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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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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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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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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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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우리 잘 해봐요.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부산국제영화제 사흘 간의 일정을 마무리한 류지호가 서울로 올라왔다.

출국 전에 용산경찰서에 출석해 모발과 소변을 제출했다.

포토라인에 서지는 않았다.

따로 조사를 받지도 않았다.

피의자 신분도 아니고, 수사로 전환된 사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참고인 조사 형식이었다.


“두 분이 함께 올 줄은 몰랐네요.”


신 변호사 부부가 류지호와 동행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거잖아요.”


끄덕.


“상의할 것도 있고, 알려줄 것도 있고.”

“뭔데요?”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조사라도 받을 줄 알고 일찍 와서 반나절 정도 시간이 붕 뜨네요. 회사로 가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에요?”

“아니요.”


류지호는 신효정 부부와 함께 순헌여대의 카페로 이동했다.


“다온이 법인으로 전환되었어요.”


류지호도 보고를 받았다.

다온 법률사무소는 1~2년 동안 몇 개의 법률사무소들과 합병을 하며 몸집을 불렸다.

최근 메이저 법무법인으로 도약했다.

10위 권 안에 들어가는 수준은 아직 아니지만.


“거인 합동사무소라고 있어요. 저희 다온과 비슷한 규모의 법률사무소죠.”


류지호는 홍보실 신설과 관련해 언론사 출신 헤드헌팅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법무법인 다온과 합병할 법무법인에 관한 내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온은 국제거래, M&A, 기업법무에서 강점이 있어요. 거인합동은 세금과 특허소송에서 저희보다 조금 나아요. 멀티플렉스 사업으로 인해서 WaW의 자산과 매출이 불과 일 년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났어요. 앞으로 더 늘어나겠죠.”


세금 문제는 WaW 픽처스의 총무 부서에서 고민할 문제다.


“아마도 세금관련 소송도 발생하게 될 겁니다. 감독님과 WaW에 대해 법률적으로 좀 더 원활하게 지원하게 위해 거인합동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어요.”


신효정의 말대로 성사가 된다면 국내 대형법무법인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합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전 삶의 역사보다 4~5년 빠른 국내 변호사업계의 지각변동이다.


“사실 최근 추세는 법무법인들이 주로 소속 변호사들을 분가(分家)시키고 있어요. 업계에서는 로펌 창업 열풍이 한풀 꺾이고 대형 로펌과 부티크(전문로펌)으로 재편될 거라고 보고 있죠.”


류지호는 국내 법률시장에 대해 알지 못한다.

사실 크게 관심도 없다.


“그걸 왜 내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일까.


“다온과 가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요.”

“그랬어요?”


막상 류지호가 되묻자 대답하기 곤란해진 신효정이다.


“다온이 대형화 되어서 시스템으로 돌아가면 나와 가온에게 좋은 것이 뭐가 있죠?”


쓸데없이 법률서비스 비용만 상승하는 것 아닐까.


“아시아와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국제적인 법무법인과 국내 법인들 간의 연합이 이루어질 거예요. 그 전에 자생력과 경쟁력을 갖추려면 전문화보다는 대형화가 맞는 것 같아요.”

“얼마나 커지게 되는데 그래요?”

“합병 후에는 변호사만 72명, 법무사무원이 200명 정도 될 것 같아요.”


류지호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휘유.


법률사무소가 아니라 기업 규모다.

대기업 법률자문은 대형로펌의 성역이다.

로스쿨에서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류지호의 사업이 성장하는 만큼 법무법인 다온 역시 법률자문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덩치를 키우는 것에는 중요 법률소송으로 진입하기 위한 전략이 깔려 있었다.


“빅 파이브에 들어가겠네요?”

“아마도....”

“굳이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행운을 빌어요.”

“감독님도 알다시피 다온은 캐서린 & 윌슨으로부터 투자를 받고 국내외적으로 업무제휴를 맺고 있어요. 지금까지 크고 작은 법률사무소들을 인수했는데 거인 합동법률사무소 합병이 완료되면 국제거래, 기업법무, 금융증권, 세무, 지적재산권 등의 자문업무 뿐만 아니라, 오랜 경력과 대형소송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는 노련한 변호사를 대거 영입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각자 강점이 있는 분야는 분야대로 미흡했던 분야는 그것대로 서로의 강점이 상승작용해서 강력한 로펌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해요.”


그러니까 그것과 자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지.

칭찬을 바라는 것일까.


“신 변호사는 변호사가 아니라 기업 경영을 했어도 잘 했을 것 같네요.”


절대 빈말이 아니다.

80~90년대 여성 법조인이 중견 로펌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법관 출신의 남편에게 대표변호사를 넘겼지만, 대단한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감독님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준비된 자에게 위기는 기회니까요.”


세계화라는 목표로 경제 개발이 한창이던 이 시기, 많은 기업들이 금융 기관에서 무리하게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다.

투자를 마구 늘렸다.

그럼에도 일본의 엔화 약세와 중국의 위안화 평가 절하로 수출은 부진했다.

따라서 한국 경상수지는 지속해서 적자를 이루고 있다.

금융 기관은 정부 보증만으로 정확한 평가 없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었다.

금융기관과 기업은 단기적으로 늘어난 채무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 당시 30대 그룹 평균 부채비율이 355%였다.

가장 먼저 고꾸라지는 한보는 무려 2086%에 달했다.

95년에는 부동산경기 침체, 비자금파문으로 인한 자금시장 경색 등 여파로 건설업계에서만 900여 개 업체가 부도가 났다.

아직 넉 달 남은 올해 역시 건설업계에서만 작년 숫자 이상의 부도 기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동남아시아발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한국경제는 여러 부분에서 곪아있는 상태였다.

언젠가는 그 곪았던 것들이 터지게 되어 있었다.


“연말 즈음에 GARAM 쪽에서 리포트가 갈 거예요.”

“......?”

“웨스트우드 헤드쿼터 비서실에서도 제안서, 의뢰서라고 해야 할까.... 암튼 형식이 뭐든지 다온으로 전달 될 겁니다.”


류지호가 기억하고 있는 IMF사태의 대략적인 흐름을 정리한 문서다.

망한 기업을 모두 기억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미국과 한국의 유능한 분석가들이 한국의 상장기업들의 재무구조를 파악해서 위험등급별로 200개 기업을 분류했다.

그 안에서 인수할 만한 기업들을 추리고 있다.


“연말부터 다온에서 할 일이 많을 겁니다.”


기업인수합병의 입찰 제안서는 해당 로펌의 전략과 법률 노하우가 집약된 고유 기술이다.


“철저하게 준비할 게요.”


류지호는 GARAM Invest 보고서 형식으로 한국의 국책연구기관과 재계에 외환위기 경고를 꾸준히 하고 있다.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고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오사카증권 보고서 외에도 많은 월가보고서가 나오고 있음에도 본체도 하지 않고 있다.

정부보다 더 귀가 많이 열려있고 인재들이 모였다는 5대 재벌대기업 경제연구소에서조차 참고만 하고 있을 뿐 심각성을 인식 못하고 있다.

알았다고 해도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겠지만.


“미국의 로펌은 내부규정으로 소속 변호사가 주식매매를 못하게 하던데, 한국도 그래요?”

“현행 법률상 변호사의 주식 매매를 금지하는 규정은 없어요. 다만 저희 법률사무소는 명시적인 내부규정으로 주식 관련 간접상품 투자는 허용하지만 직접투자는 금지하고 있어요.”


다온은 법률사무소 시절부터 기업법무 업무를 주로 했다.

기업 고객의 내밀한 정보와 고민거리를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문 역할을 많이 했다.

당연히 기업과 관련한 긴밀한 내용을 접할 기회가 많아 자칫 문제가 될 수가 있다.


“벤처투자는 가능하지 하지 않아요?”

“.....음.”

“벤처창업을 도와주거나 자문을 해주는 조건으로 수임료 대신 지분을 받는다거나 아예 로펌의 여유자금으로 VC를 운영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

“법적으로나 변호사 윤리문제에 걸리지 않으면 고려해 보세요.”


미국에서는 벤처캐피탈(VC) 투자 법률자문을 주로 맡거나 스타트업 전문로펌에 속한 변호사들은 스타트업·벤처기업과 접촉 기회가 많다 보니 투자 기회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전 삶에서 지분 투자 대박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사례가 바로 윌슨 굿리치 & 로사티(Wilson Goodrich & Rosati)의 Gogol 투자다.

윌슨 G&R은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로펌 중 하나로 Gogol 창업 초기부터 협력해 온 자문사였다.

벤처기업은 초기엔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않다.

Gogol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Gogol은 파트너 변호사들에게 자문료 대신 지분을 제공했다.

Gogol이 상장하고 나서 파트너 변호사들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게다가 초기부터 관계를 맺어 온 덕에 로펌까지 기업공개(IPO)나 주요한 딜 자문을 맡아 수익을 챙겼다.

법무법인 다온과 신효정 부부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문제는 고민해 볼게요.”


화폐전쟁(Currency Wars)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이 책으로 인해 양털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는 비유가 유명해진다.

시간이 흘러 저자가 책에서 주장한 것들이 ‘음모론’으로 평가절하 되겠지만.

유독 ‘양털깎기’ 비유는 신흥국들의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언급되곤 한다.

저자에 의하면 국제 금융자본은 시중에 유동성(돈)을 실컷 풀어놓고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한다.

그렇게 시장이 무너지면 다시 헐값에 되사들여 이익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 같은 모습이 마치 양털이 풍성하게 자라길 기다렸다가 단번에 깎아서 가져가는 것을 닮았다며 ‘양털깎기’로 표현했다.

화폐전쟁에서 꼽은 대표적인 양털깎기 사례가 아시아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던 IMF 외환위기다.

한국 역시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며 금리를 대폭 올리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기업들이 보유한 자산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헐값에 매각하게 된다.

3,000억 달러 이상의 국부유출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있었던 것으로 류지호는 기억했다.

19세기까지는 열강들이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을 했다.

현대에 와서는 금융 혹은 자본을 이용한 다양한 방식으로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 IMF(미국이 지배 주주)는 한국에 구제금융 210억 달러를 내주는 조건으로 ‘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하게 된다.

그로 인해 외국인들이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마음껏 살 수 있도록 ‘외국인 보유 한도’를 폐지하게 되고, 미국 금융기관들은 주가가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게 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금융시스템이 취약한 한국의 주식시장은 ‘공매도‘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외국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만다.

류지호가 제아무리 ‘최연소 억만장자’ 소리를 들으면 뭐하나.

그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외환위기 충격을 류지호 혼자 최소할 수도 없다.

무려 210억 달러.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액수였다.

그 밖에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를 합쳐 14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끝이 아니었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에서 추가로 200억 달러가 지원되어 한국은 외환위기로 총 550억 달러를 지원받았었다.

국가가 방어하지 못한 것을 개인이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파커와 그레이엄에게 ‘한국은 좀 봐 주세요’ 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한 발 뺀다고 해서,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헤지펀드의 작업 그리고 그 태풍이 몸집을 키워 한반도로 상륙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오지랖 떨 필요까진 없지 않나? 내가 뭐라고?’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나와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만 별 탈 없으면 되잖아.’


되지도 않는 일에 심력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류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양질의 한국영화를 만들어 내고, 할리우드 배급 파워 못지않은 힘으로 전 세계 영화시장에 한국산 콘텐츠를 팔고, 그 부를 한국으로 가져 오면 된다.

그리고 다시 그 부를 한국에 재투자하고.

미국과 유럽에도 멀티플렉스 체인을 열어 그들이 좋아할만한 한국 영화를 상영하면서 서구인들에게 한국영화를 친숙하게 만들어 나간다.

국내적으로는 굶어죽는 영화인이 나오는 안타까운 충무로 환경도 개선시키는데 일조하면 된다.

당연하지만, 외환위기 파고 속에서 류지호가 소유한 기업들이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격적인 경영도 좋지만, 과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


‘매사 나아갈 때와 멈출 때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하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꿈과 능력을 발휘하지만, 세상이 혼란하여 도가 없는 때라면 조용히 뒤로 물러나 기다리는 것도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군자의 처신인 것이다.

이제 곧 난세다.

<손자병법>에서 앞으로 진격함에 명예를 구하지 말고, 후퇴를 결정함에 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모든 진퇴의 판단 기준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의해 결정해선 안 되고, 오로지 생존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하루하루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주)가온의 임직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지혜다.

다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장수에게 난세는 기회이기로 하다는 사실.

그것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 ❉ ❉


용산경찰서에 출석해 모발과 소변을 제출한 후에도 류지호는 변호사와 비서실을 통해 수사에 적극 협조하며 수사기관의 과학적 검사 등 모든 절차에 협력했다.

마약성분으로 의심되는 약품이나 심지어 한약도 먹어본 적이 없는 류지호다.

당연히 나온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뜬소문을 한국의 경찰에서 내사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용산경찰서장 출신의 임건희 나래안전사장도 류지호 관련 내사를 막지 못했다.

대신 검찰로 갈 수 있는 것을 경찰 내사 선에서 묶어놓은 정도는 가능했다.

한국에서 류지호를 음해함으로써 뭔가 얻을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는 모양이다.


“부자나 유명인의 약점은 누군가에게 협박카드가 되기도 하니까요.”


신효정의 남편이자 법무법인 다온의 대표변호사 박문표가 한 말이다.

누군가의 의도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류지호와 관련된 마약혐의 내사를 진행하고 있던 용산경찰서 마약반은 혐의 일체에 대해서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내사를 종결했다.

언론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따로 밝히지 않았다.

혹시나 스포츠신문에서 음해성 기사를 내보낸다면 대유영화사업단의 송영석과 묶어서 대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미 나래안전 장문식 팀에서 관련 인물과 정황 등에 대해 증거를 수집해 놓은 상황이다.

관련 보도가 나가는 즉시 경찰에 고소고발을 진행하고 민사소송까지 계획하고 있다.

‘최연소 억만장자‘라 불리는 유명인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이 어떤 식으로 되돌아오는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다.

어쨌든 짧지만 강렬했던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을 마친 류지호가 일주일 만에 미국으로 복귀했다.

미국으로 오자마자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한 학년만 무사히 마치면 대학 졸업장이란 걸 딴다.

사실 류지호에게 대학 졸업장이란 것이 크게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 프로듀서이자, 작가 겸 감독으로 데뷔했으니까.

그럼에도 류지호는 부모님께 학사모를 씌워드리고 싶었다.


‘효도가 별 건 가? 남들 다 하는 거, 자식으로 해드리는 것도 효도지.’


이전 삶에서는 전문대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류지호다.

그때는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했었다.

철이 들고 나서 돌아보니 아니었다.

자신 때문이 아니다.

학업 뒷바라지를 했던 부모님들의 실망과 아쉬움.

그걸 몰랐다.

알았을 때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였고.

이전 삶에서 했던 실수와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 류지호로서는 대학졸업식에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어야 했나?’


현재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부모님이 대견해 하실 터.

미련을 가져봐야 의미가 없다.

게다가 류지호는 학교 성적은 비교가 안 되는 다채로운 수상기록을 가지고 있다.

감사패도 자주 받고 있다.

성적이 아니더라도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졸업반이 되니 영화과 친구들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수업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다.

다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열심이다.

졸업작품을 찍기 위해 돈을 모으려는 것이다.

학교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라는 것이 한두 푼 드는 것이 아니기에.

더구나 졸업작품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더라도 졸업작품은 매우 중요하다.

적당히 찍을 수가 없다.

TV·영화과 실습강의실을 나서는데, 맥도웰 교수가 불러 세웠다.


“혹시 시간 좀 되나?”

“차 한 잔 주시려고요?”

“오랜만에 이야기 좀 나누고 싶네.”


맥도웰 교수의 연구실에서 듣게 된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대학원이요?”

“나와 교수 몇 명은 자네가 조금 더 UCLA에 다니면 어떨까 생각했다네.”

“....음.”


사실 80년대 초만 해도 UCLA 영화과 대학원이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명문 영화과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명문 영화과 학생들 대부분은 학부만 졸업하고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편이었다.

점차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교수들 입장에서 학부에서 수박겉핥기식으로 배운 지식이나 기술이 실제 현장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여겼다.

졸업생들의 특강에서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고 있기도 했고.

단적인 예가 할리우드 촬영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영화들이 실험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적용한 영화가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매년 영화제작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때문에 스튜디오는 검증된 감독과 배우를 더욱 선호하게 됐다.

학부에서 16mm를 만져보고, 단편영화를 몇 번 찍어 본 경험으로는 할리우드에서 적응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많은 영화과 학생들이 대학원 과정을 졸업한 후 현장으로 가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는 추세다.

더스틴 린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그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UCLA, NYU, USC 같은 대학이 영화과로 유명한 것은 학부 때문이 아니다.

대학원 과정 때문이다.

2000년대로 넘어가면 TV·영화과는 대학원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UCLA TV·영화과 교수들은 대체로 학부생들에게 시큰둥한 편이다.

아무래도 어설픈 학부생보다 대학원생들이 소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자네는 학교에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학생이지. 지금까지 자네가 보여준 것만으로도 우리 영화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좀 더 큰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네.”

“메타보이씨와 디렉터 코폴라도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더라고요. 대학원 과정이 사실상 영화 학교의 꽃이라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교수들도 좀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차원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주며 밀어주지.”


명문 영화과를 보유한 대학들은 현직 할리우드 업계 종사자를 대학원으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학원 진학은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대학원 입학 심사는 꽤나 철저하다네. 학부 3,4학년 학점이 최소 B이상이 되어야 지원이 가능하고, 자기 소개서와 추천서 3통 그리고 대학원 입학 후 찍고자 하는 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시놉시스, 콘셉트, 기본 구상 등 3페이지 가량의 문서를 제출해야 하지.”


서류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하루 정도 심층 면접을 봐야 한다.

심층면접은 지원자를 학교로 불러 교수들 몇 명과 일대일 면담을 하게 되는데, 딱딱한 면접장이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와 장소에서 담소를 나누듯이 진행한다.


“교수들에게 장학금이나 진로 문제 등 궁금한 점을 자유롭게 질문해도 된다네. 물론 그룹 면담 시간도 있고, 면접 담당 교수와 점심도 같이 먹고, 하루 종일 인터뷰를 진행하지.”


UCLA 같은 유명한 영화 대학원을 보유한 대학들은 전 세계에서 지원자가 몰린다.

경쟁률이 높아 진학하기 쉽지 않다.

캘리포니아 거주자는 외국인 학생에 비해 약간의 가산점을 받긴 하는 것 같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자네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영화를 찍겠지?”

“가능하면 그러고 싶어요.”

“대학원은 4학년 강의와 비교해 봐도 이론수업이나 강의실에서 하는 수업은 거의 없는 편이네. 실기 위주 수업이 많지.”


영화과 특성상 당연한 것이다.

감독, 촬영, 편집 등 영화제작과 관련된 대학원 과정은 보통 3년 과정이다.

UCLA, NYU, USC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원 과정은 3년으로, 졸업하면 MFA(Master of Fine Arts) 학위가 수여된다.

영화비평은 2년 MA 과정이다.

각본 분야는 대학에 따라서 2년 혹은 3년 MFA 과정이다.

학부와 다른 점은 입학하자마자 강의 들으면서 단편작품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원은 학부와 달리 실습 과제가 상당히 많다.

졸업작품의 중요성 역시 학부 저리 가라할 정도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특별한 영화를 찍는다면 모르겠지만, 필름으로 그것도 35mm로 작업한다면 단편영화라고 하더라도 제작비 조달부터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류지호는 장편영화로 데뷔해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까지 했다.

어엿한 감독이다.

굳이 학교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막 졸업학년이 시작됐어요. 너무 이른 조언 아닌가요?”

“허허. 자네가 뉴욕이나 옆 동네로 도망갈까 봐 그러네.”


NYU 혹은 USC 대학원으로 가는 걸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미다.

물론 농담이다.

그러지 않을 거란 것은 맥도웰 교수도 안다.

류지호 역시 그럴 마음이 없고,


“한 번 브루인은 영원한 브루인이죠.”


맥도웰 교수가 자상한 눈길을 류지호에게 던지며 웃었다.


“허허허.”


오랜만에 UCLA가 배출한 뛰어난 학생이다.

대학원에도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들이 몇 명 있긴 했다.

그들에 비하면 류지호는 거의 완성된 감독이다.

학부생이 단편영화로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일은 UCLA TV·영화과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학부생이 장편영화로 기성감독을 제치고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경우는 70년대 이후 실로 오랜만이다.

비록 류지호의 영화가 UCLA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살짝 어긋나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 도전적인 태도와 실험정신은 높이 사줄만 했다.

그래서 교수들은 더 아쉬웠다.

좀 더 UCLA 영화과가 추구하는 것을 영화 속에 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물론 강요할 수 없다.

요구할 수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조언은 감사합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고려해 보게.”

“네.”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류지호는 대학원 진학이 끌리지 않았다.

학위나 실무교육은 류지호에게 큰 의미가 없다.

학교에 남아 3년을 더 보내는 것은 그에게나 다른 지원자에게나 좋을 것이 없다.

대학원에 다리만 걸치고 있는 것도 못할 짓이고.


‘나중에 조금 한가해지면 그때 대학원에 입학해도 되고.’


영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터.

그때 가서 대학원에 입학해도 된다.

UCLA 출신 졸업생들도 할리우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어떤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학교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보다는 스스로를 재점검하고, UCLA가 가진 인맥과 자원을 이용하기 위함이다.

때로는 학교가 나서서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는 프로듀서들을 대학원에 입학시키기도 한다.

그들을 통해 대학원생들이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교수들이 맥도웰 교수와 생각이 같다면, 나와 인맥을 만들어주려고 하는 걸 수도 있겠구나.’


현재 대학원에 동부와 서부, 외국에서 온 학생들도 더러 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 그들의 영화에 류지호가 지원할 수도 있고, 류지호를 보며 학생들이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미니메이저 스튜디오 트라이-스텔라를 소유하고 있으니, 학연까지 맺을 수가 있다.

류지호로서도 잠재성 있는 영화학도를 발굴할 수도 있고.

다 떠나서 일단 졸업이 먼저다.

미국 대학은 대충 출석만 한다고 졸업을 시켜주지 않는다.

특히 졸업작품이 엉성하면 학업성적이 제아무리 좋아도 졸업을 못한다.

아르바이트를 할 일 없는 류지호는 졸업작품에 골몰했다.

이때만 해도 졸업작품이 거창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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