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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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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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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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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토론토 국제영화제.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화면 앞에서 커튼처럼 하늘하늘한 천이 나풀거린다.

격자무늬로 구멍이 숭숭 뚫린 얇은 천 너머에서는 티아라 이브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녀는 몹시 혼란스럽다.

어둠속에서 잘생긴 악마가 웅크리고 있다.


[킥킥. 겁먹은 얼굴이 꼭 어린 소녀 같군.]

[당신이 진짜 누구인지 헛갈릴 지경이야.]

[내가 누군지 말해 줄게. 이 X같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뭐든지 할 놈. 그게 나야. 이제 이해가 돼?]

[당신은 가면을 쓴 것 같아. 마치... 마치...]

[동물을 생각해봐. 연어나 거미들. 걔들은 짝짓기 하다가 죽어. 우린 주위환경에 맞춰 위장한 것뿐이야.]

[어떤 모습이 진짜 당신의 모습인지 모르겠어.]

[당신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 생각을 줄여 나처럼. 복잡해지니까.]

[......]

[난 생각이 많은 게 아냐. 그냥 말이 많은 거지. 큭큭.]

[......]

[매일 사람들이 죽어. 슬퍼하지 마. 대도시에서는 지갑만 꺼내도 어느 순간 몸에 4방의 총알구멍이 생겨.]


벤 사이퍼의 한쪽 얼굴은 완전 어두워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반쪽짜리 가면을 쓴 것 같다.

권총을 꺼내 티아라 이브의 앞에 놓아둔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떠버리가 아니라, 낮고 음울한 목소리로 대사를 이어간다.


[행동으로 옮겨. 고민하지 말고. 그러면 자유로워져.]


벤 사이퍼가 계속해서 티아라를 유혹한다.

살인을 부추긴다.

신은 절대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

오로지 악마만이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아니야, 난 못하겠어.]


얼굴의 한쪽이 완전 어두워 아수라 백작(?) 같은 벤 사이퍼는 거부하는 티아라 이브를 가만히 응시한다.

무언의 압박이다.

결국 티아라 이브는 벤의 협박에 굴복한다.

악마의 시험에 패배하고 만 것이다.

연약한 인간에게는 예정된 결과다.

악마의 시험을 극복하는 것은 영웅뿐이니까.

권총을 손에 쥔다.


[이 땅은 하이에나들의 땅이야. 살고 싶어? 그렇다면 당신은 늑대가 되어야 해.]


그 말을 남겨두고 캠핑 트레일러를 떠난다.


벌컥.


티아라 이브가 권총을 챙겨 캠핑 트레일러를 뛰쳐나간다.

차를 향해 걸어가는 벤 사이퍼의 등에 권총을 겨눈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본들 여전히 주도권은 벤 사이퍼에게 있다.

캠핑 트레일러 내부에서 벤 사이퍼가 티아라 이브를 위협한 것과 정반대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티아라 이브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벤 사이퍼는 별 감흥이 없이 돌아서서 자신의 차로 향할 뿐.


탕!

탕탕탕탕......!


차를 타고 떠나는 벤 사이퍼 뒤, 캠핑 트레일러 안에서 총성이 들려온다.


[나와 함께 하려면.... 살아있어야 해. 티아라....]


티아라 이브의 손에 죄 많은 남편이 죽음을 맞이한다.

복수인지 단순히 살인일 뿐인지는 관객의 판단할 문제다.

암튼 보안관들은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미온적이다.

겉으로는 연방수사국 요원들이 어서 빨리 도시를 방문해 수사해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군다.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다.

보안관과 보안관보들이 찔리는 게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애송이 FBI 요원을 잘 요리해서 범인이 잡힐 때까지 시간을 끌고만 있다.

동료 요원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에 안심한다.

벤 사이퍼는 그런 속내를 이용하고.

뚱뚱한 배와 엉덩이로 어떻게 의자에 앉아있는지 의심스러운 보안관을 향해 벤 사이퍼가 수사를 채근해 본다.


[그냥 여기 죽치고 앉아서 다음 사건이 벌어지기만 기다려요?]


사실 벤 사이퍼 또한 아쉬울 것이 없다는 투다.


[그럼 어쩌자고? 나오지도 않는 지문을 더 뒤져? 아니면 200마일 떨어진 대도시 경찰서에 가서 얼굴도 모르는 놈들 사진이라도 뒤져봐? 차라리 여기서 죽치는 게 낫지.]

[무슨 꿍꿍인 줄 알 것 같아요.]

[꿍꿍이 같은 건 없어.]

[시간 끄는 거죠? 수사가 길면 길수록 은퇴하는 날도 미뤄지니까.]

[나는 놈이 실수하길 기다리는 거야.]

[네. 그러시겠죠.]

[느긋하게 있어. 시골 공기도 만끽하고.]


무사안일, 천하태평인 보안관이다.


[거지같은 마트는 바가지가 강도 수준이고, 하나 뿐인 식당은 불친절한 할머니가 서빙을 보고,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요?]

[그래도 다들 150년이나 여기서 잘 살고 있어.]

[동굴에서도 15만년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진 않잖아요.]

[검둥이들과 인디언은 그러고 살았잖아.]

[오래 전 우리 선조가 이곳에 와서 원주민을 죽였죠. 그리고 저 먼 땅에서 사람을 잡아왔고요.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은 이 땅의 타운을 말살하고 땅을 차지했어요. 150년 전만 해도 이 곳은 임자가 따로 있었어요. 그때는 군대가 그런 짓을 했지만, 이제는 다른 것이 그런 짓을 벌이고 있죠.]

[다른 거?]

[돈. 자본.]


이후로 벤 사이퍼는 월가에서의 경험을 한 동안 늘어놓는다.

또 5년 안에 IT 거품이 한 순간에 꺼지며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미국의 적들이 본토를, 그것도 뉴욕을 공격할 것이란 말까지 한다.


[나라면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릴 겁니다.]

[끔찍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공항도 모두 폐쇄해야 하죠. 난 이 나라가 더 이상 이민자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네도 깜둥이와 옐로를 싫어하는 모양이군.]

[난 블랙, 화이트, 옐로우 모두 싫어요. 붉은색을 사랑하죠. 정열적이잖아요.]

[유감이네만, 이 타운에 붉은 머리 앤은 없다네.]


별 시답지 않은 유머를 던지는 보안관이다.

하지만 그걸 벤은 우습다고 웃어재낀다.


[......!]


그런데 웃는 벤 사이퍼의 눈동자에는 위험한 광기가 번들거린다.

왠지 벤이 인적 없는 곳에서 보안관의 목을 ‘쓱싹‘ 할 것만 같다.


[이럇!]

[하하하.]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

일과가 끝나고 펍에서 술을 퍼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사람들.

순박하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시골 사람들 특유의 정서.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삶과 비슷한 일상적 나날들이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일상들.

가끔 살짝 미끄러지기도 하고, 속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쳇바퀴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춰져 있는 비밀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목장들에서 벌어지는 아동성폭력과 동성 간의 부적절한 여러 성적 범죄들.

그런 범죄를 서로 쉬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무관심한 이웃들.

목장들에는 마초들이 득실거리고, 가족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가부장주의 아래 가족들은 숨 막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호프’라는 가상마을의 일상 디테일이 사실감을 살려주었다.

일상의 모습이 담담하게 묘사되자, 마치 미국 어딘가 시골마을에서 실제 벌어졌을 법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일상 속에서 벤 사이퍼와 티아라 이브가 운명적인 사슬에 묶인다.

커플이 되어서 연쇄살인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살인 행각은 철저히 우발적이다.

벤 사이퍼는 그냥 재미로 총을 쏘고, 기분이 나쁘고, 짜증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분노도 보이지 않고, 증오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해맑은 어린 아이가 심심해서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것보다 살인에서 더한 쾌감을 느낀다.

아니다.

살인행각은 두 사람에게 섹스의 전희와도 같다.

티아라 이브는 살인범죄에 빠져들며 흉악한 인물로 변해간다.

어느새 벤 사이퍼처럼 괴물이 되어간다.

일그러진 카타르시스.

삐뚤어진 사고방식.

커플의 폭주하는 살인이 호프타운의 실종자 숫자를 급격하게 늘린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실종사건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 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실제 살인 장면을 묘사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NC-17 등급을 받았지만.

어쨌든 섹스와 폭력을 훨씬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류지호는 최대한 은유와 암시만으로 처리했다.

몇 번 나오지도 않는 살인 장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다.

류지호는 티아라 이브라는 여성을 가족도 없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사회도 없고, 의지할 공권력도 없는, 과거는 잊어버리고 내일은 더더욱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런 환경 속으로 밀어 넣었다.

벤 사이퍼라는 연쇄살인범에게 가스라이팅 당해서 타락하게 만들었다.

다소 개연성에서 의구심을 드는 부분도 꽤 보였다.

미처 돌아가는 호프타운과 인물들의 폭주로 인해서 약간의 허술한 개연성이 덮였다.

특히, 두 주연 배우는 세밀한 감정 표현부터 눈빛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열연이 시마스코프의 공허한 화면과 어우러져 강렬함을 선사했다.

자신을 창녀 취급했던 남자에 대한 극한의 울분으로 떨리는 손, 싸늘하게 변한 눈빛, 뚝 떨어진 한 방울 눈물, 미세하게 흔들리는 표정 연기까지.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티아라 이브의 감정을 살인으로 표출하는 마리아 베리의 연기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면서 몰입감을 한층 높였다.


[증거와 폭력....]

[뭐라고 했어?]


증거라는 영어 evidence에서 E를 지우고 d를 o와 l로 분리시키면 violence.

즉 폭력이 된다.


[그 여자는 언제 죽일 거야?]

[곧.]

[그럼 이곳에서 나와 살래?]

[싫어. 난 이곳을 뜰 거야. FBI 놀이도 시시해졌거든.]


보안관보 대니와 벤 사이퍼가 T-BONE 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간다.

손님이라곤 한 명도 없는 한적한 식당이다.


[계획이 뭐예요?]


대니는 벤 사이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메뉴판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때 이 식당의 유일한 서빙인 환갑을 훌쩍 넘긴 노파가 테이블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 어때요?]

[더워서 친절하게 대할 기분이 아니야.]


대니의 물음에 불친절한 태도로 답변한 노파가 이번엔 벤 사이퍼에게 화살을 돌린다.


[먹기 싫어?]

[....네?]

[여기서 3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티본 스테이크와 감자 말고 주문했던 손님이 없었어.]

[여기 벤은 대도시에서 온 FBI 요원이에요. 제인.]

[대도시에서 온 FBI 등신만 빼고.]


마치 귀찮으니까 대충 주문해서 처먹으라는 투다.

영화 내내 이런 식이다.

FBI요원 행세를 하는 벤 사이퍼는 이 시골마을에서 우월적인 신분이 아니다.

보안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몇몇 유지, 권력자에게만 통하는 신분이다.

동네 주민들은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

그런 분위기에서 벤 사이퍼가 연쇄살인마로서 기분이 나쁘면 언제든 혹은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걸 계속해서 영화에서 암시한다.

벤 사이퍼의 외모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백면서생.

그런데다 육체적인 능력도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다소 가벼운 언행과 투덜거림을 입에 달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만만해 보인다.

그건 극중 인물들의 착각.

벤 사이퍼는 가볍고 어설픈 신참 FBI 요원이 아니라 연쇄살인마다.

이미 여러 차례 살인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감독이 은연중에 깔아놓은 여러 암시들 속에서 언제든 무슨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리슨 노튼은 극중 인물들이 보지 못하는, 관객들만 볼 수 있는 곳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류지호의 입장에서 그런 연기는 촌스러웠다.

도리어 히죽 순박하게 웃으라고 해리슨 노튼에게 주문했다.

그 모습이 더욱 기괴하고, 불안감을 조성할 것이라면서.

이 장면에서도 불친절한 노파를 향해 더욱 친절하고 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나칠 정도로.

당연히 관객들은 이 식당 씬이 끝나면 벤 사이퍼가 노파를 죽이거나, 노파가 시체로 발견될 것이라 지레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벤 사이퍼는 노파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호프타운에 들어오기 전, 방문했던 마을에서와 똑같은 쇼트가 펼쳐진다.

호프타운의 악의 크기와 연쇄살인마 악의 크기를 묘하게 대비시키는 쇼트다.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화면을 이용해 우두커니 서있는 벤 사이퍼와 그가 바라보는 호프타운이라는 곳의 크기를 대비시킨다.

흡사 악의 크기를 재보는 것처럼.

개인으로서 벤 사이퍼는 절대적인 악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 타운 주민들의 악의는 그의 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개인주의, 무관심, 관습이라 불리는 범죄, 타락한 욕망.

이런 것이 개인에게 한정되면 작은 악이지만, 집단으로 이루어지면 그 악은....


“.....?”


관객들의 공통된 생각은 오후에 벤 사이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노파가 또 다시 죽어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의 일부는 이번에도 살인장면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풀어놓았다.

또 일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그런데 웬걸.

밴 사이퍼는 퇴근하는 음식점의 노파를 향해.


[문단속 철저히 하세요. 의심스런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보안관 사무실로 전화하시고.]


장면이 바뀌고, 캠핑 트레일러가 보인다.

티아라 이브가 잠자고 있다.

그녀를 깨운 벤 사이퍼가 캠핑카 한쪽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 술에 취했는지 약에 취했는지 보안관보 대니가 뻗어있다.

벤 사이퍼가 대니를 화장실 욕조로 끌고 간다.

팔 다리를 묶으며 짜증과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핸드헬드 촬영 장면이다.

그렇다고 정신없이 흔들리지 않는다.

화면이 슬쩍슬쩍 흔들리는 것에 어떤 긴장감이 느껴지는.


‘롭 리차드슨이 그 비싼 돈을 왜 받아 가는지 알게 해주는 멋진 촬영이지.’


단편영화를 연출·촬영하면서 핸드헬드 경험이 풍부한 류지호다.

장르마다 핸드헬드 느낌을 다르게 가져갈 수 있을 정도로 통달했다.


부스럭.


벤 사이퍼가 부엌을 뒤져 손에 잡히는 아무 도구나 손에 쥔다.

그것으로 대니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심지어 살점을 포 뜨기까지 한다.

펜치로 발톱을 뽑고, 상처에 물을 뿌리기까지 한다.


“으으.”

“욱!”


여성관객들의 입에서 옅은 혐오의 감정이 표출되었다.

꽤 실감나는 고문장면이 펼쳐졌다.

분명 영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비위가 약한 몇몇은 토할 것만 같았다.


[자본가는 절대 악이 아니야. 그렇다고 선도 아니지.]


재미로 민간인 차량에 테러를 가하고, 재미로 민간인을 성폭행하는 대니다.

그런 인간말종을 마음껏 조롱하는 걸 잊지 않는 연쇄살인마다.

그런데 하는 말은 살인적인 물가, LA흑인 폭동, 캘리포니아의 불경기, 실업률 등이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재산을 불려가지만, 서민들의 호주머니는 점차 얇아지는 미국 부의 불평등한 분배 문제까지 거론한다.

음울한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라 떠버리 FBI 요원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자본 자체가 악일까? 선도 악도 상대적인 거야.]


벤 사이퍼는 횡설수설, 오락가락 말도 안 되는 개떡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것도 개 목줄로 대니의 목을 졸랐다 풀었다 살살 약 올리면서.

티아라 이브가 첫 살인을 저지를 때 희생당한 개가 차고 있던 바로 그 목줄이다.


[이 타운에 사는 걸 행운으로 알아. 당신들이 선망하는 대도시는 죽어가고 있으니까.]


과연 그럴까.

이웃 어린이를 건드리는 이웃남자, 남동생을 성폭행하는 의붓형, 남편에게 성매매를 부추기는 부인.

그런 모든 것에 무관심한 이웃들.

정부에 신고도 하지 않고, 몰래 채취하는 금.

마치 미국 초창기에나 볼 법한 인종차별과 가부장적인 가정들.

노예를 부리듯 흑인과 중국인을 개처럼 사육하며 노동을 착취하는 시장과 보안관.

유니폼을 입은 채 뻔뻔하게 강도질을 벌이는 보안관보들.


[누가 더 쓰레기일까?]


고문과 구타로 욕실은 온통 피칠갑이다.

대니의 꼴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고.

그 옆에서 벤 사이퍼는 발가벗은 몸으로 태연하게 샤워를 한다.


탕!


마무리는 티아라 이브의 몫이다.

영화는 관객의 혼을 빼놓기 위해 더욱 몰아붙인다.

발톱이 빠진 발가락, 반쯤 잘린 귀, 퉁퉁 부어올라 눈까지 덮여있는 얼굴, 그런 얼굴을 덮고 있는 욕지기가 치미는 피딱지들.

욕실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팔 한쪽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까지.

죽어있는 보안관보 대니의 처참한 모습을 섬세하고(?) 친절하게 보여준다.

마치 이런 것이 진짜 폭력이라고 주장하듯이.

발가벗은 몸을 타월로 닦아내며 티아라 이브에게 툭 던지는 벤 사이퍼의 말.


[Good girl....]


해리슨 노튼의 연기와 존재감은 단연 압권이었다.

단 두 번의 무지막지한 살인 장면에서 완전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마리아 베리도 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살아 숨 쉬는 연기로 극 무게감과 긴장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외모 속에 가려져 있던 재능을 제대로 드러냈다.


[.....Good girl.]


속옷 차림의 티아라 이브가 피칠갑이 되어있는 욕실에서 중얼거렸다.

욕실 곳곳에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 핏자국을 닦아내는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일렁거렸다.

욕실 입구에는 인형을 안고 있는 스패파니가 그런 티파니를 멀뚱히 지켜본다.


[......]


벤 사이퍼는 살 떨리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떠버리처럼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면 능청스러운 반전이 있다.

해리슨 노튼이 이중인격의 두 개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벤 사이퍼라는 인물이 원래가 말이 많은 인물이다.

병적인 거짓말쟁이.

기존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잔혹무비하고 살벌한 이미지가 아니다.

다소 장난스러우면서 수다쟁이 연쇄살인마가 색다른 인상을 줬다.

반면에 감정이 완전히 삭제된 것 같은 티아라 이브는 사연이 많았다.

폐광에서 구출되어 살해당한 흑인 남자가 남편이었다.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무능하고 한심한 남자를 넘어 포주 노릇까지 했던 최악의 남자였다.

게다가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티아라 이브를 벤 사이퍼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타락한 그녀를 보며 흡족해할까.

아니면....

잠깐 쉬어가는 타이밍이다.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전 한 템포 죽이는 공식 같은 장면이다.

보안관보 대니의 시체가 바로 옆 칸 욕실에 방치된 상태에서 정사까지 치른다.

분노와 우울 그리고 광기라는 심해에서 허우적거리듯 그렇게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마음.

한편으로 벤 사이퍼란 구원자에게서 다시 주어진 삶만은 제대로 살고 싶다는 의지.

그러니까 무언가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

모순된 생각들이 티아라 이브의 내면에서 충돌했다.

이 복잡한 티아라 이브의 감정이 영화 <엔젤하트>의 정사 중 핏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오마주한 것 같은 영상으로 표현되었다.

TV 다큐멘터리 같았던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표현된 장면이다.

<The Killing Road>가 페이크 다큐나 실화를 영화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물론 누군가는 본래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벤 사이퍼는 선임 요원과 거짓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일한 목격자 죠앤을 도시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다.

한편 호프타운 직전 도시의 모텔에서 하우스 키퍼가 남자 두 명의 시체를 발견한다.

진짜 FBI요원들이다.

죠앤을 유치장에서 빼내는 벤 사이퍼가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FBI요원 행세는 이제 그만하시지.]

[그러지 않아도 이제 시시해졌어.]


죠앤이 벤 사이퍼와 보안관이 대치하자 끼어들었다.


[그러지 마요. 잘 해결할 수 있어요.]

[닥쳐!]

[모조품이라도 FBI 모자를 보내주려고 했는데.....]

[어쩐지.... X발! FBI치곤 X나게 섹시하다 했어.]


죠앤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주절거리는 것과 상관없이 오합지졸 보안관 보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바짝 얼어붙는다.


[날 처벌할 자격이 있나?]

[우린 누구도 처벌하지 않아.]


피식.


벤 사이퍼는 보안관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린다.


[머리통 날아가기 전에 권총이나 뽑을 수 있나 봅시다.]

[.......!]


사무실에 한참 동안 정적이 내려앉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미동조차 없다.

그렇게 서로 숨죽이는 대치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도 관객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지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정지화면이 아님에도 정지화면 같은.

죠앤만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데.....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신호가 된다.

벤 사이퍼가 가장 먼저 권총을 뽑아 보안관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


탕.탕.탕!


보안관보들도 허둥대며 권총을 뽑아 응사한다.

벤 사이퍼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몸에 총알이 박히면서도 보안관보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권총을 쏘아댄다.


탕탕탕!


멋진 총격전이 아니다.

빗나가는 총알도 많다.

공포에 질려 쏴대는 중구난방의 총질일 뿐이다.

보안관 사무실 직원 모두가 죽는다.

생존자는 오로지 죠앤뿐이다.

얼굴 범벅 눈물로 얼룩진 죠앤이 입을 연다.


[난 태어나야 하지 말았어야 해. 아니 이 촌동네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너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 것이 불행이 아니라.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야. 빌어먹게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없어. 이쁜이.]

[X까! 살인자 새끼야.]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으로 눈물을 쏟는 애처로운 모습과 동시에 분노가 뒤섞인 진폭이 큰 감정에 맞닥뜨린 캐릭터의 상황.


[날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지저분하게 삶을 끝낼 수도 있으니까.]


말과 달리, 벤 사이퍼가 풀썩 주저앉는다.

죠앤이 달아남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벤 사이퍼의 눈에 소녀가 보인다.

인형을 안고 있는 스태파니다.


[Hi. Baby....]


캠핑 트레일러에서는 티아라 이브가 벤 사이퍼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스태파니, 나도 정리할 준비가 됐어. 무슨 수를 써도 정리 못해? 왜? 아냐. 내가 벤에게 그랬어. 괴로우면 다시 오라고. 그리고 영원히 쉬게 해주겠다고 말했어.]


여전히 스태파니는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없다.

그런데, 스태파니에게 이상한 점이 눈에 뜨인다.

티아라 이브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스태파니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사람이 아닌가....


[미안해. 넌 데리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스태파니.....]


죽어가는 벤 사이퍼와 몽타주되는 영상들.

타운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죄악과 범죄의 현장들.

커플이 살인을 저질렀던 장소들.

묘하게 두 장소는 같거나 비슷했다.

우연일까.

그렇게 우당탕 총격전 장면에서 관객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길게 검은 화면을 보여준다.


꽝꽝꽝.


검은 화면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선행된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는 남자 두 명이 캠핑 트레일러의 문을 두드린다.


삐걱.


티아라 이브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들은 FBI요원 신분증을 보여준다.

그리고 벤 사이퍼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티아라 이브가 진짜 FBI요원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다.

대신 트레일러 뒤편의 땅을 파냈다가 묻은 것 같은 흔적을 보여준다.


[지겨워요. 가난하게 태어나는 건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사람을 괴롭히죠. 내가 아는 사람들 전부를 감염시키고, 아프게 만들잖아요.]

[궁금한 점이 생기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오셔도 날 만날 수 없어요.]

[.......?‘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거든요.]

[떠나요?]

[여행이죠. 그 길에 끝에 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호프타운으로 경찰과 FBI가 몰려온다.

그들의 차량을 지나쳐 캠핑 트레일러를 달고 있는 픽업트럭이 타운을 빠져나간다.

픽업트럭은 티아라가 운전하고 있다.

영화의 톤이 바뀐다.

차갑고 무감정했던 화면 톤이 캘리포니아의 일상적인 날씨처럼 보인다.

마치 영화 <Se7ven>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비가 내리고 축축하다가, 엔딩의 사막에서 해가 쨍쨍 내리쬐는 것처럼.

산길을 따라 달리는 티아라 이브의 시선으로 길가에 인형을 안고 우두커니 서 있는 스태파니가 보인다.

티아라 이브가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마치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듯이.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티아라와 스태파니가 이별하는 순간이다.


끼익!


죠앤이 숲속에서 뛰쳐나와 픽업트럭을 막아선다.

티아라 이브가 그녀를 태워준다.

죠앤은 벤 사이퍼가 연쇄살인범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이다.

티아라 이브는 공범이다.

보안관 사무실에 걸려있던 그림.

‘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 속 교차로가 실제로 펼쳐진다.

그림과 다른 점은 검고 불길한 하늘 대신 뭉게구름이 피어있는 캘리포니아의 푸른 하늘과 밀밭 대신 펼쳐져 있는 호프타운의 푸른 식물들로 가득한 구릉이다.

그리고 불길한 까마귀 대신 산새 몇 마리가 지저귄다.

검은색은 파랑색으로 노란색은 녹색으로 검은 까마귀는 알록달록한 작은 산새로.

티아라 이브의 픽업트럭이 농장지대 사이에 나있는 교차로로 접근한다.

벤 사이퍼가 악의를 품고 들어왔던 길이자, 새로운 악의를 품은 티아라의 시작점이다.

잠시 갈림길 중 어디를 선택하는지 망설이는 것처럼....

캠핑 트레일러를 달고 있는 픽업트럭이 한동안 멈춰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가 무성한 길가다.

티아라 이브를 배웅했던 스태파니가 서있던 바로 그곳.

그리고 캠핑 트레일러 욕실을 보여준다.

생수통이 뒹굴고 있다.

그 너머로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결박당한 죠앤이 욕조 안에 처박혀 버둥거린다.

공포에 질려 정면을 바라보는 커다랗고 동그란 죠앤의 눈에서....

쓸쓸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컨트리풍의 음악이 깔리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작가의말

리메이크에서 디테일이 보강되긴 했지만.... 크게 느끼진 못하실 겁니다.

즐겁고 보람 찬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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