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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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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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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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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OK할 때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에게 영화 관련된 전공준비 과목은 교수가 요구하는 서적만 열심히 읽으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교양과목만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었다.

류지호는 장학금을 받을 생각이 없다.

과수석 타이틀 역시 관심이 없다.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한다고 해서 과수석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류지호는 영화를 전공하고 안전하게 졸업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으아아...!”


류지호가 강의실을 빠져나오면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치열했던 중간시험이 끝났다.

어떤 시험이든 항상 힘들고 짜증나는 것이 시험이다.

잠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여유를 즐기고 있는 류지호다.


“지호!”


복도 맞은편에서 금발의 안경을 쓴 백인 남학생이 인사를 해왔다.

TV·영화과 4학년 로니 앤더슨이다.


“헤이. 로니~”

“다음 강의까지 시간 좀 있어?”

“응. 어디 로비로 갈까? 아니면 카페테리아?”

“로비로 가자.”


두 사람이 층마다 마련해 놓은 로비의 소파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소파로 돌아온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졸업 작품은 잘 나왔어?”


꿀꺽!


로니가 속이 타는지 콜라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거 물 아냐. 탄산.....”


캔을 반쯤 비운 로니가 트림을 했다.


“꺼억!”

“생긴 건 교양 넘치게 생겨서, 하는 짓은.....”


로니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던졌다.


“나 좀 도와줘.”

“뭔데?”

“1학년 때 스테디캠 좀 다뤄봤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한동안 신나게 가지고 놀긴 했어.”

“네가 찍은 단편영화 봤어. <Life Goes On>이었나?”

“멕도웰 교수가 수업시간에 상영했나 봐?”

“미국영화사 수업에서 봤어.”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랬구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찍은 것이지, 연습이라거나 개인소장하려고 영화를 찍지 않았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화를 봐주면 좋았다.

안 좋은 평가를 듣고, 설령 욕을 먹을지라도.


“4학년 촬영수업에 스테디캠 실습도 있는 걸로 아는데?”

“있긴 해.... 근데 거의 요식행위야.”


<Life Goes On>이 촬영이 끝나고, 스테디캠을 학교에 기증했다.

UCLA 학생들이 스테디캠 촬영의 맛보기라도 경험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교직원들이 스테디캠 사용법을 잘 몰랐다.

다루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장비보관실에서 꺼낼 일이 별로 없었다.

촬영강의를 하는 교수 역시 전문 오퍼레이터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룰 정도는 아니다.

지난 3년 간 스테디캠이 거의 사용될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사용법을 배웠다고 해도 졸업 후에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로 활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반 시네마 카메라와 스테디캠을 번갈아가며 잡으면 체력적으로도 전문성 면에서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 없다.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교수 입장에서도 학생들에게 스테디캠을 권장하지 않았다.


“졸업작품에서 스테디캠 쇼트를 찍을 생각이야?”

“이미 찍어봤어.”

“근데 나더러 도와달라고?”

“촬영 하던 지미의 허리가 나갔어.”


류지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 허리가 나가?”

“아, 허리를 못 쓰게 됐다는 뜻이 아니라, 한동안 촬영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단 뜻이야.”

“그것 참, 유감이네.”

“스테디캠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지미 밖에 없어. 또 한 사람은 지호 바로 너야.”

“나도 한 동안 스테디캠을 다뤄보지 않았어.”


로니가 예상했다는 듯 다소 실망한 어조로 물었다.


“무리겠지?”

“.....아마도?”

“젠장!”


몹시 아쉬워하는 로니를 향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네 영화에 꼭 필요한 쇼트야?”

“응.”

“핸드헬드는 안 돼?”

“역동적이면서 안정감 있는 쇼트를 원해.”

“달리는?”

“평면적이야. 난 조금 더 입체적인 쇼트를 만들어 보고 싶어.”

“지금 스크립트 가지고 있어?”

“잠시만.”


로니가 가방을 뒤져 스크립트를 꺼내 건넸다.

스크립트에 지문과 대사 사이에 줄이 그어져 있었고, 색깔 펜으로 커트 넘버와 화면 사이즈, 앵글이 표기되어 있다.

여백에는 빼곡히 메모가 되어있다.

류지호가 보고 있는 페이퍼가 로니의 슈팅스크립트인 모양이다.

학생들은 스토리보드를 그리지 않는다.

슈팅스크립트로 촬영을 진행하는 편이다.

학생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 역시 영화 전체를 스토리보드로 그리지 않는다.

액션이나 복잡한 동선 혹은 카메라 무빙이 들어가는 장면만 스토리보드를 만든다.

풀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분야는 광고와 애니메이션 정도다.

대화 장면까지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한국영화와 다른 점이다.

이유는 별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는 대화 장면에서까지 최소 2대의 카메라로 촬영한다.

일찍부터 현장모니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단순한 쇼트 구성인 대화 장면을 위해 스토리보드를 그릴 이유가 없다.

스토리보드 작업 인건비도 만만치 않았고.

류지호는 그림 실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영화에서 스토리보드를 그렸다.

1학년 때 친구들이 류지호의 작업 스타일에 반했던 것 중에 하나가 영화 전체를 스토리보드로 그려온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류지호의 그런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감독이 이미 편집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는 것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찍을 것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음.”


로니의 졸업작품은 성적이란 등급이 매겨짐으로 해서 학생 간 차별이 존재하는 교육제도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학교 성적으로 계급이 매겨져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프러포즈조차 할 수 없는 남학생.

그런 남학생이 총기난사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파국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툭하면 학내 총기사고가 발생하는 미국에서는 그다지 비현실적인 설정은 아니다.

물론 미래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직까지는 학교에서까지 총기난사가 수시로 벌어지지는 않는다.


“여기 남자주인공이 권총을 휴대하고 강의실로 들어가 교수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스테디캠을 사용하고 싶은 거야?”

“맞아.”

“몇 분이야?”

“1분 30초에서 2분.”

“이 영화 메인 로케이션이 UCLA이야?”

“도서관, 기숙사, 강의실... ”

“스테디캠 시퀀스만 찍으면 끝?”

“강의실 장면 몇 개 남았어. 내가 촬영해도 돼.”


류지호는 스크립트를 보기 전만 해도 거절하려고 했다.

막상 스크립트를 읽고 머릿속으로 장면을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카투사로 AFKN에서 근무하며, ENG 작업을 수도 없이 했다.

물론 뉴스 인터뷰, 미군 캠페인 영상 등 특별히 어려울 것 없는 작업이었지만.

간혹 웨딩비디오도 찍었다.

3년 동안 촬영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3년의 공백으로 스테디캠 운용 감각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촬영감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내게 이틀 정도만 시간 줄 수 있어?”

“지금 결정해주면 좋겠는데.....”

“당장 촬영은 힘들어. 나도 준비가 필요해.”

“장비나 어시스턴트는 다 대기 중이야. 그냥 와서 찍으면 돼.”

“스테디캠 촬영은 핸드헬드와 비슷하면서 달라. 카메라 대신 몸을 움직이는 건 같아도, 장비를 달고 하는 촬영이야. 체력, 지구력, 순발력, 촬영센스 전부 점검해 봐야 한다고.”

“이틀로 되겠어?”

“응.”

“좋아, 이틀이야. 졸업작품 제출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야 하거든.”

“대신 촬영은 주말에 하는 거다?”

“물론이지. 네게 강의까지 포기하라고 요구할 순 없으니까.”

“알겠어.”


류지호는 이틀 간 장비실에서 스테디캠의 조립부터 착용 그리고 운용까지 감을 익혔다.

쉽지 않았다.

스테디캠을 개나 소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으면 전문분야가 아니다.


“그래도 1분 정도는 어찌어찌 운용해볼 수는 있겠네.”


하루 촬영이라 시간적으로 부담이 없다.

오랜만에 하는 영화촬영이라 기대도 됐다.

평소 운동도 빼먹지 않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근력, 체력, 지구력은 문제가 없다.

촬영감각도 문제없었고.

물론 난이도가 높으면 류지호는 포기할 생각이다.

자신의 작품도 아니다.

안 되는 일에 괜히 고생을 사서할 필요는 없다.


✻ ✻ ✻


“헤이!”

“어서 와~”

“Whizz-Kid....!”


할리우드 매체에서 류지호에게 신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후로 지인들이 친근함을 표하면서 동시에 놀리기도 할 겸 ‘Whizz-Kid’라고 부르곤 했다.

좀 더 직설적으로 ‘Prodigy’나 ‘Talented Child'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매튜 그레이엄이나 모리스 메타보이 같은 이들이 주로 그렇게 놀리곤 한다.

암튼 류지호가 나타나자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하는 학생들이 일단 반기긴 했다.

다만 졸업반 남학생 몇 명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네까짓 게 스테디캠을 제대로 다룰 수야 있겠냐는 의심이다.

류지호가 알 바 아니다.

자신은 ‘땜빵‘, 고상한 말로 용병으로 참여한 것이니까.


“로니.”

“응?”

“내가 찍을 장면의 전 커트가 어떻게 돼?”

“스톤이 건물로 걸어와 안으로 들어가는 롱 쇼트. 스테디캠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스톤을 따라가면서 찍으면 돼.”

“내가 찍게 될 전 커트의 화면 사이즈와 앵글 좀 알려줘.”

“날 따라와.”


류지호가 감독인 로니를 따라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카메라가 이쯤에서 와이드로 찍었어.”

“그게 다야?”

“응.”

“두 커트만 더 찍어볼래?”

“두 커트?”

“내가 빈 화면을 잡고 있으면 스톤의 발이 프레임 인(Frame In) 되는 거야. 그리고 살짝 틸트업(T.U) 할 게.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권총을 숨기고 있는 몸의 어떤 부위쯤에서 끊을게.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스톤의 뒤통수 바스트 쇼트(B.S) 하나 찍어 두자.”

“......?”

“편집에서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돼.”

“롱 쇼트에서 바로 스테디캠으로 붙이면 튈 것 같아서 그래?”

“건물 로비로 들어오는 스톤을 롱 쇼트로 잡고 있다가 스태디캠이 다가가면 안 튈 거야. 그렇지만 내가 말한 걸 찍어두면 나중에 네가 조금 더 리듬감 있는 편집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음.”


로니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오늘 스테디캠 시퀀스만 찍으면 된다며? 간단한 걸로 너의 팀과 손발을 맞춰보려고.”

“그런 거야?”

“내가 제안한 커트는 특별히 리허설을 여러 번 할 필요 없어.”

“좋아. 애들에게 말해둘 테니까 넌 촬영준비 부탁해.”

“오케이.”


류지호가 스테디캠을 장비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촬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류지호의 미숙한 스테디캠 운용뿐만 아니라 배우와의 호흡, 포커스 풀러의 실수 등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돌발변수들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어쨌든 류지호가 제안한 두 커트를 촬영하는 데만 1시간을 훌쩍 넘겼다.

몇몇 남학생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류지호가 쓸데없는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재미있네.”


간단한 촬영부터 발동을 걸자 슬슬 <Life Goes On> 당시의 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레이첼이 생수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힘들지 않아? 너 되게 신나 보인다?”

“재밌으니까.”


레이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땀을 그렇게 흘리면서 재미있다고?”

“난 이 재미있는 걸 3년 동안 못 해봤어.”

“할리우드 영화 데뷔한다면서?”

“난 글만 썼어. 현장을 뛰진 않았지.”


레이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지켜보는 내가 다 힘들어 죽겠는데....”

“하하하. 즐기면 힘든 것도 못 느끼나봐.”


핸드헬드 촬영도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

스테디캠 촬영은 그것보다 훨씬 힘들다.

20kg을 넘나드는 카메라 무게와 함께 장비 자체의 무게 또한 무시 못 한다.

게다가 배우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

배우가 뛰면 스테디캠 오퍼레이터인 류지호도 덩달아 달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배우가 천천히 걷는다고 해서 스테디캠 오퍼레이터가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콘티에 따라서 배우의 주변을 빙빙 돌거나 배우의 얼굴을 촬영하며 뒷걸음질 쳐야 할 때도 있다.

몸에 꽉 끼는 답답하고 두꺼운 조끼에 카메라의 무게를 이겨낸다고 해도 배우나 스태프들의 NG가 계속돼 촬영이 길어진다면 짜증이 절로 난다.

하지만 류지호는 수차례 반복되는 리허설과 촬영 동안 실실 웃기만 했다.


“NG!"


주인공 스톤의 동선을 그리는 대략 2분짜리 컷을 장장 5시간 30분에 걸쳐 촬영했다.

아마 스무 번 이상 NG가 났을 것이다.

배우의 동선과 걷는 속도 등을 맞추기 위한 리허설 시간도 길었고, 2분이란 시간에 맞추려다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점도 많았다.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는 무턱대고 열정과 체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열정, 순발력, 힘, 지구력에 촬영센스도 있어야 한다.

스테디캠으로 촬영한 영상은 편집도 어렵다.

때문에 끊어지지 않게 한 흐름에 모두 촬영해야 한다.

계속해서 NG가 나자 스태프로 참여하는 학생들이 지쳐갔다.

로니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에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힘들어서 안 되겠어. 조금만 쉬었다 다시 찍자.”


류지호가 지친 시늉을 해보이며, 스테디캠 장비에서 카메라를 내렸다.

그리고 슬쩍 로니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말보로 담배를 한 대 피워 문 로니가 류지호에게 담배를 권했다.


“난 담배 안 피워.”


로니가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품기 시작하자, 류지호가 말을 꺼냈다.


“답답하지?”

“스톤이 자꾸 NG를 내니까.... 네가 더 답답하겠지.”

“스톤은 자신의 연기를 백퍼센트 보여주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 스톤에게 자꾸 NG를 낸다고 부담을 주면 과연 최상의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성과 없이 시간만 흘러가니까.... 애들한테 미안해서 그렇지.”

“지금까지 쉽게 영화 찍어본 적 있어?”

“지미가 무리하다 허리를 다쳐서, 너도 그렇게 될까봐. 그냥 프로를 불러야 했나?”

“NG 나는 걸로 날 걱정해 줄 필요 없어. 난 아직 에너지가 넘치니까.”


NG는 누구나 낸다.

스테디캠을 운용하는 류지호, 배우, 오디오, 분장, 조명 그리고 심지어 연출하는 감독까지.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테이크를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모두 다 OK할 때까지 촬영은 계속되는 것이다.

류지호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스태프를 향해 소리쳤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촬영 시작해 보자고!”


학생들도 계속 정신줄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는데 성공한 학생들은 일제히 류지호를 쳐다보았다.


“뭐 해? 나만 준비가 되었다고 촬영이 되는 건 아니잖아!”


류지호가 다시 장비를 걸치기 시작했다.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찌르르.


순간 전율이 일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욕구불만 같은 것이 있었다.

영화를 직접 만들지 못하는 아쉬움 같은 거다.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프로듀서로서 영화제작을 지휘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실제 촬영현장을 누비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은 이전 삶과는 백팔십도 달라져 있다.

감히 스테디캠을 다뤄볼 엄두도 못 냈었다.

지금은 16mm 카메라를 올려놓은 스테디캠을 제법 잘 운용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지치고 짜증이 가득한 어린 스태프들을 달래고 어르면서 능숙하게 현장 진행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기적이다.

삼류영화감독으로 낙인 찍혀 은퇴 아닌 은퇴의 기로에 섰을 때 죽음과 함께 찾아온 기적이 불러 온 새로운 삶이 선사한.

류지호가 촬영시작 지점으로 이동해 외쳤다.


“난 스탠바이야!”


잠시 어수선하고 우왕좌왕 되던 현장 분위기는 다시 한 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톤, 이번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내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쫒아가 줄게.”


류지호의 말에 힘을 얻은 것일까.

의기소침해 있던 스톤의 가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 테이크에 촬영을 마무리해야 해. NG가 계속되면서 스톤의 멘탈도 완전 박살나 버릴 거야.’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류지호가 감독인 로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로니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치 류지호가 감독행세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도 잠시.

나름 단편 촬영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부하는 로니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일단 류지호가 급한 불은 껐다.


‘스톤, 이번에 또 NG를 내면 내가 가만 안 둬.’


로니는 스톤을 노려보다가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류지호는 계속해서 실실 웃고 있다.


아차.


로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범한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한 커트를 찍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보니 예민해져 있다.


‘흥분하면 안 된다, 침착하게.’


침착하자고 몇 번씩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초조함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했다.


‘멍청하긴....!’


자책하던 로니가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또 한 번 류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 게으른 예술가가 만든 명작은 없어. 부지런히 움직이라고.”


얼른 정신을 수습한 로니가 친구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다시 한 번 기운을 냈다.

곧이어 학생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촬영은 해가 지기 일보직전에야 끝이 났다.

류지호가 남몰래 앓는 소리를 냈다.


“...죽겠네.”


장시간 스테디캠 촬영을 하고 나니, 온 몸에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들이 고된 일임에도 이런 촬영을 하는 이유는 열정 때문이다.


“앞으로 스태디캠 기사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말아야겠어. 더럽게 빡세네.”

“뭐라고 그랬어?”


류지호가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레이첼이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오늘 힘들었지? 고생은 혼자 다 한 것 같더라.”

“사람이 참 신기하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리고 집중하다보면 시간관념도 사라지고 육체적 피로도 전혀 느끼지 못하나봐.”

“촬영 끝났는데 뭐 할 거야?”

“집에 가서 자겠지.”

“그럼 내일은?”

“딱히 없어. 체육관 가서 운동 좀 하고, 도서관 가서 책 좀 보고.”


레이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랑 데이트 할래?“

“레이첼은 기숙사에서 지내?”

“응.”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푹 쉬고. 내일 점심에 내가 데리러 갈게.”


류지호는 함께 고생한 학생들과 인사하고, 레이첼을 기숙사까지 에스코트했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웨스트우드 주택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말릭이 웬 상자 하나를 주방 탁자에 놓았다.


“뭐예요?”

“한국에서 보낸 겁니다.”

“뜯어 봐요.”


말릭이 상자를 뜯는 걸 구경하던 류지호가 어머니가 찬거리를 보냈다고 하셨던 게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상자 안에는 총각김치와 마른반찬 등 밑반찬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채로 담겨있다.

그리고 꿀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유리병과 종류를 알 수 없는 찻잎이 담긴 비닐도 보였다.


‘근데 이런 음식이 미국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건가?’


류지호가 말릭을 돌아봤다.

말릭이 어깨를 으쓱하며 코를 잡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알만 했다.

총각김치 냄새 때문에 우체국에서 소포를 받아올 때 고생을 했을 터.


“고생했어요.”

“이제 우체국 직원하고도 친해져서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류지호는 물을 끓여서 커피 믹스를 한잔 탔다.

소파에 털썩 앉아 한 모금 마시자 뻐근했던 몸이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이다.


“역시 커피믹스. 이제야 좀 살겠네.”


달달한 커피믹스가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몸이 물에 젖은 빨래처럼 늘어졌다.


“하암.”


뱃속이 따듯해지니 졸음이 밀려왔다.

샤워타월만 걸친 류지호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눕혔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쿨쿨.


얼마 안가 류지호는 잠속에서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류지호는 레이첼과 데이트를 위해 오랜만에 LA 시내로 나갔다.

레이첼과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술도 가볍게 한 잔 했다.

한국의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라면 데이트 코스를 돌 때 차량을 이용한다는 것 정도.

류지호는 오랜만에 대형 풀 사이즈 SUV 타호를 직접 운전했다.

경호원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차 안에서 주로 대화를 많이 나눴다.


“사람의 인생에는 단계 혹은 시기가 있다고 생각해.”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논어에서 말하는....”


레이첼은 중국학 전공자가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지학이니, 이립이니,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걸 알 리가 없다.


“난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눠. 태어나서 배우는 시기. 배운 걸 사용하는 시기. 그리고 더 이상 배운 걸 사용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기. 각각 시기는 유효기간이 있어.”

“유효기간?”

“제한된 시간이 있고,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다시는 그 단계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는 다시 십대로 돌아갈 순 없지.”

“난 이제 배운 걸 사용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아.”

“레이첼이라면 잘해낼 거야.”

“호호. 영화천재이자 스튜디오 오너가 그렇게 말해 주니 용기가 막 나네.”

“인생이란 영화에서 오케이를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었네?”

“당연하지.”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하늘이 정해준 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서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자가 한 말이다.

류지호는 한 번 죽어본 경험(?)이 있다.

그를 통해 하늘이 정해준 명을 알게 되었다.

삶과 가치관의 기초를 새롭게 다져 다시 한 번 영화에 뜻을 두었다.

이전 삶처럼 스스로 갈피를 못 잡고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다.

레이첼은 공자가 말한 6단계 혹은 시기를 3단계로 줄여서 정립한 모양이다.

류지호는 그 단계를 더 세분화했다.

각 단계별로 어떻게 보내야 가장 이상적이고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먼저 목표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후 실패한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 원하는 삶과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준비의 과정을 보내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시기.

그 유효기간이 있는 시간 동안 게으름 피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 외에 무엇이 중요할까.....!’


류지호는 낸시와 사귄 경험이 있다.

미국 여성과 데이트하며 실수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유흥가나 문화 시설이 한 구역이 밀집해 있는 편이다.

다운타운 한 곳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한국에서와 달리, LA 지역에서는 영화 보고, 밥 먹고, 가볍게 술을 마시고, 산책을 하기 위해서는 지역을 옮겨야 할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 데이트라 함은 이미 사귀는 연인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포함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원나잇 스탠드이거나.

대체로 이 사람과 내가 어울리는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

데이트 한 번 했다고 해서 눈이 맞은 것으로 간주해 금방 뜨거운 밤을 보낼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사람 친구 남자사람 친구가 대단히 자연스러운 문화다.

연인이 버젓이 있음에도 이성친구와 극장도 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단편영화 촬영에서의 류지호의 활약(?) 덕분인지 여러 친구들로부터 파티 초대를 받았다.

류지호는 친한 친구가 주최하는 파티가 아니면 잘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술학부 학생들이 주최하는 파티는 빼먹지 않고 다녔다.

졸업작품을 함께 할 이들을 골라내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여학생들에게 대시를 몇 번 받았다.

레이첼과도 첫 데이트 이후 몇 번 더 어울렸다.

그것이 전부다.

연인으로 발전하진 않았다.

낸시에게 끌렸던 것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게 하는 여학생은 없었다.

뭐든지 해본 사람이 잘하지 안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애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

여기에 이성을 자주 만날 일이 없다보면 간혹 연애 욕구도 떨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과의 기대보다 경험한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낀 것.

그것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라고 류지호는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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