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흔적을 남긴다 – 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사람은 흔적을 남긴다 – 1
‘내공도 없는 무 대협이 어떻게 저런 걸 만들 수가 있지?’
두 사람이 놀라는 건 호란의 머리를 맑고 투명한 기운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저건 무 대협의 기운이 아니라 누님의 단전에 있던 기운이 머리에 모인 거야.’
‘무 대협의 추궁과혈이 저렇게 만들었겠죠?’
‘당연하지. 세상에 무 대협 말고 저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저 정도면 누님의 몸에도 변화가 있겠죠?’
‘그렇다고 봐야겠지. 아마 머리를 제외한 몸의 혈도는 모두 뚫렸을 거야.’
그렇다고 치료가 끝난 건 아니다. 이렇게 열 번의 과정을 반복된다.
“헉! 헉! 헉!”
모든 과정이 끝나자 무진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호란은 큰 변화가 없다.
“뭘 보았느냐?”
무진은 숨을 고른 다음 바로 두 사람과 문답을 시작한다.
“전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혈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중력에 대한 것입니다.”
“혈도에 관한 건 그렇다 치고, 집중력에 대해서 말해봐라.”
“아무리 혈도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도, 무 대협처럼 치료를 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 말이 맞지만 현실에선 그보다 몇 배는 더 집중력이 뛰어나야 한다. 집중력이란 것이 훈련 없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무공도 마찬가지다. 같은 경지의 검술을 펼쳐도 십 할 힘을 다한 것과 실력을 숨긴 채 펼치는 건 천양지차이다.
무진은 다소 엉뚱한 얘길 한다. 하지만 태운은 순순히 받아들인다.
“으음! 명심하겠습니다.”
“민이는 뭘 봤느냐?”
이번에는 화살이 태민에게 날아간다.
“전 한 가질 배웠습니다.”
“무엇이냐?”
“여인을 치료하려면 여인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농이 아닙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신체구조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정확한 치료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은 무 대협은 여인에 대해서 잘 안다는 뜻이오?”
“이성으로서 여인이 아니라 환자로서의 여인을 말하는 거다.”
“내 말이 그거요. 앞으로 여인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무 대협께 여쭤보면 되겠네.”
“자식들이 공부를 하랬더니, 잡생각만 했군. 그만하고, 난 새벽까지 이렇게 쉴 테니, 너흰 알아서 해라.”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무진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명상에 든다.
“사형, 수련 시간이오.”
“벌써 그렇게 됐어?”
“난 당분간은 신법을 익혔으면 하오.”
“나도. 신법을 펼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
“사형도 그렇소?”
“아침까진 괜찮겠지?”
“요즘 같으면 안 먹고, 안 자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소.”
두 사람은 밤새 수련을 할 모양이다.
“그보다 우리가 호법을 서야 하지 않을까요?”
“무 대협은 운기조식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명상에 들었기 때문에 괜찮을 거야. 원래 잠을 자는 성격도 아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수련을 위해 밖으로 나간다. 이제 방안에는 무진과 호란만 남는다. 호란은 침대에 누워 있고, 무진은 곧바로 명상에 잠긴다.
< 가려! 당신과 만나는 날이 많이 줄었구려. 미안하오. 그렇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아무렴 이 황룡이 당신을 잊겠소? 지금도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의 일들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다오. >
무진은 지금 과거와의 만남을 즐기고 있다.
황룡(黃龍).
그는 젊었을 적부터 주위에 여자들이 많았다. 그것도 모두 중원제일미를 다투는 그런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결혼도 여러 번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식을 단 한 명도 두지 않았다.
거기엔 슬픈 사연이 있다. 부인이 열 명이나 되지만, 사랑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부인들은 모두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문파 출신이다.
그러다 우연히 유가려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태양장이라는 작은 무가의 여식이었다. 무진이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태양장 근처의 객잔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빈민가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곤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이틀 만에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도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유부남이란 소릴 듣고 절망했다. 그녀도 황룡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좋다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진은 무려 3년 동안 정성을 들였고, 그제야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무진도 특이한 사람이다. 그녀가 허락할 때까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단순히 유부남이란 말만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태양장으로부터 모진 수모를 당했다.
이후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태양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동안 자신들이 한 행동 때문에 무진의 부하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해서다.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태양장은 일약 무림 중심세력으로 부상했고,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양장은 무림의 실세가 되었다.
“가가, 전 가가를 닮은 사내아이를 갖고 싶어요.”
“날 닮은 아들? 당신은 그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길 바라오?”
“당신 같은 사람.”
“사내가 아니라 사람이라.... 뭔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은데?”
“호호호! 깊은 뜻은 아니고, 그냥 당신은 단순히 사내가 아니라 사내와 여인을 모두 품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요.”
“하하하! 어째 나더러 땡땡이 중이나 도사가 되란 말처럼 들리네.”
“그럼 안 되죠. 난 가가가 필요해요.”
명상 중인 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 후후, 가려 당신은 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지. 지난 이백 년 동안 난 혼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당신을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했으니까. 근데 요즘은 당신의 얼굴이 잘 생각이 안 난다오. 저 아이 때문일까? 후후후, 당신도 보면 날 이해할 거요. 난 처음 저 아이를 보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놀랐다오. 으잉? >
무진은 갑자기 명상을 중단하고 눈을 뜬다.
“아이들은 수련할 시간인데.... 암습이로군. 후후후!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 됐군. 이놈들아, 명상을 깬 벌은 받아야지. 근데 누구지? 적마교는 아닌 것 같고.... 살수들이군. 잡아보면 알겠지. 어떤 놈이 보냈는지.”
그가 명상을 하는 사이에 일단의 무리들이 객잔으로 접근하고 있다. 숫자는 열 명으로 모두 복면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정확하게 자정이 되자 객잔 안으로 스며든다.
워낙 은밀하게 숨어들어 아무도 낌새를 차리지 못한다. 한 사람만 빼고. 근데 그 사람이 지금 약간 당황한 눈치다.
‘어라? 기운을 감춰? 재밌는 놈들이네.’
살수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사라졌다. 기운을 갈무리 한 것이다. 이건 절대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경지다. 아니면 기운을 감추기 위해 피나는 수련을 했거나. 이들이 살수라면 후자일 것이다.
‘아무리 살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살수들이 이런 경지라면 설사 천하제일고수라도 무사하진 못할 거다. 으음! 대체 중원에서 어떤 세력이 이런 놈들을 키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세력이 있단 소릴 들은 적이 없다. 누구지?’
무진은 제법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아는 한 그럴 만한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수들은 한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왔으면 일을 볼 것이지 뭘 꾸물거리나?”
무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러자 갑자기 방안에 찬바람이 불며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머저리! 그걸 왜 생각 못했지?”
침묵을 깬 건 무진이다. 그는 자신이 잘못 판단한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알았느냐?”
어두컴컴한 입구 쪽 벽에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게 뭐 어렵다고? 너도 눈을 감고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어봐라. 아무리 기운을 감춰도 더럽고 사악한 냄새까지 막을 순 없다. 그래도 모르겠니? 지금 방안엔 온통 네놈들의 똥냄새가 가득하다. 쯧쯧, 초겨울 찬바람에 코가 막혔군.”
“.....”
무진이 자극하자 상대는 잠시 감정을 다스리느라 입을 닫는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그게 착각이었어. 처음엔 살수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우리가 살수가 아니란 말이냐?”
“크크크, 이렇게 청부대상과 얘기하는 살수가 있더냐?”
“.....”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힘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해치워라!”
“후회할 텐데?”
복면인들이 움직이려 하자 무진이 제지한다.
“무...물러나라!”
이번에는 처음 나섰던 자의 목소리다. 아마 이들 중 책임자인 모양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한밤중에 남의 방에 몰래 들어온 이유가 뭐냐?”
“.....”
다시 침묵한다. 대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무..무슨 짓을 했느냐?”
“도..독이오. 독!”
뒤이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네놈은 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어서 오세요.’ 하고 반갑게 맞이하니?”
무진이 말하는 사이 복면인은 모두 쓰러진다.
“어라? 한 놈이 없네.”
그는 불을 켜고 복면인들을 확인한다. 헌데 아홉 명밖에 없다. 한 명이 사라진 것이다.
“우욱!”
탁자 옆에 서 있던 무진이 옆구리를 쥐고서 주저앉는다. 옆구리에는 검이 꽂혀 있다. 방심한 사이에 은신해 있던 복면인에게 당한 것이다.
“흐흐흐! 네놈은 너무 건방져.”
“후후, 그게 내가 죽는 이윤가?”
“그것도 그 중의 하나지.”
“근데 이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을까?”
“물론 검이 찔렸다고 바로 죽진 않지. 하지만 검에 독이 묻어 있다면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
“어떻게 다른데?”
챙그랑!
“허억! 아..안 찔렸어?”
검은 무진의 옆구리에 꽂혀 복면인이 물러나자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딜 가시려고? 선물을 했으면 답례를 받아야지.”
무진은 복면인의 머리를 잡고 주먹으로 목젖을 친다. 근데 그보다 더 빨리 복면인이 사라진다.
“어라? 이건 또 뭐지?”
복면인은 어느새 창가에 서 있다.
“말했지? 네놈은 너무 나댄다고.”
복면인은 도망칠 생각은 않고, 두 손을 들어 무진을 겨눈다.
“건방진 건 사실이지만 나댄다는 건 좀 그렇다. 으윽! 커어억!”
무진은 말을 하다 말고는 숨이 막히는지 목을 잡고 괴로워한다.
“이...이게 뭐냐?”
“흐흐흐, 세상엔 네놈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냥 조용히 사라져라.”
“후후후, 염력이 무섭긴 하지.”
무진의 태도가 돌변한다. 힘들어 몸부림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웃으며 여유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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