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9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9
“허억! 저 무식한 놈이 사람을 완전히 걸레로 만들어 버리네.”
그의 말대로 태진은 나무토막을 하나 주워 들고선 주덕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부셔버린다. 정확하게 열 대를 맞는 순간 주덕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맞으면서 정신을 차렸으나 그것도 금방, 스무 대를 맞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까지도 태진의 두 눈에선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 놀라운 일은 그때 벌어진다.
“진아!”
그때까지 얌전히 무진의 옆에서 누워 있던 호란이 벌떡 일어나더니 태진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막은 것이다.
“.....?”
태진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녀를 쳐다본다. 호란이 그를 막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근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의 눈은 왕방울만해진다.
“우리 코흘리개 경호 많이 컸네. 소똥 모아 판돈으로 만두 두 개 사줬더니 옆집 비단이와 나눠먹던 착한 내 동생.”
“누..누나! 경실이 누나! 흐흐흐흑!”
태진은 호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며 또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한 말이 사실인지 호란을 자신의 누나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호호호! 한 여름 개울에서 발가벗겨 불알이며 고추를 씻어주면 간지럽다며 내 품을 파고들곤 했지. 그런 꼬맹이가 이리도 큰 어른이 됐구나.”
“누나! 어어엉엉엉....!”
태진은 아예 대성통곡을 한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힌다.
“경호야, 착하고 착한 우리 꼬맹이 경호야. 누난 너를 단 하루도, 아니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단다. 하지만 경호야, 난 우리 경호가 항상 순수하고 착한 아이로만 간직하고 싶단다. 근데....”
“누..누나, 누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
태진은 누나가 폭력 행사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천천히 나무토막을 내려놓는다.
“그래. 그래. 역시 내 동생 경호는 착한 아이구나. 경호야!”
그 말을 끝으로 호란은 스르르 뒤로 넘어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누워 있다.
“누..누님!”
이번에는 태민이 호란을 부축해서 뒤로 물러난다. 사람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한 동안 말이 없다.
“야, 난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휴우! 난 혼이 다 빠져나간 것 같다.”
“큰일이다.”
“뭐가?”
“무당 도사들은 퇴마사 역할도 해야 되잖아?”
“그렇지.”
“근데 저런 걸 보니 무섭고, 떨리기만 하고 말이야. 솔직히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야! 그래가지고 어떻게 퇴마사가 되겠니?”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이 손을 봐. 온통 땀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오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어.”
무당 제자들은 긴장을 했던지 손바닥이 땀에 흠뻑 젖어있다. 놀란 건 그들만이 아니다.
“빙의가 된 걸까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혹시 무 대협이 하신 건 아닌가요?”
“난 아니다. 저건 인공적으로 되는 게 아냐. 아마 저 여인의 간절함이 란이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으음!”
진운자와 무진의 대화 내용이다. 한편 태민은 호란을 무진에게 넘기고 주덕을 깨운다.
“푸하아아!”
주덕은 호란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고비를 모두 넘긴 건 아니다.
“질문은 한 번씩만 한다. 대답을 하고 안 하고는 니 자유다. 물론 책임도 니 몫이다. 첫 번째 질문이다. 소속은 어디냐?”
“도..동방파입니다.”
“호오! 동방파라... 이름이 근사하네. 직책은?”
“해...행동대장입니다.”
주덕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다. 그만큼 겁먹었다는 걸 의미한다.
“후후후, 잘 어울리는 직책이군. 주로 어떤 일을 하느냐?”
“그..그건... 아...아닙니다. 대답하겠습니다. 주로 자릿세를 받거나 도박, 술장사, 아편, 인신매매를 해서 먹고 삽니다.”
“후후, 도박이라 함은 야바위를 말하는 거겠지?”
“그..그렇습니다.”
“하하하! 우리의 인연이 처음은 아니었군. 좋다. 동방파의 책임자는 누구냐?”
“.....”
책임자란 말에 주덕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새파랗게 질린다.
“그 표정은 무슨 뜻이냐?”
“그..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그게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후후후! 이거 정말 재밌네. 뒷골목 깡패 두목 이름값이 사람 목숨보다 비싸다? 좋다. 좋아. 그건 네가 아니라도 말해줄 사람들이 많은 테니까. 대신 넌 벌을 좀 받아야겠다.”
태민은 태진이 놓아둔 나무토막을 집어 든다. 순간 태민의 귀에 무진의 전음이 들려온다.
‘관병들이다. 신중하게 해라.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제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뒤쪽으로 물러나서 준비해라.”
사제들은 이제 태민의 말이라면 이유도 묻지 않고 따른다. 그 사이 수백 명의 관군들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다.
“난 신양성의 즙포사신 장상이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중년의 관리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친다. 즙포사신은 수사기관의 책임자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신양성의 경찰서장인 셈이다.
“즙포사신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입니까?”
태민이 일행을 대표해서 나선다.
“우린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어떤 신고입니까?”
“외부인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신양 주민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신고자가 누군지는 밝힐 수 있소?”
“그건 안 된다. 신고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밝힐 수 없다.”
“그럼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증명하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증거다.”
“그 말은 즙포사신께서 이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오?‘
“으음!”
순간 즙포사신의 말문이 막힌다. 듣기에 따라서는 동방파의 조직원들과 즙포사신이 친한 사이란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신양성에선 신고만 들어가도 수백 명의 관군들이 출동하오? 개봉이나 낙양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그렇진 않던데.”
“으음!”
즙포사신 장상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태민을 노려본다.
“일단 신고가 들어왔으니 너희들은 모두 조사를 받아야 한다. 끌고 가라!”
장상은 사람들이 많은 시장 통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게 싫은지 연행을 지시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체포하겠다는 말씀이오?”
“혐의가 없으면 곧 풀려날 것이다.”
“이것 보시오. 즙포사신 영감!”
이번에는 태수가 나선다. 그는 처음부터 나서고 싶었으나 태민이 나서는 바람에 참고 있었다.
“너도 같은 편이냐?”
“일행이오.”
“일행이라... 그래. 할 말이라도 있느냐?”
“그렇소. 우리가 듣기론 무림과 관부는 서로 불가침의 관계라고 합디다. 맞소?”
“나도 그렇게 들었다. 그럼 니들은 무림인이란 말이냐?”
“그렇소. 우린 무....”
태수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는 순간 태민이 막아선다.
“넌 물러나 있어라.”
“사..사형!”
“이건 형님의 뜻이다. 좀 더 지켜보자.”
“알겠습니다.”
무진이 거론되자 태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난다.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뜻이냐?”
“즙포사신의 체면을 봐서 그렇게 하겠소. 대신 그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소.”
“질문? 가서 말하면 안 될까?”
장상은 구경꾼이 많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간단한 겁니다.”
“좋다. 해봐라.”
“즙포사신께선 동방파라고 들어보셨소?”
“도..동방파?”
장상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소. 이곳 신양의 암흑가를 지배하고 있다는데 설마 모르기야 하겠소?”
“으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아무래도 즙포사신께서 범죄조직에 대해선 전문가일 것 같아서 드리는 질문이오. 혹시 동방파의 책임자가 누군지 아시오? 신양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사람인데 아는 이가 없구려.”
“그..글쎄? 나도 들은 적이 없어서 말이야. .... 꼭 알아야겠다면 나중에라도 말해주마.”
“후후!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알려주면 고맙겠소.”
“험! 험! 자, 이 자들을 끌고 가라!”
장상의 명령에 따라서 관군들은 무당의 일대제자들을 연행해 간다.
“잠깐!”
막 이동하려는 순간 태민이 다시 나선다.
“무슨 일이냐? 자꾸 시간을 끌면 강제로 압송하겠다.”
“이상하지 않소? 분명 저들이 우릴 먼저 공격했는데 왜 우리만 끌고 가는 거요?”
태민은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방파의 깡패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신양의 주민들이다. 필요하다면 따로 불러 조사할 것이다.”
“뭐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일대제자들이 일제히 반발한다. 하지만 태민이 나서서 진정시킨다.
“그만해라. 설마 즙포사신께서 범죄조직인 동방파와 한패이겠느냐?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시는 거라 믿자.”
“으음! 가자!”
태민의 말에 장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날 오후.
신양성부에 한 사람이 방문한다. 무진이다. 그는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찾아왔다. 호란은 진운자에게 맡기고 혼자 왔다. 그는 어제 즙포사신과의 면담을 신청했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에야 성사된 것이다.
“후후후! 이것만 봐도 관리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관병의 안내로 무진은 커다란 집무실로 들어간다.
“아방궁이 따로 없군.”
즙포사신의 집무실은 황제의 집무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크고 화려하다. 크기도 하지만 집기에서 장식품인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명품이 아닌 게 없다. 분재만 하더라도 대부분 수백 년이 된 것들이다. 모두 값을 따질 수 없는 진기한 예술품이다.
“무슨 일로 왔느냐?”
즙포사신은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서 무진을 노려본다. 그는 어제 시장에서 무진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을 찾기 위해 왔소이다.”
“사람?”
“그렇소. 제 누님인데, 날 찾아온다고 떠난 지가 삼 개월이 넘었다오. 참! 난 여기서 오십여 리 떨어진 백양이란 곳에 살고 있소. 누님의 집은 낙양이오.”
무진은 차분하게 최대한 예를 갖춰서 설명한다.
“그런데?”
그에 비해 즙포사신 장상은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듣는 둥 마는 둥 성의가 없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주일 전에 신양에는 분명히 들어왔고, 본 사람도 있다고 하오. 그런데 집엘 오지 않고 있소.”
“다른 곳엘 갔을 수도 있지 않느냐?”
“주위 수백 리 안에는 나 이외 친구나 친척이 없소이다.”
“그래? 인적 사항을 적어 놓고 가면 찾아보마.”
“여기 인적사항과 초상화도 있소. 그럼 잘 부탁드리오. 만약 찾아주신다면 제 재산의 반을 내놓겠소.”
“네 재산이 얼마나 되기에 그런 소릴 하느냐?”
“구체적으로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오천 냥은 될 거요.”
“후후, 오천 냥?”
장상은 오천 냥이란 말에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무진의 말을 듣고 표정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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