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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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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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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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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토론토 국제영화제.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2.35:1 비율의 길쭉하고 시원한 화면.

밝은 갈색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그리고 코밑을 덮고 있는 수염까지.

다소 푸석푸석한 해리슨 노튼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의 살짝 갈린 목소리가 우울함과 음산한 느낌을 풍겼다.


[왜 항상 영화에서 인질을 쉽게 죽이지 않을까? 사실적이지 않아. 인질을 바로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자비심이나 연민 따윈 없이! 내 이야기로는 영화 흥행이 안 돼? 왜 안 되는데? 뭐라고? 관객은 해피엔딩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악당은 지게 되어 있다라.... 큭큭. 영화는 영화일 뿐이야. 실제 삶은 영화보다 훨씬..... 뭐 어때,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큭큭.]


첫 등장부터 캐릭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빛과 살벌한 말투,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가 더해져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해리슨 노튼이다.

크레디트가 화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사이, 해리슨 노튼이 지루할 틈 없는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와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며 화면을 꽉 채웠다.


[하나씩 차례로 죽이는 거야. 빵! 또 빵! 내가 감독이라면 협상을 하기 전에 인질을 죽이는 걸 보여주겠어. 잔인하게 빵! 또 빵!]


벤 사이퍼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그리며 그윽하게 정면을 슬쩍 바라본다.

마치 관객 혹은 스크린 밖의 사람들을 비웃는 것 같이.

젊은 감독의 치기어린 혹은 패기 넘치는 타이틀백이다.

해리슨 노튼의 얼굴 클로즈업이 한창 이어지다가, 창고인 것 같기도 하고, 건물 지하실 같기도 한 넓고 텅 빈 공간이 드러난다.

넓고 휑한 공간에 사람이라곤 달랑 둘 뿐이다.

화면 톤은 푸른색, 공간의 벽은 녹색과 회색으로 칠해져 있다.

바닥에는 테이프로 결박당한 누군가와 손에 파이프 렌치를 든 채 쭈그리고 앉아있는 벤 사이퍼가 보인다.

길쭉한 화면 한쪽 벽면에 흘러내리는 피로 써진 타이틀.


The Killing Road.


카메라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벤 사이퍼와 바닥에서 꿈틀대는 여자를 관조하듯 가만히 잡고만 있다.


퍽!


공허한 풀 쇼트에서 느닷없이 벤 사이퍼가 파이프렌치로 여자를 내려친다.


퍽! 퍽! 퍽! 퍽!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폭력.

급박하게 화면이 전환되며, 동이 틀 새벽 무렵의 희미한 조명과 텅 빈 공터 그리고 도로의 풍경이 몽타주 된다.


후다닥!


느닷없이 백인 여성이 낡은 건물에서 튀어나온다.

그런데 뜬금없이 버려진 골동품 오르간으로 화면이 튄다.

다시 저 멀리서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는 죠앤의 극단적인 롱 쇼트가 이어진다.

몽타주 편집 화면 위로 파이프렌치로 생고기를 다지는 듯한 ‘퍽!퍽!’ 사운드가 청각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긴장감이나 심리묘사를 위한 음악도, 비명소리, 인물의 거친 호흡소리조차 없다.

죠앤이 겁먹은 얼굴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달려와 화면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그 너머에서 벤 사이퍼가 모습을 드러낸다.


[......!]


화면 밖, 어딘가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벤 사이퍼의 고민은 짧았다.

미련 없이 다시 범행현장으로 되돌아간다.


낡고 색 바랜 붉은색 밴.

벤 사이퍼가 화물칸에 성인 남성의 허리 높이까지 오는 플라스틱 대형 통을 싣는다.

이미 안에는 너 댓 개의 통이 실려 있다.


‘설마 저 통속에 다 시체들이 들어있는 거야?’


영화 좀 볼 줄 안다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 그것이 밝혀질지 나름 시점을 예측해봤다.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의 묘미다.


‘과연 그럴까....?’


류지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스릴러 영화는 뭘 해도 독창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류지호는 독창성을 고민하는 것보다 의외성을 더 많이 고민했다.

관객들은 관습적인 진행방식보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의외성에서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붉은색 밴이 커피브랜드 사이렌 앞에 주차되어 있다.

벤 사이퍼가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운전석에 앉는다.

커피 맛을 음미한다.

마치 고된 노동 뒤에 맛보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도 누리듯이.

뜬금없이 공간과 이야기가 호프타운으로 점프한다.

화면 전체의 채도를 떨어뜨려 차갑고 건조한 느낌의 톤이다.

강렬한 명암대비를 주지 않아도, 영화 톤 자체만으로 온기 하나 없는 비정함이 느껴지는.

색도 빛바랜 듯, 질감도 투박한 듯.

마치 동트기 전 새벽 느낌이 드는 화면 톤이다.

호프타운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 도로.

수렵금지 표지판 위로 ‘탕탕’ 총성이 들려온다.

보안관보들의 우두머리 대니(존 터튜)와 신참 보안관보 잭(UCLA 졸업반)이 맥주병을 세워놓고 권총사격을 하고 있다.

둘 다 명사수다.


[술이 안 깨.]


셰리프 차량의 트렁크를 열어젖히면, 안에 자동소총부터 갖가지 권총들이 가득 들어있다.


[난 이 아가씨들을 정말 사랑해. 언제나 믿음을 주거든.]


대니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잭이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간다.


탕!


대니가 지나가는 차의 타이어를 쏘아 맞춘다.

잭은 그런 선임의 사격술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보안관보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강도로 돌변한다.

보안관 복장을 하고 대놓고 벌이는 강도질.

젊은 커플은 총까지 꺼내들고 위협하는 두 보안관보의 위협에 도리가 없다.


[우린 아무 짓도 안했어요!]

[바닥에 엎드려. 계속 반항해? 네 엉덩이에 한 방 갈겨줘?]

[쏘, 쏘지 마세요,]

[매번 운전을 이 따위로 하나?]

[아니요. 맹세코.]


잭이 남자를 위협하는 사이, 대니는 여자를 협박한다.

서부시대 무법천지도 아니고.

보안관보의 행동은 공권력이 아니라 날강도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남편에게 말해.]

[남편 아니에요.]

[난 X같은 널 싫어해. 증오해.]


대니가 권총의 총구를 여자의 입안에 쑤셔 넣고, 당장 방아쇠를 당길 듯 위협한다.

진짜 쏘려는 것이 아니라 커플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대니의 강압에 못 이긴 여자가 남자를 향해 증오를 표출한다.


[난 널 싫어해.]


커플의 자동차에서 마약봉지가 발견된다.

이를 빌미로 대니가 여자를 숲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강간까지 저지른다.


[경치 좋지? 가끔 나도 생각이 많아지면 여기 오지... 마음을 비우려고.]

[개자식.... 언젠가 너희 놈들도 똑같이 당할 거야.]


대니는 여자의 저주가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실컷 떠들어 봐. 내 말과 너희들 말 중 누구 말을 믿을까? 이곳에는 감시카메라도 없는데.}


연기, 촬영기술, 편집 모두 심심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적인 테크닉을 구하지 않고 담백했다.

셰리프의 SUV와 커플의 승용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갈 길로 헤어진다.

계속해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처럼 무난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끼익.


보안관 사무실로 복귀하는 대니의 SUV 앞으로 여자가 뛰어든다.

죠앤이다.


[살려주세요. 도와줘요. 제발!]


겁이 질린 죠앤이 대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녀는 숲과 들을 헤치고 온 것인지 옷이 찢기고 꼴이 엉망이다.

그들 너머 산등성이로 불길하게 해가 진다.

오후 7시가 넘어가면 문을 닫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

이곳의 유일한 펍과 편의점만 조금 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을 뿐.

한적한 것을 넘어 정막감이 돈다.

약간의 불빛이라도 있는 시골마을과 달리 그 너머로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이 마을 너머 산속 어딘가에 호프타운이 존재한다.

어둠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어둠 혹은 악의.... 벤 사이퍼.

그가 살인목격자 죠앤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벤 사이퍼의 낡은 밴이 마을로 천천히 들어간다.


지지직.


고장 난 모텔의 네온사인이 불길하게 깜박인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캠핑 트레일러 형식의 모텔이다.

벤 사이퍼가 화물칸에 실린 대형 플라스틱 통을 열어 인사를 건넨다.


[안녕, 베이비.....]


통 안에 언뜻 보이는 사람의 퍼렇게 괴사한 팔.....

벤 사이퍼가 손님 하나 없고 관리인조차 퇴근해버린 모텔에서 밤새도록 무거운 플라스틱 통을 굴려가며 어디론가 옮겨놓는다.


[난 더럽게 무서워. 왜? .....경찰에 잡혀서 사형 당할까봐.]


그렇게 중얼거리지만, 정작 벤 사이퍼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붉은색 밴 옆에 주차되어 있는 파란색 승용차 한 대.

벤 사이퍼가 운전석으로 몸을 집어넣고, 차 안 이곳저곳을 뒤진다.


[죄는 전염병 같은 거야. 치료제가 없는....]


부우웅.


극단적인 롱 쇼트.

지평선이 시네마스코프 화면 하단에 손톱 크기만큼 걸려있다.

나머지 화면의 대부분은 하늘 그리고 구름이다.

화면 하단 지평선에는 전봇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다.

콩알만큼 작아 보이는 붉은색 밴이 빠른 속도로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간다.

구름의 두께가 가까운 곳과 먼 곳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달라, 그 불규칙성이 먹구름 못지않은 불길함을 선사하는 것만 같다.


부릉. 부르르르.


산길을 달리던 밴이 말썽을 일으킨다.

때마침 숲 안쪽으로 캠핑 트레일러가 보인다.


꽝꽝꽝.


몇 번을 두드려보지만, 좀처럼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한참을 문을 두드린 끝에 결국 문이 열리고.... 발가벗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벤 사이퍼가 남자의 아랫도리에 슬쩍 시선을 뒀다가, 다시 남자와 눈을 맞춘다.

남자의 뒤편으로 부스스한데다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흑인 여성이 스쳐지나간다.

산속 캠핑 트레일러에서 살며 인근 남자들의 성노리개로 살아가고 있는 티아라 이브다.

벤 사이퍼는 귀찮아하는 남자를 가까스로 설득한 끝에 고장 난 벤을 임시 수리하게 된다.

남자가 화물칸에 실려 있는 플라스틱 통에 관심을 보이는 순간.

그의 최후가 결정되고 만다.


[우리는 슬픈 현실 속에 있어. 왜냐면, 넌 날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때마침 뉴스에서 호프타운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종사건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실종자는 세 명.

벤 사이퍼의 밴에 실려 있는 플라스틱 통은 모두 여섯 개.

그렇다면 더 많은 실종자가 있다는 뜻일까?

맥거핀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지나치게 똑똑한 관객들을 혼란시키는 장치다.


[......]


티아라 이브는 벤 사이퍼가 의심스럽다.

한편으로 그가 자신의 구원자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벤 사이퍼는 연쇄살인범이다.


[혹시 인질 놔준 적 있어요?]

[내가 무서워?]

[살려달라고 사정해야 하나요?]


티아라 이브의 눈을 죽어있다.

살아있지만, 삶은 시체와 다름없다.

벤 사이퍼는 그녀에게서 흥미를 잃어버린다.

이미 죽어 있는 여자였으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

[입으로 해 줄까요? 난 당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어....]

[그게 유언인가?]

[나와 스태파니에게는 소원이 있어요.]

[....스태파니?]


캠핑 트레일러 안 소파에서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소녀가 동화책을 읽고 있다.

그럼에도 반문하는 벤 사이퍼다.


[한 사람을 죽여줘요.]

[큭큭....]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벤 사이퍼가 티아라 이브를 배아래 깔고 농락했던 남자에게 데리고 간다.

총을 쥐어주고, 쏴보라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티아라는 목석같고, 의욕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벤 사이퍼는 개를 한 마리 끌고 온다.

티아라는 벤의 강요에 굴복해 총으로 개를 쏴서 죽인다.

사실은 티아라가 방아쇠를 당긴 것인지, 그녀의 손을 포개고 있던 벤의 손가락이 힘을 줬기 때문에 얼떨결에 총을 쏘게 된 것인지.... 정확하진 않다.


[이대로 그냥 가려고? 나도 데려가 줘. 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난 백마를 타고 오지도, 로시난테를 타고오지도 않았어.]

[알아. 기사가 아니라는 걸. 당신의 ‘보니‘가 될 순 없어도, ’판초‘는 될 수 있어.]

[개 한 마리 죽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권총 창녀‘가 되겠다고?]


‘권총 창녀‘란 표현은 금주법·대공황 시절에 무수한 범죄행각으로 악명 높은 보니 파커를 당시 신문기사에서 표현한 말이다.

벤 사이퍼는 티아라 이브를 살려두기로 결정한다.

마치 그녀의 캠핑 트레일러가 제집인양 치렁치렁한 곱슬머리를 자르고, 면도도 깨끗하게 한다.

헤어폼을 이용해 단정하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기까지 한다.

흰색 와이셔츠에 노타이 정장을 차려입자, 벤 사이퍼는 영락없는 신출내기 공무원으로 보였다.

변신을 마친 벤 사이퍼는 호프타운에서 일을 마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캠핑 트레일러를 떠난다.


[핫 초코 먹을래?]


스태파티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말을 못하거나 혹은 장애가 있는 아이인가.

어딘지 스태파니는 인형 같다.

티아라 이브가 스태파티 앞에 핫 초코가 담긴 머그컵을 놓아준다.


[그래, 피가 어떤 건 줄 알아. 하지만 너도 알잖니.....]


스태파티는 핫초코에 손도 대지 않는다.


[우리 아가 용감하지. 나도 힘을 낼 게. 넌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어. 스태파니.... 자꾸 그러지마.]


티아라 이브는 대답 없는 스태파니를 향해 계속 말을 건다.

스태파니는 핫 초코에는 손길조차 주지 않고, 동화책만 읽는다.

머그컵에 담긴 핫 초코는 그렇게 식어만 간다.

영화 관계자들이 마리아 베리의 연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전작인 <부메랑>, <고인돌 가족> 같은 코미디 영화로 익숙한 그녀의 연기가 어딘지 깊어지고 섬세해졌다.

그저 예쁘장한 흑인여배우 이미지였다.

그랬던 그녀가 제대로 연기를 뽐내고 있다.

호프타운의 보안관 사무실 앞 성조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인다.

보안관 사무실로 연행되어 온 죠앤은 어딘지 불안한 모습이다.


[내가 살인현장을 목격했어요.]


죠앤은 보안관에게 살인사건과 살인범에 대해 설명한다.

보안관(테일러 빈스)의 표정은 어딘지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호프타운 인근에서 세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 상황이다.

죠앤처럼 살인사건을 목격했거나 살인범을 안다는 신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모두 허위, 장난 신고다.

오랜만에 벌어진 사건(?)으로 타운은 재미있는 놀이판이 벌어진 듯 시끄러웠다.

보안관보 대니는 그녀의 몸수색까지 한다.

주머니에서 마약 봉지가 발견되고, 그녀는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날 왜 가둬! 풀어줘! 이 빌어먹을 돼지들아!]

[얌전히 그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아가씨.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살인자 놈이 날 죽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얌전히 이곳에 있으란 말이야!]

[그 곳은 세상 어떤 곳보다 안전하니까, 안심해.]


죠앤은 유치장에서 내보내 달라고 한동안 난리를 친다.

로즈 맥로한의 화내고, 욕하고, 바락바락 대는 모습은 정말 리얼했다.

<The Killing Road>는 현란한 영화적인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면서 담담하게 응시하는 느낌으로 펼쳐 놓는다.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어설프다면 바로 하품이 나올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류지호는 영화 곳곳에서 의미심장한 장치들로 계속해서 암시를 줬다.

1999년 달력.

올 해는 1996년인데 왜 세기말이지.....

9는 '완전을 위한 기다림'을 상징한다.

한편으로 10에 근접한 9는 불길한 숫자로 여기기도 한다.

완전한 수 10에서 1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홉 수'라는 말이 그렇다.

또한 보안관 사무실 벽 한 쪽에 걸려있는 대형 그림.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오마주 해서 그린 그림이다.

호프타운의 한 장소를 암시한다.

그림에서 실사화면으로 장면 전환되면서 파란색 승용차(모텔 주차장에 있던)가 삼거리로 진입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교차로에는 ‘호프타운’ ‘죽음의 계곡’ ‘용암 다리’ 세 개의 이정표가 박혀있다.

미서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여행전문가나 지리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그런데 ‘죽음’과 ‘용암’의 영문 글자의 일부분이 흐려졌거나 지워져서 뚜렷하진 않다.

그럼에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단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창백하다.


도대체가 이 영화에는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인다.

벤 사이퍼가 달리는 시골길은 밤의 세계로 곧바로 이어질 것처럼 음산하다.

호프타운 입구의 아치형 조형물에 부두인형처럼 누덕누덕한 할로윈 인형이 걸려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메인 도로에는 핏방울처럼 불길한 흡혈귀가 좁은 골목에서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영화가 시작한지 20분이 넘어가는 시점에야 벤 사이퍼가 메인 장소인 호프타운으로 들어왔다.

지금부터 컨트리풍의 쓸쓸한 음악과 ‘못다 핀 한송이’의 하이라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억눌린 울분 같은 음악이 뒤엉킨 70분이 펼쳐질 예정이다.

보안관 사무실에 당당히 입성한 벤 사이퍼는 자신을 연쇄실종사건 수사를 위해 주정부에서 파견한 FBI요원이라고 소개한다.

보안관이 보기에 FBI요원이라는 작자는 영 믿음이 가질 않는다.

애송이, 신출내기, 말만 많은 싱거운 녀석.

그리고 파트너 없이 혼자 왔다?


[선배와 다른 팀은 며칠 후에나 합류할 겁니다. 옆 동네 브롱에서 발생한 실종사건이 살인사건으로 전환되었거든요.]


벤 사이퍼는 수다쟁이처럼 말을 쏟아냈다.

떠버리, 허풍쟁이, 잘난 척 쟁이 등.

보안관들의 벤 사이퍼에 대한 첫인상이다.


[총갑이 열려있네요.]


대니가 얼른 자신의 총갑을 확인한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총갑의 덮개가 열려있다.


[잃어버릴 뻔 했군.]


류지호는 이런 식으로 계속 뭔가 냄새를 풍겼다.

어떤 암시와 복선이 진짜인지 모를 정도다.

뭔가 의미심장한 것들 투성이다.

보안관이란 작자의 행실은 전형적인 시골의 나태하고 게으른 공무원이다.

그를 보좌하는 보안관보들은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젊은 보안관보들이 벤 사이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다.


[사무실로 돌아가면 모두에게 FBI 모자를 보내줄 게.]

[대부분 이미테이션이라던데.....]

[FBI 요원이 가짜를 구하겠어? 걱정 마 정부에서 지급하는 진짜 모자를 보내 줄 테니까.]


어차피 모든 것이 거짓인지 무슨 약속이든 못할까.

결국 벤 사이퍼가 유치장에서 죠앤과 조우한다.

연쇄살인범은 유치장 밖에 있고, 목격자이자 어쩌면 희생자에 포함 되었을 수도 있는 죠앤은 유치장 안에 갇혀있는 아이러니.

두 인물의 화면 배치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치장 철망이 리차드슨 촬영감독의 일반적이지 않은 앵글로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특별한 미술적 요소 없이 오로지 조명과 유치장 창살만으로 표현한 미장센이 돋보였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나이를 먹은 것 같아보이진 않았어요.]

[체격은 요원님 정도? 말하는 걸 얼핏 들었는데, 목소리가 섹시했어요. 마치 요원님처럼요.]

[내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말은 자주 듣고 있지요. 하하하.]


죠앤은 그저 자신이 기억하고 본 대로 말할 뿐.

벤 사이퍼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진술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벤 사이퍼다.

시종일관 능청스럽게 조사를 이어간다.

관객은 이미 그가 연쇄살인범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해리슨 노튼의 의미심장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뭔가 당장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 밸리, 뉴욕 맨해튼에 대한 벤 사이퍼의 생생한 묘사가 죠앤 뿐만 아니라 유치장까지 따라온 보안관보까지 흔들어 놓는다.

해박한 지식들.

결코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누구도 벤 사이퍼가 가짜 FBI요원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아가씨 풀어주죠?]

[목격자이기도 하지만,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구금된 상태야.]

[음.... 마약이란 말이군요?]

[설사 목격자라고 하더라도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곳에 있는 게 더 안전 할 걸.]


맞는 말이라 벤 사이퍼는 더 이상 그녀를 풀어주라고 요구하지 못한다.

벤 사이퍼가 마을 돌아보겠다고 하자, 타이밍 좋게 살인사건이 접수된다.

모든 보안관들이 현장으로 출동한다.

벤 사이퍼 역시 따라나선다.

그런데 보안관들이 주고받는 눈짓이 어딘지 이상하다.

시체는 없었다.

살인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는 양이었다.

허탈해하는 벤 사이퍼를 보며 보안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했지, 무슨 시체인지 얘기 안 했어.]


보안관들이 벤 사이퍼를 놀린 것이다.

실제 시골에서는 말이나 양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신고가 많이 접수된다.


[사람들은 총격사건으로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지.]

[이번 주는 아니었어요.]

[실종된 사람들이 죽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 않나?]

[이곳을 둘러보세요.]

[누군가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지. 호프타운은......]


이 말을 남겨두고, 보안관과 부보안관은 퇴근을 해버린다.

이들의 행태는 연쇄살인범인 벤 사이퍼마저 당황시킨다.

무사안일, 천하태평.

벤 사이퍼가 나선다.

보안관보를 앞장세워 양의 시체를 최초 발견한 사람들은 조사한다.

특별할 것이 없다.

보안관보가 죽은 양의 시체를 가까이서 보겠냐고 제의한다.

두 사람은 양의 시체가 발견된 산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벤 사이퍼가 하늘 한 점에서 선회하는 까마귀를 발견한다.


[뭐 하세요?]

[생각.]

[말을 쉴 새 없이 하면서, 생각이란 것도 합니까?]

[사람들이 까마귀 떼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

[까마귀는 까마귀죠.]

[무정하다고 하지.]

[그냥 까마귀 떼라고 부르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부른답니까? 대도시 사람들은 꼭 그렇게 잘난 척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죠?]

[무정하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거든.]


까마귀 떼가 선회하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진짜 시체.

발가벗은 채 죽어있는 사내.


[아는 사람?]

[단골이죠. 단골 색광.]

[......?]


벤 사이퍼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척 한다.

호프타운의 남자들 사이에서 티아라 이브는 공중화장실이라고 불린다.

여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안다.

차라리 남편이나 자식이 이웃이나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 창녀에게 다녀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연쇄살인마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권을 말살하는 평범한 시골 사람들.

어떤 죄가 더욱 무거울까.

벤 사이퍼가 마치 전문가인양 엎어져 있는 시체를 뒤집는다.

머리에 자상이 나있고,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하루 사이에 사망했네. 등 뒤에서 쐈고....]


자신이 쐈으니까, 당연히 잘 알 수밖에 없다.

티아라 이브의 캠핑 트레일러에서 벤 사이퍼를 맞이했던 알몸의 사내다.

플라스틱 통에 관심을 보였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보안관보는 전문가적 식견을 드러내는 벤 사이퍼를 보며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실종사건의 첫 사망자가 나왔군요.]


호프타운에서의 발생한 첫 살인사건이다.

보안관보가 앞장서서 차로 향한다.

벤 사이퍼의 시선은 그의 뒤통수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치 뒤에서 습격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호프타운에서 성착취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들은 거 없어?]

[그 쪽은 취향이 아니라서 몰라요. 여자가 궁하지도 않고.]


외딴 산속에서 타운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광지역을 지났다.

호프타운은 서부시대 유명했던 광산 지역이었다.

곳곳에는 과거 골드러시 시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도시는 완전히 망했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장 일당(빈세트 부셰미)은 되도 않는 채광으로 희망을 이야기 한다.

자기기만이자, 위선이다.


[아직도 저곳에서 일을 하나?]

[아니요. 이 일대는 사유지예요.]

[사유지?]

[시장의 땅이죠. 저 쪽부터 이쪽 끝까지.]


모른척 하라는 보안관보의 충고를 무시하고 벤 사이퍼가 폐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는 흑인과 중국계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한다.

흑인은 티아라 이브의 남편이자 기둥서방이었던 자다.

이 땅의 주인(시장)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

이곳에 끌려와 노역을 하고 있다.

동양인(오순탁)은 이 지역을 지나다가 보안관들의 강도행각에 저항하다가 납치됐다.

실종신고처리 된 후에, 이곳에 감금당한 채 금을 채취하고 있다.

벤 사이퍼가 이 일을 문제 삼는다.

타운의 고위층들이 두 사람을 풀어준다.

타운을 벗어나려던 동양인은 보안관보 대니에게 사냥 당하듯이 산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적 작은 재미를 위해 숲속에서의 몰이사냥은 액션스릴러처럼 묘사되었다.

이런 장면마저 없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서 편집으로 약간의 재미를 넣었다.

캠핑 트레일러로 돌아온 남자를 기다고 있었던 것은 티아라 이브가 아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네.]

[......!]


벤 사이퍼가 살인마의 본색을 드러낸다.


작가의말

재미 없으신 분은 (5)로 바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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