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45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45
“당연하지. 이렇게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남,녀간엔 눈빛 한 번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거는 게 다반사인데, 이 정도면 무지하게 친하다고 할 수 있지.”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오랫동안 봐온 사이인 것 같아서....”
“옛날에 내가 아는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있지. 자기 제자가 셋인데, 그 중에서도 막내 제자의 막내 제자 놈이 참으로 기특하다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지. 막내라 귀여워서 그렇겠지. 라고 말이야. 근데 그 친구가 뭐라고 한 줄 아나? 그 어린놈이 자기 생일에 선물이라며 노래를 불러줬는데, 얼마나 잘 부르는지 눈물이 날 뻔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또 물었지. 무슨 노랜데 그렇게 좋았느냐고.”
“그랬더니요?”
처음엔 가만히 듣고 있던 극양자가 점점 얘기 속으로 빠져들더니 급기야 채근까지 한다.
“두 곡이었는데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한 곡은 잊어버렸고, 나머지 한 곡은 뭐라더라? 그래. ‘무당산의 산새소리’가 맞을 거야. 그 친구 말이 꼬맹이가 지었다는 거야. 불과 일곱 살 밖에 안 된 놈이 말이야. 혹시 영감은 그런 노랠 들어봤어?”
“크흐으으흑!”
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극양자는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한다.
“아..알다 마다요. 제가 어찌 그 노랠 잊겠사옵니까? 사조님께선 그 노랠 부를 때마다 절 무등을 태우시며 우리 손주, 우리 손주 하신 걸요. 근데 그런 얘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이 정도 얘길 하면 보통 사람들도 대충 무진의 신분을 추측한다. 그런데도 극양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그 정도로 무진의 나이가 어려 보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단전이 파괴된 사람을 반로환동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조금 전에 극양자가 무진에게 내력을 밀어 넣었을 때 무진은 튕겨나갔다 금방 일어났다. 극양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다.
설사 진운자라고 해도 같은 공격을 받으면 몇날 며칠을 드러누워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무진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금은 멀쩡하다. 극양자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걸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요 아래 균현이란 동네에 갔더니 무당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이 퍼져 있더라고. 마침 영감이 과거 얘길 해서 그 중 한 놈을 써먹었지. 한 냥 주고 산 건데 영감의 반응을 보니 제법 괜찮았나 봐.”
“이거였습니다. 이거요.”
극양자는 엄지척을 하며 좋아한다.
“다음번에는 열 냥짜리로 해주세요.”
“그러다 전전전대 장문인 체면에 오줌이라도 싸면 어쩌려고?”
“어차피 대협과 둘뿐일 텐데 그럼 어떻습니까?”
“그건 그래. 다음번엔 훨씬 더 재밌는 놈으로 얘기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왜, 내려가시게요?”
“가야지. 영감이 날 잡아먹을까봐 꼬맹이들이 밑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을 거야.”
“헐헐헐! 제가 먹힐까봐 걱정하는 거겠죠.”
“하하하! 그런가? 그럼 다음에 봄세.”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무진이 호란을 업고 정자를 내려오자 극양자는 허리를 최대한 굽혀 인사한다.
“헐헐헐!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까 그 얘긴 증사숙조님이 아니고선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균현에서 떠도는 얘긴 더더욱 아니고. 알 수 없는 인물이군.”
극양자는 무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시선을 옮기지 못한다. 한편 무진은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호란의 손길을 느낀다. 그녀의 양손이 그의 젖꼭지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후후후, 그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라고 그냥 있을 순 없지.”
그는 업혀 있던 호란을 앞으로 옮겨 안고선 두 손을 가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으음!”
곧바로 호란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두 사람은 태민 사형제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그 자세대로 내려온다.
균현(均縣).
한 마디로 무당파가 생기면서 형성된 고장이다. 초기엔 마을이 무당산을 중심으로 중턱과 산 아래 여러 곳에 분산돼 다소 산만했지만, 그것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큰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진과 호란은 그 중에서도 가장 무당산과 가까운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인근엔 단 한 채의 집도 없고, 사람보단 산 짐승을 더 자주 마주치는 그런 곳이다. 무진은 위로는 무당이 보이고, 아래로는 균현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그런 명당자리에 아담한 통나무집을 만들고 있다.
오늘로 보름째인데 대충 집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오늘은 집에 넣을 세간살이를 마련하기 위해 아랫마을에 내려왔다. 돈은 충분하지만 지난 번 단환을 만들고 남은 약초를 가지고 내려왔다.
먼저 그걸 약재상에 판 다음 시장에서 물품들을 사는 중이다.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수레다. 거기에 호란과 물품을 싣고서 이동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환자 행세를 하고 있다.
“란! 이번에는 뭘 사고 싶소? 예쁜 옷은 어떻소?”
“배고파!”
“벌써 점심 먹을 때가 됐나? 뭘 먹고 싶소?”
“만두 먹고 싶다. 만두 사주라. 만두!”
“하하하! 내가 만두 먹고 싶은 걸 어떻게 알았소? 자, 그럼 만두 가게를 찾아봅시다. 그래. 아까 저쪽에서 본 것 같소. 자, 만두 가게를 향해 출발합니다. 가자!”
“가짜!”
무진은 직접 수레를 끌고 왼쪽 큰 길로 향한다. 근데 불과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한다.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찌! 나 저기 가고 싶어. 저기!”
호란이 가리키는 곳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뭔가를 구경하고 있다.
“야! 재밌겠다. 우리도 가보자.”
“재밌겠따!”
무진도 덩달아 호들갑을 떨며 수레를 그쪽으로 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모녀의 모질고도 슬픈 사연은 천하제일의 목석도 눈물짓기에 충분합니다. 저길 보십시오.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슬픈 건 슬픈 것이고, 현실은 또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 두 모녀는 어쩔 수 없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딸은 어느 부호의 수양딸로, 엄마는 어느 고관댁의 식모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해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전 세상 물정은 물론 그런 높은 분들과 인연이 없습니다. 해서 여러분 중에 혹 이 모녀를 그런 분들에게 소개해줄 분이 계시면 도와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이 두 모녀는 그분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고마워 할 것입니다. 어느 분이 도와주시겠습니까?”
시장 한 구석에 두 모녀가 서 있고, 그 주위를 수많은 남정네들이 둘러싸고 있다. 모녀는 겁에 질려 서로의 몸을 껴안고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걸 쳐다보는 사내들의 눈빛은 욕망으로 이글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모녀는 이런 시장바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모를 지녔다. 특히 삼십대 초반의 엄마는 사내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미인이다.
거간꾼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말을 마치자 구경꾼들 중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표시한다.
‘정랑! 인간시장이에요.
호란의 전음이다. 그들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후후후, 시장바닥에서 거래되는 인신매매라... 간땡이가 제법 큰 놈들이군.’
무진의 시선은 거간꾼으로 보이는 자에게 가 있다. 그가 구경꾼들 중에 손가락으로 가장 큰 숫자를 표시한 중년인을 가리킨다. 그러자 중년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선다.
“제가 한 번 나서보겠네.”
“아! 감사합니다. 은공께선 어떤 분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분은 북경에서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는 분이오. 그분은 최근에 건강이 좋지 못해 일꾼들을 구하고 있소. 특히 솜씨가 좋고, 건강한 중년의 여인이 필요하다고 하오. 게다가 그분 휘하에 계신 분 중에 몇 해 전 여식을 불의의 사고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분이 있소이다. 그분이 수양딸을 찾고 있소.”
“오라! 그래서 이 모녀를 그곳으로 보냈으면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이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아마 이 모녀는 은공을 영원히 주인으로 모시고 고마워 할 겁니다.”
“나야 소개를 할 뿐이지만, 불쌍한 모녀가 행복할 수 있다니 기쁠 뿐이오.”
“자, 그럼 앞으로 나오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행복원(幸福園)이라는 자선단체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행복원은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절대로 인신매매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부에서 발행하는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합니다. 서류 작업은 간단하기 때문에 금방 끝날 겁니다. 감사합니다.”
중년인이 앞으로 나와 서류를 작성하자 거간꾼이 가방을 하나 건넨다. 그러자 중년인은 거기에 뭔가를 넣는다. 가방이 출렁하고 밑으로 처진 거로 봐선 상당히 무거운 것이 들어간 모양이다.
“정랑, 저게 뭘까요?”
“금덩이요. 적어도 금화 천 냥은 넘을 거요.”
“쓰레기 같은 놈들이군요. 감히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란! 아직은 그대가 나설 때가 아니오. 내가 처리하리다.”
“하지만... 알았어요.”
“고맙소. 당신에겐 지금 태청단의 기운을 소화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오.”
아마도 극양자에게 받은 태청단을 호란에게 먹인 모양이다.
“명심할게요. 대신 확실하게 혼내줘야 해요.”
“알았소. 다신 이 땅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리다.”
무진은 모녀를 데리고 떠나는 중년인을 따라간다. 일단 모녀부터 구할 모양이다. 중년인에겐 부하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모녀를 끌고 시장 구석으로 간다. 그곳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다.
“이것 보시오.”
그들이 모녀를 마차에 태우고 막 움직이려는 순간 무진이 나선다.
“뭐하는 놈이냐?”
무진이 마차 가까이 접근하자 중년인의 부하들이 가로막는다.
“난 그대의 주인과 거래를 하러 왔소.”
“무슨 거래를 하겠다는 거냐?”
“방금 여러분이 데리고 온 모녀를 내게 넘겼으면 해서 말이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느냐?”
“보시다시피 저의 집 사람이 몸이 좋지 않소. 그런데 난 일을 해야 하오. 해서 모녀로 하여금 저의 집안일을 하면서 집사람과 같이 지내게 했으면 하오. 부디 선처해주시오.”
무진은 정중하게 부탁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냉소뿐이다.
“미친 놈. 여기가 불우이웃돕기 행사장인줄 아느냐?”
“아까 행복원에서 나오신 분은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분들에게 새 삶을 주기 위한 운동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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