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적과의 동침
잔해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손으로 큰 잔해들을 옆으로 밀며 간신히 비집고 나온 유성은 온몸이 피투성이와 회색 먼지로 덮어져 있었다. 기침을 해대며 연이어 고통과 먼지를 토해냈지만, 그 상황에서도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 자이크? 자..이크! 어디 있어? "
목소리도 갈라지며 눈에서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피 인지 알 수 없을 정도에 온몸 전체가 피투성이였고, 옷이 찢어지고, 완전 만신창이였다.
그 상태에서도 기침과 자이크의 이름을 연이어 부르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여 계속해서 자이크를 찾아 헤맸다.
얼마 걷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며 계속해서 기침을 하고 있을 때 아르미엔디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짓밟고 유성을 발로 차 넘어트렸다.
" 플오이사 계집은 겨우 이 정도에 죽은 건가? "
" 닥쳐! 자이크는 나를 지키려고……. "
차마 아르미엔디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유성은 아직까지 믿을 수 없었다.
그때처럼 자이크를 잃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이 생각은 곧 공포로 변했다.
아르미엔디가 주는 치욕은 신경 쓰지도 않고 계속해서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르미엔디는 그런 유성이 아니 꼬았는지 팔짱을 끼며 쏘아보았다.
" 대신 희생했다고? "
" 그래……. "
" 끝까지 너는 이 정도인가? 이왕 희생할 것이라면 자신의 왕을 제대로 지켜야 되는 게 아닌가? "
" 무슨 소리야……. "
" 정말 불쌍하군. 이런 왕을 만나서 개죽음을 당하다니……. "
" 나도 알아. 내가 무능한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아! 자이크는... 이런 나를 지켜주려고 몇 번이나 달려왔어. 나도 자이크를 지켜주고 싶었다고! "
" 결국엔 네놈이 공포에 지려서 네놈 대신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
아르미엔디의 이 한마디에 유성은 이제야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차마 입은 열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그저 눈물만 흘렸다.
" 네놈은 결국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애도?
사과?
이제 와서?
네놈이 약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면 누구보다 더 노력해야 됐던 것이 아닌가?
그게 네놈의 한계라는 것이다 애송이. "
계속되는 독설에 멍하니 아르미엔디의 얼굴만 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좌절했다.
아르미엔디는 그런 유성에 더욱더 화가 난 듯 턱을 한손으로 잡으며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 웃기지 말라고, 이 정도에 쫄고 주눅들 정도면 그냥 빨리 죽어. "
그러고는 강하게 밀쳐내며 유성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가뜩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유성의 몸은 종이뭉치처럼 잔해 위를 날아가듯 굴렀다.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자이크의 생각에 그럴 수 없었다.
충격이 꽤 컸는지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섞여서 나왔고, 왼쪽 발목은 삐었는지 일어설 수 없었다.
" 플오이사 계집은 네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닌가? "
" 그건……. "
유성의 대답에 아르미엔디는 관자놀이를 한번 주먹으로 누르더니 곧이어 양날 도끼를 추켜올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쥔 도끼로 유성의 목에 대며 위협했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목을 숨 막히게 죄어왔다.
살짝만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목에 상처가 생기며 그 틈에서 새빨간 피가 흘렀다. 유성이 나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도끼를 더욱도 깊숙하게 들이댔다.
" 아닌가? 그럼 네가 정신을 차리려면 네 주변인들을 다 죽이면 되나? 조금이라도 네놈이 약하다는 것을 자각을 할까? "
" 그런 짓을 한다면……. "
유성은 도끼날을 손으로 밀며 일어서려했다.
도끼날을 잡은 부분은 이미 피가 흥건해졌고, 깊숙하게 날이 박혀 곧바로 치료를 헌다해도 과다출혈은 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 너는 플오이사 계집의 치맛자락만 잡고 매달리는 게 네 한계야. "
" 그렇지 않아요. 제가 유성님을 위해 죽는 것은 개죽음이 아니에요. "
" 자이크? "
서있는 것 만해도 신기할 정도로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유성의 뒤에 서있었다. 유성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다행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큰 상처는 없어서 다행이라고 유성은 마음 한구석에서 안심했다.
곧바로 뛰어가 자이크를 부추겨 주었지만, 자이크는 그대로 두 팔로 유성의 허리를 감싸며 머리를 가슴팍에 파묻었다.
" 지금은 응석을 부려도 받아주실꺼죠? "
" 그래... "
오랜만에 밑에서 자신을 찾아보는 자이크를 보니 긴장이 풀리며 아까보다 호흡이 안정되었다. 자이크도 유성도 서로를 말없이 계속 껴안았다.
하지만 유성은 자신 때문에 자이크가 죽을 뻔 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과거에도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먹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약한 것이 원통스러웠다.
자이크가 유성의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아르미엔디를 바라보며 해맑에 웃음을 짓더니 한마디를 꺼냈다.
" 미안하지만 유성님도 살고 저도 살았네요. "
" 나도 제법 강하게 나간 것이었는데 약했던 거야?
그럼 다시 바보들끼리 사이좋게 죽는 게 어때?
이번에는 한 번에 죽여주는 것이 나의 최소한의 배려야."
" 어떡하죠. 이러다가 또 죽겠어요. "
자이크의 도발에 아르미엔디도 약간 화가 난 듯 아까보다 어조가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위엄 있었던 알토 음역대의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 귀여운 소프라노로 바뀌어있었다.
유성은 아르미엔디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자이크는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아닌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이렇게 상황이 변할 줄은 몰랐다며 어떡하냐며 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이렇게 쉽게 도발에 넘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나 보다.
" 왜 도발한 거야? "
" 유성님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기죽으면 안 된다고요 "
자이크는 검지를 치켜세우더니 유성에게 윙크를 날렸다. 행동과는 달리 손과 몸은 떨고 있었다.
"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
" 그러게요? "
" 야! "
" 헤헤 "
자이크는 겉보기에는 웃고 있었지만, 유성은 한눈에 봐도 억지웃음이라는 것이 보였다. 자이크 또한 유성과 마찬가지로 두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일부러 유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혼자서 힘내고 있던 것 같았지만, 죽을 뻔 한 일을 겪고나 서야 자이크의 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성은 그런 자이크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 자이크, 괜찮기는 한거야? "
" 전 괜찮아요. 유성님이야 말로 괜찮나요? "
" 난 괜찮아. 하지만 더 이상 네가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
" 유, 유성님? "
유성은 결심이라도 한듯 주먹을 쥐고 당당하게 아르미엔디 앞으로 다가갔다. 발목은 욱신거리고 온몸의 관절은 삐걱거렸다.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각했다. 하지만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고통을 참고 다가갔다.
자이크는 유성을 말리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아르미엔디님? 제가 대신 남아서 싸워 드릴 태니 자이크는 제발 보내주세요! "
" 왜? 너는 약하고 오히려 플오이사 계집이 더 강해 보이는데. 쓸데없는 영웅놀이는 하지마. 영웅은 단 한명이니까. "
"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나만 노리라고! "
유성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르미엔디는 들은 척도 안하며 유성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유성은 곧바로 라도 달려들 기세 이었지만, 자이크가 달려와 뒤에서 유성을 끌어안자 흥분된 정신을 식힐 수 있었다.
" 유성님 제발 그만하세요. "
" 하지만... "
"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그거아세요? 지금은 저에게 최고의 순간이에요. 유성님과 함께 죽을 수 있잖아요?
전 당신의 검, 당신의 것, 저의 삶의 이유. 맹약을 어기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요. "
" 그렇다면, 우리가 했던 계약을 해제할게. "
" 저는 유성님을 절대 혼자 남게 두지 않아요. 유성님도 절 혼자 남게 두지 말아주세요. "
『 만약 다시 만난다면 저를 다시는 혼자 남게 하지 말아주세요. 』
" 약속…? "
" 네? "
" 아니… 그게……. "
" 약한 것들이 죽기 전에 입만 살았구나 "
" 좋은 분위기 망치지 말아줄래? "
" 그렇다면 나를 무시하고 너희들끼리 말한 대가는 치러야지? "
" 자이크.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
" 좋아요. 어차피 죽는다면 먼저 죽을 만큼 힘을 쏟아 부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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