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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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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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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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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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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박스오피스는 내가 더 높거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닷새 동안 토론토에 머물렀다.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많은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에서 세계 곳곳에서 온 감독·배우들과 교류했다.

그들로부터 수십 장의 명함을 받았다.

감독으로서 프로듀서로서 또 복합기업 JHO Company 오너로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언론노출과 공식적인 자리에 잘 나서지 않는 류지호다.

이번 같은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찾는 곳도 찾아가야 하는 자리도 많았다.

어쨌든, 류지호는 WaW 픽처스 외화수입팀이 좀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 후, 다양한 미팅을 소화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계약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바쇼비츠 형제와의 계약이다.

바로 <매트릭스> 프로젝트다.

형제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이미 <어쌔신>의 스펙 스크립트(원안)를 써서 예사롭지 않은 신예를 출현을 예고한 바 있었다.

<어쎄신> 제작 당시에 워너-타임의 제작총괄 사장이 바쇼비츠 형제가 쓴 세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묶어서 계약하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류지호의 지시를 받은 도널드 제이콥이 끼어들었다.

형제는 워너-타임이냐 트라이-스텔라냐를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보면 워너-타임의 승리다.

그런데 워너-타임 CEO는 형제의 영화가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난해하며 특수효과의 난이도가 높은 것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했다.

결국 1년 넘게 <매트릭스>와 계약을 미루다가 최대 6,500만 달러까지 제작비를 내주겠다고 약속한 류지호와 계약을 체결하게 됐다.

워너-타임에서 제시한 제작비는 최대 6,000만 달러.

500만 달러에다가 JHO Company 산하에 할리우드 빅3 VFX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는 것도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뒤늦게 워너-타임에서 제작비를 올려서 베팅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형제의 마음이 돌아서고 난 후였다.


“Hues & Rhythm Studios가 전폭적으로 영화에 참여한다는 것이 사실이지?”


끄덕.


“<터미네이터Ⅱ>와 <쥬만지>의 그 Hues & Rhythm 맞지?”


끄덕.


“홍콩에서 위엔우핑을 데리고 올 거고.”


형제는 홍콩무술영화의 광팬이었다.

류지호가 <취권>의 위엔우핑을 무술감독으로 초청할 것이라고 하자 당장에 계약서에 서명을 하겠다고 몸이 달았을 정도다.

이후의 과정은 JHO Pictures과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에 떠넘겼다.


‘이 꼴통들과 친해봐야, 정신만 사나워.’


류지호는 바쇼비츠 형제와 라르스 트리르에 등 다소 사차원적인 사고방식의 감독들과는 적당한 선에서 안면만 터놓았다.

항상 논란만 몰고 다니는 이들이다.

친구가 되면, 두고두고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그들로부터는 본받을 것도 배울 것도 별로 없고.

차라리 이들에 비해 덜 사차원인 태런티노와 어울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매트릭스> 프로듀싱에 참여할 생각 아니었습니까?”

“트라이-스텔라에서 실무적인 부분을 총괄할 프로듀서를 선임해서 보내겠죠.”


워너-타임이 아닌 트라이-스텔라로 투자·배급이 바뀌었다.

제작사 역시 JHO Pictures가 되면서 이전 삶의 영화와 달라질 가능성이 생겼다.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알 수 없다.

모리스 메타보이가 바쇼비츠 형제를 통제할 베테랑 프로듀서를 보낼 것이다.

류지호는 영화가 형제의 정신세계처럼 잡스럽지 않도록 중간마다 확인하면 된다.


“Don, 다음 미팅은 파인라인 시네마였던가요?”

“생산책임 사장 조나단 미러와 만나셔야 합니다.”


호텔 스위트룸으로 파인라인 시네마의 생산담당 부사장(Vice President in Charge of Production) 조나단 미러와 그의 비서가 찾아왔다.

할리우드에서 조금 규모가 있는 스튜디오들에는 다양한 직책들이 있다.

스튜디오마다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다.

조나단 미러의 직책을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에서는 Production Head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영화제작 실무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

그가 토론토 국제영화제까지 와서 류지호와 미팅을 하려는 이유는 Timely로부터 판권을 얻었던 <블레이드> 실사화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최근의 움직임은 1992년 Timely가 래퍼이자 가수 Cool J를 캐스팅해 실사화를 준비한 것이다.

이후로도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했다.

최근에 <지옥의 반담>을 쓴 사뮤엘 고어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스크립트를 고쳤는데, 그것을 파인라인 시네마로 가지고 갔다.

사실 파인라인 시네마가 처음부터 <블레이드> 실사화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블랙 팬서>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Timely가 다른 캐릭터를 허락하지 않아 좌절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다.

웨스 스나입스는 <블랙 팬서> 출연을 원하고 있다가 실사화가 좌절되자 <블레이드> 출연을 자청했다.

그의 선언으로 프로젝트 가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이다.


“파인라인에서 블레이드를 백인으로 바꾸는 것을 논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Timely에서 단단히 뿔이 나기도 했다.

Timely Comics 흑인 캐릭터 중에서 블랙팬서와 함께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이 블레이드 에릭 브룩스다.

당연히 화이트워싱에 찬성해줄 리가 없다.


“잠시 논의된 적이 있긴 합니다만 주요 의견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디컨 프로스트에 리양중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애석하게도 그의 캐스팅은 불발되었습니다. 그는 <블레이드> 대신 <리셀웨폰4>를 선택했습니다.”

“그거 참, 안타깝습니다.”


류지호는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이전 삶의 디컨 프로스트를 연기한 배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작과 비교해서 싱크로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의 연기력은 좋았다.

다만 웨스 스나입스와 비교해 한주먹거리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마치 <범죄도시>의 마석도에게 <비트>의 환규가 깝죽거리는 격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도 부족하게 느껴지는데, 액션만 잘하는 리양중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다.


“제작비가 4,500만 달러던데, 제작비는 모회사인 터너브로드캐스팅에서 받습니까? 아니면 파인라인 시네마의 투자펀드가 따로 있습니까?”

“단독으로 제작비를 조달하는 것은 우리로서 큰 부담입니다.”

“먼저 Timely Enterprise는 <블레이드>의 영화권리를 모두 파인라인에 넘긴 적이 없습니다. Timely를 빼놓고 논의를 진행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Timely과 파인라인 시네마의 계약은 50:50의 5년짜리 판권분할 계약이었다.

5년 안에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판권회수 조항도 들어있다.

즉 내년까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50%의 영화판권을 다시 Timely에 돌려줘야 한다.

그들로서는 JHO Company가 Timely를 인수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적당한 선에서 양보할 의향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Timely Studios에서 제작되길 희망합니다. JHO Pictures가 지원을 하겠습니다. 제작 크레디트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파인라인은 북미 배급만 책임지고 해외배급은 트라이-스텔라가 하길 바랍니다.”

“.....음.”

“마지막으로 캐스팅 권한에 내가 관여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랍니다. 단 하나의 캐릭터만 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디컨 프로스트를 류지호가 직접 뽑겠다는 말이다.


“....음.”


조나단 미러 입장에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문제다.

캐스팅 부분은 투자자 측에서도 수시로 추천하는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해외배급을 트라이-스텔라가 전부 맡는 것이 자사에게 좋은 것인지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트라이-스텔라의 배급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수익 배분에서 파인라인 시네마가 이익을 덜 가지게 될 것을 우려했다.


“해외 배급은 어디와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단독으로 합니다.”

“......”

“아마도 파인라인에서 제작비의 일부를 해외 선판매로 충당하려고 했을 겁니다. 또 그것을 근거로 은행권 담보 대출을 받으려고 했겠죠.”

“.......”

“제작비는 백퍼센트 우리가 부담할 수도 있습니다.”

“Timely가 여전히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1억 달러 예산 영화를 여러 편.....”

“GARAM과 G&P 그리고 트라이-스텔라의 할리우드 합작 펀드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가에서 도는 소문은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마르지 않는 샘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영화 투자펀드 가운데 가장 수익률이 높은 펀드이자 가장 많은 자금이 운영되는 영화 펀드다.

다만 비공개 펀드라서 일반인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영화 제작 전에 싸게 해외판권을 넘기는 것보다 북미 박스오피스 상황에 맞춰 해외에 영화를 푸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이다.


“웨스는 <도망자Ⅱ>의 계약을 했다고 하던데.... 늦어도 내년 5월에는 크랭크 인 해야겠군요?”


웨스 스나입스는 <더 팬>을 트라이-스텔라에서 했다.

지난달에 개봉했는데, 좋은 흥행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도망자Ⅱ>에는 스펜서 베어드가 감독으로 내정된 상황이다.

류지호의 <The Killing Road>를 편집했던 바로 그 스펜서 베어드다.

따로 비서실에서 보고를 받지 않아도 웨스 스나입스와 관련해서 상세하고 파악하고 있는 류지호다.


“오늘의 미팅은 이 정도로 합시다. 파인라인 시네마로 돌아가서 최고경영자와 의논해보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유익한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류지호와 파인라인 시네마 측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일정을 마쳤다.

LA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폐막식에 참석하라고요?”

“수상 가능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닐 걸요.”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비경쟁영화제이지만, 캐나다 국내 영화 수상 부문이 있다.

또한 외국영화에 관객상과 국제비평가상을 수여한다.

어차피 <샤인>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미 온갖 영화제를 휩쓸고 다녔으니까.

실존 인물의 삶이자 천재의 이야기이며 음악영화다.

발로 찍어도 기본은 한다는 말이 있다.

<샤인>은 연출도 잘했다.

그래서 류지호는 폐막식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수상 가능성이 없기에.


“특별한 스케줄이 없다면 나와 함께 몇 시간 더 토론토에 머물지 않겠나?”


류지호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알버트 마샬 사장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샤인>이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메트로 미디어 어워드 2관왕을 차지했다.

그런데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에서 수여하는 상을 <The Killing Road>가 차지했다.

류지호는 이변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심지어 두 개 부문의 주요 상에서 <샤인>과 <The Killing Road>의 표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The Killing Road>는 이번 영화제 기간 내내 평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오로지 관객의 투표로 결정되는 관객상에서 간발의 차이로 <샤인>에게 수상의 영광을 빼앗겼다는 말은 영화팬들에게 먹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알버트 마샬 사장은 LA로 떠나려던 류지호에게 국제비평가 특별언급은 노려볼 만하다고 말했다.

그 보다 더 값진 비평가들이 주는 상을 받게 된 것이다.


“비평가가 좋아하면 영화는 망하는데.....”


류지호의 말을 들은 알버트 마샬 사장이 껄껄 웃었다.


“한국말 했는데, 알아들었어요?”

“표정을 보니 알겠던데. 흥행을 걱정했지?”

“돈 벌려고 찍은 영화는 아니지만, 완전 망하면 좀 그렇잖아요.”

“벌어.”

“번다고요?”

“특별언급 정도만 되도 제작비는 모두 회수해. 국제비평가가 주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작품성이 있다는 것을 공인받은 셈이니까.”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취향은 다 다르다.

<The Killing Road> 같은 마니아 취향적인 장르영화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특히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에 많다.

그 시장이 세계 영화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류지호의 속마음은 달랐다.

왠지 안심이 된다고 할까.


❉ ❉ ❉


토론토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본래 LA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폐막식 참석으로 일정이 조금 꼬였다.

어차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가야했다.

LA를 들렀다가 가는 것이 번거로웠다.

부산국제영화제에 <The Killing Road>는 초청작에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단편영화 특별전 형식으로 류지호의 단편영화 4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메인 스폰서 기업의 오너이기도 하고, 특별전도 열어주는 마당에 부산으로 날아가 얼굴을 비출 필요가 있다.


“보스, 리처드 박이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리처드?”


성을 보면 한국인인 것도 같은데, 풀 네임이 아는 이름은 아니었다.


“용무가 뭐라고 하던가요?”

“영화와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답니다.”

“미팅 약속이 잡혀있었던가요?”

“아닙니다. 무작정 호텔로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에요?”

“미국 영주권자라고 합니다.”


제 아무리 한국인이라고 해도 사전 약속이 없으면 비서들이 돌려보낸다.

종종 사기꾼들이 만만하게 보고 들러붙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정은 모두 끝났죠?”

“보스는 강행군으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찾아오라고 할까요?”

“괜찮아요. 잠시 담소나 나누죠 뭐. 올라오라고 하세요.”


류지호는 또 무슨 사기를 치나 여흥삼아 들어보기로 했다.

50대 초반의 한국인 남자가 객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류지호라고 합니다.”

“리처드 박, 아니 박은상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류지호가 박은상을 맞은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실 건 뭐로 드릴까요? 커피가 있고, 오렌지 주스, 콜라가 있어요.”

“커피 마시겠습니다.”


류지호가 커피를 손수 내려 두 잔을 가지고 소파로 왔다.

박은상의 앞에 커피를 놓아주고는 호로록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캐나다 교민은 아니시라고.....?”

“세인트루이스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시민권은 받지 않았습니다.”

“언제 미국으로 오셨는데요?”

“77년에 넘어왔으니까 벌써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도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하셨다고요?”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영화를 하다 보니.....”


‘어? 두 나라를 오가며 영화를 하고 있다?’


류지호가 기억을 뒤져보려다가 말았다.

그가 영화인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 출신의 영화인은 유학생과 뉴욕 출신 교포 몇 명밖에 없다.

류지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피칭을 하고 싶어서 찾아오신 거군요?”

“제가 준비하는 영화에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기꾼들과 어딘지 달라보였다.

눈망울과 태도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이 전부 연기라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제작하실 생각이세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예산이 어떻게 되죠? 장르는요?”

“액션영화입니다. 예산은.... 500만 달러 정도....”


듣자마자 사이즈가 나왔다.

저예산 비디오용 액션영화.

B급 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으로 찾아갔지만, 모두 거절당했을 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찾아왔을 것이다.

류지호로서는 진부하고 지겨운 패턴이다.


“시나리오는 가지고 오셨어요?”

“네. 잠시만.....”


박은상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내밀었다.


“응?”


표지에 써 있는 타이틀이 어딘지 낯익었다.

<KK Killer>.


'혹시.....‘


<은행나무 침대>에서 황장군으로 악역 신드롬을 일으킨 배우가 출연한 미국 로케이션 영화 제목과 같았다.


“선배님.”


류지호의 호칭이 바뀌었다.

기억하고 있는 영화가 맞았다면 적어도 돈만 노린 사기꾼은 아니었으니까.


“아, 예.”

“혹시 할리우드 프로덕션에 접수했거나 피칭 해보셨어요?”

“.....예.”

“이 영화 다찌마리에요?”

“건액션도 적당히 섞었습니다.”

“혹시 충무로에서 데뷔를 하시고 미국으로 오신 거예요?”

“사실은....”


박은상이 살아온 삶을 간략하게 들려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충무로로 나와서 임선택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십년 간 했다.

태권도 공인 4단이었던 그는 소위 ‘다찌마리’ 영화라고 불리는 액션영화를 찍던 임선택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땀내 나는 액션 영화 장르에 매료되었다.

입봉 이후 20여 편의 액션영화를 연출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유명한 액션영화 감독이었지만 잊힌 것이지만.

어쨌든 동남아시아에서 그의 영화가 더욱 인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그가 연출한 영화 두 편이 상영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 일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일까지 겪었다.

반정부 성향 영화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70년대 당시에는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소득수준이 높았다.

인도네시아의 영화사에서 3작품만 찍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홍콩에서 러브콜이 왔다.

결국 박은상은 두 나라가 아닌 미국행을 선택했다.

한국 공안부서 하도 괴롭히다보니 가족과 함께 이민을 와 버렸다.

충무로에서 수십 편을 연출한 박은상은 할리우드에서 B급 액션영화 감독으로 활약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메이저 배급망을 타고 상영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아마 <차이나타운>이란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을 겁니다.”

“원제는 뭔데요?”

“콜롬비아스에서 개봉할 때 타이틀이 <Ninja Turf/Los Angeles Streetfighter>였지요.”


기억에 없는 영화다.

류지호가 도널드 제이콥에게 눈짓을 보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널드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스마트폰의 시대라면 즉석에서 검색하면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현재는 비서가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해 봐야 했다.

여담으로 박은상 감독의 <닌자 터프>는 메이저 스튜디오인 콜롬비아스 픽처스가 북미 1,650개 극장에 배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제한 상영으로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할리우드 대작영화 상영관 숫자에 육박하는 스크린에 걸렸다는 의미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 도널드가 류지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이 끝났다는 의미다.

굳이 도널드의 확인이 아니더라고 류지호는 박은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임선택 감독과의 일화라던가 당시 충무로 상황은 현직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하는 게 우습지만, 난 액션영화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한때 내 영화 스타일을 홍콩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베껴서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니 홍콩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 옛날이야기지만.....”


그 이후로 고단했던 이민 생활, 태권도 사범으로서의 삶, 아시아 출신으로 미국 영화판에서 겪었던 모욕과 힘든 경험들, 마지막으로 류지호에 대한 칭찬까지.

한 시간에 걸쳐 류지호는 박은상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선배님, 일단 대본은 꼼꼼하게 읽어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후배님!”

“제가 미국의 영화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처럼 마음대로 이거해라 저거해라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ParaMax 산하에 디멘션필름이라고 저예산 장르영화 전문 제작사를 가지고 있어요.”

“<크로우를> 제작했던 영화사잖습니까? 브루스 리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디멘션이 공포영화 프랜차이즈 위주로 영화를 제작하지만, 간간이 액션영화도 제작하죠. 홍콩액션영화도 수입해서 ParaMax를 통해 배급하기도 하고요.”

“임 감독님의 <장군의 아들>도 미국에서 개봉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극장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비디오로 영화를 봤습니다. 여전 하시더군요.”

“매년 서너 작품의 한국영화를 ParaMax를 통해 북미에 배급하고 있어요.”

“좋은 일을 합니다. 암, 좋은 일이고말고요.”

“먼저 선배님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디멘션필름과 대화를 해볼게요. 그렇다고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박은상이 황공하다는 듯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저자세라서 류지호로서도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대본을 읽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혹시 저를 만나려고 일부러 토론토까지 오셨어요?”

“겸사겸사....”


박은상이 살고 있는 미주리는 미국 중부에 위치해 있다.

토론토까지 겸사겸사 올만한 거리나 비용이 아니다.

큰마음을 먹고 왔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어디서 묵으시는데요?”

“아는 후배가 하는 태권도장에서....”

“이 호텔에서 묵으시고 사시는 곳으로 돌아가시는 걸로 하세요.”

“괜찮아요....”

“3개 층을 통째로 빌렸는데, 업무 때문에 먼저 돌아간 직원도 있어요. 어차피 빈방이라 선배님이 묵으시는데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


류지호는 쭈뼛대는 박은상과 함께 호텔의 바로 내려갔다.

그 사이 비서에게 객실 하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박은상이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의 비디오를 구해보라고도 했다.

박은상은 한국영화사에서 특이한 존재다.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던 감독이다.

실질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인 1호 감독임에도.

오로지 액션영화만 판 상업영화 감독이기 때문에 저평가 받았다.

충무로에서 액션영화를 찍을 때는 드라마도 잘 다루고 스케일이 크고 리얼한 액션 연출이 강점이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혹은 할리우드에서 주목 받을만한 유의미한 작품을 만든 감독은 아니다.

다만 액션영화 장르만 고집하며 한길만 걸어 온 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잔혹 액션영화의 귀재’라고 불리던 박은상 감독.

류지호는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의 연출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충무로의 나쁜 물도 빠졌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요한 건 인생은 멈춰 있는 게 아니란 거야. 그래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도 살아야겠지. 그래서 포기하면 안 돼. 절대! 모든 건 다 때가 있어. 항상 이유가 있고..... 우린 순간에 맞는 이유를 찾아야 돼.]


이번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한 영화 <샤인>에서 나오는 대사다.

류지호는 박은상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작은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그것이 과거로 돌아온 후에 결심한 바에 부합했다.

삼류라고 불리는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영화판을 만들어 보자는.

바로 그 다짐에.


다음날.


류지호는 수행원들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제 박은상이 놓고 간 시나리오는 비서에게 넘겼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프로젝트는 류지호와 함께 할 수 없다.

대신에 류지호는 다른 프로젝트를 꺼냈다.

몇 년 전부터 적임자를 찾고 있던 원작소설의 실사화 프로젝트다.

일제강점기 만주와 상해 등지를 활보하며, 수많은 싸움꾼들과 대결을 즐겼던 풍운아.


‘시라소니!‘


류지호는 이 프로젝트를 박은상 감독에게 줄 생각이다.

이 시대 홍콩영화 액션 안무와도 다르고, 할리우드 액션 안무와도 다른.

진짜 한국식 리얼 액션.

무술이 아닌, 실전 격투라고 쓰고 개싸움이라고 읽는.

박은상 감독을 통해 땀내 나는 날 것 액션을 보고 싶었다.


“리처드 박 연락처 받아두었죠?”

“그렇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에 맞춰, 그를 웨스트우드로 초대하세요.”

“제니퍼에게 숙소와 항공권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부탁해요.”


<퇴미기록>에 이어 <풍운아 시라소니>까지....

WaW 픽처스의 블록버스터 라인업도 하나씩 갖춰가고 있다.


❉ ❉ ❉


매년 12월, LA와 뉴욕의 비평가협회에서 그 해 최우수작품 및 감독, 남녀주연배우 등을 선정 발표한다.

이 시상이 아카데미 후보선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모든 영화사들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시상식을 몇 주 앞두고 본격적인 아카데미 프로모션이 시작된다.

LA비평가협회는 <비밀과 거짓말>을, 뉴욕비평가협회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연출한 감독에게 각각 최우수감독으로 선정하게 된다.

두 협회는 또 두 영화에 각각 여우주연상을 수여한다.

최우수 남우주연상은 <샤인>에서 데이비드 페프고트 역을 열연한 제프 러쉬를 선정한다.

양대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제프 러쉬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는 확정이다.

최우수 각본상에는 LA 비평가협회는 <파고>를, 뉴욕 비평가협회는 <어머니>를 선정한다.

해리슨 노튼은 LA 비평가협회상에서 최우수 남우조연상에 선정된다.

<The Killing Road>와 <프라이멀 피어>에서도 열연을 펼쳤지만, 해리슨 노튼이 수상한 영화는 <래리 플랜트>다.

올해 세 편의 영화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해리슨 노튼은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 <래리 플랜트>의 변호사 역할을 잘 소화한 것을 인정받아 조연상에 선정된다.

<The Killing Road>가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수상작에 비할 바는 아니다.

비평가협회 주관 시상에서 <The Killing Road>가 완전히 빈손인 것은 아니다.

뉴욕비평가협회 최우수 여우조연상에서 마리아 베리가 선정된다.

류지호의 친구들, 고언형제의 블랙 코미디 <파고>는 LA와 뉴욕 양쪽 비평가협회에서 최우수영화로 선정된다.

3달 후에나 발표될 두 비평가협회 시상 내역이다.

류지호의 <The Killing Road>는 토론토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상에 이어 뉴욕비평가협회로부터 마리아 베리가 여우조연상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마리아 베리에게 축하한다는 말 좀 전해줘.”

“놀리는 거지?”


큭큭.


“박스오피스는 내가 더 높아.”

“쩝.... 처음으로 나와 형이 박스오피스 3,000만 달러를 넘었는데 말이지.”


크크크.


<파고>는 제작비 780만 달러로 전 세계 3,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된다.

<The Killing Road>는 제작비 320만 달러, 무려 전 세계 8,400만 달러를 거둬들이게 된다.

온갖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녔던 <샤인>은 제작비 600만 달러, 전 세계 3,600만 달러를 올리게 된다.

예술적 가치는 그들의 영화가 더 뛰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돈은 류지호가 훨씬 더 번다.

제작비 대비 수입까지 감안하면 <The Killing Road>가 월등하다.

이 기록은 1999년 <블레어 위치>가 제작비 6만 달러, 전 세계 2.4억 달러를 벌어들임으로 해서 깨지게 된다.

어쨌든 각종 영화잡지나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블레어 위치>가 제작비 대비 수입 기록을 깨기 전까지 기록을 보유한 영화로 <The Killing Road>가 매번 언급된다.

<The Killing Road>로 할리우드 데뷔를 한 류지호.

할리우드 데뷔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다.

아주 훌륭했다.

비평이나 흥행 모두에서.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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