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1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11
“무 대협, 무슨 일입니까?”
“잘못된 건 아니겠지요?”
“무슨 일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지?”
“그..그건 안 됩니다.”
“맞습니다. 누님은 회복해서 사숙의 명예를 되찾아야 합니다.”
태민 사형제는 호란이 죽는다는 말에 강하게 반발한다.
“자식들이 발끈하기는? 농담이다. 농담.”
무진은 한 발 물러난다. 하지만 눈치 빠른 진운자가 제동을 건다.
“농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늙은이가 눈치는 있군. 지금 란이에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두 가지 요?”
“그래. 하나는 사고로 뇌가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많이 좋아졌다. 머리 때문에 죽진 않을 거야.”
“다행입니다.”
“모두가 무 대협 덕분입니다.”
태민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진운자는 답답했던지 채근한다.
“누군가가 머리에 장난을 쳤어.”
“머리에 장난을 쳐요? 어떻게 말입니까?”
“장난이 장난이지 뭐냐?”
“최면이라도 걸었다는 겁니까?”
호란의 문제라 태민 사형제의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그 새끼들 참! 시끄러워서 말을 못하겠네. 기다려 봐!”
“치료하시게요?”
태운의 말대로 무진은 그때부터 호란의 혈도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시간도 길고 훨씬 더 신중하게 한다.
“대체 머리에 뭔 장난을 쳤다는 거지? 사부!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다. 아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 무 대협이 하는 게 무슨 치료법이냐?”
진운자는 말은 못하고 무진의 치료법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제자들과는 달리 환자의 혈도를 자극해서 치료하는 걸 처음 봤다.
문제는 그도 한 때는 그런 치료방법을 생각했다는 거다. 그러니 무진이 실행하는 걸 보고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름은 없습니다. 혈도를 자극해서 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저 치료법 때문에 누님이 이만큼이라도 회복된 겁니다.”
“으음! 너희도 잘 봐둬라. 의술뿐만 아니라 무공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게다.”
“요즘은 가끔 사형이랑 실험도 해보는 걸요?”
“그래? 앞으론 나도 같이 하자.”
“예에? 사부님이요?”
“너 기억 안 나? 우리가 어렸을 때 사부께서 약전의 전주직도 맡으셨는데.”
“그래. 기억이 납니다. 그땐 눈만 뜨면 사형이랑 약제실에 들어가서 놀았지. 그러다 하루는 사형의 실수로 사부께서 일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단약 재료를 업어버렸지. 덕분에 하루 종일 기마자세로 벌을 썼었지만.”
“야! 내 잘못이라니? 니가 내 발을 걸어서 넘어진 거잖아?”
“무슨 소리요? 그때 사형이 잘못했다며 운 거 기억 안 나시오?”
“누가 울었다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진운자는 무진과 호란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
“사형! 아무래도 사부가 무 대협의 의술에 꽂힌 것 같지 않소?”
“잘 됐다. 무 대협에게 의술을 배우면 중원제일의 의원이 되실 거야.”
“무 대협이 가르쳐 주실까?”
“니 눈엔 사부 눈빛이 안 보이냐? 사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야, 정말 빨려 들어가겠다. 아냐. 벌써 빨려 들어갔어.”
“우리한텐 잘 된 일이야. 사부가 의술에 빠져 있을 동안엔 잔소리를 안 하실 테니까.”
“흐흐흐! 그럼 우린 좋지.”
태민 사형제가 즐겁게 얘기를 하는 사이 점차 치료의 끝이 보인다. 한 시진쯤 지나자 무진이 호란의 뒷머리에서 침을 빼낸다. 근데 하나가 아니라 한꺼번에 세 개의 침이 같이 올라온다.
“그..그건!”
진운자는 침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영감은 뭔가 아는 눈치군.”
“그렇습니다. 화타가 말년에 영혼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삼지침이 분명합니다.”
삼지침(三支鍼)은 하나의 침에 세 개의 발이 있는 것으로, 몸속으로 들어가면 각자 분리된다.
“몸속으로 들어가면 찾기가 어렵다고 전해지는데, 어떻게....?”
찾고, 뽑기까지 했느냐는 말이다. 그 대답은 태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혈도를 자극한 것이 침을 찾기 위한 것이었나요?”
“그건 차차 얘기하자. 침을 뽑았다고 치료가 된 게 아니라서 말이다.”
무진은 태민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요?”
“이런 일에는 후유증이 있기 마련이다. 그 동안의 노력을 날려버릴 수는 없잖아?”
“영영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원래 삶이란 게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기 마련이니까.”
“방법이 있군요.”
“후후, 있지. 다만 약간의 제물이 필요하지.”
“제물이라면? 살풀이라도 하자는 말씀인가요?”
“그건 일단 제물을 보고 결정하자. 상제께선 입이 좀 까다롭거든.”
“뜬금없이 제물은 뭐고 살풀이는 뭐야? 사형은 무슨 말인지 알아?”
“글쎄? 잠시 지켜보자.”
“그 사이 무진은 일어나 숲으로 걸어간다.”
“그만 나오지?”
그는 길 건너 숲을 보며 말한다.
“오호호호호! 한 가닥 하는 놈이 있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숲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대체 얼마나 온 거야? 끝이 없네.”
“적어도 삼백 명은 되겠다.”
태민과 태운의 말대로 숲에서는 삼백 명에 가까운 무사들이 나와서 일행을 에워싼다. 곳곳에 흑룡방의 깃발이 보이는 게 무진 일행을 기다린 모양이다.
“병신들! 가만히 있으면 찾아갈 텐데.”
“그 말은 날 기다렸다는 뜻이냐?”
여자의 목소리다. 소문대로 흑룡방의 방주는 여자다.
흑룡방주. 여옥.
여자로선 무림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원래는 화류계의 유명 인사였으나 매춘사업으로 돈을 모으더니 그 힘으로 아예 문파를 만들었다.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다. 42세. 당연히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 무공은 특별히 배운 건 없으나 돈과 매춘을 이용해서 강호 문파들의 독문무공을 얻어 상당한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후후,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함정이라고?”
방주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무진을 노려본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보든지.”
“어린놈이 허풍이 심하구나. 뭐가 있다고.... 허엇!”
“바..방주, 무당입니다.”
주위를 살피던 방주와 부하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확인을 했는데...”
흑룡방의 무사들 뒤로 삼십여 명의 무당 제자들이 서 있다. 이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으나 진운자의 전음을 받고 흑룡방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신경 쓸 거 없다. 고작 삼십 명에 불과하다.”
방주는 부하들이 당황하자 급히 무마시킨다. 하지만 흑룡문의 제자들은 무당파의 전통 복장을 보는 순간 겁을 먹는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자신들과 무당파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무진은 태민 사형제에게 명령을 내린다. 흑룡방의 무사들이 당황한 틈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사형! 격권을 사용합시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내기다.”
“하하하! 후회하실 텐데?”
두 사람은 곧바로 흑룡방의 무리 속으로 뛰어든다.
“저..저놈들이.”
“괜찮아. 어릴 땐 저렇게 해서 실력을 키우는 거지.”
“그래도...”
“영감, 아끼는 자식일수록 절벽으로 내몬다고 했어. 되돌아보면 난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거나 밑바닥 인생을 경험할 때마다 성숙했었던 같아. 무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영감이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고서야 인생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듯이 젊었을 땐 저렇게 격렬하게 사는 거야. 그래서 머리도 깨지고, 죽음의 문턱도 넘어봐야 이론의 함정을 극복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 제자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으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이들을 가둬 키웠습니다.”
“영감만 아니라 요즘 대부분 그렇게 가르치지.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저 정도 재목이면 머지않아 무당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저..정말입니까?”
“난 말이야. 무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더 싫어. 만약 영감이 무당제일인, 무림제일인자의 사부란 소릴 듣고 싶으면 저 아이들을 거친 들판으로 내보내야 해.”
“바..방금 무림제일인이라고 하셨소?”
“왜, 그것만으론 부족해?”
“아..아닙니다. 전 살아생전 무당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소원입니다. 저 아이들이 무림에서 우뚝 설 수만 있다면 무당은 과거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당의 명예는 특정의 몇 사람이나 외부세력이 만들어주진 않아. 무당 스스로 체질 개선을 하고,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 설사 고금제일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과거의 전성기로 돌아갈 순 없다.”
“으음!”
진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씨름에 휩싸인다. 그 역시 무진이 말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천하 각지로 떠돌아 다녔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쯧쯧, 이래서 칭찬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자식이 그렇게 몸을 세우지 말고 튕겨나갈 준비를 하랬더니. 후후, 제법이네. 하긴 위기 때 잘 빠져나오는 놈이 실력자지.”
무진의 말대로 태운과 태민은 흑룡방도들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야, 너 자꾸 신경 쓰이게 할래?”
태민이 방금 위기에 몰렸던 태운에게 핀잔을 준다.
“흥! 그래도 멀쩡하게 빠져나왔잖아!”
“어라? 자식이 또 사형한테 말을 까네. 이크! 이 새끼가!”
태민은 잠시 방심한 사이에 흑룡방도 한 명이 파고들자 팔꿈치로 면상을 날려버린다.
“난 벌써 열 명 째다. 넌 여덟 명이지? 하하하, 오늘 저녁은 푸짐하게 먹겠네. 형제들이 삼십 명이나 왔으니 너 돈주머니가 꽤 가벼워지겠다.”
“흥! 이제 시작이요. 승부는 끊나봐야 안다는 말도 모르오? 야압! 아홉이요. 아홉!”
태운도 다시 한 명을 거꾸러뜨린다. 이렇게 두 사람은 흑룡방도들을 몰아세운다. 그건 일행을 마중 나온 무당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수적으론 밀리지만 워낙 기본기가 단단해서 오히려 주도권을 쥐고 싸운다. 그들도 벌써 다섯 명의 흑룡방도들을 쓰러뜨렸다.
근데 그다지 열심히 싸우는 것 같지 않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곁눈질로 태민 사형제가 싸우는 모습을 훔쳐보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태민 사형이 원래 저 정도 실력이었어?”
“그러게. 일대제자들 중에선 수위에 있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맞아. 작년에 있었던 무당제일검무대회를 생각해봐. 일등을 간신히 했어.”
“근데 몇 개월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가 있어?”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난 태민 사형보다 태운이가 더 무서워.”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