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5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54
“이..이런! 자, 자! 모두 천천히 언니를 따라 오너라. 무서워할 거 없다. 언니가 나쁜 사람들을 모두 혼내줬으니까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래. 착하지.”
호란은 아이들을 보는 순간 무진의 등에서 뛰어내려 아이들을 다른 건물로 안내한다. 하지만 금방 밖으로 다시 나온다. 아이들이 밀폐된 공간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시 몰려온 수십 명의 태양장 무사들은 태민 사형제에 의해서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목숨을 잃는다.
한 시진 뒤.
여자 아이들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행복원의 사람들이 데리고 갔지만, 무진 일행은 밤이 새도록 그곳을 떠나질 못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그들의 분노가 태양장 비밀분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정랑! 동생들의 충격이 큰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아마 이젠 무당에 남으라고 해도 그렇겐 못할 거요.”
태민 사형제가 받은 충격은 태양장의 저지른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여자 아이들을 늙은이들의 노리개로 삼은 것도 충격이지만, 정신을 차린 뒤 그들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의 손에 죽은 태양장의 무사는 무려 백오십 명이 넘는다. 아무리 무림이 살벌한 곳이라지만, 평생 백 명 이상을 죽인 사람은 무림사에 손가락을 곱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대부분 지금도 살인마라 불리고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무당으로 돌아온 뒤에도 거의 보름 가까이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양장의 비밀분타에 다녀온 후, 무진과 호란도 두문불출하고 있다. 호란도 그렇게 많은 시신은 처음 봤고, 무진은 한 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왕부와 관부의 처리 문제 때문이다.
결론은 당분간 관부와 충돌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다. 무림의 문제를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두 사람은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호란은 무진이 가르쳐준 운기조식에 전념했고, 무진은 자연무예에 집중했다.
< 비우기 위해선 채워야 하고, 채운 다음 다시 비워야 한다. >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하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다. 채우는 것도 얼마나 채워야 하는지, 다 채웠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떻게 비울 것인가? 그냥 다 차면 저절로 비워질까?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매일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몸은 내력으로 인해 터지기 일보직전이고, 이 일대는 거의 다 황폐화가 되었다. 더 이상 기운을 받아들이면 모든 생명체들이 생기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이제 이곳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무진이 무당산에 머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서 자연무예를 익히기 위해서다. 하지만 집 주위의 나무를 비롯한 생명체의 기운을 모두 빨아들이고도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무예를 익히는 건 고사하고 시작도 못한 것이다. 그가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비명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아아악!”
호란이다. 그녀의 앞엔 손바닥 길이만 한 커다란 사마귀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호란이 그걸 보고 놀란 것이다.
“으음, 사마귀조차도 기운을 빼앗겨 죽었구나.”
무진은 사마귀의 시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때 그의 눈이 반짝인다.
“멍청한 놈들, 요즘 것들은 말을 들어 먹질 않아요.”
위쪽에서 태민과 태운이 달려오는 게 보인다.
“니들이 어쩐 일이냐? 이젠 바깥출입을 하는 모양이구나.”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보다 형님.”
태민은 고개를 숙인다.
“왜?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했느냐?”
“예, 일단 여길 피하셔야겠습니다.”
“내가 왜?”
“형님은 괜찮겠지만, 그들은 누님을 괴롭힐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면 니가 데리고 도망치든지.”
“예에?”
“무림맹이냐?”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네 놈들처럼 멍청한 줄 아니?”
“죄송합니다. 형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데. 지금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은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게 어찌 너의 잘못이냐? 근데 무당이 언제부터 무림맹 따위에게 겁을 먹고 쩔쩔맸느냐?”
“무림맹의 정예들이 왔습니다.”
“당연히 그럴 테지. 그래서 니들도 겁나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무당은 그 어떤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설사 황실이라도 해도.”
태운은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당당하게 말한다.
“흥! 그건 니 생각이겠지. 그 영감탱이한테는 가봤니?”
“영감탱이라면 누굴 말하시는지... 아, 증사숙조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영감이라면 무당이 나갈 바를 알고 있을 게다.”
“물론 그분이 나선다면 무림맹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은 온갖 명분을 내세우며 누님을 데려가려 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왜, 니들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그럼 니들은 빠져라.”
“형님, 섭섭합니다. 저흰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앞으론 형님과 누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론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내가 호구냐? 니들 밥까지 해먹이게?”
“하하하! 밥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 말 잊지 마시오. 난 분명히 밥한다는 말은 안 했소.”
“그래. 밥은 내가 하마. 대신 맛없단 소릴 하면 각오해라.”
“자, 그만하고 몸 풀 준비나 해라.”
“벌써 여기까지 왔습니까?”
“오 장로께서 직접 안내를 하니 빨리 올 수밖에.”
태운의 말대로 오 장로 진형자를 선두로 일단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복장으로 봐선 제갈세가와 하북팽가의 고수들이다. 이들은 태양장의 소장주가 고금제일인의 유물을 찾는 문파에게 우선권을 주겠다는 말에 서로 경쟁하다 추첨을 통해 선택받았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하신 오 장로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태민은 처음부터 시비를 건다.
“그런 네놈은 여긴 어쩐 일이냐?”
“저야 두 분과 인연이 있어서 자주 들리곤 하지요.”
‘근데 무당의 장로가 언제부터 무림맹의 안내견 노릇을 했나요?’
태운은 노골적으로 오 장로를 비꼰다. 다만 무당의 체면을 생각해서 전음을 사용한다.
“태운, 네 이놈! 일대제자란 놈이 감히 장로인 나에게 뭐라고?”
“허허! 벌써 귀까지 어두워졌소? 전 어릴 적부터 무당인은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겐 허릴 숙일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근데 이게 대무당의 모습입니까? 그러고도 감히 장로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이까?”
태운의 말에 진형자는 얼굴만 붉힐 뿐 말을 못한다. 대신 무림맹의 사자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무량수불!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피한다. 그런데 무림맹의 사자들은 아무도 답례를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무당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그걸 보는 태민과 태운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진다.
“여긴 저의 형님댁인데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요?”
먼저 태민이 나선다.
“그러는 자넨 누군가?”
“남의 집에 왔으면 먼저 신분을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그리고 얼마나 지체가 높으신지 모르지만, 처음 보는 이에게 하대를 하는 걸 보니 그렇게 인품이 뛰어난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오신 김에 저희 무당의 예절 교육을 받아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교육 내용도 알차고, 하루 네 시진의 교육만 이수해도 어딜 가든 무례하단 소린 듣지 않을 겁니다.”
그는 상대가 끼어 들 틈도 주지 않고 몰아세운다. 당연히 상대의 분노 지수는 높아진다. 하지만 섣부르게 잘못 덤볐다간 또 당할지도 모르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나는 무림맹의 총사인 팽도수라고 하네. 여기 계신 분은 제갈세가의 부가주이시네.”
“난 제갈헌이라고 하네. 소형제는 어느 분의 제자이신가?”
“전 태민이라고 하고, 이 친구는 제 사제인 태운입니다. 위로는 장문인과 사부이신 진운자 장로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칠백의 사질들과 무도행을 하고 있는 일대제자입니다. 무림맹의 총사와 부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운이라고 합니다.”
태민 사형제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한다. 이러니 하북팽가와 제갈세가의 사람들도 뭐라 하질 못한다.
“근데 무림맹의 총사와 장로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린 무림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왔다네.”
팽도수는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무림맹의 장로회의를 거론한다.
“무림맹과 저희 형님이 어떤 관련이 있단 소린 금시초문입니다.”
“자네 형이 아니라 저 여인에게 볼 일이 있다네.”
“여인이라면 저희 누님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그거 참 이상하군요. 보시다시피 저희 누님은 최근에 사파의 공격을 받아서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근데 무림맹과 관계가 있다니, 후배의 머리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호란은 무림맹의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무진의 등에 업혀 있다.
“태민이라면 아마 저 여인을 적마교에서 무당까지 데려온 그 일대제자겠지?”
이번에는 제갈세가의 부가주인 제갈헌이 나선다. 그는 무림제일뇌라는 별호를 가진 인물로 무림인들은 흔히 그를 ‘무림제일의 꾀돌이’라고 부른다.
“그렇습니다. 저희 사형제가 형님의 가르침을 받아 누님을 여기까지 모시고 왔지요.”
“형님이라면 저 친구를 말하는 건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했던가? 결국 제갈헌은 실수를 하고 만다.
“친구라? 후후후! 부가주, 말씀을 좀 가려서 하셔야겠습니다. 저희 형님께선 비록 나이는 어려 보이시나 저희 사부님조차도 존대를 하시는 분입니다. 부가주께서 나이를 가지고 저희 형님을 하대하신다면 그리하십시오. 대신 저도 제갈세가에서 하늘처럼 떠받드는 태양장의 어린 소장주를 그렇게 불러도 되겠지요?”
“.....”
태민의 직설적인 말에 제갈헌은 당황해서 잠시 말을 못한다. 대신 한 사람이 튀어나와 소리친다.
“뭐라고? 무당 일대제자 따위가 태양장의 소장주님을 모욕해?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그가 나서자 제갈헌의 표정이 밝아진다.
“으하하하! 과연 태양장의 위세가 대단하구려. 그래도 한 땐 소림과 더불어 정파 무림을 대표하던 대무당의 일대제자가 장주도 아니고, 소장주의 이름조차 거론하기 힘들다니 말이오. 그렇다면 겨우 정파무림의 말석을 차지하는 제갈세가의 젊은 무사께선 무슨 배짱으로 대무당에 와서 그렇게 큰 소릴 치시는가?”
태민의 말솜씨는 갈수록 유려해진다. 한 마디로 혀가 옥구슬처럼 부드럽게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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