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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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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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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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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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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토론토 국제영화제.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패배자.

실패자.


이전 삶에서 류지호의 모습이었다.

매일같이 시나리오를 썼다.

그것을 들고 시도 때도 없이 영화사를 들락거렸다.

그러면 뭐할까.

충무로 변방으로 밀려났던 걸.

삼류영화를 찍는 것도 모자라 싸구려 성인용 대본을 쓰는 신세로 전락했었는데.

좌절하고 또 좌절했었다.

그런 비루한 삶을 버티면서도 영화판을 떠나지 못했다.

단 한번.

자신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류지호가 운명처럼 다시 영화를 하게 된 것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상황일까.


‘내게 마지막 기회인 거야.....?’


이전 삶은 다시 오지 않을 과거가 되어 버렸다.

얼어 죽기 전의 삶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꿈도 못 꿨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것뿐만 아니라,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인물들과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그것조차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 어떻게 삶이 변화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또 해야 할 일들이 무수히 남아 있다.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 영화를 만드는 것.

언젠가부터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움직이고 있는 류지호다.

메이저 스튜디오라는 허울 좋은 간판.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삶의 동기가 아닌데.

최근에는 JHO Company를 키우는데 유독 에너지를 쓰는 것 같았다.

영화인과 기업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때그때 휩쓸리는 느낌.

생각을 이어 갈수록 류지호는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나오지 않을 답이겠지. 내가 언젠가 말했지 않느냐. 너는 상당한 바보이거나 성가실 정도로 진지한 녀석이라고.”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일종의 가르침이었다.

초심(初心)을 되새기라는 말이 아니었다.

욕망 혹은 야망에 충실 하라.

재력이든 권력이든 또 다른 어떤 성취든.

자신이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하라는 조언이었다.

대니얼 그레이엄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


“쯧, 역시 생각이 많은 녀석!”

“할아버지.“

“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때요?”

“뭐가 어때? 다 똑같지.”

“.....?”

“발밑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됐냐?”


류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미국 재계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 대니얼 그레이엄이다.

농담인 듯 아닌 듯 한 대답이었다.

분명 진심일 것이다.

류지호가 아는 대니얼은 매우 오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젊었을 시절에는 야망을 충족하기 위해 매사에 열정적으로 살아왔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많아. 빌어먹게도 말이지.”

“윌리엄 할아버지나 터너씨처럼 기부 좀 많이 하세요.”

“윌리엄은 몰라도. 겨우 터너? 웃기지도 않는군. 캐서린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누가 돈을 대는 지 잊었냐?”

“아, 그랬죠?”

“건방진 녀석.”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LA로 돌아가요.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차도 안마시고 그냥 가?”

“마신 걸로 칠게요.”

“이제 머리 좀 컸다고 예의까지 버리는 게냐?”

“저도 바쁜 몸이라고요. 제 시간도 조금 값어치를 매길 수 있게 됐네요.”

“쯧. 건방진 녀석.....!”


류지호는 윌리엄과 함께 파커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반나절을 머물렀다가 LA로 떠났다.

최근 들어서 가장 홀가분한 기분으로.


❉ ❉ ❉


엊그제 여름학기가 시작된 것 같은데 벌써 7월 마지막 주다.

물론 류지호는 강의가 많이 열리지도 않는 여름학기를 신청하지 않았다.

길고 긴 방학 기간 동안 단편영화를 찍어볼까도 생각했다.

딱히 끌리지 않았다.

장편영화 데뷔를 한 탓이다.

다음 학기부터 졸업반이다.

방학 동안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데....


“Attack!"


최근 들어서 딴 짓을 조금 하고 있다.

웨스트우드 집무실에 출근해 재미도 없는 감사보고서를 검토하던 류지호가 4월에 출시된 ‘워크래프트2 확장팩’ 게임에 열중했다.


“Take That Ya Sod!(이거나 받아라 망할 놈아)”


작년에 발매된 오리지널부터 대부분의 웹진에서 만점에 가까운 리뷰를 얻었으며, 모든 면에서 전작보다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얻은 게임이다.

류지호는 SnowStorm 위주로 게임업계를 지켜보고 있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사실 북미 게임은 ‘둠’으로 시작해서 ‘둠’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둠‘은 발매 직후 대학교나 회사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위스콘신 대학교 전산망을 다운 시킨 것을 시작으로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암암리에 네트워크 게임을 즐기다가 업무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심지어 트래픽이 폭발해서 사내 회선을 마비시키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둠’에 빠져서 학기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대학생도 있었다.

국책연구소에서까지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 ‘둠’을 하느라 연구원들이 정신이 없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들릴 정도다.

파인 소프트웨어 내부에서 ‘둠’의 인기는 거의 종교 의식에 가까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헨리 게이츠가 개발사를 인수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류지호 역시 In-demand Software를 인수하게 위해 보우먼 팀장을 통해 제안을 넣어봤다.

실패했다.

그들은 ‘둠’의 성공에 고무되어 있었다.

메인 투자자도 이미 구한 상태였다.

그런데 GARAM Invest 벤처투자팀의 투자 리스트에 재밌는 회사가 들어가 있었다.

게임개발사 Helve Corporation이다.

파인 소프트웨어에서 윈도우 개발에 참여하고 ‘둠’을 윈도우용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했던 데이브 뉴얼(Dave Newell)이라는 개발자가 독립해서 설립한 회사다.

류지호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Helve Corp은 ‘하프라이프’를 비롯해 다수의 히트게임의 개발사일뿐만 아니라, 전자 게임 소프트웨어 유통망 ‘Valve'를 서비스하게 되는 회사다.

웨스트우드의 GARAM Ventures에서 투자했다면 무슨 게임을 개발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겠지만, 저 멀리 시애틀의 벨뷰에 소재한 벤처기업이라 류지호는 이내 관심을 끊어버렸다.

게다가 온통 StreamFlicks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도 했고.

암튼, GARAM Ventures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GARAM Invest 역시 벤처투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닷컴 창업 불꽃이 서서히 지펴지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의전비서 제니퍼 허드슨이 들어왔다.


“오늘은 스케줄이 없지 않았어요?”

“기쁜 소식이 있어서 전해드리려고요.”

“나쁜 소식도 있어요?”

“좋은 소식만 있어요.”

“뭔데요?”

“축하드려요 보스. <The Killing Road>가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공식초청 되었다는 연락이 왔어요.”

“9월에 열리는 그 토론토 영화제?”

“맞아요! 조직위에서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해줄 수 있냐고 문의를 해왔어요.”


'갈라 프레젠테이션'은 초청작의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레드카펫이 진행되는 가장 중요한 섹션이자 영화팬들이 가장 기대하는 최고의 섹션으로 꼽힌다.


“쟁쟁한 기성 감독들도 초청을 받지 못하는데, 대학 재학생 신분인 보스가 초청된 것이라구요. 제가 알기로 전례가 없는 대사건이에요.”


제니퍼가 흥분할 만도 했다.

류지호가 영화제에 공식초청 된 자체만으로 대사건이다.

지금까지 배우를 제외하고 감독이나 제작자 중에서 학생이 국제영화제 장편부문에서 레드카펫을 밟아본 일이 없었으니까.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학부생이 장편을 만드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영화가 매우 신선해서 초청을 결정했다고 알려왔어요.”


류지호를 더욱 기분 좋게 했던 것은.


“영화제에서는 <The Killing Road>를 연출한 감독이 보스인 걸 몰랐나봐요.”

“감독 프로필을 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찌 모를 수가 있죠?”

“실무자의 실수로 보스의 프로필에 UCLA TV·영화과 재학과 장편데뷔 사실만 적어서 제출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것을 놓치다니.

실무자가 해고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실수다.

어쩌면 ParaMax Films의 홍보마케팅팀에서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에요.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대요.”

“둘 모두 참석할 수 있어요?”

“일정 상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비슷한 시기에 열리거든요. 월드 프리미어라는 상징성도 고려하셔야 하고요.”

“알겠어요. ParaMax의 알버트와 의논해보고 결과 알려줄 게요.”

“네.”


영화제에서 관심을 가질 것이라 예상은 했다.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영화는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일 필요는 없다.

영화제가 추구하는 비전에 부합하거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으면 된다.

예술영화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다.

결국 <The Killing Road>를 베니스로 보내지 않고, 토론토로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류지호는 ParaMax 배급팀의 의견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북미 흥행에는 베니스 영화제보다 토론토 영화제가 훨씬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에서도 보스의 단편영화 프린트를 보내달라고 해요.”


9월에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된다.

특별 섹션에 류지호의 단편영화 초청전이 열릴 예정이다.


“몇 편이나 보내달라고 하던가요?”

“전부요.”


프로그래머들이 류지호가 찍은 모든 단편영화를 보고 선별하고 싶은 모양이다.


“영화제에서 수상했거나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추려서 5편만 보내는 것으로 하자구요.”

“네. 보스!”


류지호가 달력을 확인했다.

캐나다와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차례로 다녀오면 4학년에 올라가게 된다.

앞으로 3쿼터 동안은 졸업작품에 매달리게 될 터.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영화에 빠져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에드윈 터너는 류지호로부터 인수합병 거절을 면전에서 들어야했다.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시간은 조금 걸릴지언정 못 합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보다는 NBC 인수합병이 무산 된 것이 더욱 뼈아팠다.

에드윈 터너가 처음 의도한 대로 터너 브로드캐스팅사가 주도해 NBC를 인수했더라면 그의 말년은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터너 브로드캐스팅사의 주식 19%를 갖고 있는 워너-타임과 CEO 제리 레빈의 반대로 인수건은 무산되고 말았다.

에드윈 터너가 간절히 원했던 인수건이 물 건너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리 레빈이 역으로 터너 브로드캐스팅과 워너-타임의 합병을 제안했다.

에드윈 터너의 인생 후반기를 암흑 속으로 밀어 넣을 악마의 유혹이었다.

꿈에도 그 같은 사실을 몰랐지만.

에드윈 터너 소유의 뉴멕시코주 목장 활주로에 비즈니스 제트기가 내려앉았다.

목장의 비행장에는 에드윈 터너의 아내 폰다 여사가 마중 나와 있다.


“오랜만입니다. 부인.”

“반가워요. 제리.”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눴다.

폰다 여사는 어딘지 억지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목장의 별장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다.


“제리... 내 남편을 불행하기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결코 불행해지는 일은 없어요. 결코 두 기업이 수직적으로 결합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터너씨에게도 충분한 자율권이 주어지는 파트너 관계임을 장담해요.”


여자의 직감이란 것일까.

불안했다.

워너-타임 CEO 제리 레빈과 별장의 서재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폰다 여사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폰다 여사는 이 번 결정으로 인해 자신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음을 직감했다.


“차라리 JHO의 젊은 부자와 손을 잡았다면 안심이 되었을 텐데.....”


에드윈 터너를 대하는 류지호는 적어도 가식적이거나 비즈니스적이지 않았다.

존경심은 아닐지라도 태도가 진실 돼 보였다.

그 청년에게는 야망이라기보다는 자기 삶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개척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10여 년의 남편 에드윈 터너처럼.

반면에 현재의 남편과 제리 레빈은 과대 포장된 이상론에 휩싸여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 하고 있었다.

한 때 최고의 여배우였던 폰다 여사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폰다 여사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터너 브로드캐스팅과 워너-타임의 인수합병이 급물살을 탔다.

마침내 9월 중순.


[굴지의 언론·미디어 대기업 워너-타임은 17일 미연방통상위원회(FTC)로부터 케이블TV 뉴스 네트워크 CNN을 소유하고 있는 터너 브로드캐스팅시스템(TBS) 인수를 원칙적으로 승인받았다고 발표했다. 워너-타임은 성명을 통해 총 75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터너 브로드캐스팅과의 합병이 성사됨으로써 세계최대의 언론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탄생하게 됐다고 밝혔다. FTC는 그동안 워너-타임과 터너 브로드캐스팅의 합병이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심사 중이었다. 이미 한 달 전 대주주들이 인수에 대해 개략적으로 합의했고, 본지를 비롯한 몇몇 뉴욕 언론을 통해 인수에 따른 구체적인 조건들이 3일간의 노동절 연휴때 합의돼 인수계약 내용이 발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TBS 설립자인 에드윈 터너 회장과 TBS 지분 18%를 소유하고 있는 워너-타임, 그리고 21%의 지분을 갖고 있는 텔레커뮤니케이션(TCI)사 간에 인수에 관한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텔레커뮤니케이션(TCI)사의 칼 말론은 이번 합병의 당사자로 참여, 앞으로 워너-타임의 지분 9%를 갖게 된다고 밝혔다. 워너-타임이 TBS를 인수할 경우 지난 7월말 ABC를 인수한 LOG 컴퍼니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미디어업체로 부상하게 된다.]

- 월스트리트 저널.


“결국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구나.”


워너-타임과 TBS의 인수합병 뉴스를 보는 류지호의 마음이 어수선했다.

에드윈 터너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가 보다 할 사안이다.

지금의 상황이 조금은 안타깝게 다가왔다.

친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두 기업의 합병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당장이야 LOG 컴퍼니에 버금가는 대형 미디어기업이 탄생했다고 흥분들 하겠지만.

몇 년 안 가서 두 회사의 합병은 최악의 조합으로 판명 나게 될 터.

에드윈 터너는 자신의 의도대로 CNN을 이끌어갈 수 있는 모든 힘을 상실하게 된다.


“한국의 재벌들이 문어발식 확장과 차입경영, 순환출자로 대기업을 운영하다가 커다란 곤란을 겪게 되지. 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누군가의 성공담은 그저 읽을거리에 불과하다.

반면에 실패담은 좋은 참고서다.

실패 사례에는 해결책도 함께 들어있게 마련이니까.

류지호는 비서실에 워너-타임과 TBS의 결합 이후 물밑에서 벌어지게 될 경영권 경쟁, 조직관리, 의사결정 과정과 관련해서 내부사정에 대해 조금씩 정보를 모아보라고 지시했다.

JHO Company가 워너-타임, LOG 컴퍼니처럼 거대 미디어그룹이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거대한 기업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남의 실패사례는 류지호에게 교훈을 줄 것이다.

미리 준비하는 자는 성공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실패를 최소화 할 수 있을 테니까.


✻ ✻ ✻


9월 5일.

캐나다 온타리오의 주도 토론토.

북미에서도 그 크기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도시다.

류지호와도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도시 미시소가에 Eye-MAX 본사가 위치하고 있기에.

캐나다의 수도를 토론토나 몬트리올로 아는 한국인이 많았다.

심지어 캘거리가 수도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다.

그런데 도시의 크기는 이들 중 토론토가 가장 크다.

그런 토론토가 국제영화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올해가 21회인가 보죠?”


오랜만에 도널드 제이콥 비서실장이 류지호를 수행했다.


“그렇게 유서가 깊은 영화제는 아닙니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토론토 국제영화제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몬트리올 영화제는 한국의 영화기자들이 직접 날아와 취재를 해도 토론토 영화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북미 영화제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진행 되는 국제영화제임에도.

할리우드 기대작들을 아예 토론토 국제 영화제 기간에 최초 공개하는 경우가 많아서 필름마켓도 상당히 크게 열리고 있다.

한국의 매스컴에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개막작은 뭐예요?”

“캐나다 감독이 연출한 <Fire>라는 영화입니다.”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영화제다.

때문에 다른 영​화제에서 공개된 화제작들을 모두 상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미관객들이 올 초부터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주목 받은 영화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는 영화제란 의미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국제영화제와는 달리 영화 배급 창구, 다시 말해 필름 마켓으로써의 역할이 매우 컸다.


“영화제 기간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대거 토론토로 몰려옵니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보면 됩니다.”

“당연히 영어권 국가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겠네요?”


그 때문인지 한국영화나 한국인이 초청되거나 수상한 적이 없었다.

한국인으로써는 류지호가 처음으로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것이다.

한국영화가 아닌, 미국 영화였지만.


“할리우드의 입김이 강한 편이고 북미 영화들을 주로 주목하기 때문에 비영어권 국가 영화들의 수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평가입니다.”

“비경쟁이라면서요?”

“캐나다 영화가 아닌 외국영화 시상에 관객 투표로 진행되는 관객상과 비평가가 주는 상 단 두 개 부분이 있습니다.”


류지호는 수상은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월드프리미어가 중요할 뿐.


“일각에서는 1976년 영화제가 개최한 이후로 조금씩 성격이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나 영화 예술적 접근보다는 북미 외의 국가에서 북미영화시장 진입의 창구로 활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실험적인 작품이 부족하다,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영화들이 유럽 영화제 수상은 자신이 없으니 토론토 영화제를 발판삼아 마케팅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딱히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토론토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작품들이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도 받고 흥행도 잘되는 편이어서,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 충족시킨다는 평가를 받게 되니까.

올 해 초청받은 영화들의 면면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올해 토론토 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는 모두 40편이 초청 상영되었다.

작가주의 영화가 다수 초청되었지만, 장르영화이거나 장르를 변주하는 영화들도 많았다.

류지호의 <The Killing Road>만 해도, 장르를 혼합한 변종 스릴러 영화다.

실존 인물을 감동적으로 그린 <샤인>이 있었고, 1960년대, 원 히트 원더( One-Hit-Wonder)를 소재로 만들어진 유쾌한 음악 영화 <That Thing You Do>도 있다.

동성애 코드와 느와르를 혼합한 바쇼비츠(Wachowicz) 형제의 <바운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착한여자와 착하려고 하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물론 이들 영화들은 할리우드 산 영화들보다 조금 더 작가주의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대중성과 예술성이 적절히 조화된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캐나다 자국영화와 단편영화를 포함해 300여 편이 토론토 시내 20여 개 극장에서 열흘 간 상영될 예정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한 가지.


“보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주목 받은 영화는 대부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은 한 개 부분에서라도 수상하는 편입니다.”


그런 만큼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토론토 영화제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신작을 공개하는 첫 번째 무대로 점점 변해가게 된다.

즉 월드프리미어 장소로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ParaMax가 <The Killing Road> 첫 공개를 베니스 대신 토론토로 선택한 이유다.


“선댄스였다면 혹시 모를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부우웅.


류지호가 타고 있는 승용차가 토론토 시내로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영화제가 막을 올리자, 토론토 시는 온통 영화축제로 들썩거렸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영화상영 일정과 스타들의 방문, 주요 행사들에 대한 기사들, 당일 날 있을 영화에 대한 설명, 지난 날 있었던 영화에 대한 리뷰, 관객들과 언론들 간에 있었던 토론회와 강연들의 요약들이 각종 신문과 뉴스, 매스컴을 장식했다.

캐나다 극장뿐만 아니라, 북미 극장은 지정좌석제가 아니다.

때문에 영화상영 1시간 전부터 영화관 건물을 에워싼 긴 줄을 보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영화제 기간에 아예 휴가를 내고 영화를 볼 만큼 토론토 시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받고 있는 영화제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영화팬과 영화 관계자들.

류지호는 그들을 구경하며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화축제는 축제구나!”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영화제다.

하지만.


“젠장, 영화제에 와서 영화제를 즐길 수 없다니.....!”


영화제 참석 기간 내내 매우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가 줄줄이 잡혀 있다.

<The Killing Road>를 홍보하는 인터뷰가 아니다.

올해 JHO Company와 관련해 다사다난했던 일들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터너 브로드캐스팅시스템의 인수를 거절한 것, Timely Enterprise 인수로 바뀌게 될 것들, 작년 한 해 처음으로 할리우드 빅 식스를 제치고 가장 큰 박스오피스 수익을 거둔 트라이-스텔라에 대한 궁금증, 실리콘밸리 투자를 공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이유 등.

초청작인 <The Killing Road>를 취재하기 위한 영화 및 연예 기자들보다 경제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 했다.

물론 영화제 공식행사인 갈라 프레젠테이션 레드카펫, <The Killing Road> 월드프리미어 참석 및 공식 기자회견, 세계비평가협회가 주관하는 세미나 참석, 단편영화와 관련한 주제로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까지 잡혀 있다.

매일 밤마다 각종 파티도 참석해야 한다.

한국에서 온 WaW 픽처스 해외 영화 수입/배급 직원들이 개설한 필름마켓 부스도 둘러봐야 했다.

또한 사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미팅이 세 개가 잡혀있기도 했다.

<타이타닉>을 공동 투자/배급 하는 패러마운틴 최고경영자와의 식사 미팅.

92년부터 Timely의 캐릭터 <블레이드>를 실사화 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파인 라인 시네마 관계자와의 미팅.

마지막으로 바쇼비츠(Wachowicz) 형제의 차기작에 관한 계약이 예정되어 있다.


“패러마운틴 CEO와 미팅에서는 <타이타닉> 제작비에 대한 재조정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PARKs 부회장도 티타임을 갖자고 했다면서요?”

“Timely의 샘 리버먼 신임 CEO가 리빌딩에 정신이 없습니다. 판권 부분의 최종결정을 보스에게 떠넘긴 모양입니다."

"PARKs가 원하는 캐릭터가 뭔지 추측할 수 있어요?“

“Timely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책임자 말로는 전부터 <데어 데블>과 <일렉트라> 판권구매 의사를 꾸준히 보냈다고 합니다.”

“파인라인에서도 <블레이드>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하고 싶다고 하던데....”


파인라인 시네마의 모기업은 터너 브로드캐스팅이다.

에드윈 터너의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류지호가 직접 프로젝트를 살펴봐 줄 것을 부탁받은 바 있다.

당시에는 관계자와 미팅을 진행해보겠다는 말로 넘겼다.

토론토 영화제에 참석하는 김에 파인라인 측의 계획을 들어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바쇼비츠 형제와 맺게 될 계약은 <매트릭스> 투자·제작 계약이다.

류지호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매트릭스>를 채가기 전에 선점할 생각이다.

당연히 배급은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가 맡게 된다.


“이곳에도 보스의 고향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모양입니다.”


운전하는 말릭의 말에 류지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 곳곳에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70년대 처음으로 한인이 터를 잡은 이후로 크리스티 거리에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상점 3~40개 정도가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수준.


“토론토에 정착하는 한국인들이 더 나은 교육 체계 및 시설, 녹지가 잘 조성된 노스요크 지역으로 옮겨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크리스티의 코리아타운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도널드 제이콥은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 같을 때가 많았다.

류지호가 궁금하지 않은 것까지도 미리 준비하는 것 같은데, 때로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여담으로 2010년대에 접어들면 토론토에는 두 개의 한인타운이 존재하게 된다.

구 한인타운 크리스티가에는 대략 120여 개의 한인 점포들이 들어서게 된다.


“확실히 토론토가 큰 도시이긴 한 것 같네요.”


캐나다에서까지 한글 간판을 보게 되자, 류지호는 묘한 감흥이 일어났다.

어쨌든 류지호를 태운 차량이 한적한 지역에 들어섰다.

영화제의 메인 지역에서도 그리 멀지 않으면서 주변이 번잡해보이지 않았다.

8층 높이에 아담한(?)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보스!”


스탠 크레이그 트라이-스텔라 배급총괄 부사장이 얼른 휴대폰 통화를 종료하고 류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하하하.”

“오랜만이에요.”

“보스와 시간과 장소가 매번 엇갈렸는데, 이번에 드디어 일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스탠 부사장의 목소리가 까랑까랑했다.

여전히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트라이-스텔라의 배급을 총괄하고 있는 스탠 부사장은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다.

전 세계 배급망을 구축하느라 몇 년째 애쓰고 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류지호를 향해 몰려들었다.


“보스!”

“미스터 류!”

“헤이!”

“의장님!”

“감독님!”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터져 나오면서 정신이 없었다.

이 호텔에는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류지호의 할리우드 영화사 배급관련 직원들이 모여 있다.

뿐만 아니라, WaW 픽처스의 외화수입·배급팀까지 묵고 있다.

그 인원이 무려 60여 명에 이른다.

따라서 영화제 기간 동안 베이스캠프 삼아 이곳 호텔의 세 개 층을 통째로 빌렸다.

다운타운의 대형 호텔에 비해 소박한 호텔이지만,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영화제의 주요 장소들과도 멀지 않았다.

영화사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미팅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불편한 점은 없어요?”


미국의 영화사 직원의 대답했다.


“호텔이 다 거기서 거기죠.”


WaW 픽처스 직원에게서 류지호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처음으로 호텔다운 호텔에서 묵습니다.”

“....호텔다운?”

“이 정도면 저희에게 감지덕지입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장님!”

“회사에서 업무 추진비를 얼마를 주기에 이 정도 호텔이 감지덕지라고 하는 거죠?”


류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하시고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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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토론토 국제영화제. (2) +7 22.09.19 4,711 157 26쪽
» 토론토 국제영화제. (1) +4 22.09.17 4,923 162 28쪽
278 쯧.... 역시 생각이 많은 녀석! +6 22.09.16 4,807 153 26쪽
277 큰 힘에는 큰 문제가 따르는 법. (3) +5 22.09.15 4,787 162 26쪽
276 큰 힘에는 큰 문제가 따르는 법. (2) +2 22.09.15 4,508 140 23쪽
275 큰 힘에는 큰 문제가 따르는 법. (1) +7 22.09.14 4,730 15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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