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7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빛과 어둠은 공존한다 – 27
“그것만 있냐? 재작년에 이론 공부하는 중에 졸다가 걸렸잖아?”
“이 자식이 정말, 너 내가 경기 드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지? 왜 자꾸 사형한테 혼난 것 만 말하고 지랄이야? 참, 그때 물동이 이고 벌서다가 오줌 산 거 너 맞지? 맞잖아!”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계속해서 장난을 친다. 근데 갑자가 태진이 한 곳을 쳐다보며 몸이 굳어진다.
“누..누나!”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 있고, 그 중앙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사내들이 여자 한 명을 놓고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다. 태진은 그 중 여자를 보며 넋이 나가 있다.
“야! 너 왜 그래? 진아!”
“수야, 우리 누나야. 경실이 누나. 저기 봐. 저기!”
태진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간다.
“이 자식이 할 말이 없으니까 괜히 엉뚱한 짓을..... 진아! 너 진짜 왜 그래?”
태수는 친구가 장난이 아니란 걸 알고는 앞을 가로막는다.
“야, 정신 차려! 저 여자가 니 누나가 맞다고 치자. 그렇다고 무작정 가면 안 되지. 저길 봐. 여러 놈이 누날 괴롭히고 있잖아? 대책을 세워야지.”
“안 돼! 경실이 누날 구해야 해.”
“어..어! 저 자식이 정말 미쳤나? 사형! 운아! 어떻게 좀 해봐요.”
그걸 보고 멀리서 따라오던 태민 사형제가 달려온다.
“무슨 일이냐?”
“사형, 진이 저 놈이 저 여자가 자기 누나라며 저러고 있어.”
“누나? 어릴 때 헤어졌다는 그 누나 말이야?”
“예!”
“일단 가보자.”
다행히 태운이 태진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다.
“더러운 년! 네년이 병든 서방을 버리고 도망치면 못 찾을 줄 알았더냐?”
“아악! 아니에요. 제 남편은 죽었고, 당신들이 날 사창가에 팔아넘기려는 거잖아요? 아악!”
건장한 사내놈들이 발길로 여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얼마나 맞았는지 겉옷이 다 찢어질 정도이다. 다행히 얼굴은 손으로 막아 그다지 상하진 않았다.
“흐흐흐! 여러분, 이 화냥년이 다른 놈과 바람이 나서 병든 남편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이런 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벌을 받을 년일세.”
“저런 년은 사창가도 아깝다. 그냥 매음굴에 넘겨야 해.”
“사내놈도 잡아서 고자로 만들어야 해. 고자!”
구경꾼들은 사내들의 말만 듣고 여자를 완전히 패륜녀 취급한다. 그 때 태운이 나선다.
“그 바람난 놈이 나요. 어디 자신 있으면 고자로 한 번 만들어 보시지?”
그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선다. 순간 사내들이 주춤하며 한 발 물러선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네놈은 누구냐?”
“방금 말했잖아. 저 여인과 바람 난 사람이라고.”
“아니다. 저 계집과 바람난 놈은 이미 죽었다.”
“정말? 그거 참 이상하네. 난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었다니? 그리고 보니 이상하네. 아저씨들은 누구야? 내 애인과 무슨 관계야? 아니지. 이 여인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 이름이나 고향, 나이 같은 거 말이야. 한 번 말해봐.”
“그러는 당신은 알고 있소?”
“당연하지. 이름도 모르는 애인이 어딨어? 그래. 그럼 되겠네. 저 여인의 신상에 대해서 정확히 맞추는 쪽이 저 여인을 데려가는 걸로. 어때, 그게 공평하겠지? 여러분 생각은 어떻소?”
태운은 구경꾼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게 좋겠네.”
“그렇게 합시다.”
“빨리 말하시오.”
오히려 구경꾼들이 더 재촉한다.
“고향은?”
곧바로 태운의 질문이 시작된다.
“.....?”
상대방은 말을 못한다.
“호북성의 작은 마을 진하.”
태운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순간 여인의 눈이 번쩍이며 그를 쳐다본다.
“나이는?”
이번에도 사내들은 우물쭈물하다 대충 말한다.
“서..서른 살!”
“후후후!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저 여인에게 나이를 물어 보시오. 그런 다음 내가 말하겠소. 가는 김에 고향과 이름도 물어봐 주시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다가가서 나이와 이름을 묻자 여인은 귓속말로 말한다.
“스물여덟이요. 어떻소?”
“맞소. 스물여덟이라고 했소이다.”
“고향은 어디라고 했소? 난 호북성의 진하요.”
“호북성인지는 모르지만 진하라는 마을은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태운의 물음에 구경꾼이 큰 소리로 외친다.
“어찌된 일이냐? 놈이 어떻게 저 계집에 대해서 알고 있냐 말이다.”
“저도 금시초문이라...”
“그건 그렇고 계집의 이름은 뭐냐?”
“대장이 알지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야! 이러다 잘못하면 계집을 뺏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좀 해봐.”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언제 말로 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사내들은 어차피 여인의 신상에 대해서 태운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그냥 응했다가 낭패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름은? 이번 것도 내가 맞추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겠지?”
마지막이라는 말에도 사내들은 반응이 없다. 자기들이 말한 대로 행동으로 보여줄 모양이다.
“후후후! 난 저 여인을 경실이라고 부르오. 어떻소?”
“맞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과 남동생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저 놈들이 인신매매범이라는 거야?”
“야, 가자. 놈들이 흉기를 뽑았다.”
“그래. 괜히 여기 있다가 불똥이 우린한테 떨어질지 몰라.”
“사내들이 검을 빼들자 구경꾼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제 남은 건 태운을 비롯한 무당 제자들뿐이다.
“자, 좋게 말 할 때 꺼져라. 그럼 지난 일은 따지지 않겠다.”
태운은 가능하면 충돌하지 않으려고 부드럽게 말한다. 근데 사내들이 아니라 태진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안 돼! 저 새끼들은 절대 살려줄 수 없다.”
“진아!”
태민이 막아보지만 막무가내다.
“누나를 저렇게 만든 인간들은 모조리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거야.”
그 기세가 얼마나 강렬한지 옆에 있던 태수가 밀려날 지경이다. 유황천에서 수련한 이후 그의 내력이 급상승했다.
“저 놈들은 또 누구야?”
“알 필요도 없다. 지워버려!”
대장이란 사내는 귀찮다는 듯이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태진이 움직인다.
“다 덤벼!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모두 분질러 줄 테니까.”
말은 덤비라고 하면서 자신이 먼저 나간다. 그는 맨손으로 흉기를 휘두르는 사내들 사이로 뛰어든다.
“오랜만이다. 진이 실력을 보는 게.”
“사형은 잘 모르시겠지만 진이는 무서운 아입니다.”
“그래?”
“예. 항상 어리숙하게 행동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수련도 얼마나 하는지 매일 새벽에 들어옵니다.”
“그래? 근데 왜 우린 몰랐지?”
“동무들 입막음을 철저하게 했죠. 보세요. 저 덩치에 유연하게 움직이는 발놀림을.”
태수의 설명대로 태진은 사내들 사이를 다람쥐처럼 피해 다니며 한 명씩 처리한다.
“태극권이구나.”
“예. 아마 태극권에 관한한 우리 항렬에선 가장.... 운이를 빼면 가장 강할 겁니다.”
“호오! 제법이네. 저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가요?”
“격권을 가르쳐 볼만 하지 않을까?”
태민이 사제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야 형님이 결정할 문제죠.”
“저길 봐라.”
태민이 가리키는 곳엔 무진과 호란, 그리고 진운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도 태진이 펼치는 태극권을 유심히 보고 있다.
“생각보다 영악한 놈이군.”
“어리숙해 보이지만 속이 깊은 놈이지요.”
“쓸 만한 것 같으니까 네가 신경을 좀 써 봐.”
“가르치란 말씀인가요?”
“그건 알아서 하고. 저놈에겐 태극권이 잘 어울리네.”
“알겠습니다.”
이때 무진이 여인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이런! 저 아이의 상태가 좋질 않다. 빨리 데려와라. 빨리!”
태진이 싸움을 벌이는 사이 여인은 바닥에 쓰러져 괴로워하고 있다. 아마 사내놈들에게 맞은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사내들은 무진의 전음을 받은 태민에 의해 정리된다.
잠시 후, 일행은 길 옆의 찻집에 자리를 마련해서 여인을 눕힌다.
“사..사형! 우리 누나가 왜 이래? 누나!”
태진은 여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곤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진이 너, 잘 들어라. 네 누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여인은 지금 위험하다. 장 파열이 분명하다. 극도로 집중해야 되니까 힘들더라도 진정해라. 운이가 데려가서 차라도 먹여라. 민이는 수술 준비를 하고.”
“알겠습니다.”
“누..누나! 흐흐흑!”
태진은 태운에게 끌려가면서도 눈물을 흘린다.
“누난 괜찮을 거야. 아니, 널 봐서라도 절대 잘못 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진정하고 차분하게 기다려.”
“운아! 정말 괜찮겠지?”
“그렇다니까. 니가 흥분하면 치료에 방해가 되고, 그럼 누나만 위험해져.”
“아..알았어.”
“으음!”
사실 태운은 상황 때문에 친구를 다독거리고 있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어린 시절 매일 같이 누나를 찾으며 울던 친구가 천신만고 끝에 소원을 풀었다. 근데 만나자마자 누나가 잘못되면 친구가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걸 걱정하는 것이다.
“칼!”
무진이 손을 내밀자 태민은 화로에 달군 단검을 냉수에 식힌 다음 건넨다. 칼은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뱃속에 들어간 다음 아랫배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뱃속의 창자가 훤히 드러난다. 놀라운 건 그 과정에서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사전에 무진이 혈도를 모두 제압했기 때문이다.
“수건!”
무진이 소리치자 태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헝겊을 건넨다. 창자 주변에는 각종 이물질들이 많다. 장이 파열되면서 내장에 있던 것들이 흘러나온 것이다.
“칼!”
이물질을 깨끗하게 처리한 다음 무진은 새로운 칼로 장을 깔끔하게 자른다.
“바늘!”
태민은 이런 일을 많이 해봤는지 이미 준비를 해 놨다. 무진은 바늘로 잘려나간 장을 잇는다. 언뜻 봐선 잘린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으음!”
그걸 지켜보는 진운자와 호란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들은 이런 수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니, 들은 적도 없다.
“저렇게 해도 괜찮을까?”
“글쎄? 무 대협이 하는 걸로 봐선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만약 저게 성공하면 정말 획기적인 치료법이 되는 거지.”
“그건 그래. 앞으로 속병이 생기면 저렇게 수술을 하면 될 테니까.”
그 사이 무당 제자들이 한, 둘씩 모여들더니 무진의 수술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마무리는 니가 해라.”
“예에? 제가 요?”
“왜, 자신 없어?”
“그건 아니지만 아직 사람에겐 한 번도 해보질 않아서... 그래도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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