나오는 짬밥이라도 드시오.”
법문은 거지가 개방도란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애써 그 사실을 숨기고 부화뇌동한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손님이 양해해 주셔야겠습니다.”
점원은 어쩔 수 없이 거지를 내보내려 한다. 이때 멀리서 점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점원, 그 분을 이곳으로 모시게.”
태민이다. 그를 비롯한 일행은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에? 하지만....”
점원은 구파의 제자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머뭇거린다.
“대운객잔이 언제부터 손님을 가려서 받았느냐? 사숙이 그렇게 시키더냐?”
“그..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당장 손님을 이 자리로 모셔라.”
“뭐라고? 네놈이 지금 우리말을 무시하는 거냐?”
풍진이다. 그는 호령에게 당한 걸 다른 사람에 풀 심산이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행동을 똑바로 해야지. 명색이 정파의 후기지수란 자들이 무슨 짓이냐? 더구나 저 사람은 같은 정파인 개방도가 분명하다. 설마 그걸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뭐, 개방도라고? ... 이..이런!”
풍진은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시선을 법문과 호령에게 돌린다. 이번에도 그들에게 당한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언질을 줬다면 이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 거다.
‘크크크! 그래. 나중에 한꺼번에 돌려주마. 기대해라.’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나중을 기약한다. 하지만 호령과 법문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도 창피를 당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호령이 먼저 시작한다.
“네 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구파의 일에 끼어드는 거냐?”
“네 놈? 하하하! 그러는 네 년은 누군데 감히 구파를 거론하며 정파의 이름을 더럽히느냐? 대체 네 년이 말한 구파는 어디냐? 당장 소속 문파를 밝혀라. 내 그럼 그 문파의 수장에게 네 년의 행실을 그대로 고해바칠 테니.”
태민은 작심을 한 듯 세게 나간다.
“뭐..뭐라고? 저놈이 감히....”
호령은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법문을 보며 구원을 요청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다. 하지만 태민의 기세에 눌려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시주께선 어느 문파 소속이신....”
그는 말을 하다 말고는 얼굴이 굳어진다.
‘아차! 저 자의 옷은 도복이다. 그렇다면 무당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리 무당의 힘이 약해졌다 해도 구파의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건 무당의 오랜 전통과도 관련이 있지만, 지난 세월 정파가 무당에게 진 빚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후후후! 이런 외진 곳에서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뵙게 되어 영광이긴 합니다만, 실망스럽기도 하오. 난 무당의 태민이라고 하오. 여긴 내 사제인 태운이오.”
“태운이라고 하오이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하지만 무진과 호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우리 조카님의 제자분이 아니신가?”
대운객잔의 주인인 임화다. 그는 개방의 제자를 보곤 기분이 좋은지 처음부터 농을 한다.
“할아버지!”
개방의 제자는 달려가서 그의 품에 안긴다.
“아이쿠, 타 큰 놈이.... 할아버지라. 그래. 언제 들어도 변함없이 좋은 이름이야. 근데, 니가 이런 시골까지 어쩐 일이냐? 설마 일부러 나를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예, 할아버지. 사부가 실종됐어요.”
“니 사부라면 내 조카이자 개방의 방준데.... 명색이 중원제일 방파의 방주란 놈이 실종이라니? 무슨 도깨비 하품하는 소리냐?”
임화는 직접 듣고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저도 모르겠어요. 갈만한 곳은 다 찾아봤는데 흔적이 없어요.”
‘그럼 저 꼬마가 개방의 소방주란 말이야?’
‘이런! 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장문인께서 불호령을 내릴 텐데.’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안 그래도 장문인께서 개방과는 절대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는데....’
구파의 제자들이 모두 놀란다. 그들은 꼬마 거지가 개방의 소방주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화와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난 개방의 태상방주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태상방주가 그에게 제자를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친했다. 그런데 방주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개방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사부의 행적을 살펴보면 할아버지를 찾아온 게 분명해요. 여기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행적이 사라졌어요.”
“네 말을 정리하면 최근 개방에 반역 사건이 발생했는데 방주란 놈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 말이지?‘
“예, 할아버지. 제발 사부를 찾아주세요.”
“니미, 하필이면 지금이냐?”
“왜요? 설마 안 된다는 말씀은 아니죠?”
“그럴 리가 있느냐? 다만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이지.”
임화는 태양장의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큰일이다. 이번 일도 태양장이 관련돼 있으면 풀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한편 무진 일행도 방주의 실종과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무 대협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니 생각부터 말해봐라.’
태운의 질문에 무진은 되묻는다.
‘아직 상황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만약 누군가가 방주를 납치하거나 해친 거라면 전 이유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건 아니냐?’
‘그 대상이 다른 문파의 수장이라면 몰라도 정보조직인 개방의 방주라면 얘기가 다르죠.’
‘어떻게?’
‘역대 무림의 혼란기 마다 지배세력들이 개방을 공격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으니까요.’
‘그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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