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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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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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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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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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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토론토 국제영화제.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미국은 물가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다운타운에 위치한 호텔에서는 묶을 수 없고, 유럽도 마찬가집니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영화제에서는 이 정도 호텔에서 묵는 것도 감지덕지 입니다. 감독님들과 배우들은 좋은 호텔에 묵으실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까 오해하진 마십시오. 의장님.”


혹여나 류지호가 오해를 할까봐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들이 도리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인원 중 최고 책임자가 누굽니까?”

“정운영 팀장입니다.”


류지호의 음성이 딱딱해지자, WaW 픽처스 직원들이 흠칫 굳어졌다.

류지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심기가 상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류지호는 호텔에 남아있는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객실로 이동했다.

벨보이와 비서들이 이미 다녀간 모양이다.

여행용 캐리어가 먼저 객실에 도착해 있다.

4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다.

발코니도 있고, 실내도 꽤 널찍했다.

의전비서 제니퍼 허드슨이 캐리어에서 영화제에서 류지호가 입을 의상들을 한 벌 한 벌 골라 옷장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정이 많다보니 의상도 꽤 많이 준비해 왔다.


“Don, 해리와 마리아는 언제 도착한대요?”

“내일 오전에 도착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 진행되는 레드카펫 행사로 곧바로 오기로 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을 순 없겠군요.”

“예.”

“오늘 저녁에 호텔 연회장에서 파티를 할 수 있는지 알아봐줘요.”

“누구를 위해 여는 파티입니까?”

“이 호텔에 묵고 있는 우리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고 싶네요.”


도널드 제이콥이 데이빗 브레이텐바크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짓을 받은 데이빗이 얼른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떠실지.”

“WaW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어요.”


류지호가 발코니로 나갔다.

우뚝 솟아 있는 빌딩이 시야를 가려 토론토 시내를 감상할 순 없었다.

그저 9월의 차가운 바람만 불어올 뿐.

잠시 발코니에서 북쪽의 찬 기운을 느끼고 있는데, WaW 픽처스의 수입영화를 책임지고 있는 정운영 팀장이 스위트룸으로 찾아왔다.

마주앉자마자 류지호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회사에서 해외출장비 얼마나 책정합니까?”

“영진공 직원들이나 다른 영화사보다 넉넉하게 책정하고 있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올해부터 가온 계열 회사들을 대상으로 ‘해외출장 실비정산제’가 도입되었습니다. 따라서 WaW 픽처스 외화수입배급팀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해 출장경비의 실비 정산과 함께 항공기 좌석등급 역시 직급별로 상향 조정됐습니다. 이사급 이상에만 국한돼 있던 비즈니스 클래스 이용자격을 차장급으로 사장급만 해당됐던 퍼스트 클래스이용 대상을 전무급으로 확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임원이 아니더라도 실무진들의 숙박비를 실비 정산하고 있으며 거래선 접대비와 현지교통비 및 통신비까지 실비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칸 필름 마켓은 특별히 직급에 따라서 출장비 정액 외에도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비까지 받게 됩니다. 내년부터는 예비비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법인카드를 실무책임자에게 지급하기 때문에 돈 걱정 일절 없이 해외출장업무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제도가 ‘해외출장 실비정산제’다.

(주)가온웨딩 계열 기업들은 올해부터 일부 시행에 들어가서 내년부터 범위와 자격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영화제나 필름마켓 출장 갈 때 항상 변두리에서 묵습니까?”

“그런 편입니다.”

“영화제에 초청받은 게스트들이 주로 어디 묵습니까? 시내에 묵거나 대형 호텔에 묵지요?”

“공식 초청일 경우는 그렇습니다.”

“메이저나 유수의 영화사 관계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묵는 것과 외곽지역의 호텔에 묵는 것과 비즈니스로 봤을 때 무엇이 더 효율적이고 유리합니까?”

“당연히 메이저들 근처에 있는 것이.....”

“미팅이 주로 어디서 이루어지고, 파티가 어떤 장소에서 벌어집니까? 단순히 필름마켓과 극장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세일즈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네트워크 구축을 해야 합니다.”

“WaW가 가난합니까? WaW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변두리를 전전할 정도로 형편없습니까? 혹시 임원들이 비용 절감하라고 지침을 내린 적이 있습니까?”


정운영 팀장은 류지호의 꾸지람에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회사에서 어지간한 출장비는 따지지 않는 편이다.

굳이 ‘해외출장 실비정산제’가 아니더라도 WaW 픽처스는 해외출장비용에서 깐깐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알아서 몸을 사렸던 것 뿐.

다운타운의 비싼 호텔에서 묵고 비싼 음식을 먹으면,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을까봐서.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충무로가 세계적으로 봤을 때 변방이고 보잘 것 없는 시장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WaW는 해외 나와서 주눅 든다거나, 스스로 변방에서 온 이류라고 규정하고 비즈니스 하지 마세요. WaW는 다른 충무로 영화사들과 레벨이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렇게 하면 뒷말이 나올 텐데.... 충무로가 남 헐뜯기 좋아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데라는 걸 의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트라이-스텔라, ParaMax와 함께 움직이는데 무슨 말이 나옵니까? 부러워하면 부러워하겠지.”

“그것이....”


류지호가 (주)가온웨딩 계열 기업들의 출장 경비를 현실화하도록 한 것은 임·직원들에게 보다 넉넉하고 품위 있는 해외출장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업무성과가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실무자들의 해외출장업무는 본사업무의 연장이다.

류지호는 출장 경비를 소모적인 비용이 아니라 더 큰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투자라고 봤다.

세련됨.

품위와 격식.

문화적 자부심으로 인한 여유로움.

류지호는 가온 계열의 직원들이 해외출장을 나가서 국제 비즈니스를 할 때 그 같은 것들이 기본적으로 장착되길 바랐다.

비즈니스맨이 궁상맞아 보이는데 그가 팔려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고급스러워 보일 리가 없다.

바이어와 식사를 해도 비즈니스 미팅을 해도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하는 것과 그 밑 단계 호텔에서 하는 것과 받게 되는 인상이 다르다.

특히 영화라는 대중문화상품을 팔고 사야 하는 비즈니스맨이라면 더더욱.

필름마켓이나 국제영화제에서는 무조건 주류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없던 기회도 생긴다.


“혹시 지금까지 미국의 영화사들과 따로 움직였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왜 요?”

“예?”

“왜 그렇게 했냐고 묻는 겁니다.”

“의장님이 소유하신 미국 영화사들과 해외 필름마켓에서 함께 영업을 해도 되는 겁니까?”


허!


류지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토해냈다.

WaW 픽처스와 동등한 제휴협력관계로 묶어놨더니, 지금까지 따로 놀고 있었단다.

조금이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로부터 할리우드 영화 세일즈 방법을 배우고, 그들의 인맥과 배급라인을 이용해 한국영화를 소개하고 팔아먹을 생각을 해야지.

너는 너.

나는 나.

딱 이런 자세였던 거다.


“혹시 오동석 본부장이 외화팀에 있을 때도 출장비가 넉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출장비를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비용절감 차원에서.....”


회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출장비용을 줄였다는 말이다.


“절대 제 개인적인 용도로 출장비를 유용하지 않았습니다. 의장님!”


절레절레.


류지호는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누가 회사 돈 아껴 쓰라고 했나.

돈을 펑펑 가져다 쓰더라도 똘똘한 영화만 잘 사오고 WaW 영화를 좋은 가격에 팔면 그것으로 칭찬을 하면 했지 혼낼 이유가 없다.

헌데, 지금까지 영화제 메인에 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외곽에서만 놀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각국의 배급사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맥을 쌓는단 말인가.


“일단 알겠어요. 저녁에 트라이-스텔라, ParaMax 직원들과 함께 파티할 거니까. 중요한 미팅이나 꼭 참석해야 할 파티가 없는 직원은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해주세요.”

“회식입니까?”

“이번 기회에 내가 소유한 미국의 영화사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놓으세요. 적당히 안면만 트지 말고. 제대로 인맥을 만들어 봐요.”

“예? 네! 알겠습니다. 의장님!”


류지호의 마인드는 A4 용지 뒷면까지 아껴서 써야 한다는 거다.

대신에 해외출장비 같은 비용은 인색하게 굴지 말아야 하고.

A4 용지를 화장실 휴지처럼 사용하는 것은 낭비지만, 해외출장비용은 업무 효율성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류지호가 경영에서 한 발 떨어져 있어서 비용문제에 덜 민감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형! 도대체 해외팀에 인수인계를 어떻게 한 거야!”


류지호가 한국의 오동석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 인수인계는 확실하게 했는데요?

“확실하게 했는데, 이 딴 식이야!”

- 저기.... 제가 알아듣게 말을 해주셔야.... 외화수입팀 모두 똘똘한 친구들입니다. 싹싹하고요.

“외화수입팀은 수시로 외국에 나와 있잖아. 내 집 드나들 듯이 편안한 해외출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주면서 일을 시켜야지.”


오동석은 해외출장을 나간 직원의 품위를 찾는 류지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좀 불편하더라도 잠시 견디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기업도 다 그렇게 하는데.....

“한국영화가 이제 국내만 머물지 않고 있잖아. 국내와 해외가 따로 없는 전방위 비즈니스시대인지가 언젠데. 무슨 쌍팔년도 비즈니스 마인드인데! 그딴 해외출장 비즈니스가 통할 것 같아?”


해외에서의 격식 없고 어설픈 행동은 기업이미지에 큰 손상을 준다.

결국 출장 자체가 실패로 끝나기 십상이다.


"영화배급 사업에서 해외출장은 단순한 업무 차원이 아니잖아. 프로 세일즈맨으로서 외국 바이어를 상대하는 거 아니었어? 출장자가 비용 따위에 신경을 쓰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낭비를 초래할 뿐이란 걸 몰라.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출장경비가 더 이상 WaW에서 문제 안 되잖아."


한국영화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세일즈맨이 궁상맞아 보이면 WaW 픽처스 기업 이미지까지 추레해 보일 수가 있다.

외화수입팀이 출장에서 유흥비로 몇 억씩 써도 되냐고 묻는다면.

류지호는 허락해 줄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똘똘한 영화판권을 계약했거나, 영화계에서 유력한 회사의 인맥을 만들어놓았다면.

굳이 류지호가 아니더라도 외화 관련 업무 경험이 풍부한 오동석과 박건호 선에서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 출장비를 흥청망청 썼는지 업무를 위해 무리했는지 다 걸러지게 되어 있기도 했고.

무려 한 시간 동안 오동석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류지호 본인이 누리는 것만큼 모든 직원들이 지원받을 순 없다.

다만 충무로 어떤 영화사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쉬고, 일하게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해외 필름마켓에 와서 대한민국 최고 영화사라고 어깨에 힘주고 거들먹거리면 볼썽사납겠지만, WaW 픽처스는 여타 한국의 영화업자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비즈니스를 펼치길 원했다.

필름마켓 세일즈의 첫 번째는 판매할 영화의 완성도와 흥행성이다.

그것 못지않게 네트워크 즉 인맥 또한 중요하다.

영화 수입 가격을 디스카운트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의 배급업자들과 알고 지내다보면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꼭 영화만이 아니어도, 외국 국내 정치 상황이나 기업들의 동향까지도 얻어 들을 수가 있다.

대기업이나 다국적기업들은 해외 각지에 현지지사나 사무소를 거미줄처럼 깔아놓고 있다.

그곳들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때로는 유용하게 사용된다.

WaW 픽처스는 해외에 그런 루트가 전혀 없다.

오로지 필름마켓이나 영화제를 통해 정보를 취득할 수밖에 없다.

WaW 픽처스는 짧은 행사기간 정말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쉬고, 잘 차려입고,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는 필름마켓에서 과거처럼 떠들썩하게 세일즈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각 나라 배급업자들이 알아서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다.

최근에는 어떤 영화제나 필름마켓에 가도 트라이-스텔라 부스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북미에서 흥행을 한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WaW 픽처스는 트라이-스텔라가 주최하는 파티나, 미팅 자리에서 동석하기만 해도, 부스러기를 얻어먹을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배급업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영화 배급업자들에게 오성이니, 대유계열이니 하는 이야기 꺼내봐야 코웃음만 칠 뿐이다.

반면에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트라이-스텔라의 한국 파트너라는 사실은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오너 류지호의 유명세를 곁들이면 좀 더 수월하게 WaW를 어필할 수 있다.

이제 류지호의 이름을 팔아도 될 정도가 됐다는 말이다.


“고생을 사서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제나 필름 마켓을 다니며 돈을 펑펑 써대도 된다.

<데미지> 같은 영화 한 편 건져온다면 몇 천 만원을 탕진해도 된다.

오동석은 92년 칸 필름 마켓에서 프랑스·영국 합작영화인 <데미지>를 8만 달러에 사왔다.

서울 기준 2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10배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오동석의 영화를 고르는 안목도 주요했지만, 사실은 프랑스의 Le Studio channel+의 아시아 담당임원과 맺은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데미지>는 다른 한국의 수입업자들이 가세해 필름마켓에서 30만 달러까지 가격이 올라갔다.

오동석은 트라이-스텔라의 스탠 크레이그까지 끌어들여서 Le Studio channel+의 고위직하고 직접 협상을 진행해 헐값(?)에 구매했다.

물론 패키지 계약이었지만.

스탠 크레이그는 폴 베숑의 <레옹>을 Ox-Eye Film Company과 공동 제작할 당시 프랑스 현지법인을 지휘했다.

프랑스 현지법인을 지휘하며 유럽의 여러 스튜디오들과 친분을 다졌는데, 그 중에 Le Studio channel+의 최고위직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스튜디오가 Le Studio channel+였지만, 몇 년 사이 급부상하고 있는 트라이-스텔라의 손길을 거부할 순 없었다.

두 영화사가 전략적 협력을 도모하는 사이 오동석이 끼어들어서 실리를 취했던 것.

JHO와 WaW 두 기업의 오너인 류지호를 은근슬쩍 팔아가면서.

어쨌든 당시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는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시장을 공략했다.

트라이-스텔라는 겁도 없이 유럽영화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레옹>의 경우처럼 그들 국가 영화에 직접 투자를 시작했다.

이전 삶의 흐름보다 10년 정도 앞 선 유럽시장 공략이었다.

게다가 단편영화감독 류지호는 유럽에서 나름 유명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잡지에서 단골로 다뤄지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WaW 픽처스의 외국영화수입팀은 류지호의 이름값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해외 필름마켓에서 임선택 감독이나 강주연 배우를 백날 팔아봐야 류지호의 이름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


“보스!”


파티를 준비하러 갔던 데이빗 브레이텐바크가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리셉션 홀을 예약하지 않아 사용할 순 없고. 다이닝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다만 저녁예약 손님이 식사를 마치는 7시 30분 이후부터 파티가 가능합니다.”

“알겠어요.”


어차피 영화제 기간 내내 파티가 끊이지 않는다.

도착 첫날, 한국과 미국의 영화사 해외파트 직원들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친교를 다졌다.

류지호는 특별히 트라이-스텔라에서 해외업무를 총괄하는 스탠 크레이그에게 향후 필름마켓에서 WaW 픽처스와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스탠 크레이그는 흔쾌히 류지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좀 더 일찍 이런 자리를 마련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동석이형을 그대로 해외팀 총괄로 놔뒀어야 했나?’


성급하게 오동석을 극장사업으로 돌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기도 했다.

직원들과 저녁식사만 하고 류지호는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박건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향후 5년 동안 WaW 픽처스의 자금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영화사 직원들이 해외에서 궁상맞게 비즈니스 하지 않도록 지원 확실히 해주세요.”

- 지금도 충분히 지원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막말로 우리가 돈이 없어요, 가오가 없어요? 근성이니 헝그리정신이 그 딴 거 제 회사에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 ......?

“빠르면 올 하반기 늦어도 내년 봄에 WaW 픽처스에 1,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할 겁니다. 대표님만 알고 계세요.”


그것도 달러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한껏 폼을 잡는 류지호다.

물론 오성전자, 선경텔레콤, 경일자동차 같은 장기 보유목적 주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한국 기업 주식을 외환위기 신호가 울리기 전에 처분할 계획이긴 했다.

주식을 모두 팔아치우기 위해 적절한 핑계가 필요하던 참에 잘 됐다 싶었다.

류지호는 자신의 허세가 우스웠다.


큭큭.


마냥 허세만은 아니다.

류지호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기업의 주식들을 모두 처분하면 중견기업 몇 개를 살 수 있을 정도다.

반면에 미국에서 형성한 재산의 가치는 류지호도 알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가가 널뛰기를 하고 있으니까.

현재 시점에서 세계 최고 부자는 PS의 창업자 헨리 게이츠다.

그의 순재산이 129억 달러로 알려졌는데, PS의 주식가치가 급상승한 덕분이다.

헨리 게이츠가 세계 최고 부자가 되기 전까지는 일본 Kokudo(國土) 주식회사의 회장이 최고 부자였다.

참고로 한국의 최고 부자는 경일자동차의 명예회장으로 62억 달러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브스 순위로는 세계 9위다.

윌리엄 파커와 대니얼 그레이엄은 포브스나 포춘의 부자 순위에서 50위에 겨우 들어간다.

실제로는 Kokudo 회장보다 훨씬 부자임에도.

두 노인이 가진 부가 개인의 것보다는 가문의 재산이기도 하고.

게다가 파커와 그레이엄 가문의 기업들 대부분이 비상장이다.

때문에 포브스나 포춘에서 두 사람의 재산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쉽지 않다.

대신 상속가문 순위에서는 5위권에서 밀려나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은 에드윈 터너다.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나 법인으로 확대하면 단연 파커 가문이 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 땅들이 누구의 명의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는 오로지 가문을 이끄는 사람만 안다.

게다가 전통이 있는 명문가문의 서재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장식물 가운데 골동품 아닌 물건이 없다.

얼마나 많은 골드바나 보석을 개인금고에 보관하고 있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

그렇듯 미국의 전통적인 부자들은 외부에 노출된 재산보다 감춰진 부가 훨씬 많다.

그래서 포브스나 포춘의 부자순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명예롭지도 않고.


"부자인 걸 자랑하고 싶진 않지만, 빠른 시일 안에 트라이-스텔라와 WaW를 위해서 스튜디오를 준비해야겠어.“


메이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규모 스튜디오단지를 갖게 되면 임·직원들도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을 터.

마침내 류지호가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 ❉ ❉


토론토 시내에 위치한 Cineplex Odeon.

캐나다를 대표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이다.

현재 이곳에서 <The Killing Road> 갈라 프레젠테이션 레드카펫 행사가 준비 중이다.

감독인 류지호와 주연배우인 해리슨 노튼, 마리아 베리가 영화제가 지정해 준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다.

세 사람은 정장과 드레스로 한껏 멋을 부린 상태다.

다른 행사였다면 마리아 베리가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한껏 뽐낼 수도 있었다.

오늘 만큼은 조금 자제했다.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 대신 비교적 무난한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의 생각일 뿐이다.

가슴과 등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을 뿐, 드레스와 피부가 반반으로 보일 정도로 꽤 노출이 있는 드레스다,


“해리는 다시 예전 체중을 회복했나봐?”

“영화가 끝나고 조금 빈둥거렸더니 다시 <The Killing Road>때로 돌아간 것 같아.”


<The Killing Road> 촬영이 끝나자마자, 해리슨 노튼은 4Kg을 감량했다.

<프라이멀 피어>에서 외모가 연약하고 어려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베리가 말했다.


“난 지금 모습이 괜찮아. 마른 모습은 별로야. 예민해 보이니까.”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해리슨 노튼의 성격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해리슨 노튼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큭.


류지호가 웃음을 삼켰다.

몇 달 만에 만났지만, 흉허물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다.

둘의 사이가 여전히 좋은 모양이다.


“극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영화제 운영요원의 안내로 세 사람이 <The Killing Road>가 상영될 메인 극장으로 이동했다.

프로듀서 게리 캠프와 존 터튜와 맥로한 배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레드카펫 행사장에 도착하자, 뜨거운 환영열기가 전해졌다.


펑펑!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영화제에 초대받은 수많은 감독과 배우가 있지만, <The Killing Road>도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류지호의 데뷔작이란 것도 있고, 해리슨 노튼과 마리아 베리가 라이징스타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취재진뿐만 아니라, 영화제를 찾은 시민과 팬들도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


현장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어서 모두가 의아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The Killing Road>가 올 하반기 할리우드 최대 기대작도 아니고.

함께 레드카펫을 걷는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류지호에게 향했다.

너 때문이 아니냐는 듯.

그러거나 말거나.

류지호가 마리아 베리를 향해 왼쪽 팔을 슬쩍 내밀었다.

마리아 베리가 냉큼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만면에 자본주의 미소를 띠고 여유롭게 레드카펫 위로 올라섰다.


“이쪽을 봐줘요!”

“잠깐 멈춰서 주세요!”

“손 한 번 흔들어주세요!”


사진기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마리아 베리에게 팔을 내준 류지호와 일행들이 레드카펫 중간에 잠시 멈췄다.

세 방향의 사진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했다.


“해리슨!”

“지호!”

“마리아!”


영화팬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해리슨 노튼은 신인 배우다.

그런데 4월에 개봉한 <프라이멀 피어>의 흥행성공으로 북미 영화팬들에게 존재를 각인시켰다.

마리아 베리는 비교적 무명 축에 속했다.

5월 개봉한 <파이널 디씨전>의 흥행성공으로 영화팬들에게 친숙한 배우가 되었다.

외모 역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남미녀이기도 하고.


‘선글라스 쓰길 잘했어.’


우황청심원을 구하지 못한 류지호는 대신 알이 굵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류지호로서는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 처음 경험해 보는 레드 카펫 행사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드 카펫을 걸어간다는 게 몹시 어색했다.

그렇다고 무대 울렁증이나 심한 긴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하고 미남미녀와 비교될까봐 선글라스로 멋을 조금 부려봤다.

의전비서들이 추천하기도 했고.

감독들이 레드카펫 행사에서 선글라스를 끼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아니다.

배우들은 레드카펫 행사에서 선글라스는 착용해선 절대 안 된다.

영화팬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언론매체에 완벽한 외모가 노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계약서 조항까지 있다.

사실 레드카펫 행사라고 해서 대단할 건 없다.

배우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기 때문에 최대한 행사에서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해야 했지만, 감독에게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감독에게 더욱 중요한 행사는 보여주기 쑈가 아니다.

이어지는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 그리고 관객과 직접 만나는 자리다.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구만....!”


상영관에 먼저 도착해 있던 ParaMax Films의 알버트 마샬 사장과 홍보 이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레드카펫을 하고 온 일행이 극장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는 열흘 간 진행된다.

<The Killing Road>는 레드카펫 행사가 진행된 메인 극장에서 3회에 걸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뎅.


영화상영을 알리는 알림이 들려왔다.

다소 시끌벅적한 극장 안이 조용해졌다.


촤라라라락~


영사기에서 스크린을 향해 영상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PARAMAX FILMS.

JHO Pictures.


제작 크레디트에 류지호가 백퍼센트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영화사 JHO Pictures가 들어갔다.

로고도 떴다.

토론토 영화제는 류지호의 장편영화 데뷔는 물론이고, 앞으로 류지호라는 감독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제작할 할리우드 영화사의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쨌든 <The Killing Road>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다.

류지호는 우황청심원을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손바닥에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되었기 때문이다.

<The Killing Road>를 처음으로 본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평론가들과 기자들은.

업계관계자들의 반응까지도.

단편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류지호를 엄습했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출발하시면서 좋은 일만 있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PS. 다음 두 편은 The Killing Road 영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흥미가 없으신 분들은 (5)편으로 바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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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5 valette
    작성일
    22.09.19 09:30
    No. 1

    스티브 잡스는 격식있는 장소에서 면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된다.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영업하는 사람은 추레하게 다니면 안된다. 아무도 당신을 알지 못하니까.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87 lo******
    작성일
    22.09.19 09:47
    No. 2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보아서 저 에피소드에 대해 생각을 공유 드립니다
    당시 시대상을 떠나서, 출장비 관련 에피의 빌런은 궁극적으로 주인공 같습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방임하느라 회사 임원들에게 전하지 못했고, 그런 회사 오너의 의중을 알리가 없는 임원들은 당연히 주인공이 원하는 회사정책(출장내규)을 조성하지 못했겠지요ㆍㆍ 아무리 인생 2회차라도 리더쉽 미숙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같습니다.
    회장급 오너가 실무자들에게 인상 쓰고 정책에 힘 없는 관리자를 면전에서 추궁하는 짓은 너무 갑질 같아요ㆍㆍㆍ주인공의 철학을 1도 모르는 말단중급 회사원 입장에서는 왜 지돈 아껴써줘도 지랄이지? 하는 반감만 들겠지요ㆍㆍ

    찬성: 6 | 반대: 1

  • 작성자
    Lv.99 badchild
    작성일
    22.09.19 11:20
    No. 3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루시오엘
    작성일
    22.09.19 12:25
    No. 4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할젠
    작성일
    22.09.19 12:57
    No. 5

    그야말로 주인공이 꼰대라는 정석을 보여준 씬이군요.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9.19 17:19
    No. 6

    잘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9.19 19:07
    No. 7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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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말한 것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2) +11 22.09.30 4,789 146 21쪽
291 말한 것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1) +12 22.09.29 4,760 164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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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우리 잘 해봐요. (3) +8 22.09.26 4,776 15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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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박스오피스는 내가 더 높거든! +11 22.09.22 4,903 17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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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토론토 국제영화제. (4) +13 22.09.20 4,425 140 26쪽
281 토론토 국제영화제. (3) +7 22.09.20 4,471 122 25쪽
» 토론토 국제영화제. (2) +7 22.09.19 4,711 157 26쪽
279 토론토 국제영화제. (1) +4 22.09.17 4,922 162 28쪽
278 쯧.... 역시 생각이 많은 녀석! +6 22.09.16 4,806 153 26쪽
277 큰 힘에는 큰 문제가 따르는 법. (3) +5 22.09.15 4,787 16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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