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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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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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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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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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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후회가 남지 않게!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배창훈 감독이 WaW 픽처스를 찾아왔다.

결국 <퇴마기록> 연출제의를 받아들였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라도 있으세요?”

“.......”

“연이은 흥행부진 때문에요?”

“하나의 계기는 됐지. 승승장구하던 내가 이렇게 금방 무너질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보여준 거잖아. 내가 창작의 원천을 새롭게 찾지 않으면 얼마든지 도취하고 게으르고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아. 새로운 창작의 원천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준 것 같아.”

“사람들이 제게 영화감독이 될 녀석이 너무 산업에 종속되었다고들 해요. 전형적인 기업가 마인드라고 하더라고요.”

“영화가 돈이 드는 예술이잖아. 제작자나 투자자하고 같이 잘 맞아야 하지. 하고 싶은 작품은 많은데.... 그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하고. 그런 것까지 조건이 맞춰져야 하기 때문에 더구나 더 어렵고 뭐 그렇지.”


배창훈 감독이 다소 횡설수설했다.

마치 연출을 안 할 것처럼 했다가 승낙한 것이 민망했던 모양이다.


“제가 주장하는 것이 대중영합주의에 타협하자는 게 아닙니다.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적응을 하자는 거죠. 타협은 감독이 가진 기본까지 흔들릴 정도로 상업성에 양보하는 것이고, 적응은 본질은 지키면서 작업을 해 나가는 거죠. 때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영화는 대중성을 의식해서는 제대로 만들 수 없잖아요. 지금 시점에서 <꼬방동네 사람들> 찍겠다고 하면 누가 돈을 대겠어요. 환호와 박수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을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봐요.”

“내 별명이 ‘기름틀’이야 이 사람아. 참깨만 있으면 짜내는 능력이 있다. 이런 거지. 하하.”

“감독님은 작가라는 칭호에 연연하지 않으시잖아요.”

“류 감독도 잘 알겠지만, 작가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 누벨바그의 프랑수아 트뤼포였잖아. 그 이전에 알렉상드르 아스트릭이 ‘카메라 만년필설’로 영화예술론을 주장했고.”


‘카메라 만년필설‘은 간단하게 말해서 영화예술도 소설가가 펜으로 글을 쓰듯이 자기 창작 작업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기 세계가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식에서 테마를 잡아 창작을 하면 작가라고 분류를 하는 것이잖아. 그런 의미라면 나는 멜로를 찍든 사극을 찍든 드라마를 찍든 테마를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니까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

“예술과 종교는 같은 것이다. 둘 다 사랑이다.”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이 한 말이다.

배창훈 감독이 술자리에서 자주 언급하는 말이다.


“본질적인 사랑이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솔직히 우리나라 평론가들은 배 감독님이나 이명수 감독님 같은 개성이 뚜렷한 감독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구는 것 같아요. 영화팬들이 그런 평론가들의 글에 경도되어 한국영화를 더욱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평론가들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감독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적은 것 같아. 자기의 고정관념을 허물지 못해. 그걸 일단 접어놓고 한번쯤은 감독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두 셋이었나....? 거의 없는 것 같아. 좀 더 영화에 대해 잘 이해가 될 텐데.”

“어떤 평론은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비평을 썼을 때 그 작품을 모델로 한 자기 작품을 만드는 것 같아요. 이번 <젊은 남자>의 경우도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감독님이 전하려는 메시지와 이야기를 이해하고 거기에 숨어 있는 뜻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재료로 한 자신의 평론 작품을 쓴 것 같아요.”

“평론의 함정이지. 자아도취야.”

“이번에 제가 조금 충격 받은 비평이 있었어요.”

“<젊은 남자>에서?”

“예.”

“자네는 이번 영화를 꽤 좋게 봤나봐?”

“아니요. 많이 실망했어요.”

“......”

“흥행 성적이야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제가 가장 황당했던 것은 감독님의 테마가 너무 진부하다는 지적이에요. 사랑이란 진부한 소재에 왜 집착하냐는 말을 평론가가 중앙지 칼럼에 버젓이 쓰는 걸 보고. 우리나라 영화 평론에 좌절했네요.”

“자주 듣는 말이야. 하하.”


배창훈 감독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사랑이란 테마를 진부하게 풀었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 소재로서 진부하단다.

사랑을 소재로 제작되는 콘텐츠가 다른 소재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음에도.


“새롭지 않은 것 하고 진부한 것 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냉소적인 것은 새로운 것인가요? 비열하고 뒤틀린 인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새로운 것인가요? 그건 아니라는 거죠.”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기자들 중에 내 돈을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촌지를 얼마를 주느냐에 따라 기사가 달라졌어. 몇몇 기자들은 필요할 때 용돈 받듯 돈을 받아가면서도 기사를 안 써줬지.”

“홍보팀에 촌지관행을 타파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를 내린지 3~4년 됐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가 보더라구요.”

“앞으로 자네도 영화하면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이야. 그런 거 다 신경 쓰다보면 영화 못 해.”


류지호도 잘 안다.

이전 삶에서 비평의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삼류감독이기도 했고.

암튼 한국의 대중예술분야 비평 수준이 너무 떨어졌다.

그럼에도 한 가닥 희망이 보이고 있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던 세대가 동인지 <프레임>을 발행해 비평에 나섰고, 동서영화연구회 출신들의 활약으로 인해 충무로 비평 판도에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온 김에 계약서 쓰지.”

“계약서 검토와 조율 없이요?”

“별 거 있으려고.”

“WaW 계약서는 많이 달라요.”

“......”

“변호사와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긴 한데... 당장 싸인 하지 마시고 권 피디로부터 충분히 계약서 내용에 대해 설명 들어보세요.”


할리우드 연출계약서처럼 100페이지가 넘는 빡빡한 계약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4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각종 항목이 들어가 있다.

특히나 신경 쓴 조항들은 신의성실의 의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게으른 한국감독이 의외로 많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마음대로다.

제왕적 감독 시스템이다.

류지호는 연출계약서에 출퇴근시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을 주문했다.

심지어 식사와 간식 시간에는 촬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항목도 넣어 놨다.

감독 본인이 입맛이 없거나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서 배우와 스태프의 식사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충무로 촬영현장에는 비일비재하다.

감독이 굶어가면서 촬영을 하겠다면 배우와 스태프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인권침해다.

계약서에만 써놓고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다.

당연히 벌금 규정을 넣어 놓았다.

이는 제작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감독이 어기면 감독이 벌금을 내야하고, 프로듀서가 피치 못하게 식사와 휴식을 보장하지 못할 일정을 짰다면 프로듀서가 벌금을 물어야 하는 식이다.

WaW 픽처스와 계약하는 감독과 스태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 일쑤다.

여전히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마인드였으니까.

배우들은 반응이 다소 엇갈렸다.

이제야 제대로 대우를 받는다고 좋아하는 배우도 있고, 할리우드 흉내를 내며 허세를 부린다고 비아냥거리는 배우도 있다.

암튼 할리우드처럼 배우의 애완견 사료까지 계약서에 넣어줄 순 없다.

하지만 제작사와 배우 및 스태프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계약을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 ✻ ✻


감독이 정해지면서 미뤄두었던 <퇴마기록> 원작자와의 식사자리가 만들어졌다.

반주로 마신 술로 살짝 취기가 오른 이승혁 작가가 우려를 드러냈다.


“솔직히 제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진짜 자신 있으십니까?”

“할리우드만큼 완성도는 못 뽑아냅니다. 제작비, 인프라, 제작환경 등 비교가 안 되니까요.”


류지호는 돌려 말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다.


“혹시 에피소드 하나만 발췌해서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국내편과 세계편을 한데 묶어서 압축한 다음, 새로운 영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겁니다.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세편 정도가 나눠지면 제일 좋습니다.”

“그걸 저더러 해달라는 겁니까?”

“그럴 여력이 된다면.”


멈칫.


전혀 생각도 못한 제안이라 이승혁 작가가 말을 잊지 못했다.


“배 감독님과 함께 영화판 소설을 써주면 좋죠. 글쟁이는 글로 말하고, 영화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거니까요. 사실 제작팀이 작가님 소설을 수백 번 읽어본 들 제대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줄거리, 스토리 부분의 참여를 보장해 준다는 게 그런 말이었습니까?”

“각본에 참여해도 되고, 방금 말한 것처럼 아예 영화판 소설을 써줘도 됩니다. 영화 쪽 시나리오작가와 감독님이 원작소설을 각색할 경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내 짜깁기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원작에서 몇 가지만 따오는 것에 그칠지도 모르고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쓸 필요는 없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은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거든요.”

“저도 영화에 크게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과 못하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제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요.”


이전 삶에서 <퇴마기록>이 영화화 될 때 이승혁 작가가 많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소설과 영화는 다른 분야고 작업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원작자를 영화화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시킨 것은 제작진의 근거 없는 선민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원작자는 작은 소도구까지도 많은 자료조사와 고증을 거쳐 소설 속에 담았다.

영화판에서 그런 것들을 모두 무시해버렸다.

결정적으로 제작진이 판타지 장르의 이해도가 떨어졌다.

소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얕은 상황에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

결국 괴상한 졸작이 탄생해버렸다.


“혹시.... 배우들에 대해 제가 의견을 제시해도 될까요?”

“일단 배 감독님이 안정기 선배님과 친하십니다. 박 신부를 맡기면 어떨까 하는데... 작가님은 어떻습니까?”

“...음.”


이승혁 작가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작가님이 소설 속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의 체격, 몸매, 의상, 분위기는 묘사했어도 얼굴생김새는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놓지 않았더군요. 박 신부 나이 대에 연기력이 되면서 관객에게 거부감이 없는 배우는 안 선배님 외에 특별히 떠오르지 않는군요. 물론 큰 키에 근육질 마초 남자는 몇 명 있습니다만. 그들이 박 신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인간적 딜레마의 복잡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배창훈 감독이 적절하게 대화를 끊었다.


“아직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캐스팅을 논할 건 아니라고 봐.”


류지호가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이 작가.”

“예. 감독님.”

“혹시 주인공들의 백스토리를 간략하게 써줄 수는 없나?”

“백스토리요?”

“소설에 들어있지 않은 주인공의 역사라고 해야 할까.... 그 캐릭터가 소설이 시작될 시점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전사가 되겠지. 가량 현암은 여동생을 악령에게 잃고 복수심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추상적이잖아. 그는 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이런 짓도 해봤다 그러면 그것들이 90년대 현재에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씨익.


류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감독이 판타지장르에 이해도를 높이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배 감독처럼 원작소설부터 접근한다면.

이야기에 접근하는 첫 번째 단계이자 최종 단계는 인물(캐릭터)이다.

대체로 이야기의 성패는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생명력을 부여하는가에서 갈린다.


“....음.”


이승혁 작가의 머릿속에는 주인공의 삶이 모두 들어있다.

굳이 문서로 작성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술술 이야기 할 수 있다.

류지호가 끼어들었다.


“말로 해주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조금 번거롭더라도 대략적인 전사를 정리해주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작가님은 현암의 특별한 버릇, 식습관, 혐오하고 좋아하는 것 등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나와 배 감독님은 소설만 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어요. 그저 우리가 읽은 감상에 따라 판단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되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원작자 사이의 첫 단추가 잘 못 꿰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승혁 작가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작가 소설을 그대로 스크린에 복사해서 옮길 생각이 없어. 소설가가 언어와 문자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나와 같은 영화감독은 영상이 언어이자 문자야. 이작가가 소설 속에 표현한 분위기와 설정 그리고 이야기는 그대로 영화로 옮겨지게 되겠지만, 주제의식과 정서는 달라질 거야.”


이승혁 작가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코미디영화나 멜로만 찍지 말아주세요.”

“하하하. 배 감독님이 괴상한 영화를 찍긴 하셨죠. 멜로영화는 원래 잘 찍으시고. <퇴마기록>은 네 명의 주인공의 긴 여정을 다루고 있어요. 배 감독님 영화의 라이트모티브에는 여행, 방랑의 여정이 있죠. <고래사냥>, <안녕하세요 하나님>이 대표적이네요. 그 외 영화들도 인물들이 여행을 나서서 고난과 역경을 거친 뒤 성장 내지 각성을 얻고 돌아오는 신화-동화의 서사적 구조 속에서 작동하죠. 최근에 작업하신 <젊은 남자>도 패션모델을 꿈꾸는 청년의 방랑 내지는 방황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번에는 파국을 맞이하면서 이전까지 배 감독님이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던 성장과 성찰이란 태도에서 다소 모호해진 면이 없진 않았지만.”


류지호가 자신의 의견을 확인받기라도 하듯 배창훈 감독을 쳐다봤다.

배창훈 감독은 류지호가 아니라 이승혁 작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적당한 유머는 극의 리듬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필요해. 멜로부분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서 억지로 넣고 싶진 않아. 현암과 승희 사이에서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속으로 깊이 파고 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건 차차 고민해 보자고.”

“예. 감독님.”


권영균이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대화를 한 템포 끊었다.


“자, 술 식습니다. 일단 건배 한번 하시죠.”

“서둘지 말고, 충분히 의견을 조율하시고 책 작업에 들어가세요. 어차피 영화제작 인프라를 미국에서 들여와 WaW에 세팅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류지호는 <퇴마기록> 제작팀을 재촉할 생각이 전혀 없다.

먼저 <은행나무 침대>가 흥행에 성공해 판타지 장르가 한국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제작 인프라와 관련해서도 할리우드에서 들여와야 할 것도 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다. 프로듀서는 그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교과서적인 말이다.

실제로 교과서적으로 일하는 프로듀서는 거의 없다.

프로듀서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충무로는 여전히 감독의 시대다.

기획 프로듀서란 이름으로 등장한 젊은 영화인들의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이들 1세대 프로듀서는 기본적인 프로듀서 업무부터 시작해, 영화사의 제안이 작가(감독)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들은 감독을 영화의 중심에 놓고 생각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물론 파격성이 지나칠 경우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자고 설득한다.

그러자면 프로듀서가 감독 못지않은 안목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당장 완성도가 높지 않더라도 싹수 있는 시나리오를 골라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초창기 기획 프로듀서들이 대부분 극장의 홍보 담당자로, 연출부의 막내로 출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작사 경영자 마인드가 아니라 창작자 마인드가 강했다.

그 같은 프로듀서가 내놓는 제안이라면 감독이 간섭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1991년 공식 단체로 출범한 한국기획실모임은 프로듀서 시스템을 충무로에 정착시키는 전진기지다.


“고약한 놈.”

“너무 나대.”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하는데....”


기성 영화인들이 벼르며 하는 말들이다.

구체제 기성 영화인들은 젊은 영화인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을 류지호라고 보고 있다.

사실 충무로 기획 프로듀서들의 맏형은 2000필름의 이춘영이다.

충무로 변화를 이끌고 있는 것은 류지호가 아니라 이춘영같은 현장 영화인들이다.

현재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충무로 구체제와 실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개혁을 강조하는 영화운동 진영 간의 본격적인 충돌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1~2년 안에 충무로 헤게모니를 놓고 신구세대가 대립하기 시작한다.

<애니깽> 대종상 논란은 2000년 이후 영화운동 진영이 충무로를 장악하게 되는 과정의 서막이다.

류지호가 지펴놓은 불씨로 인해서 이전 삶보다 훨씬 커다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류지호는 충무로의 변혁기를 비교적 느긋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됐다.

신체제로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그들이 지나치게 재벌 자본에 의존하지 않도록 WaW 픽처스가 중심을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동네는 용산구 한남동이다.

한남동이 ‘부촌 중의 부촌’으로 대접받는 것은 오성가 오너들이 대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남동 오성생명 사옥 주변엔 상당수의 오성가 오너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언론 노출을 몹시 꺼리는 오성그룹 회장이 언론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곳도 한남동에 자리 잡은 오성 영빈관 ‘승지원’이다.

승지원에서 이 회장은 국내 대기업 총수와 회동하거나 외국 주요인사 면담, 계열사 사장단 회의 등을 연다.

오성그룹 회장 주택을 중심으로 한남동엔 200여 가구의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다.

보통은 대지가 200~400평에 이르는 대가(大家)들이다.


슥슥.


류지호가 부동산매매계약서에 서명했다.

부모님이 열심히 발품을 팔아가며 고르고 골라 선택한 주택은 대한민국 대표 부촌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위치했다.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대지 200평 지하1층 지상 2층의 연건평 110평 주택이다.

평당 1,300만 원에 구입했다.

부동산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 주 이하로 보유하고 있던 자잘한 주식 종목들을 처분했다.

며칠 만에 20억 대 현금이 만들어졌다.

은행대출 없이 현금으로 주택매입을 마칠 수 있었다.

주택매매계약은 다온법률사무소가 맡아서 처리했다.

신효정이 축하를 건넸다.


“서른도 안 돼서 한남동에 입성하셨군요.”

“이 동네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 같네요.”

“금방 이 동네 부자들과 교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어디 족보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벼락부자를 진골 부자들께서 상대해 주겠어요?”


한국의 재벌들은 혈연, 혼맥, 학연 등을 포함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5대 재벌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리면 대한민국 유력 집안이 다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류지호는 그런 부분에서 매우 이질적이다.

재벌을 포함해 기득권 누구와도 어떤 접점이 없으니까.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빈자들은 빈자들끼리 모여 사는 것은 세계 도시들의 보편적 현상이죠. 어차피 같은 한 국가에서 소속되어 있어도 1%의 사회와 99%의 사회는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감독님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LA만 보더라도 대지진과 경기침체로 서민들은 아우성인데, 베벌리힐스 같은 부자동네는 호황이죠.”


매매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류민상을 힐긋거린 신효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께서는 날이 좀 풀리고 이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요?”

“리모델링과 인테리어 공사는 우찬이 아버님 업체와 계약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막내 전학문제도 있고, 리모델링이나 이사 부분도 두 분이 편하실 대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

“집사는 어떻게.....?”

“집사까지는 오버하는 것 같고. 나래안전 통해서 가사도우미 분과 운전기사 겸 궂은 일 도와줄 비서를 고용해야겠죠. 그 부분은 의장 비서실과 아버지가 의논해서 진행하면 될 것 같네요.”


신효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신변이 되었든 누구라도 좋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께 공식행사장이나 파티 혹은 식사초대에서 에티켓을 알려주도록 해요. 서양식 식사 에티켓은 내가 알려드리긴 했는데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 두 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실 수도 있으니까.”

“비서실에 의전비서관 없습니까?”

“아. 그 생각을 못했네요. 다온에서 적당한 사람으로 의전 비서 추천 해주세요.”


JHO Company 이사회 의장 비서실 제니퍼 허드슨이 의전비서관이다.

그녀의 업무 중에는 보스인 류지호의 매너컨설팅도 있다.

여의도 비서실에는 의전비서가 따로 없었다.

이번에 채용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임직원들의 매너컨설팅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인재가 한국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CS교육까지 가능한 비서라면 연봉을 얼마를 주던지 무조건 채용할 게요.”

“.....CS?"

"Customer Satisfaction 또는 Customer Service라고 하죠. 단순히 친절마인드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할 만한 사람이면 좋겠네요. 가온과 G.O.M 또 아네모네 프랜차이즈의 고객서비스 기틀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몇 달 후 극장업을 시작하는 WaW 픽처스로서는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다.

기업이 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할 것인지, 고객이 받고 싶은 서비스를 할 것인지.

그 첫 단계가 CS 전략수립과 실행이다.


“알겠습니다. 대기업 비서실 출신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꼭 외모가 수려한 젊은 여성이 아니어도 됩니다. 출산이나 기타 사유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지만 의전과 CS 양쪽에서 전문가라면 환갑을 넘긴 할머니·할아버지만 아니면 연령은 상관없어요.”

“이사장님이 재단 업무를 보시기 전까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온법률사무소는 수년간 헤드헌팅을 하다 보니 나름 데이터와 노하우가 쌓였다.

재벌 대기업에서까지 의뢰가 들어올 정도다.


“다온이 다른 법무법인과 합병을 준비하고 있다고요?”

“중견 로펌 한 곳과 합병을 논의하고 있긴 합니다.”

“괜찮겠어요?”


법조계에서 여성이 유리천장을 뚫기란 제로에 수렴한다.

신효정이 지금까지 다온법률사무소를 이끈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감독님이 경고한 경제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전문화·분업화를 해야 하니까요.”


류지호는 미국의 연속적인 금리인상 조치에 따른 중남미 경제위기 관련 리포트를 한국의 사업체들 임원진들에게 발송한 바 있다.

남의 불행은 나에겐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다온법률사무소 역시 한국의 경제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로펌의 업무 중에 기업설립, 상장, 화의, 파산, 청산 등도 있으니까.

지금 이 시기 한국에는 M&A 시장 자체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외환위기가 찾아오게 되면 서구 선진국 기업과 투자사들이 한국으로 물밀듯이 들어올 터.

수 백 년의 유구한 M&A 역사를 축적해온 선진국 기업과 투자사들이 금융 위기로 갑작스럽게 생겨난 초기 국내 M&A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소위 4대 대형 법무법인조차도 외국 투자자들이 사용하는 M&A 실사 방식이나 계약서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신효정과 다온법률사무소는 미국의 중견로펌 캐서린 & 윌슨 로펌과 제휴를 맺고 있는 것은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글로벌 로펌에서 경험을 쌓은 한국계 변호사들을 대거 채용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다온법률사무소 변호사들이 한국의 ‘1세대 M&A 변호사’ 타이틀을 달지도 모르겠네요.”


류지호의 말을 들은 신효정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일명 ‘채권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금리인상 릴레이의 여파가 중남미 국가를 넘어서 아시아까지 밀려오고, 한국까지 위험에 빠진다면 다온법률사무소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금융·법률 자문, 헤드헌팅, M&A 전문화·고도화, 기업청산까지.

국내 최고 로펌이라는 Young&Soo가 특허 부분으로 크게 성장한 것처럼.

다온이 M&A 부분을 통해 메이저로 올라설 수도 있다.


“좋은 결과 있길 기원해요.”

“감사합니다.”


어릴 때는 보모 같았다가 이제는 수족(手足)처럼 구는 신효정이다.

그녀가 최고의 여성변호사가 될지 알 순 없다.


‘꼴페미에 빠지거나 정치권만 기웃거리지 말기를.....’


한남동에 이사할 주택매매계약을 마치고 리모델링까지 챙기자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잠시 다니러 왔다가 본의 아니게 여러 일을 챙기며 체류시간이 길었다.

겨울학기 개강을 앞두고 류지호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 ✻ ✻


한국이라면 추위 때문에 두꺼운 옷과 목도리로 싸매고 다니겠지만, 눈을 볼 수 없는 LA 지역의 겨울은 한국의 봄가을 정도 날씨다.

한 낮에는 섭씨 20도까지 올라가고, 저녁에는 10~15도 선을 유지한다.

류지호는 낮엔 민소매 차림으로 다닐 때도 있고, 얇은 셔츠를 걸치기도 했다.

밤에 쌀쌀한 기분이 느껴질 때만 간편한 점퍼나 후드티를 입었다.

UCLA는 여전했다.

매일 밤 학교 밖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파티가 열린다.

도서관은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들로 빈자리가 없다.

주말과 휴일이면 외부에서 방문한 관광객들이 캠퍼스 투어를 한다.

웨딩, 광고, TV시리즈, 영화 등 각종 촬영팀이 북적거린다.

고풍스런 건축양식을 모티브로 지어진 UCLA의 건물들 가운데, 1929년 지어진 파웰 도서관이 특히 촬영지로 각광을 받았다.

물론 재학생들의 단편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장난삼아 만든 단편영화 <퀴즈>가 한국유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것 정도가 류지호에게 3년 전을 떠올리게 할 뿐.


“3년 전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정작 달라진 것은 류지호 본인이다.

여자 친구와 이별한 것을 포함해 많은 것들이 달라져서 학교로 돌아왔다.

3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졌다.

할리우드에서 영향력 역시 알게 모르게 확장되어 있다.

입대 전에 행사했던 영화선택권리 역시 올해부터 다시 행사할 수가 있다.

지난 LA폭동을 전후로 해서 설립한 아동청소년 센터와 저소득층장학재단 활동도 활성화되어 있어서 류지호는 남가주의 유력한 청년리더 대접을 받고 있다.

각종 행사, 기념식, 강연 등 각계각층에서 류지호를 모시려고 안달이 나 있다.

모두 사양하고 있다.

소정의 사례금을 준다고 한다.

그럼에도 졸업 전까지는 선별적으로 외부활동을 할 생각이다.


“태권도는 3단에서 멈추려고 했는데.....”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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