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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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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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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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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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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티노, 가까운 셀룰러폰 매장으로 가요.”


미국의 통신시장은 사실상 BT&T 천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4년 미국 독점 당국의 규제로 시내전화사업을 7개(베이비 벨)로 분사시킨 BT&T(Bell Telephone and Telegraph)는 급격히 시장 지배력을 잃었으나, 10년간의 눈물겨운 구조조정으로 마침내 시가총액 1위를 거머쥐었다.

류지호가 꾸준히 주식 보유량을 늘리고 있는 기업 중에 한 곳이다.

류지호는 모토로라 플립형 Tac5000 단발기를 구입해 뉴욕주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통신사업자 NYNEX로 개통했다.


“두 사람은 LA로 돌아가서 개통하는 것으로 해요.”

“나와 말릭보다 제이콥 보좌관부터 개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암튼 LA로 복귀해서 따로 또 개통을 하든 말든 합시다.


아직은 개인이 무선전화 요금을 부담할 정도로 저렴하지 않다.

때문에 회사차원에서 업무용으로 몇 개 개통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통신사가 7개로 분리가 되어 있어서 동부, 중부, 서부의 유무선전화 개통이 조금씩 달랐다.

암튼 무선전화 첫 통화는 Garam Invest의 매튜 그레이엄과 했다.


“Garam에서도 BT&T 주식 보유하고 있지?”

- 당연하지. 걔들 올해부터 주주배당 시작했어.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데?”

- 980만 주였나....? 맥시멈 25달러 선까지는 꾸준히 모아보려고. 미국 기업은 배당을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편이고, 통신사업은 미래 전망이 매우 밝으니까.

“현재 주가가 어떤데?”

- 19~21달러 사이를 오가고 있어.

“대주주가 될 정도 지분율을 끌어올리지는 말고.”

- BT&T의 총발행 주식이 얼만데 대주주가 되냐? 지금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두 배를 사들여도 1%가 될까 말까야.

“나도 더 매입해도 될까?”

- 내년에 지역전화사업자가 자사 서비스지역에서 장거리전화사업을 하는 것이 금지되는 통신법이 발효가 되긴 하는데, 그것을 우회하기 위해서 통신사업자들 사이에서 M&A가 활발하게 진행될 것 같아. 주가가 내려가기 보단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매입해도 된다는 거야 말라는 거야?”

- 여유자금이 얼마나 되는데?

“120만 달러.

- 영화 찍는다며?

“ParaMax에서 투자받았어.”

- 20달러 선에서 여름 가기 전에 100만 달러 써 봐. 올 하반기에 주당 30센트 선에서 배당을 또 줄 것 같으니까.

“알겠어.”


IT와 연관된 기업은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가격과 상관없이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그 가운데 닷컴버블이 붕괴되면서 쪽박을 차는 주식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기억할 정도로 유명한 기업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는 것도 모자라 더욱 크게 성장할 터.

잃는 돈의 수십 배의 이익을 그 같은 기업들의 주식이 안겨줄 것이다.

인터넷 브라우저의 대중화를 이끈 넷스케이프의 IPO와 파인소프트의 윈도우95는 닷컴버블의 신호탄이다.

62년 만에 연방 통신법(The Communications Act of 1996)이 개정되면서 미국 닷컴 기업들의 성장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법의 주요 개정 요지는 통신 업체들의 경쟁과 대형화였고, 이를 바탕으로 통신 업체들은 합종연횡을 통해 망을 개선하고 사업을 대형화 하며 통신 인프라가 확대된다.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제 2의 넷스케이프 등을 꿈꾸며 창업 시장에 뛰어든다.

풍부한 시장의 펀드 자금과 벤처 캐피탈은 청년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된다.

결국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나스닥 종합지수가 무려 400% 상승한다.


절레절레.


류지호가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상념을 털어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도 살아남았던 기업들만 보고 가면 된다.

수천수만 개의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을 일일이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슬슬 실리콘밸리로 진출해야 하려나.....?’


류지호는 <The Killing Road> 작업을 마치고 실리콘밸리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뉴욕 맨해튼 트라이베카의 허드슨 스트리트에 위치한 ParaMax NY 사무실.

류지호보다 하루 늦게 프로듀서 게리 켐프와 조감독 터커 레이튼이 뉴욕으로 날아왔다.

뉴욕으로 온 김에 주연배우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다.


“두 사람 다 뉴욕에서 머물고 있다니 마침 잘 됐네요.”

“해리슨 노튼은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고, 마리아 베리는 스팍스 리 감독의 차기작을 논의하기 위해 뉴욕에 와 있다고 하더군.”

“스팍스 리?”

“<걸 식스>라고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폰섹스 걸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영화라고 들었어. 주연은 아니고.”

“스팍스 리 감독이 쿠엔 태런티노를 출연시키고 한다고 하던데, 마리아 베리에게 카메오 부탁을 하고 있나보네요.”


스팍스 리가 마리아 베리를 <정글 피버>에서 데뷔시킨 인연이 있었다.

마리아 베리(Maria H. Berry)는 할리우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모델이나 TV시리즈에서의 활동에 비해서 인지도가 약한 편이다.

아직은 그녀에게 선뜻 영화 주인공을 맡길 감독이나 스튜디오는 없었다.


“<걸 식스> 말고 현재 논의 중인 프로젝트는 없대요?”

“<모정>은 이미 촬영을 마쳤고, 워너-타임의 하이재킹 영화에서 계약만 남아 있는 상황인가 봐.”


류지호는 곧바로 <파이널 디씨전>을 떠올렸다.


“TV시리즈는 안 하고 있나 봐요?” ”완전히 영화로 넘어 왔어.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이지만.“


게리 켐프는 티아라 배역에 좀 더 유명한 흑인여배우를 캐스팅하길 원했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의 오너이자 영화 신동으로 알려진 류지호의 작품이기 때문에 적은 개런티라도 서로 출연하려고 할 것이기 뻔했기에.

미국의 TV·영화 업계는 티켓 파워를 인정받는 소수의 톱 배우들을 제외하고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배우일지라도 무조건 오디션을 봐야한다.

충무로 조감독들은 단역 오디션이라도 비교적 성의 있게 봐주는 편이다.

할리우드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류지호는 트라이-스텔라나 ParaMax를 방문할 때 미팅 룸이나 오디션 스테이지를 지날 때가 있다.

배우들이 열심히 오디션을 보고 있지만, 그걸 심사하는 사람들이 딴 짓 하기 일쑤다.

할리우드는 캐스팅 디렉터가 대본을 분석한 후 배우 리스트를 작성해 조감독과 일정을 논의한다.

캐스팅 디렉터가 배역에 알맞은 배우를 추려서 가져오긴 하지만, 프로듀서와 조감독이 오디션을 봐야할 인원은 굉장히 많았다.

그들은 절대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디션을 보는 중에도 영화와 관련된 업무를 봐야 할 경우도 있다.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배우가 연기를 할 때면 지루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오늘 오디션을 함께 보기로 한 프로듀서 게리 켐프와 조감독 터커 레이튼은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마리아 베리 같은 배우는 할리우드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디렉터 류, 메이가 방금 도착했다고 하네요.”


끄덕.


캐스팅 디렉터 수잔 베일리(Susan Bailey)가 마리아 베리를 데리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미국 최대 에이전시 중에 하나인 WMA(William Morris Agency) 소속이었다.

올해 3월에 Endeavor Talent Agency로 옮겼다.

수잔 베일리에게 마리아 베리는 전 직장인 WMA의 소속이 연예인이다.

때문에 섭외가 쉬웠다.

보통 감독과 제작사, 투자사가 캐스팅 디렉터와 주인공 캐스팅 관련 미팅을 한다.

의견대립이 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긴다.

스크립트를 보는 각자의 해석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

누가 더 설득을 잘 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결국 설득력(권력) 있는 쪽에서 제안한 배우로 캐스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The Killing Road>는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하지 않다.

류지호가 투자자이자, 제작자이고, 각본가이며, 연출가이기 때문이다.

프로듀서 게리 켐프 또한 류지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줬다.

상업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산운용과 포스트프로덕션 진행 더 나아가 배급 문제만 신경 쓰면 됐다.

베테랑 영화제작자 저리가라 할 정도다.

류지호는 영화제작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사실 게리 켐프가 반대를 할 상황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잔 베일리는 선입관이 있었다.

매스컴이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지나치게 트라이-스텔라의 오너를 띄워준다고 여겼다.

직접 류지호를 만나서 작업을 해보니 오히려 매스컴의 평가가 모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컹.


ParaMax NY VIP 미팅룸 문이 열렸다.

백인과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의 미녀.

아프리카계의 진한 피부색이 아닌 짙은 구릿빛 피부.

건강하고 글래머러스한 몸매.

조막만한 얼굴의 시원한 입매까지.

미인 대회 출신이자 패션모델로 연예계 경력을 시작한 마리아 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류지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동안이다.


“하이!”


마리아 베리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게리와 터커가 시큰둥하게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반면에 류지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달고 친절하게 대꾸했다.


“오디션 일정을 급하게 변경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마침 뉴욕에 올 일이 있었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네에~”


조단역 배우에게 친절하게 구는 제작진은 두 부류다.

배우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 때.

다른 하나는 음흉한 속셈이 있을 때다.

마리아 베리는 류지호의 눈동자가 맑고 초롱초롱한 것을 보고는 전자임을 확신했다.


“내가 당신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전에 연기를 봤으면 좋겠군요.”

“잠시만.....”

“수잔과 함께 밖에 나가서 준비를 하고 다시 들어와도 됩니다.”


류지호가 지나친 호의를 보이자, 게리와 터커가 돌아봤다.

처음으로 애송이처럼 구는 류지호를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독이 오디션 배우에게 친절하게 굴 이유가 없다.

차라리 거들먹거리며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편이 좋다.


“괜찮아요. 해볼 게요.”


마리아 베리는 전혀 떨지 않았다.

한두 번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고.

<탑 건>의 앤서니 스콧, <정글 피버>의 스팍스 리, <트윈 픽스>의 스테판 질렌할 같은 유명한 감독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애송이 감독 앞에서 긴장할 이유 따위가 있을 리가.


“....음.”


마리아 베리가 자신 앞에 가상의 인물을 그렸다.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렸다.

오디션에서 상대 배역을 미리 준비시키기도 한다.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약식으로 진행하는 오디션이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보다.... 같이 하는 게 멋진 거잖아.]


마치 상대의 반응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마리아 베리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잠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보였다.


덥석.


마리아 베리가 가상의 인물의 양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나, 날 데려가 줘. 제발.....]


온통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시골마을에 나타난 FBI 요원.

마리아 베리가 연기하고 있는 티아라는 지역 보안관은 물론 불량배들에게까지 성노리개처럼 유린당하며 살고 있다.

모두 의붓아버지 때문이지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범죄이며 악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지나치게 예쁘장하게 생긴 흑인 처녀는 항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먹이사슬의 맨 아래 비참한 신세다.

백인 남자들에게 노리개가 되어 죽음보다 못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나타난 구원자.

티아라는 FBI요원 남자를 붙잡아야 했다.

그가 연쇄살인마라 할지라도.

당장 그의 곁에서 안전을 보장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따라 이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살기위해서.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당신은 나 같은 여자를 구해줘야 할 의무가 있잖아..... 거짓말. 당신이 나와 같다고? 어떻게 살인자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어. 당신은 날 귀찮아하면 안 돼.]


호흡이 긴 다이얼로그를 제법 맛있게 살릴 줄 알았다.

한참 호흡과 표정연기가 지속됐다.

연기에서 ‘사이’라고 부르는 대사 사이의 순간이 밀도 높은 감정으로 들어찼다.


‘괜찮네.’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미인대회 출신이자 모델로 경력을 쌓은 흑인 여배우가 예쁜 얼굴만이 아니라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들어오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어려운 배역을 일부러 골라서 하고 있다.

<정글 피버> 촬영당시에는 약물중독자를 연기하기 위해 2주간 목욕을 하지 않아 스태프들로부터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다.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74년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되는 배우.

섹시한 이미지와 연기파 여배우를 넘나들며 커리어에서 부침을 겪긴 할 테지만.

그리고 아직은 연기부분에서 다듬어야 할 것이 많지만.

어쨌든 좋은 배우다.


[난 무조건 당신을 따라 갈 거야. 날 떼어놓고 가려면 차라리 죽여줘.]


더는 떼어내려 해도 소용없다는 걸 상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단호한 결심이 전해졌다.


‘절제돼 있어. 그루밍으로 길들여져 수동적이고 자포자기 하던 티아라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순간을 오버하지 않았네.’


LA에서 오디션을 봤던 몇몇 여배우들은 한 편의 신파를 찍었다.

자신들의 연기력을 자랑하듯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연기를 펼쳤다.

반면에 마리아 베리는 최대한 담담한 척 하면서도 간절함을 슬쩍슬쩍 내비쳤다.

대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심리상태까지 함께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물론 완전히 배역에 동화되지 못해 살짝 떠있는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잘 봤어요.”


후우.


마리아 베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오디션을 지켜본 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10페이지짜리 오디션 대본만 보고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배역을 이해하고 오디션에 참여하는 것은 진짜 힘든 일이다.

오디션이 열리는 한참 전에 대본을 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게 아니다.

오디션 미팅이 낮 12시면, 전날 저녁 7시에 10페이지 내외 분량의 대본을 준다.

대부분 대충 외워서 오디션을 보는 배우는 없다.

다 외워야 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 시간 있어요?”


마리아 베리가 원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물었다.


“정말이요?”

“시간만 괜찮다면 옆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네요.”

“좋아요!”


류지호는 마리아 베리와 자리를 옮겨서 차담의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완전 무명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오디션만 보고 돌려보내도 상관없다.

류지호는 그녀가 연기 준비와 캐릭터 구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미국식 메소드 연기법의 골수 신도인지.

자신만의 루틴을 고집하는 배우인지.

알아야 캐스팅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당뇨는 어때요?”

“혈당 관리를 위해 인슐린을 처방 받고 있고,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생활습관을 조절하고 있어요.”


지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마리아 베리는 단호한 어조로 문제없음을 피력했다.

20대에 덜컥 당뇨 진단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도 있다.

마리아 베리는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남자다.

2년 전 유명한 메이저리거와 결혼했다.

남편이란 작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나 툭하면 성적 폭행을 가했다.

곧 그와 이혼을 하게 된다.

참고로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더 최악이다.

오죽하면 이혼할 때 마리아 베리의 왼쪽 귀의 청각을 30%까지 상실할 정도로 얻어맞으며 부부생황을 했을까.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마리아 베리의 불행한 개인사다.


‘이 놈에 딴따라 판에는 개놈이 참 많이 꼬인다니까....!’


❉ ❉ ❉


류지호는 마리아 베리를 시작으로 뉴욕에서 이틀간 서른 명의 배우 오디션을 봤다.

브로드웨이나 뉴욕인디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었다.

뉴욕을 떠나기 전 오디션을 보고 싶었던 배우와 만났다.

바로 해리슨 노튼(Harrison Norton)이다.


“시그니처 시어터에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배역이 크진 않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을 하고 있어요.”


2~3년 안에 ‘연기괴물‘이라고 불리게 될 해리슨 노튼이다.

현재는 브로드웨이의 한 극단에 소속되어서 연극무대에 오르고 있다.

아직 영화에 데뷔하기 전이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 오디션을 보진 않았습니까?”

“패러마운틴의 범죄영화 오디션을 보긴 했어요. 에이전트에게 듣기로 경쟁률이 2000 : 1이라고 하더군요. 기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리슨 노튼이 본 오디션은 <프라이멀 피어>다.

세상에 해리슨 노튼이란 이름과 배우로의 잠재력을 알린 영화다.


“연기 한 번 봅시다.”


류지호는 충분히 배역에 몰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줬다.

예일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해리슨 노튼은 지적인 배우다.

대학 후드티를 입혀놓으면 영락없는 대학원생의 얼굴이다.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할 것처럼 희멀건 하게 생긴 주제에 웃을 때는 언뜻 염세주의자의 비웃음기가 돌았다.

그것이 오디션을 위해 준비된 연기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연기의 발동이 조금 늦게 걸리는 타입이다.

한 동안 가만히 서서 감정을 잡았다.


[난 구세주니 구원자 따위가 아니야.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나 살기도 바쁜데.]


해리슨 노튼의 표정은 차분하고 덤덤했다.

결코 빠르지 않은 대사 속도와 호흡이다.

말투에서는 어딘가 지역 사투리가 섞인 것도 같았다.

담담하게 대사를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연기초보가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내 삶에 들어오지 마. 후회는 불행을 초래하지. 내가 원하는 걸 이뤄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어조에 진심이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매정하게 들렸다.

한편으로 자신이 이기적이란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태도다.

벤이란 캐릭터만 연기하다보니 때로는 대사를 건너뛰었다.

그렇다고 인물이 가져가야 할 호흡을 놓치진 않았다.

사이사이에 표정과 시선으로 호흡을 가져갔다.


“이상입니다!”


게리, 터커 두 사람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해리슨 노튼이 배역을 나름 잘 이해한 것 같다.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그뿐이다.

선뜻 좋다고 말하기 애매했다.


‘잘 하긴 하는데.... 뭔가 확 잡아당기는 무엇.......’


류지호는 해리슨 노튼이 연기를 잘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통과해 <프라이멀 피어>에 출연하게 되는 것도.

또한 이중인격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다는 것도 안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주인공이 아니다.

반면에 <The Killing Road>에서 해리슨 노튼이 영화를 이끌어 가야 한다.

영화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

과연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연기를 잘하는 것과 주인공으로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류지호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눈치 챘을까.


“대본의 일부만 보고 상상해본 벤이란 인물의 장면이 있어요. 한 번 해봐도 될까요?”


끄덕.


류지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존이라는 녀석을 죽이고 싶었는데,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몰랐어. 그러다가 우연히 비틀비틀 제 정신이 아닌 떠돌이를 발견했어. 나는 집안에서 도구들을 모두 가지고 와서 하나하나 떠돌이에게 실험을 해봤어. 그때만큼은 난 외과의사였던 것 같아.]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해리슨 노튼은 사람 좋은 청년에서 순식간에 악마적인 사이코패스로 변신했다.

벤이 처음 살인을 했던 장면을 대사로 묘사했다.

<The Killing Road>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 스스로가 10페이지 오디션대본을 보고 상상한 것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TV를 켠 다음,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놓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컵에 따르고, 구워진 토스트 두 장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는 것처럼.

매일 반복한 일상인 것처럼.

벤에게 살인이 무미건조했음을 덤덤하게 풀어냈다.

목소리만 담담했을 뿐.

표정과 몸짓으로 호흡을 가져가며 절묘한 타이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백 마디의 설명 보다 다른 것들로 인물을 묘사할 수 있어야 좋은 연기라고 한다.

말투, 표정, 사소한 습관의 반복 등.

그 인물의 성격, 사회적 지위, 처한 상황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해리슨 노튼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로는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 자기 것으로 체화한 다음 표현하는 타입이다.

학구적인 배우일 수밖에 없기도 했고.

예일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영향 때문이다.

은근히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또한 연기와 영화 예술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편이다.

그 때문인지 이전 삶에서는 상업적인 블록버스터를 기피하는 편이었다.

아직은 할리우드에서 그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디렉터 류, 난 얼마 전 패러마운틴이 준비 중인 영화에 오디션을 봤다고 말했어요. 그 배역과 <The Killing Road>의 벤이란 인물이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프라이멀 피어>.”

“....난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해리슨은 분명 그 영화에서 배역을 따낼 겁니다. 확신합니다.”

“......?”

“당신처럼 준비된 배우를 누가 퇴짜를 놓을 수 있을까요.”


해리슨 노튼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성격이 까다로운 것은 스타가 된 이후에나 표출되는 것이고.

현재는 그저 사회물정 잘 모르는 이십 대 후반의 신인 배우일 뿐이다.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거절하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게 당신 영화도 흥미롭지만, 할리우드 데뷔도 커리어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직 애송이인 주제에 기회를 차버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해리슨 노튼은 당당했다.


“패러마운틴의 영화와 내 영화와 전혀 다른 캐릭터라면 문제가 되지만, 이중인격 캐릭터라면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중인격과 사이코패스는 다르지만.”

“......!”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오너라고 하더니 타 스튜디오가 준비하는 영화까지 꿰고 있는 모양이다.

해리슨 노튼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비밀유지조항이 신경이 쓰였다.


“메이저 영화를 하기 전 스스로 캐릭터 연구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내 작품에 들어온 다면 내 쪽에서 사양입니다.”

“....음.”

“내가 학생 신분이라고 해서 작품까지 학생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난 프로들과 함께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The Killing Road>를 절대 낮춰본 적 없어요.”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합시다. 차후에 자리를 만들어 더 진솔한 대화를 나눠 봅시다.”

“언제든지. 저는 노호 지역의 시그니처 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시간 되면 보러오세요.”


감독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자고 했다.

구부능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리슨 노튼이 배역을 따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작가의말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PS. 니름님, 바람으로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진도 빼는데 속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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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Collapse. (4) +6 22.08.05 5,251 167 22쪽
241 Collapse. (3) +10 22.08.04 5,276 163 27쪽
240 Collapse. (2) +9 22.08.04 5,065 144 23쪽
239 Collapse. (1) +7 22.08.03 5,413 165 23쪽
238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5) +8 22.08.02 5,255 169 22쪽
237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4) +6 22.08.01 5,316 163 22쪽
»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3) +7 22.07.30 5,424 156 24쪽
235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2) +2 22.07.29 5,331 160 24쪽
234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1) +5 22.07.28 5,532 148 26쪽
233 대박 축하한다! (2) +5 22.07.27 5,693 152 24쪽
232 대박 축하한다! (1) +10 22.07.26 5,612 156 21쪽
231 OK할 때까지..... +7 22.07.25 5,417 151 25쪽
230 배고픈 놈이 이긴다. (4) +14 22.07.23 5,485 168 26쪽
229 배고픈 놈이 이긴다. (3) +9 22.07.23 5,165 135 21쪽
228 배고픈 놈이 이긴다. (2) +7 22.07.22 5,388 158 22쪽
227 배고픈 놈이 이긴다. (1) +10 22.07.21 5,548 166 26쪽
226 후회가 남지 않게! (3) +4 22.07.20 5,552 162 28쪽
225 후회가 남지 않게! (2) +10 22.07.19 5,647 151 27쪽
224 후회가 남지 않게! (1) +7 22.07.18 5,721 162 26쪽
223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3) +4 22.07.16 5,774 155 22쪽
222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2) +6 22.07.15 5,607 159 22쪽
221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1) +5 22.07.14 5,567 171 21쪽
220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3) +5 22.07.13 5,772 170 28쪽
219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2) +4 22.07.12 5,705 167 27쪽
218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1) +2 22.07.11 5,842 160 23쪽
217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4) +4 22.07.09 5,832 144 24쪽
216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3) +4 22.07.08 5,773 164 23쪽
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5,837 16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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