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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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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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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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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3.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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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혼자 늙어 죽는 수가 있거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북부 캘리포니아의 2월말 날씨는 한국의 봄가을과 비슷했다.

낮에는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밤이 되면 제법 쌀쌀함을 느낄 수 있어 셔츠나 니트를 걸치는 편이 좋았다.

스탠퍼드 후드티, 청바지, 운동화를 신은 레오나 파커가 백팩을 메고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영락없는 대학생처럼 보였다.

레오나가 종종 걸음으로 스탠포드 대학 앞의 유니버시티 거리(University Avenue)를 걸었다.

언제 걸어도 참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입학 이후로 워낙 자주 지나다녔기에 레스토랑이나 카페는 다 한 번씩 가본 것 같았다.

이 거리에는 벤처 창업자와 벤처캐피털리스트의 만남의 장으로 알려진 카페도 있고, 스탠퍼드생들에게 인기 있는 샐러드 가게도 있고, 몇 달 전 오픈한 레오나가 좋아하는 프랑스식 빵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거리에는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 임대료가 무척 비싸다.


찰랑.


레오나가 카페에 들어섰다.

그녀가 자주 오는 카페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많은 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며 레오나는 짧게 한번 혀를 찼다.


‘자리가 없나? 그래도 여기만한 카페가 없는데... 에잇. 좀 기다리자!’


다른 카페를 찾아가기 귀찮았다.

레오나가 다시 카페 밖으로 나왔다.

자리가 날 때까지 카페 밖에서 서성거렸다.

쌀쌀한 바깥에서 서성거린지 십여 분이 지나고 한 커플이 자리를 비웠다.

레오나가 재빨리 카페 안으로 들어가 의자를 향해 가방부터 던졌다.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니까.

매너 없는 행동에 손님들이 돌아볼 만도 하지만, 일상이라도 되는 듯 누구하나 레오나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예스!’


벽과 일체형으로 되어있는 의자 밑으로 콘센트가 보였다.

레오나는 밖에서 무려 십 분을 기다린 것에 대한 보상 받는 기분을 느꼈다.

따듯한 라테와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백팩을 열었다.

노트북과 마우스, 그리고 이어폰을 꺼내고, 두꺼운 서적과 노트 마지막으로 다양한 기능의 펜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호로록.


카페라테를 음미하는데.


우우우웅.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신 스타텍의 플립을 열자, 문자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큰오빠네....?”


레오나가 메시지를 읽으며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 저녁 먹었니?

- 먹으려고.

- 학교 도서관?

- 유니버시티 애비뉴.

- 정확하게 어디?


레오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략적인 카페 위치를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냥 전화를 걸어볼까?’


내일 수업을 위해 읽어야 할 책과 찾아봐야 할 자료가 많았다.


도리도리.


레오나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한순간 카페가 그녀의 공부방으로 변했다.

레오나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공부에 몰입했다.


❉ ❉ ❉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문득 레오나는 자신의 테이블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응?’


고개를 들어 자신의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를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검은 머리의 동양 남자... 어떤 장소에서도 절대 헛갈릴 수 없는 얼굴의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달고 서 있다.


“....Jay?"


류지호가 레오나의 맞은편에 털썩 앉자마자 물었다.


"저녁은 그 샌드위치로 대충 해결하려고 했던 거야?“

“읽을 책이 너무 많아...”


레오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이 자리 명당이야?”

“딱히 그렇진 않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Jay가 어떻게.....!”


<복수의 꽃> 촬영 때문에 레오나의 스탠퍼드 입학식과 신입생 무브인데이에도 참석을 하지 못한 류지호다.

크랭크업 이후로도 동남아시아 순방을 다녀오느라 미국 복귀가 늦어졌다.


“나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맛있는 거?”

“공부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가면서 해야지.”

“자, 잠깐!”


레오나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른 펼쳐놨던 물건들을 백팩에 구겨 넣었다.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카페 안을 둘러봤다.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꽤나 많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부가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오나는 잘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연인들이 주로 찾는 카페라서 집적대는 남자가 없어서 자주 찾는 것이었지만.

류지호가 알 리가 없었다.


“가. 다 챙겼어!”


카페 밖으로 빠져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백인 남자가 얼른 두 사람 뒤로 붙었다.


“티노와 말릭은.....? 휴가 갔어?”

“아니.”

“새로운 경호원이야?”

“사적으로 움직일 때는 언론매체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경호원들과 다니기로 했어.”

“그런다고 몰라볼까?”


류지호가 야구 모자를 쓰며 말했다.


“몰라보던데?”


파파라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경호원을 바꾸고 약간 변장(?)을 하는 것만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줄었다.

아시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일부에서는 변장이 먹히는 것 같았다.

레오나도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다.


“추워?”

“나도 변장하려고.”

“넌 왜?”

“나도 스탠퍼드에서 유명인사거든. 친구들이 큰오빠의 정체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면 피곤해져.”

“풀 문 행사(Full Moon on the Quad) 때 남자들이 서로 키스하려고 줄을 섰겠는데?”

“우와, 말도 마! 완전, 완전!”

“....?”

“다들 미친 것 같아. 난 절대 참여하고 싶지 않았는데, 스탠포드 트리와는 꼭 키스를 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랩을 하듯 빠르게 말을 토해내는 레오나를 보며 류지호가 웃었다.


하하.


스탠포드 대학에서는 매년 10월 중순 보름달이 뜨게 되면 열리는 거대한 행사가 있다.

Full Moon on the Quad.

스탠포드 재학생 수천 명이 자정이 오기 전 캠퍼스로 뛰쳐나와 카운트다운을 함께 외치고는, 자정이 되는 순간 주변 사람과 마구잡이로 키스를 하는 전통적인 이벤트다.

대학원에 다니던 황재정도 동기생들과 술을 거하게 먹고 은근슬쩍 행사에 참여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심지어 풀 문 온 더 쿼드를 전후로 팬티차림으로 캠퍼스를 날뛰는 학생도 있을 정도다.

류지호는 최근 몇 년 사이 UCLA에도 이와 비슷한 이벤트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학부생들이 팬티차림으로 웨스트우드 시내를 질주하는 이벤트가 생겼단다.


‘묘하게 타이밍들이 어긋나네....’


돼지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복이 부활했다든가.

UCLA를 졸업하자마자 속옷 차림 달리기 행사가 생긴다든가 하는.


“멀리 가?”


레오나가 도착한 곳에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산호세.”

“거기 가봐야 별 것도 없는데...”

“샌프란시스코로 갈까?”

“...음.”


레오나는 망설였다.

읽어야 할 책도 몇 권 있었고, 리포트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팔로알토 근처에 간단하게 먹자.”

“오늘은?”

“일주일 정도 샌프란시스코에 머물 것 같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 촬영해?”

“광고 한편 촬영하기로 했어. 주말에 차 보내 줄 게.”

“진짜?”

“이만 차에 타세요, 레이디.”


레오나가 경호원이 열어준 차문 너머로 사라지고, 이어서 류지호도 차에 올라탔다.


“조금만 잘 게. 도착하면 깨워 줘.”


레오나는 말을 내뱉고 얼마 되지 않아 잠들었다.

비록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잠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UCLA도 정신없는데, 학구열이 남다른 스탠퍼드라면 말 할 것도 없다.


“잘도 자네...”


류지호가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대학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쓸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학습량과 치열한 경쟁으로 악명 높은 스탠퍼드라면 그 고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한편으로 안경을 벗어버린 레오나의 잡티 없는 하얀 피부, 길고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은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하... 호호.


류지호는 팔로알토 부촌 거리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레오나와 저녁을 먹었다.


재잘재잘.


레오나는 식사 내내 힘겨운 대학공부에 대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류지호는 자신의 경험과 친구들의 예를 들어가며 조언했다.


“근데 광고도 찍어?”

“내가 한국에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된 것은 알지?”

“응.”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광고모델 제의가 많이 들어오나 봐.”

“오오!”

“공익 목적이 아니면 출연하지 않을 거라서 들어올 때마다 거절하고 있는데, 광고 연출 제의도 곧잘 들어오거든.”


한국에서는 영화감독에게 CF 연출제의를 거의 하지 않는다.

미국은 아니다.

류지호에게 광고나 뮤직비디오 심지어 다큐멘터리 연출 제의도 심심찮게 들어오고 있다.


“마냥 거절만 할 수 없어서 하나 찍어보기로 했어.”

“한국 제품이야?”

“작년에 북미에 진출한 한국자동차 회사 신차가 있거든.”

“경일모터스 SUV?"

"맞아, 생트푸아라고. 그 SUV 미국 프로모션 광고를 찍기로 했어.“

“그렇구나.”


짧은 식사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간 것 같았다.

레오나는 아쉬움에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 주말에 꼭 데리러 와야 해?”

“내가 직접 오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말고. 대신에 하루를 모두 비워둘게.”


류지호가 직접 운전한 차를 타고 레오나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레오나를 기숙사까지 에스코트한 류지호가 2시간 거리를 열심히 달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 ❉ ❉


작년 10월 한국의 경일자동차는 SUV 모델 생트푸아(Sainte-Foy)를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1만대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동차의 수출 방식은 내수용으로 내놨다가 반응이 괜찮으면 적당히 고쳐 수출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생트푸아는 개발을 시작하던 1995년 당시 디자인부터 미국인 전문가에게 맡겼다.

미국 진출을 처음부터 상정했다.

경일자동차 LA 디자인연구소는 경쟁사들의 인기 모델들을 분석한 결과 선발주자인 일본차의 밋밋한 디자인이 더 이상 미국인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머슬카의 미국에 걸맞은 디자인을 채용하기로 했다.


"작년 처음 미국 시장에 소개되었을 때 근육질의 디자인만으로 눈길을 사로잡았죠. 하하.“


경일자동차 미국 법인(KMA)의 마케팅 최고책임자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광고주를 대리하는 인물이니 시끄럽다고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가격 정책도 기존 방식을 버렸습니다. 평균 판매가격을 헨리모터의 경쟁차 '이스케이프'의 90% 수준인 2만 달러대로 결정했죠. 싼 가격이 아닌 품질과 성능으로 평가받는 차종으로 인정받기 위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법인 마케팅 최고책임자의 열정적인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는 류지호가 스토리보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내게 자랑질 할 시간에 RMW 같이 연작을 만들 궁리나 하지.’


류지호는 경일자동차 미국 법인에 RMW 단편 프로젝트처럼 해보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유명 감독들을 섭외해서 연작으로 광고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미국 법인 측에서 단칼에 거부했다.

영화 수준의 비용을 지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류지호는 다시 제안했다.

저렴한 비용에 영화 수준으로 찍어주겠다고.

또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경일그룹 계열 광고대행사인 금강에서 기획한 대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

계약을 파기할 순 없었다.

광고제작을 Aram 프로덕션에서 하기로 했다.

연출도 최준영과 공동으로 하기로 했기에 류지호가 빠지면 프로젝트 자체가 없던 일이 되어버리기에.

자신 때문에 Aram과 최준영이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금강기획이 제시한 콘셉트를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금강기획은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을 광고에 등장시키고 싶어 했다.

류지호가 반대했다.

자동차 광고는 모델보다 차량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생트푸아의 근육질 바디와 머슬카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근육질 디자인.

안전한 차.

연비 좋은 차.

게다가 워킹맘이 아이를 안전하게 태우고 퇴근 후 마트 가기에도 좋은 차.

류지호와 최준영이 생각한 생트푸아 미국 광고 콘셉트다.

바쁜 류지호를 대신해서 광고와 관련된 회의는 최준영이 참석했다.

말만 공동연출이지, 실제로 류지호는 한 발 떨어져서 총감독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최준영을 키워줄 속셈 때문이기에.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총 3일 촬영하기로 했다.

류지호는 광고계에서 일하고 있는 UCLA 영화과 출신들을 모았다.

TV 프로덕션, 광고, 뮤직비디오 업계에서 일하는 영화과 출신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는 동문들을 불러 모았다.

한국의 경일자동차 본사에서는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가는 것에 질색했겠지만, 이왕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찍는 광고이다 보니 아무하고 일하고 싶지 않았다.

류지호가 미국에서 영화 연출을 해오면서 가장 편하고 쉬운 촬영을 꼽자면 자동차가 등장하는 장면도 포함된다.

자동차가 전복되거나 충돌하거나 복잡한 체이스를 선보이지 않는다면, 도로 주행하는 장면 정도 누워서 떡먹기다.

할리우드에는 자동차 장면을 많이 찍어 본 스태프가 수두룩하다.

스토리보드만 제시해 주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전문 스태프들로 인해 빠른 속도로 촬영이 진행된다.

대도시 도로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다.

때문에 현장에서 스토리보드가 바뀔 수가 없다.

정확하게 계획된 대로 쭉쭉 촬영해 나간다.


아름답고 섹시한 커리어우먼이 연신 사무실 시계를 힐긋거린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녀가 내다보는 창밖에는 근육질의 SUV가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커리어우먼이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의 옆을 뜯어버린다.

샌프란시스코 도로를 질주하는 SUV.

미국의 초등학교 앞에서는 귀엽게 생긴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 앞에 SUV가 멈춰서고, 섹시한 모델(엄마)이 아이가 안전벨트를 매는 걸 확인한다.

그 사이 SUV의 내부와 몇 가지 기능이 아주 짧게 소개된다.

다시 SUV가 시내를 달리고.

대형마트에 주차되어 있는 SUV 트렁크에 각종 식료품이 실린다.

그 사이 아이가 SUV의 근육질 몸매(?)를 손바닥으로 훑고 지나가고, 엄마도 운전석에 탑승하기 전에 차량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마치 섹시한 여성이 유혹하듯 건장한 남자의 근육을 만지는 것처럼.

SUV는 경일자동차의 신차 생트푸아다.


“마지막에 촬영한 부분은 편집에서 날리겠지?”


류지호가 하도 괴롭혀서 최준영의 말투도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이전 삶처럼 깊은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사람 사이의 신분격차는 없어졌다.


“왜?”

“유부녀가 바람피우는 걸 암시하는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아니면 종마 같은 남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뭐 그런...?”


류지호가 최준영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광고로 먹고 살기는 글렀네. 어떻게 그 장면을 그렇게 보나?”

“네 의도는 뭐였는데?”

“튼튼하고 건강한 말아 집까지 잘 부탁해. 그런 의미 정도....?”

“그런 것치고는 모델의 표정이 너무 요염한데?”

“그럼 광고 모델이 섹시해야지 아줌마처럼 푸근해야 할까?”

“킥킥. 그렇긴 하지.”


사실 류지호는 최준영이 말한 것까지 암시하는 스토리보드를 짰다.


‘자동차 광고에서 섹스어필은 국룰이지.....’


어린이 대상 제품을 제외하고 모든 광고에는 성적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미국 광고에는 성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광고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심의 때문에 시도하지 못하는 걸 버젓이 한다.

가령 호르쉐 광고 중에 바바리를 입은 섹시한 여성이 알몸에 가까운 속옷 차림으로 나타나 운전자에게 보여주는 광고가 있다.

여성의 알몸을 본 호르쉐의 운전자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숨겨져 있던 호르쉐 후면 날개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나는 장면으로 광고가 끝난다.

포르쉐의 상징 같은 후면 날개도 강조하고, 성적으로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광고 콘셉트다.

심지어 콜라 광고에도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광고가 꽤 많다.

모르고 보면 그저 이미지에 지나지 않지만.

이번 광고촬영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 류지호다.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동선과 고도의 영화적 미장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자동차를 가장 멋지게 묘사해 주고, 광고 콘셉트에 따라 이미지만 만들어주면 끝.

자동차 광고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광고만으로 구매자를 단 번에 끌어당기기 힘들다.

섹시 콘셉트를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든가, 광고 카피가 잘 빠지던가, 경쟁사 제품을 디스한다던가.


“날로 먹어서 괜히 형한테 미안하네.”


사실 이번 광고 촬영에서 그가 한 것은 별로 없었다.

통역으로 참여한 것 아니냐고 말해도 대답이 궁색한 것이 사실.


“뭘 날로 먹어? 네가 다 했으면서....”

“내가?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원래 영화에서도 인서트나 이미지만 찍으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막말로 너 아니었으면 Aram이 경일자동차 북미 광고를 어떻게 땄겠냐?”

“광고 반응이 좋아서 다음 편부터는 형이 찍었으면 좋겠다.”

“난 별로야.”

“왜?”

“대기업 계열 대행사들하고 작업하면 다른 작업을 못해. 사실 이것 때문에 뮤직비디오 몇 개는 놓쳤어.”

“나중에 드라마 연출하고 싶으면 짧은 이미지에 매몰되지 마. 이야기를 놓치면 안 돼.”

“알겠어.”


광고 촬영은 3일 만에 끝났다.

최준영이 촬영 필름을 챙겨 엘 사군도로 떠났다.

후반작업은 Hues & Rhythm Studios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영화계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친목을 다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정을 마치고 팔로알토로 향했다.

여담으로 생트푸아의 미국 내 매출이 매년 큰 폭으로 신장세를 보이게 된다.

2000년 미국 시장에서 총 1만3백대가 판매된데 이어 2001년 5만6천대, 이듬해는 7만8천대 등으로 매년 큰 폭의 신장세를 보이게 된다.

사실 생트푸아가 미국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팔린 것은 동급 SUV에 비해 가격은 훨씬 저렴한 반면 품질 면에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고객들 사이에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JHO Pictures 영화 몇 편에서 생트푸아가 유의미하게 노출되면서 북미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놓기도 한다.

어쨌든 생트푸아의 북미 매출이 상승하면서 광고를 찍은 류지호로서는 체면치례를 한다.


❉ ❉ ❉


주말에 류지호는 레오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아침부터 레오나와 함께 스탠퍼드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황재정의 대학원 진학 때 사인방 친구들과 둘러봤기에 감흥은 없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학교 자랑을 하는 레오나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처음 와 본 척을 해야 했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현대미술관을 돌아보고, 골든게이트 공원을 산책했다.

저녁에는 소살리토의 아담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데이트에 경호팀을 총동원했다.

혹시 모를 파파라치를 단속하기 위함이다.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기 싫어.”

“유니언스퀘어로 구경 갈까?”

“응.”


류지호의 제안에 레오나가 냉큼 팔짱을 껴왔다.

유니언스퀘어에서 차이나타운쪽으로 볼거리가 제법 많았다.

먹을거리, 쇼핑거리도 많아서 시간 보내기 좋았다.


“큰오빠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


오랜만에 레오나의 입에서 한국말 ‘큰오빠’가 튀어나왔다.


“내가?”

“응.”

“어떤 면에서? 어떤 사명감?”

“만날 조국을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조국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거든.”

“그럴 리가...”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한국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전 삶부터 과거로 돌아온 현재까지 한국이 자신에게 해 준 것 하나 없었으니까.

도리어 자신이 나라가 부여한 의무는 죽어라고 했다.

물론 한국 영화계라면 조금 다르지만.

이가 갈릴 정도로 싫어 복수심이 있기도 했고.

증오가 깊어지면 그리움이 동력이 된다고 했던가.

류지호는 충무로에 대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함이 있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받아서 JHO를 경영해도 되는데, 자꾸 한국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잖아.”

“미국에는 내가 아니어도 잘할 사람들이 많아. 한국 사업에는 내 이름값이 필요하고.”

“앞으로도 미국과 한국을 계속 오갈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큰오빠에게 난 여동생일 뿐이야?”


레오나가 훅 치고 나왔다.


“너희들의 든든한 보호자이기도 하지.”

“정말 그게 다야?”

“세상에서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게 뭐가 있지?”

“나는 큰오빠를 사랑해.”

“알아.”

“진짜!”

“근데 큰오빠는 가슴이 퍼석해.”

“그게 뭐야?”

“그쪽으로는 가슴이 황무지라고.”

“그럼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지!”

“난 레오나 그리고 파커와 서먹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여자로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과분하지.”

“근데 왜....?”


콩!

류지호가 레오나의 머리에 살짝 알밤을 먹였다.


“인마, 넌 미성년자야. 어디서 어른한테 사랑타령이야.”

“나이가 대순가 뭐. 할아버지는 할머니하고 15살 차이가 나지만 두 분이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어디서 45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냐?”

“그러다가 혼자 늙어 죽는 수가 있거든!”

“쯧. 서른 밖에 안 된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레오나가 혀를 날름 내밀고는 후다닥 앞서 달려갔다.

류지호는 피식 웃으며 저 멀리 앞서 달려가는 레오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잡아 봐라는 사양이니까.

50년을 살아봤다고 사랑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혼 경험이 있다고 해서 다시 가정을 갖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성과 인연을 맺을 기회가 생기면, 헤어짐부터 준비하게 된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에 앞서 이성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튀어나온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충동적이며 한량 기질이 매우 농후한 사람이었다.

과거로 돌아와서는 이성적이며 계산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어쩌면 한량 기질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꼬맹이부터 자라는 과정을 보아 온 여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여자로 보이는 것도 웃기지.’


지금도 얼굴 가득 케이크를 묻히고 헤헤 거리던 7살 레오나의 모습이 생생한데, 19살에 성숙한 처녀가 되었다고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게 아닐까.

어쨌든 현실적으로 따져봤을 때 레오나만한 신붓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두 집안이 각별한 사이이기도 하고.

아니다.

미국에서도 명문가 중 명문가인 파커 가문의 손녀라면 신붓감으로 과분하다.

게다가 두 사람 다 일반인과 사랑한 끝에 결혼으로 골인하는 것 같은 아침연속극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없는 신분이다.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여성은 류지호의 삶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고 재벌이나 고위공직자 자녀와 결혼하는 것도 썩 좋을 것 같지 않다.

쇼윈도 부부가 될 확률이 높으니까.

경제적인 여유를 빼놓고 류지호는 좋은 신랑감이 아닐지도 몰랐다.

잦은 출장으로 장시간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삶이다.

주변에는 늘 어리고 예쁜 여성들이 넘쳐난다.

어떤 여자가 그런 남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좋아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감독들이 결혼생활이 깨지지 않고 잘만 살지만.

류지호에게 어떤 강박관념... 혹은 트라우마의 잔재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나 오랜 시간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을 하고 있는 지인들은 류지호에게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해 볼 것을 충고한다.

영화감독은 스트레스가 꽤나 심한 직업이니까.


‘전문가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려나....?’


심리전문가와 상담하는 건 부끄럽거나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니다.


작가의말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나누는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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