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연재수 :
901 회
조회수 :
3,838,439
추천수 :
118,862
글자수 :
9,980,317

작성
22.07.23 09:05
조회
5,485
추천
168
글자
26쪽

배고픈 놈이 이긴다.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최근 일본 전자산업협회가 2000년 즈음에 DVD시장이 15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글로벌 전자업체들은 DVD가 80년대 후반 캠코더 이후 침체된 가전시장을 부흥시킬 ‘특효약‘으로 보고 있다.

할리우드의 일부 스튜디오는 영화팬들이 비디오테이프 대신 영화DVD타이틀을 수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컴퓨터업체들은 DVD램으로 CD롬을 대체해 고속성장세를 이어갈 전략을 세웠다.

차세대 영상기억매체인 디지털 비디오디스크(DVD)의 주도권을 놓고 세계적인 기업들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가 뭐라고 그 판에 끼어들어서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황재정이 속으로 멀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류지호를 욕했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가 규격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이다.

류지호의 트라이-스텔라는 워너-타임·도쿄시바우라·판토소닉 진영에 가세하기로 입장을 정하고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 공식발표에 나선 바 있다.

소닉·로열필립스 진영과 20세기의 마지막 ‘산업전쟁‘이라고까지 불리는 규격전쟁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이번 DVD 규격전쟁은 전자왕국 일본과 영상 소프트웨어왕국 미국이 벌이는 기술전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워너-타임과 도쿄시바우라가 이끄는 연대세력과 소닉과 로열필립스의 제휴세력 등 굴지의 10여 개 업체가 DVD표준규격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다.

컴퓨터 업체 INTECH과 파인소프트까지 표준화대열에 참가하고 있다.

가전과 컴퓨터에 영상소프트웨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시대로의 변화가 얼마 안 남았다는 의미다.

그런 역사적인 전환기에 류지호가 발을 걸쳤다.

황재정은 빅6도 아니면서 고래싸움에 끼어들었다고 투덜거리고 있지만, JHO Company는 충분히 자격이 된다.

모든 계열사들이 매해 쏟아내는 영상 콘텐츠 숫자가 60~70편에 이르고 있으니까.

게다가 북미 2~3위권의 대형 홈비디오 회사를 산하에 두고 있기도 하고.


‘이제 하다하다 가전과 전자까지 챙기게 생겼네.’


어차피 전략기획실 기능도 일부 수행하는 비서실이다.

전사적 관점에서 회사를 바라봐야 했다.

한국의 사업들은 미국의 JHO Company처럼 명확한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

따라서 누가 해야 할지 모르는 업무는 일단 기획수립까지 하는 비서실에서 맡고 있다.

가장 우선되는 업무는 VIP 직접 지시 사항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만 신규 사업 개척이나 때론 M&A까지도 챙길 수 있어야 한다.


‘......’


황재정이 각자 업무에 바쁜 비서들을 돌아봤다.

회사가 작을 때는 충분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점점 벅찬 것이 사실이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연륜이다.

요즘 황재정은 제 아무리 똘똘하고 습득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세월로 쌓인 경험과 숙련도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스페셜한 마음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발라드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누구라고요? 호호호. 그렇다며언~ 에이 뜸 들이지 말고. 척하면 척이죠. 다음 곡 여러분도 기대가 많이 되실 것 같은데요. 자~ 만나보시죠.]


VJ라는 연예인이 발랄한 음성으로 가수와 노래를 소개했다.

지상파의 아나운서와는 다르게 자유로운 복장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서 통통 튀는 진행을 선보이고 있다.

기존 지상파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로운 모습이다.

황재정의 시선이 저절로 MS·net 채널에 고정됐다.


“......”


TV 브라운관 앞을 떠나지 않고 있는 황재정에게 송선희가 다가왔다.


“실장님?”

“.....”

“실장님!”

“아....!”


상념에 잠겼던 황재정이 송선희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송선희가 사무실 입구를 가리켰다.

김준우가 입구에 서서 황재정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여의도엔 웬일이냐?”

“공휴일인데도 출근한 거야?”

“어떤 분께서 저 멀리 미국에 계셔서. 우리가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지호도 알아?”

“모를 걸.”

“몰라?”

“공휴일에 출근한 거 알면 엄청 잔소리할 텐데. 내가 미쳤냐? 보고하게.”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네가 회장은 아니잖아. 그러다가 탈모가 더 심해진다.”


그러지 않아도 머리숱이 별로 없는 황재정의 이마가 부쩍 훤해졌다.


“생긴 대로 사는 거지 뭐. 커피 한 잔 할래?”

“그러자.”

“김준우 작가와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올 게요.”


두 사람은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따라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제 막 봄에 접어들어서인지 다소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김준우가 호로록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혼자 출근해서 궁상떨더니, 다른 비서들도 다 나오는 모양이네?”

“내가 시킨 거 아냐. 자기들이 자원해서 나오는 거야.”

“상관이 출근하는데 부하직원들이 집에서 편하게 놀 수 있겠냐?”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업무가 많으면 인력을 더 뽑아.”

“계속 뽑고 있어. 내 성에 차는 사원이 없어서 그렇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류지호의 한국 사업들 또한 인력 구하기에 열성이다.

수시로 입사공고를 내고, 특채와 스카우트를 통해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인재를 모집하고 있다.

더군다나 멀티플렉스 사업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려서 가온GP투자신탁과 함께 직원채용에 열을 다하고 있다.

특히나 회사의 성장과 맞물려 초기에 입사한 직원들의 진급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들을 받쳐 줄 인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사회 의장실이 생기고 처음 뽑은 비서 중에 남아 있는 직원은 최영미 하나뿐이다.

모시는 빅보스보다 비서실장이 더 엄격하다.

황재정으로 인해 처음 뽑힌 비서 대부분이 못 버티고 퇴사했다.

류지호의 비서들은 단순히 커피심부름이나 하고 의전이나 경조사를 챙기는 정도로는 안 된다.

법률, 회계, 홍보마케팅, 미디어, 경제, 경영 전문가팀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영어는 기본이고 고학력에 외모 또한 출중해야 했다.

류지호의 기준이 아니라 미국의 도널드 제이콥 총비서와 황재정 두 사람의 기준이다.

현재는 황재정 포함 5명이다.

기획실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에 10명 안팎으로 인원구성을 생각하고 있다.


“5대 대기업 회장 비서도 아니고, 너무 기준이 높은 거 아니냐?”

“그에 상응하는 연봉을 보장하잖아.”

“아무튼 지호 회사가 계속 성장한다는데, 공부와 병행할 수 있겠어?”

“곧 졸업반인데 뭘.”


비서들에게 회사가 커지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자신들이 모셔야 할 VIP가 주로 미국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한국 상황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VIP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나래안전시스템과 아네모네 프랜차이즈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경영 모니터링까지 분류하고 정리하느라 월말월초에는 공휴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VIP가 한국에 없다고 해서 업무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다.

분기별로 개최되는 정기이사회 준비기간에는 야근은 기본이다.

가온웨딩 주식회사는 여는 한국 중견기업과 달리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회사의 '미래'와 '현재'를 이사회 의장과 CEO가 각각 나눠서 맡으며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사회 의장은 보통 이사회의 리더로서 경영진이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CEO는 통상적인 경영 활동을 수행하면서 경영진의 최고책임자로서 경영성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쉽게 말해,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CEO를 이사회 의장으로 대표되는 이사회가 견제하고 감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업자들은 자신이 만든 회사를 경영하고 싶어 한다.

류지호는 그런 생각이 없다.

CEO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이 부여됨과 동시에 소모적인 일이다.

경영에만 집중하다보면 다른 일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

류지호는 이전 삶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장점에 집중하고 부족한 부분은 좋은 인재를 영입해 보완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류지호 본인은 이사회 의장으로서 큰 전략과 방향을 짜거나 신사업 발굴, 혁신에 대한 요구 등을 하면서 사업 전반은 탁월한 경영진에게 맡기는 경영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외부의 시선이나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면도 있다.

대외적으로 20대 초중반의 청년이 CEO로 활동하기에는 한국과 미국 모두 곤란한 점이 생각보다 많다. 또한 각종 기관(정치 및 사법)의 표적이 되는 대표이사보다는 막후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이사회 의장이 안전하기도 하고.


“가온웨딩에서 지방에도 예식장 새로 연다며?”

“그런가 보더라.”

“호텔과 경쟁이 안 될 텐데....”


지난해 여름 보건사회부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의 시행규칙’을 개정공포하면서 특2급 이하 관광호텔에서의 예식장영업을 공식 허용했다.


“손님 1인당 평균비용이 2만원 안쪽인 일반 예식장과 고객층이 다르니까 큰 타격은 없을 거래. 그래도 번잡한 분위기 같은 취약한 부문을 보완하려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긴 한가봐. 사장님 직속으로 테스크포스팀도 구성해서 그동안 제공하지 않던 뷔페메뉴로 단가를 낮춘 새메뉴 개발에 착수했다고 하고, 결혼정보 업체들하고 제휴를 맺어 공동마케팅도 할 건 가봐.”


예식장 진출은 황재정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관계당국에서 호텔 예식장업을 허가해 줬다.

한 번 빗장을 열었으니 이른 시간에 특1급 호텔 예식도 허용될 터.

예식 프랜차이즈 진출에 박차를 가하려던 가온웨딩에 거대한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멀티플렉스 1호점 개장까지 안 그래도 각 사업체들이 커지고 일감이 넘쳐나는 이 시기.

곧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도 늘릴 예정이다.


“각 딱 잡고 일을 해도 모자랄 판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놈이 미국으로 가버렸으니....”


딱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친구 놈은 영리한 놈이다.

아니 작두를 탄 용한 무당 같다.

어찌 사람을 그렇게 적재적소에 가져다 놓는지.


“준우야, 지호한테 진짜로 신기가 있는 거 아닐까?”

“오랜만에 소설 쓰냐?”

“미래를 내다보는 거나, 사고 칠 사람, 크게 될 사람 딱딱 구별해 내는 게 점쟁이도 아니고. 맞출 수가 없잖아.”

“고등학교 때부터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냐? 한창 잠도 모자랄 시기에 매일 3대 일간지를 읽고, 타임이나 월스트리트 저널 읽은 놈이야. 만날 지 보다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어른들을 상대했던 놈이다. 달리 별명이 애늙은이겠냐?”

“그렇긴 하지만.”

“지호가 예전에 그랬잖아. 성공을 갈망할 때만 성공 근처에라도 도달할 수 있다고.”

“그래도 좀 심해.”

“뭐가?”

“지호 이 자식은 도대체가 상식적이지가 않아.”

“달리 천재겠어?”

“중학교 때까지 롤라나 타던 놈이.....!”

“지금 화내는 거야?”

“누가, 내가?”

“방금 목소리 높였잖아. 왜 화를 내는데? 딱 까놓고 말해서 지호가 사업도 잘하고, 뭐든 척척해낸다고 해서 네가 화를 낼 이유는 없잖아. 친구끼리 격려하고 응원은 못해줄망정.”

“오해야.”

“무슨 오해?”

“지호한테 화낸 거 아니야.”

“그럼?”

“나한테 화를 낸 거야.”

“.....?”

“자꾸 지호 발걸음에 뒤처지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나.”

“아직도 지호 질투 하냐?”

“질투라니! 내 입장에서 업어줘도 모자란 놈인데!”

“그러니까. 지호 덕분에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냐?”

“그건 그렇지!”


황재정이 대화를 멈추고 저 멀리 63빌딩에 시선을 뒀다.

그런 황재정을 김준우가 빤히 쳐다봤다.

처음 황재정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경력직으로 스카우트 된 중간관리급 직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회장 백 믿고 한자리 차지한 애송이.

사업이 소꿉장난도 아니고.

뒷말이 무성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서 자회사 사장들을 포함해 낮춰보는 시선이 싹 사라졌다.

황재정은 사람 자체가 틱틱 거리고 냉정하단 생각이 들어서 인간미가 떨어진다.

그거야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장학금 받으며 다니며 의장 비서업무까지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류지호 못지않은 천재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재정은 그런 사람들의 평가는 관심도 없었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사실 사인방은 아직은 다 자라지 못한 어린 맹수다.

다 자랐을 때가 기대가 되는.

그것도 배고픈 새끼 호랑이들이다.


“재정아....”

“왜 또 분위기를 잡고 그러냐? 또 여자랑 헤어졌냐?”

“좀 더 큰 세상을 보고 올 게.”

“이번엔 어디 가게? 유럽이나 미국, 대만도 자주 다녀왔으니까. 이번엔 남미라도 다녀오게.”


김준우는 결혼 비수기인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가온웨딩의 포토그래퍼들과 해외출사를 다니고 있다.

뉴욕의 포토그래퍼 해리 맥코트와 그의 동료들과 사진예술의 세계를 탐구하기도 했다.

말을 잇지 않는 김준우를 보며 황재정이 불안한 듯 물었다.


“혹시 아프리카... 가냐?”


김준우는 입버릇처럼 세렝게티 출사를 말하곤 했다.


“독일에 사진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어. 거기 지원해볼 생각이야.”

“유학? 굳이 대학에서 더 배울 게 있겠냐? 넌 지금도 또래 중에 웨딩사진업계에서는 최고야. 뭘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고 하는 지 난 모르겠다.”

“최고는 십년은 일러. 해리랑 사진 찍으러 다니면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

“넌 가끔 보면 너 스스로를 너무 낮춰보는 것 같더라. 네가 인천에서부터 해 놓은 걸 보라고 인마. 우리 나이에 여성잡지에 웨딩 사진이 실리는 게 쉬운 일이냐? 연예인들도 너한테 많이 의뢰한다며? 그 모든 걸 버려두고 공부를 하겠다고 떠나?”

“배움엔 때가 있다잖아.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유학을 못 갈 것 같아서. 넌 안 그래?”

“......!”


황재정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류지호를 대신해 기업들의 각종 경영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기업들이 매달 쑥쑥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다.

예비 경영전문가로서의 소양이 쌓이는 것도 즐겁고.


“우찬이도 군대 말뚝 박네 마네 하는 판에 너까지?”

“우찬이 말뚝 안 박아. 그건 내가 장담한다.”

“일단 우찬이는 빼고... 그 놈은 회사에 도움이 안 되니까. 너하고 나까지 다 떠나면 회사는 어떻게 하고?”

“지호 외삼촌도 있고, 상우 형도 있고, 영화사는 박 대표님이 있고, 신탁투자회사는 미국사람들이, 나래는... 알아서 잘하겠지.”

“하긴 너하고 나 없다고 회사가 안 굴러갈 일은 없다, 그렇지?”

“당연하지 인마.”


김준우가 황재정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일단 졸업은 해야지.”

“지호가 빨리 미국으로 넘어오라고 안 해?”

“엄청 쪼아대지. 같이 놀아달라고.”

“설마? 놀아달라고 그랬을까.”

“지호 예비역이야. 얼라들이 예비역 아저씨랑 놀겠냐?”

“서양애들이 예비역을 알까? 걔들은 십년은 막 트고 지내지 않냐?”

“말이 그렇다고. 뭘 자꾸 따져.”

“일단 서울대 졸업장은 따놓는 게 좋긴 하겠다. 인맥이 중요하니까.”

“인맥은 개뿔!”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당장 신포고 동문회 한 번 나가봐라. 서울대? 선배들이 뺑뺑이라고 얼마나 무시하는데. 서울대 나와도 뺑뺑이는 뺑뺑이지. 그게 변하는 건 아니야.”

“지호와는 자주 통화 해?”

“봄 학기 마치자마자 이사회 때문에 올 거야.”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더니, 새 여자 친구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말은 더럽게 있어보이게 해.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막아?”

“지호는 오는 여자를 구별 못해서 문제야. 딴 걸로는 눈치가 빠른 놈이 여자문제는 은근히 눈치가 없지 않냐?”

“그래서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야. 모자란 것도 있고 그래야 인간미가 있지.”


김준우가 황재정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나 인간미 좀 있어봐라. 만날 틱틱 거리지 좀 말고.”

“일반미와 정부미는 알아도 인간미는 몰라.”

“자랑이다!”


두 친구는 커피를 모두 마신 후에도 한참 동안 옥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왔다.


❉ ❉ ❉


“넌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야?”


김윤희는 매번 새롭게 고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류지호에게 가져왔다.

마치 숙제검사 받는 아이처럼.

류지호는 솔직히 귀찮고 성가셨다.

절로 목소리에 냉기가 풀풀 풍겼다.


“말이 지나친 것 같아 선배.”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는 그녀에게 보였던 호의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왜 내게 의지하려 들어?”

“그 게 아니라....”

“시나리오에 대한 리뷰라면 해줄 수 있어. 나는 네 영화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도왔다고 생각해. 더 이상 내 시간을 뺐지 말아줄래?”

“너무 해.”

“내가 만만하고 쉽게 보이냐?”

“난 그저 같은 유학생이고, 후배니까.....”

“지난 2년 간 이런 식으로 학교생활 했어?”

“이런 식....?”

“여긴 한국의 대학이 아니야. 너도 2년 간 경험했듯이 한국과는 완전 다른 문화잖아. 선배가 후배를 챙기고, 후배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특히 제법 반반한 여학생 뒤꽁무니 쫒아 다니며 살뜰하게 챙기는 같은 과 남학생 같은 건 없어. 심지어 커플도 서로의 캠퍼스 라이프를 존중해.”

“나, 난 그냥....”

“윤희야, 네 시간이 가치 있고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시간도 가치 있고 소중한 법이다. 내가 트라이-스텔라 오너이자 UCLA 예술학부에서 제법 유명인사라고 해도, UCLA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선이 있는 법이야. 내게 쪼르르 달려와 숙제 검사 받듯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내게 연기를 시키고 싶다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고집을 피울 시간에 교수를 찾아가 상의했어야 했어. 그리고 네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너의 팀을 모았어야 했고.”


김윤희는 매정하게 구는 류지호가 야속했다.


“난... 난, 류지호의 팀이 되고 싶은 것뿐이야. 선배.”

“무슨 팀?”

“선배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영화과 3학년 학생들이 류지호의 사단이 있다고 했어. 더스틴과 쉘라도 그렇다고 확인해 줬고. 난 선배에게 인정받아 사단에 끼고 싶었던 거라고.”


한때 류지호의 단편영화에 참여했던 친구들이 한 팀으로 불리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졸업 하면서 류지호 팀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류지호 팀이니 사단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 친구들은 너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 친구들과 함께 작업 한 것은 그들이 나만큼 치열하고 간절했기 때문이야. 너 스스로 간절하지 않으면 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을 거야. 같은 한국인? 그것이 내가 널 도와야 할 이유가 되어주진 못해.”


김윤희는 이제야 류지호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소문에는 류지호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친구들과만 어울린다는 평가 있다.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상대에게는 친절하고 신사.

하지만 관심에서 멀어지면 칼 같이 선을 긋는 성격.


“시나리오에 대한 내 평가는... 이 이야기에는 대상에 대한 공감도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어. 코폴라가 특강에서 그랬지. 얀 포만은 관객에게 떳떳했다고. 넌 이 영화를 봐줄 사람들에게 과연 떳떳할 수 있어? 최선을 다 했어? 넌 어떤 노력과 치열함이 있었지? 내가 준 자료 외에 어떤 취재를 했고, 무슨 고민을 했지?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과연 공감을 하고 있어? 아니 공감하려고 노력했는지 의문이야.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상관없어. 이 시나리오에서 난 작가의 땀과 눈물 단 한 방울도 발견하지 못했어. 영화 찍는 흉내를 내려거든 어려운 길을 가지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한국으로 돌아가. UCLA에서 웬만한 한국의 대학으로 역편입이 어렵지 않을 거야.”


류지호는 가감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가차 없었다.

그런데 류지호의 평가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중에 이 영화가 받게 될 교수와 학생들의 평가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수준임을 알게 될 터.


“선배...!”

“세상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그 근처에 못 가보고 좌절하는 사람이 많아.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한국에서 거들먹거리겠지.”

“선배가 낸 아이디어로 시나리오를 고쳤어.”

“내 친구들은 내가 쓴 시나리오로 단편영화를 찍더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연구했어. 그들은 나의 팀이 아니라 전우였고 파트너였다. 내 배경과 내 실력에 의지하는 지질한 녀석들이 아니라.”


류지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김윤희에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난 간절한 사람과 함께 해. 겉 멋 들린 사람이 아니라.”

“......선배가 그렇게 잘 났어요? 이렇게 잔인한 말을 할 정도로?”


김윤희의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편하고 만만한 상대에서 거북하고 어려운 사람으로 관계가 바뀐 것이다.


“당연하지. 난 네게 이런 말을 할 자격 있어. 네가 앞으로 영화를 업으로 삼아서 살 거라면.”

“....?”

“내가 학기 중엔 UCLA에서 여느 학생처럼 강의를 듣고 있지만, 캠퍼스를 나서는 순간 내 직업은 프로듀서야. 내가 쓴 각본으로 만든 영화가 5월에 개봉도 해. 난 교수들처럼 네게 학점을 줄 순 없지만, 프로듀서로서 평가를 할 순 있어. 넌 이번 일로 인해 한국인 프리미엄까지 포함한 총점에서 80점 감점 당했다. 그것만 알아둬.”


류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후우.


류지호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UCLA는 주립대지만, 혜택은 캘리포니아 출신에게 한정된다.

다른 주나 외국에서 온 학생은 비싼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

한국의 국비 유학생이 아니라면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포함해 꽤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입학이 어려운 걸 떠나서 비싼 돈 들여 유학을 왔으면 더욱 치열하게 생활을 해도 모자랄 터.

그것도 이미 미국 대학 적응이 끝난 3학년이.

적당히 어학연수하는 셈 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어린애가 할 법한 억지를 부려선 안 된다.

잘나가는 자신에게 줄을 대려는 것을 류지호는 탓할 생각이 없다.

인맥은 무시 못 하는 것이니까.

태도도 탓할 마음이 없다.

자존감과 싸가지를 구분 못하는 예술대 학생들도 많으니까.

류지호가 중요하게 본 것은 영화 학도로서의 자세다.

필름으로 영화작업을 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기회다.

영화과 학생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다.

아무나 그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류지호는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

대부분의 영화 학도들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한 고민 끝에 영화작업을 마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도 함께 맛본다.

그 좌절은 교훈이 되어서 영화인으로 성장할 밑거름이 된다.

류지호를 캐스팅하는 문제도 그렇다.

최선을 다해보고,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맞다.

TV·영화과의 유일한 남학생이라는 안일한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연극학과에는 당장 프로무대로 나가도 될 정도로 준비된 배우가 더러 있다.

그런 좋은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연기 아마추어인 류지호에게 배역을 주겠다는 발상은 겉멋에 지나지 않았다.

류지호는 영화로 친목질이나 하고, 학예회 수준의 작업에 낄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시나리오 속에 묘사한 여자가 윤희의 내면의 일부였을까?’


폭력에 시달리면서 남자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여자.

23살의 여학생이 세상을 경험해봤으면 얼마나 해봤고, 인간 군상을 경험해 봤으면 얼마나 해보았겠는가.

책에서 본 것 또는 다른 창작물에서 본 것들에 자신의 내면이 투영되어 만들어졌을 것이다.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자신을 묻힐 수밖에 없다.

김윤희가 쓴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대체로 그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일 터.

영화감독은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작품에서 드러냄으로써 자아성찰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야 가능하겠지만.


‘근데 미국애들하고는 잘 지내는 편인데. 꼭 한 번씩 한국 유학생들과 트러블이 있네.’


신입생 시절 한인회 회장과 있었던 작은 갈등이 문득 떠올랐다.

류지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자신이 오만해 진 건 아닌지.


“부자가 되려면 부자처럼 행동하고,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언젠가 대니얼 그레이엄이 류지호에게 해준 말이다.

윌리엄 파커와 대니얼 그레이엄은 늙었지만 노련한 맹수들이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호랑이와 사자가 혈투를 벌이는 북한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방송에서는 호랑이의 판정승이었다.

싸움 자세에서 두 맹수는 달랐다.

사자는 호랑이의 뒤를 공격했다.

반면에 호랑이는 반드시 정면만 공격했다.

호랑이는 사자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공격태세를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류지호는 호랑이가 산군(山君)다운 품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글쎄.....”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정말 배고픈 놈이 이기는 걸까.

북한방송이 리얼 버라이어티였는지 혹은 조련사가 호랑이의 승리를 위해 굶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호랑이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제아무리 산군이라는 호랑이도 토끼를 잡으려면 쉼 없이 뛰어다녀야 한다.

토끼를 잡아먹기 위해 맹수인 호랑이조차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호랑이도 그럴 진데....

겨우 대학생 주제에.

나태, 방만, 자기만족, 슬럼프, 오만 등.

류지호가 경계해야 할 것들이다.

영화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작가의말

주말 잘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루시오엘님 과분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4 Collapse. (6) +6 22.08.08 5,232 161 24쪽
243 Collapse. (5) +4 22.08.06 5,293 158 25쪽
242 Collapse. (4) +6 22.08.05 5,251 167 22쪽
241 Collapse. (3) +10 22.08.04 5,276 163 27쪽
240 Collapse. (2) +9 22.08.04 5,065 144 23쪽
239 Collapse. (1) +7 22.08.03 5,413 165 23쪽
238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5) +8 22.08.02 5,255 169 22쪽
237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4) +6 22.08.01 5,316 163 22쪽
236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3) +7 22.07.30 5,424 156 24쪽
235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2) +2 22.07.29 5,331 160 24쪽
234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놈이라니까! (1) +5 22.07.28 5,532 148 26쪽
233 대박 축하한다! (2) +5 22.07.27 5,693 152 24쪽
232 대박 축하한다! (1) +10 22.07.26 5,612 156 21쪽
231 OK할 때까지..... +7 22.07.25 5,417 151 25쪽
» 배고픈 놈이 이긴다. (4) +14 22.07.23 5,486 168 26쪽
229 배고픈 놈이 이긴다. (3) +9 22.07.23 5,165 135 21쪽
228 배고픈 놈이 이긴다. (2) +7 22.07.22 5,388 158 22쪽
227 배고픈 놈이 이긴다. (1) +10 22.07.21 5,548 166 26쪽
226 후회가 남지 않게! (3) +4 22.07.20 5,552 162 28쪽
225 후회가 남지 않게! (2) +10 22.07.19 5,647 151 27쪽
224 후회가 남지 않게! (1) +7 22.07.18 5,722 162 26쪽
223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3) +4 22.07.16 5,774 155 22쪽
222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2) +6 22.07.15 5,607 159 22쪽
221 나만 잘 먹고 잘 살려는 게 아닙니다. (1) +5 22.07.14 5,567 171 21쪽
220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3) +5 22.07.13 5,772 170 28쪽
219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2) +4 22.07.12 5,705 167 27쪽
218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1) +2 22.07.11 5,842 160 23쪽
217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4) +4 22.07.09 5,832 144 24쪽
216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3) +4 22.07.08 5,773 164 23쪽
215 우리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죠! (2) +6 22.07.07 5,837 169 2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