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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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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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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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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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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복수의 꽃.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여주 WaW 종합촬영소에서 진행되는 촬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김영찬, 이서영 배우는 비록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좋은 배우였다.

송라원은 신인이었지만, 류지호의 디렉션을 잘 따라왔다.

촬영에 들어오기 전에 주요 배우들과 틈나는 대로 대본리딩을 했다.

자주 만나서 캐릭터와 연기톤에 대해 철저히 준비했다.

사전준비가 탄탄했기에 연기와 관련해서 촬영현장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별로 없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감독님. 무전기요.”


스크립터 이혜진이 류지호의 무전기를 챙겨줬다.

WaW 종합촬영소 부지는 20만 평이 넘는다.

야외세트장만 10만 평 이상이다.

낮은 산으로 시대별 구역이 나눠져 있지만, 엄청난 부지다.

현재는 군산시내 거리만 재현되어 있을 뿐 드넓은 부지가 텅텅 비어있다.

아직 스튜디오 공사 중이라서 군산시내 세트장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복수의 꽃> 촬영팀은 이동식 화장실을 설치해 사용하고 있다.

이동식 화장실이지만 나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쯧. 담배꽁초들 하고는.....”


WaW 종합촬영소가 자신 소유 기업 산하 시설이어서 일까.

류지호가 화장실 주변에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 주워서 휴지통에 버렸다.


피식.


본인이 생각해도 웃겼다.

이전 삶에서는 꽁초를 버리는 입장이었지 줍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


촬영현장으로 복귀하던 류지호가 주차장에서 담배들 피우고 있는 여배우를 발견했다.

대선배들 앞에서도 당차게 맞담배를 피우던 여배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선배 배우들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이미 20대부터 배우로서 아우라를 마구 품어냈던...

이서영 배우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 조감독, 어디 가서 내가 담배 피운다는 소리 하면 안 돼.

- 선배님, 저는 조감독 아니고, 연출부 막내입니다.

- 호호. 감독을 도우니까 조감독이지. 암튼 비밀이다?

- 네. 선배님!


이전 삶에서 류지호가 이서영과 처음으로 나누었던 대화다.

<피와 불>이란 영화로 처음 류지호가 연출부를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로서는 너무 개방적이어서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헌데 배우로서는 매우 성실했다.

털털한 성격이었다.

배우로서는 조금 까다로운 구석도 있었다.

배우라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성격이었지만, 그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샀다.


“차안이나 대기실에서 몸 좀 녹이시지, 추운데 밖에서 담배를 피우세요?”

“류 감독은 담배 안 피우지?”

“끊었어요.”

“언제?”

“고등학교 때요.”

“호호호. 어릴 때 날라리였구나?”

“아웃사이더였던 것 같네요.”


날라리도 아니고, 모범생은 더더욱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그래서 아웃사이더라는 애매한 표현 말고는 딱히 정의할 수 없는 학생이었다.


“지금 현장으로 바로 가봐야 돼?”

“조금 전에 카메라 뒤집었어요. 천천히 피고 오세요.”


류지호가 로드매니저를 손짓으로 불렀다.


“승렬아, 저기 의자 가져와서 내 옆에 놔봐.”


로드매니저가 디렉터 체어를 가져와 이서영 옆에 나란히 놓았다.

류지호가 자리에 앉자 이서영이 대뜸 물었다.


“내가 어려워?”

“.......?”

“영찬 오라버니는 형님이고 나는 왜 선배님인데? 류 감독하고 나하고 9살인가 차이 나는 것 같던데 무슨 고모뻘인 것처럼 대하더라?”

“누님이라고 불러드려요?”

“옛날에는 다 누나동생했는데.... 요샌 나한테 쉽게 누나라고 부르는 사람을 별로 못 본 것 같아. 그렇게 불러 줄 테야?”

“하하. 사석에서는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강렬한 외모만큼이나 80~90년대 선보였던 과감한 노출연기.

대중들은 그녀를 센언니, 카리스마 넘치는 여배우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감독으로서 이서영은 센언니는 아니다.

차라리 사차원 캐릭터에 가깝다고 할까.

화려하게 미소 짓고, 호탕하게 웃으며, 잘 찌푸리고, 종종 한숨을 쉬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재밌는 배우다.

우아한 말투와 평범한 엄마의 수다를 오가는 모습은 류지호가 기억하는 이서영의 모습과 같으면서 달랐다.

이서영은 우아하고 똑 부러지는 말투가 어울리는 배우였다.

천생 배우라고 할까.

중학교 1학년까지 함께 살았던 친아버지는 거장 이만훈 감독이다.

배우의 꿈을 독려했던 어머니는 한때 유명한 여배우였다.

딴따라 피가 흐르는 부모 밑에서 이서영은 당연하다는 듯 배우를 꿈꿨다.

<티켓> <땡볕> <성공시대> 등에서는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배우였다.

파리 이민생활, 결혼, 출산 등으로 90년대 공백기를 보낸 뒤에도, 변함없이 뜨겁고 한결 같이 거침없는 모습은 스크린 안팎에서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연극을 하다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던 80년대 초만 해도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가 흔치 않았다.


“누님이 출연하신 <땡볕>이 에로영화인 줄 알았어요.”

“그 영화 국제영화제 수상작이야.”

“하하. 중학교 때 변장하고 동시상영 극장에 가서 봤는데 생각보다 에로씬이 시시하더라고요.”

“많이 엉터리였어. 여자들이 저고리를 벗고 다닐 게 아니라 저고리를 입었어도 옷이 작아 가슴이 삐져나오면 몰라도.”


저고리가 작아서 여성의 가슴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미신과 여러 이유들로 인해 조선 후기에 출산한 여성 사이에서 젖가슴이 드러낼 정도로 짧은 저고리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찍은 사진을 일제가 유럽에 대대적으로 퍼트리면서 자신들의 조선침탈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땡볕>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화였다.

개봉한 그 해 국내 영화상을 휩쓸었고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에도 초청되기도 했는데, 좋은 원작을 가지고 나름 작품성 있게 영화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거침없는 연기에 대해 후회가 없다지만, 그렇게 이미지가 굳어진 상황이 답답하지 않으셨어요?”

“있는 거나 잘하자, 있는 거라도 잘해야 한다고 봐 나는. 내 모습이 어찌 보면 개성이고 어찌 보면 매너리즘이잖아. 그거라도 완벽하게 발휘될 기회가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해.”

“이왕에 한국에 돌아오셨으니까 이제부터 일 좀 많이 하세요. 영화판에 누님 연배의 배우들이 별로 없어요.”

“다들 내가 무섭나봐. 책을 안 주네?”

“무서운 것까진 모르겠고. 까다롭다는 소문은 났죠.”

“....내가?”

“누님은 스스로 털털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싸가지 없어 보여요. 은근히 까탈스럽다는 선입견도 있고.”

“배우가 예민해지는 것도 용납 못한다는 거네? 류 감독도 그래?”

“처음 누님 볼 때부터 한 서너 작품 같이 한 것 같이 편하더라고요.”


호호호.

이서영의 까랑까랑한 웃음소리가 주차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요즘 현장이 많이 달라진 거야 아니면 내가 늙은 거야?”

“영화마다 다를 걸요. 그리고 누님은 20대 때도 40대 연기를 하셨잖아요. 이제 제 나이를 찾아가는 역할을 맡기 시작한 거죠.”

“내가 이 영화 때문에 기자 몇 명하고 밥을 먹었잖아. 내가 여태껏 영화만 생각하고 살았냐면 그것도 아니야. 나도 라이프가 있었고 애도 있어. 그렇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뒤처져 있지 않다고. 지금도 남들과 같이 가고 있는데, 왜.... 뭐가 달라졌냐는 질문을 나한테 하냐고. 사실 난 아무런 갭을 못 느끼거든. 그런 질문 자체가 너무 고리타분한 것 같아.”


큭큭.

류지호가 작게 웃었다.


“웃겨?”

“저도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누님하고 차이라고 할까, 제 경우는 영화 쪽 기자말고 경제부 기자들한테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는 거죠.”


그렇구나.

이서영이 쉽게 납득했다.


“할리우드 데려가 주는 거야?“

“할리우드에서 연기하고 싶으세요?”

“배우를 꿈꿨고, 실제 배우로 활동했던 우리 엄마만 해도 활동 당시에는 할리우드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더라. 거기 뭐가 있는지 궁금하긴 해.”

“하는 거 봐서요.”

“뭐야 쿨하지 못하게.”


류지호가 일어서며 말했다.


“슬슬 현장으로 돌아가시죠.”


호호.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양반이었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이서영은 꽤 잘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가 너무 재밌었으니까.

감독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할리우드 감독이 나올 줄은 꿈에서라도 생각 못했다.

그녀가 활동할 당시에도 거장이라 불릴 감독이 없진 않았다.

류지호와 비교하면 그 분들은 겸손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아버지가 감독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감독을 신뢰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촬영 전에 다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촬영에 들어가면 감독의 디렉션을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아버지 같은 감독은 충무로에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경험한 것으로도 여배우를 그렇게 다루는 충무로 감독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페미니스트였을 거야.’


이만훈 감독은 현장에서 굉장히 리더십이 있으면서도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소품 담당 스태프와 이야기할 때도 꼭 둘이서만 소곤소곤 얘기할 정도로 다감했다고 한다.

스태프와 배우가 자기를 이해하도록 만들면서 큰소리를 친 적이 없었다.

이서영도 충무로 삼촌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번에 작업하는 류지호 감독이 그랬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영화를 떠올려보면, 소위 ‘오야지‘라는 어른들이 조수들에게 ’야‘’너‘ 라고 할 뿐, 그들에게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류지호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 이름을 모두 기억했고, 꼬박꼬박 이름을 불러줬다.

나이, 지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했다.


‘미국식 마인드일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세상에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만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 ❉


대길의 움막을 중심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후반 작업에서 까치가 소리가 입혀질 예정이다.

대길의 처가 먼저 일어나 대길의 머리맡에 놓인 자리끼를 갈아주고는 바가지로 항아리 물을 뜬다.

바가지 안에 물에 무명천을 찍은 후 얼굴을 닦는다.

대길의 처가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대길이 부스스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자마자 소쿠리에서 아편을 피울 때 사용하는 담뱃대를 꺼낸다.

이내 방안에 아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컷!”


류지호의 영화에는 수미상관 구성이 자주 보인다.

<복수의 꽃>에서는 도입부에서 대길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과 영화 엔딩에서 나이를 조금 먹은 연화가 아편을 피우는 모습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편에 의존하는 대길.

복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그로인해 찾아온 공허함으로 아편에 손을 대고만 연화.

온갖 고난 속에서도 억척스럽고 묵묵하게 살림을 하고 나물을 캐는 대길의 아내의 모습은 두 사람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복수의 꽃>에는 중요하게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이 있다.

토호의 딸로 태어났으나 도적떼에게 가족을 잃고 삶을 복수에 바친 연화.

험난한 인생살이에서 모든 걸 바쳐 자식을 키웠으나 결국 노망이 들려 자식에게 버려지는 신세가 되는 어머니.

죄 많은 남편과 지리산에 숨어살며 자식과 가정을 꿋꿋하게 지키는 대길의 처.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두 여성 캐릭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때문에 WaW 기획실에서는 여성영화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 땅에서 살아갔던 어머니들이 세 명의 여성의 삶을 모두 포함한다고 류지호는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자식을 키우는 것에 모두 써버리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갔으며, 때로는 세상과 인생에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복수의 모든 걸 걸었던 주인공마저 결국 그런 어머니가 된다.


대길의 움막에 찢어진 창호지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든다.

대길의 처가 잠결에 대길의 이부자리를 더듬는다.

대길이 만져지지 않는다.

대길의 처,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킨다.


후다닥.


마당으로 나간 대길의 처는 저 만치 숲에서 걸어 나오는 제 남편 대길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전형적인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처럼 보인다.

엔딩을 위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모습이다.

그녀는 바람 같은 대길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훌쩍 집을 나설까 아침마다 마음을 졸인다.

마치 갑오년에 동학도들을 따라나섰을 때처럼.


“밥 먹고 합시다!”


류지호는 12시가 되면 하던 촬영을 무조건 멈췄다.

감독이 촬영을 중단하니 스태프라고 별 수 없다.

또한 밥차가 서비스하는 점심을 먹은 후 1시가 되기 전까지 촬영현장 근처에도 얼씬 하지 못하게 했다.

WaW 픽처스 인하우스 영화는 아침과 점심시간 1시간을 무조건 휴식시간으로 보장하고 있다.

또한 낮촬영은 웬만하면 6시에 종료하도록 했다.

해가 긴 여름에는 1시간 더 연장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고.

하루 기본근로시간을 계약서에 명확하게 작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5년 이상 그렇게 진행을 하다 보니, 현재 와서는 자연스럽게 정착한 분위기다.

식사 후 바로 일을 시작하는 스태프들도 종종 있긴 했다.

그럴 때마다 프로듀서와 제작실장이 그들을 제지했다.

원칙은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법.

박건호 대표는 불시에 촬영현장을 방문하곤 한다.

WaW의 방침이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근로시간과 휴식 보장을 정착시키기 위해 10여 년이 걸렸다.

WaW가 투자·배급하는 영화들에게까지 이런 분위기가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년에 제작되는 한국영화 제작편수 가운데 기본근로시간이 준수되는 영화는 서너 편에 불과해기에.


터벅터벅!


연화가 숲길을 걸어가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길도 없는 숲을 지나 도달한 곳에는 엉성한 움막이 한 채 지어져 있다.

대길의 움막 앞 공터로 연화가 들어선다.

연화 복수행의 종착점이다.

마침 부엌에서 나오던 대길의 처가 연화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차돌이 아부지....!]


연화는 대길을 비난한다.

그 때문에 대길의 처는 연화를 동학도로 오해한다.


[동학도들이 왜인에 맞서 다시 죽창을 든다고 하던데, 이런 곳에 숨어 살줄은 몰랐습니다.]


대길은 조반은 들었냐고 물으며 함께 할 것을 권유하지만, 연화는 기다리겠다며 마당 한쪽으로 물러난다.

대길 가족이 초근목피를 삶고 끓인 죽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연화는 마당 한쪽의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원수 가족의 아침식사를 훔쳐본다.


“컷!”


일반적으로 주인공의 감정여정을 따라가는 영화에서는 얼굴 빅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된다.

주인공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복수의 꽃>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만 절제되어 사용된다.

Eye-MAX 카메라로 촬영되는 시퀀스에서 간혹 연화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촬영되었는데, 거대한 스크린 또 선명한 화질로 인해 배우의 눈동자, 아주 미세한 얼굴 근육의 변화, 심지어 땀구멍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Eye-MAX 시스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초대형 화면은 거대한 스크린의 스펙터클 못지않게 영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클로즈업의 효과를 극대화 시켜준다.

클린턴 우드 감독에게서 배운 연출이다.

영화의 95%를 Eye-MAX포맷으로 촬영한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주인공 설리의 복잡한 감정 변화와 고뇌를 1.9:1의 화면비를 통해 섬세하게 잡아냈다.

Eye-MAX가 극대화해 줄 스펙터클에 휘둘리지 않고, 서사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던 거장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연출이었다.


“난 널 예쁘게 찍지는 않을 거야. 대신 네가 연기하는 연화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연출할게.”

“....”

“네 아름다운 얼굴로 인해 연기력이 저평가되지 않도록 할 거야. 날 믿어주겠니?”


송라원 얼굴의 잡티와 주근깨를 메이크업으로 가리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얼굴을 그대로 카메라에 노출했다.

송라원은 군소리 없이 노 메이크업 느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감독을 신뢰했기 때문인지, 그녀 스스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인지 알 수 없다.


“라원이는 어떻게 된 애가 분장을 안 받은 맨 얼굴도 예쁘냐?”

“1200:1의 경쟁률을 뚫은 배우야.”

“더 리얼하려면 분장으로 조금 망가뜨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맨얼굴이 예쁜 걸 어떻게. 일부러 더 못 나게 만들 필요까진 없지 않겠어?”


송라원은 류지호와 김영복이 시키는 건 뭐든지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고집을 피웠다.

디렉션을 거부하기도 하고 다른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류지호는 열심히 설득하는 척 했다.

못이기는 척 그녀의 뜻을 존중해줬다.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들이었다.

괜히 감독의 권위를 내세워 배우가 하고 싶다는 걸 무시할 것 까지는 없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꼭두각시일 뿐.

배우가 아니다.

고민하지 않은 배우는 연기가 늘지 않는다.


✻ ✻ ✻


대길이 지게를 둘러멘다.

여느 날처럼 땔감을 해오기 위함이다.

아들 차돌에게 엄마 말 잘 듣고 멀리 가서 놀다가 길 잃어버리면 안 된다며 당부한다.

뭔가를 짐작한 아내도 다독인다.

어느 틈엔가 연화는 마당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숲으로 사라진 대길을 쫒아간 것이다.


“컷!”


연화가 움막 뒤편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지치고 상처 입은 연화를 대길의 처와 차돌이가 맞이한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의 대길의 처.

연화만 혼자 돌아온 것은 제 남편이 죽었다는 의미일 터.


[내 이름은 연화이고, 고부 복골에 살았고... 살 겁니다. 억울하다 생각이 든 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아이가 어른이 되어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받아줄 겁니다.]

[일 없소. 우리 아기는 협객으로 키울랑게.]


제 남편을 죽인 살인자 앞에서 강단을 부렸던 대길의 처다.

하지만.


[난세에 당신마저 없으면 우리는 인자 그날부터 다 죽은 목숨인게.]


차돌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돌을 줍는다.

양손바닥 가득 돌을 주워 어미에게 달려가 보면...

대길의 처가 돌무덤을 만들고 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것소. 기왕 죽을 것, 멀라고 고생하고 죽어라. 죽기나 편하게 죽제. 뭐덜라고!]


지리산 산자락에 대길 처의 한탄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컷! 좋습니다!”


✻ ✻ ✻


총 65회 촬영이 예정되었다.

여주 WaW 종합촬영소까지 마무리하며 절반의 회차를 소화했다.

서울에서 박건호 대표가 여주로 내려왔다.

고생하는 제작진을 격려할 겸 전체 회식자리를 가졌다.

김영복이 류지호의 소주잔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거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촬영에 임하고 있는데.”

“왠지 느긋한 것 같아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김영찬이 끼어들었다.


“쉴 거 다 쉬고. 테이크도 많이 안 가고....”


김영복과 김영찬이 쿵짝이 맞아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형님도 솔직히 불안하죠? 이러다가 촬영 날짜 오바하는 건 아닐지.”

“그러게. 예전에 영화 찍을 때는 아주 목숨 걸더니, 이젠 너무 느긋한 것 같아 내가 적응이 잘 안 된다. 이상해. 아~주!”


이서영이 류지호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할리우드에서는 느긋하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

“감독마다 개성이 다 다르고, 현장 스타일이 제각각이죠. 젊잖게 조곤조곤 일하는 감독도 있고, 직접 메가폰 들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감독도 있고, 스태프 개무시하면서 독재자처럼 구는 감독도 있고....”

“할리우드에서 대접 좀 받아?”


류지호와 가까이에 자리를 잡은 헤드 스태프들 시선이 모두 모여들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윤민구만 빼고.

이 자리에서 류지호의 할리우드에서의 위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작가의말

소설 속 영화인 <복수의 꽃>에는 3.1운동도 언급이 됩니다. 리메이크 하면서 우연히 맞아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암튼 오늘 하루만이라도 애국지사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한 번쯤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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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3) +6 23.03.11 3,674 128 26쪽
442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2) +5 23.03.10 3,623 121 26쪽
441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1) +7 23.03.09 3,647 118 23쪽
440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3) +4 23.03.08 3,578 123 24쪽
439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2) +14 23.03.07 3,579 128 21쪽
438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1) +3 23.03.06 3,585 117 21쪽
437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면 됩니다. +6 23.03.04 3,704 128 27쪽
436 복수의 꽃. (10) +8 23.03.03 3,397 127 21쪽
435 복수의 꽃. (9) +6 23.03.02 3,267 127 21쪽
» 복수의 꽃. (8) +4 23.03.01 3,262 120 21쪽
433 복수의 꽃. (7) +3 23.02.28 3,331 119 22쪽
432 복수의 꽃. (6) +4 23.02.27 3,376 115 21쪽
431 복수의 꽃. (5) +4 23.02.25 3,456 128 24쪽
430 복수의 꽃. (4) +5 23.02.24 3,383 128 25쪽
429 복수의 꽃. (3) +11 23.02.23 3,468 115 26쪽
428 복수의 꽃. (2) +2 23.02.22 3,557 128 24쪽
427 복수의 꽃. (1) +5 23.02.21 3,676 123 20쪽
426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4) +6 23.02.20 3,647 126 25쪽
425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3) +5 23.02.18 3,702 135 25쪽
424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6 23.02.17 3,654 134 25쪽
423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1) +7 23.02.16 3,745 13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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