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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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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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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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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복수의 꽃.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복수의 꽃> 제작진이 전라북도 김제로 내려왔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평야와 푸른 하늘이 마주보며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사방을 둘러봐도 광활한 들판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 김제의 가을벌판은 마치 황금바다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산과 구릉이 많은 한반도에서 이처럼 드넓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누렇게 익은 별들이 바람결에 누웠다 일어섰다는 반복하고 있다.

첫 날 오전에는 드넓은 김제평야의 롱 쇼트(L.S) 위주로 촬영했다.

전봇대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화면에 잡히지 않게 조심하게면서 촬영했다.

오후에는 바둑판처럼 잘 정비된 평야가 아니라 익산과 가까운 시골의 구불구불한 논두렁의 전통적인 평야를 찾아가 촬영했다.


“액션!”


논두렁길을 터벅터벅 걸어나는 연화의 모습을 찍고.


“액션!”


좁은 논두렁에서 지게꾼과 마주치다가 연화가 논으로 내려가 비켜주는 모습도 찍고.


“액션!”


누런 황소를 끌고 가는 농부를 앞질러 걸어가는 연화의 뒷모습도 찍었다.

다이얼로그가 없는 장면들이다.

Eye-MAX MKⅡ가 메인 카메라로 촬영을 진행했다.

혹시 몰라서 바로 옆에서 파나플렉스 슈퍼 35mm로 똑같은 앵글로 동시에 촬영했다.


“......?”


캐나다 촬영팀이 서로 눈을 맞추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류지호와 김영복이 담아내는 화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Eye-MAX 영화의 탄생 배경에는 광활한 화면비를 이용해 대자연의 장엄함, 우주의 신비로움, 폭포 같은 수직운동성의 스펙터클, 자동차 경주 같은 역동성을 보여주기 위함이 있었다.

그런데 류지호는 광활한 화면을 비우는 걸 고민하고 있다.

그들로서는 뭐하려고 1.44:1 화면비의 Eye-MAX 카메라를 활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Eye-MAX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

“혹시 한국의 산수화를 본 적이 있어요?”


도리도리.


“중국이나 일본의 산수화도?”


끄덕끄덕.


“혜진아, 내 가방 좀 가져다줄래?”

“네.”


스크립터 이혜진이 류지호의 백팩을 가져왔다.

류지호가 백팩에서 큼지막한 파일바인더를 하나 꺼냈다.

파일바인더를 펼쳐 페이지를 넘기자 각종 동양화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 그림 한 번 보세요.”


캐나다 촬영팀 뿐만 아니라, 김영복 촬영팀 조수들도 어깨너머로 얼굴을 디밀었다.

18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전통적 화제(畵題)인 ‘강산무진(江山無盡)’을 주제로 끝없이 이어지는 대자연의 풍광을 묘사한 산수화가 파일바인더에 스크랩 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궁중화원으로 이름을 떨친 이인문이란 분이 그림 강산무진도에요. 총 길이가 무려 8.5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죠.”

“....음.”

“실제로 존재한 산수를 그린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관념적인 산수화에요. 게다가 단순히 웅장한 자연풍광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세상도 함께 묘사하고 있죠. 언뜻 보면 산수화 같지만 들여다보면 풍속화이기도 합니다.”

“마치 파노라마 같군.”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에요. 디테일이 상당하죠.”

“이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으니 시네마스코프나 Eye-MAX 화면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겠군요?”

“사실 한반도의 산들은 미국의 산들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맛은 덜 해요. 장엄하지만 은은하게 이어진 연속성의 멋이 있어요. 나는 한반도 산의 그 장엄하면서 은은한 수직성을 표현하고 싶어서 광활함을 표현하기 좋은 시네마스코프보다는 수직성이 강조되는 Eye-MAX 화면비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지요. 게다가 이 그림에서도 보듯 한국화는 화면을 꽉꽉 채우는 것보다 어떻게 비울 것인가가 미학의 핵심이죠.”


서구적 실용학문을 주로 교육 받은 사람들은 ‘여백의 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적 철학이 기반이기에 설명한들 납득하는 서양인은 많지 않다.

<The Killing Road>에서 ‘여백의 미‘를 설명하기 위해 꽤 곤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지가 비어있기 때문이죠. 그림이 꽉 찬 화지에는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잖아요. 집이 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집 내부가 비어있기 때문이에요. 겉이 아무리 화려하고 내부 인테리어가 멋지다고 해도 머무를 공간이 없다면 그것을 집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고 했는데, 캐나다 촬영팀이 알아들었는지 알 순 없다.

그만큼 ‘여백의 미‘라는 개념은 쉽지 않다.


“현대의 물질문명 사회는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처럼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유롭고 진실된 정신과 마음이 머물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죠. 따라서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모두가 ‘그렇구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볼일 없는 감독의 말이었다면 그게 무슨 ‘개똥철학‘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해외 유수영화제 수상자이자 할리우드 현직 감독의 말이다.

촬영팀은 뭔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자신의 할 일에 집중했다.


화면을 비움.


<The Killing Road>에서도 추구했고, 그 이전의 단편영화에서부터 꾸준하게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면서 영상미학인 동시에 류지호만의 영상언어다.

<The Killing Road>에서 빈 화면은 상실의 시대 그리고 인물들의 공허함을 상징했다.

이번 <복수의 꽃>에서는 말 그대로 여백이다.

마치 미완성으로 보이는 듯한 과감히 생략된 공간이다.

여백은 말 그대로 생략된 표현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적절한 배치와 작가의 표현력으로 인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조형구도의 절제미, 과감한 조형 구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공백과 여백의 차이다.

공백은 단순히 비어있음을 뜻 한다.

그러나 여백은 의도적으로 남겨둔 빈 공간을 뜻한다.

단순히 화면에 여백을 많이 둔다고 해서 그것이 조형적 구성상의 여백은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멋 부리기에 그칠 수도 있다.

한국화의 여백은 감상자의 ‘이해’ 속에 완성 된다.

감상자는 단순히 그려진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채워진 부분을 통해 비어 있는 부분을 연상하고 그 과정에서 흥미로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감상자의 머릿속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상상하도록 그리지 않았지만, 감상자 스스로 풍경 혹은 인물을 보다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시선의 흐름이 역동적으로 이동하고 효과적으로 집중, 혹은 무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의 구조가 명료하고 그 과정에서 미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하지요.”


류지호가 인터뷰한 산수화 화가가 한 말이었다.

여러 산수화가나 대학 교수들에게 배움을 청하긴 했지만 솔직히 수박 겉핥기였다.

<복수의 꽃>을 통해 ‘여백의 미’의 철학적·미학적 완성도가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아직 스스로의 배움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화면비를 통해 감독이 무언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관객들이 어렴 풋이라도 알아주길 바랄 수밖에.

한편으로 한국의 영화인들에게는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영화가 어느 정도로 확장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기도 했고.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 쇼트, 웨스 앤더슨 감독의 지독한 대칭 구도,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모더니즘 영화의 비대칭 구도 등등.

영화사적으로 무수한 표현양식들이 존재했다.

류지호는 지독한 시네필이다.

이전 삶에서는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영화들 위주로만 편식한 예술영화지상주의자이기도 했었고.

<복수의 꽃>은 시대극이다.

그럼에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상언어를 오마주하고 있다.

<L'Avventura>, <Il Deserto Rosso>, <Blow-Up> 등.

현대 영화 최후의 거장이라고도 불리는 감독이 안토니오니다.

그의 영화에서 죽은 공간이란 상징으로 공원, 넓은 공터, 공장부지, 도시 외곽, 사막 등 비어있는 공간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러한 공간에 의해 압도된 인물로도 나타난다.

죽은 공간은 공간 내에서 사건이 없다.

인물들 간 관계의 부재, 윤리적 기준의 부재, 자아의 상실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게다가 안토니오니 감독은 롱쇼트를 체계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영화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황량한 빈 공간이 자주 부각된다.

때문에 혹자들은 영화가 너무 정적이고 따분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로부터 죽은 공간, 공허한 여백을 배웠다.

그때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그걸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이젠 아니다.

‘여백의 미‘까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의미를 채워 넣지 않은 미장센을 통해 관객 스스로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쿵저러쿵 제 아무리 현학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필모그래피에 걸쳐서 일관성과 유기적인 연결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저 화려한 영상의 나열일 뿐이다.

감독의 영화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몇 편의 영화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영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과정 속에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변화·발전의 분기점이 존재하게 되고, 일관되게 주목하는 인문학적 요소가 읽혀야 한다.

류지호는 작가영화와 상업영화 사이를 오가고 있다.

졸업작품까지 포함해 다섯 번째 장편영화를 찍고 있다.

그 필모그래피에서 주제의식이든 영화적 표현양식이든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읽히지 않는다면 류지호는 그저 영화 좀 찍을 줄 아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로 가는 과정과 인생살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최소한 그 두 가지만 실천해도 거장까지는 몰라도 능히 명감독이라 불릴 수 있다.


❉ ❉ ❉


9월 초순에 시작한 촬영은 어느덧 10월 초로 넘어가고 있다.

설악산에 슬슬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복수의 꽃> 제작진은 민속촌에서 진행하던 촬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서둘러 강원도로 이동해야 했다.


“놀러왔냐! 좀 뛰어다녀라!”


해가 저물어 영업을 종료한 민속촌이 소란스러웠다.

무엇보다 민속촌 상공에 달이 떠있다.

실제 달이 아니다.

크레인에 달린 고용량 HMI조명이다.

지상에서 리모컨으로 조명 포커싱이 가능한 특수장비다.

WaW 종합촬영소 장비렌탈 사업부에서 Nettmann Systems로부터 구입해 들여온 장비다.

참고로 충무로에 조명 크레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5년이었다.

당시에 5t 트럭을 개조해 15m까지 대형조명을 올릴 수 있었다.

처마의 달그림자처럼, 고작해야 2~3m 높이만 올릴 수 있는 스탠드 조명기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표현이 그때부터 가능해기 시작했다.

밤장면이 유난히 조악했던 한국영화다.

대략 그 시점부터 자연스런 밤 장면 묘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영화현장에서 크레인 조명이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건설현장에서 크레인 기사를 하다가 영화로 업종을 전환하는 경우도 생겼다.

크레인을 높이 올릴수록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위험도는 커진다.

때문에 크레인이 쓰러지는 바람에 스태프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제 리모트 컨트롤이 가능한 크레인 조명이 국내에 들어옴으로써 조명 스태프가 수십 미터 상공에 올라가 조명을 다룰 필요가 없게 됐다.

사람이 올라가는 공사장 크레인을 개조한 차량보다 비싸기 때문에 제작사가 자주 빌려 쓰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WaW 인하우스 영화만큼은 무조건 쓰게 될 터.

박건호 대표는 그런 부분에서는 절대 제작비를 아끼는 인물이 아니다.


보름달이 떠있는 고즈넉한 밤...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일단의 청년들이 인적 없는 거리를 등롱(燈籠)으로 밝히며 걸어가고 있다.

술에 취하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고 하더니 이들이 딱 그 모습이다.


[척왜척양 헌들 나라가 바로 서간디?]

[웬수 놈의 시상! 관가 곤장소리에 왜놈 돈은 관가 놈들 배때기로 들어가고, 조선 쌀은 배를 타고 왜로 건너가고... 시상 참 잘 돌아간다잉!]

[누가 들어. 그만들 거시기 혀....!]


청년 하나가 누가 들을까 황급히 벗들을 진정시킨다.

그때, 골목 반대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괴나리봇짐 사이에 칼을 찔러 넣고, 헤지고 낡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 연화다.

청년들은 골목 반대편에 인적이 어른거리는 것도 모르고 곧 혼례를 치룰 중구를 놀려대기 바쁘다.

연화는 괴나리봇짐 사이에 찔러 넣은 칼집에 손을 가져간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쓰개치마를 벗어던지자 하회별신굿탈놀이의 각시탈이 드러난다.

각시탈을 쓴 연화가 사내들을 향해 달려간다.


다다다... 탁.


연화의 꽃신이 경쾌하게 바닥을 찍으며 낮게 나는 제비처럼 달려 나간다.

사납게 달려드는 연화를 발견한 청년들이 반사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해본다.

이미 늦어도 한 참을 늦었다.

연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들 사이를 파고들어 칼춤을 춘다.

베고, 찌르고, 튕겨내고, 후려치고...

사내들이 죽어나자빠진다.

복부에 한칼 먹은 중구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 쥐고 일어선다.


[꼴로 보지마랑께! 나가 갑오년 전쟁에 나선 놈이랑게!]


중구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지만.... 연화의 칼은 자비가 없다.

칼에 뭍은 피를 털어내고는 납검한 연화가 바닥에 죽어나자빠져 있는 사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그 모습에서 어떤 흔들림도 없다.

끄르륵거리는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이는 중구의 입가에 연화가 귀를 대고 유언을 듣는다.

아니다.

중구와 함께 연화의 집을 털어먹었던 도적들의 행적을 듣는다.

그렇게 하면 살려주기라도 할 것 같았지만.


[...살려주시오. 존 일 합시다... 각시가 기다리오... 나가 이번에 장개 든당게...]


연화는 버둥거리는 중구의 가슴에 무감정한 얼굴로 칼을 쑤셔 넣고 돌아선다.

중구는 바닥을 기어 골목길을 벗어나며 애원하다가 끝내 숨을 거둔다.

연화가 사라진... 시체 네 구가 남겨진 골목에 달빛만이 내려앉을 뿐....


도적패들은 완전범죄를 꿈꾸었다.

하늘 아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자신들이 자행한 살인행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연화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연화의 연쇄살인 행각 역시 비밀이 될 수 없다.

전주 성읍부터 추적하고 있는 전주 감영의 군관이 수사망을 좁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슥삭.


민속촌의 액션 장면은 화려한 액션 디자인을 하지 않았다.

연화가 순식간에 무리로 달려와 그 안에서 칼을 몇 번 휘두르면 그걸로 끝이었다.

고전 사무라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를 보는 것 같았다.

류지호는 <Remo : The Destroyer>에서 그랬지만, 액션 장면에서 쓸데없이 폼을 잡거나 비장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연화의 얼굴 클로즈업은 단 한 쇼트도 찍지 않았다.

각시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클로즈업을 보여준다고 해서 연화의 감정을 보여줄 수도 없었지만.

중구의 일행들 역시 뭔가 큰 리액션을 펼치며 죽지 않는다.

그저 주저앉고 맥없이 쓰러질 뿐.

마치 복싱이나 격투기 경기에서 카운터펀치를 맞고 무너지는 선수의 모습처럼.

다만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꿈틀거리는 걸 강조하긴 한다.

이 역시 다운된 선수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버둥대는 것 같아 보인다.

어쩌면 당연했다.

류지호가 최영웅과 배우들에게 레퍼런스로 그 같은 동영상을 제시했으니까.

따라서 피가 튀고 신체부위가 잘리고 가슴이 갈라지는 특수분장 없다.

즉사한 사람, 고통 속에서 꿈틀거리며 죽어가는 사람,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 등.

그 사이에서 무심하게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납검하는 연화를 풀 쇼트(F.S)로 건조하게 보여줄 뿐이다.


“찍을 때도 심심해보이고 막상 극장에서도 그럴 것 같지?”

“.....”

“Eye-MAX 대형 스크린으로 보게 되면 달라질 거야.”


거기에 Eye-MAX 상영관 특유의 묵직한 사운드까지 합쳐지면, 조잡하게 쇼트를 나누지 않아도 훨씬 강렬한 현장감을 선사하는 액션 시퀀스를 보여줄 수가 있다.

액션은 빠르고 간결하지만, 미장센만큼은 예술적이었으니까.

특히 골목길의 깊이감과 공간감 연출은 Eye-MAX 화면비와 만나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라 류지호는 의심치 않았다.


❉ ❉ ❉


2주.

그 시간이면 스태프들이 호흡을 맞추는데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민속촌에서 잠시 파나플렉스 슈퍼 35mm가 사용되었지만, 다시 Eye-MAX 카메라가 전면에 등장했다.

단풍으로 물든 설악산에서 <복수의 꽃> 촬영이 이어졌다.


산천의 풍광은 수려하고 고즈넉하여 평화롭다.

산과 들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다.

낡고 헤진 치마저고리에 괴나리봇짐을 진 연화가 고갯마루를 넘는다.

연화는 길을 간다.

악적들이 걷던 길을.... 악적들이 지났을 고개를.... 그들이 보았을 풍경을 거쳐.... 그들이 만났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산기슭에 다 쓰러져 가는 서낭당 앞에서 지게를 진 벌목꾼과 눈인사를 나눈다.

길을 가다 만나는 인연들.

그런 인연들이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되는 거겠지...

연화는 추적추적 비가 오는 거리를 홀로 처량하게 걷는다.

잠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우의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튀긴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기생집 수챗구멍에서 음식이 나온다.

연화는 거지와 고아들 틈에 섞여 기생들이 버리는 음식으로 허기를 채운다.


영화 <킬빌>에서 태런티노는 ‘복수는 차갑게 식혀서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연화는 이 지긋지긋한 짓을 끝내고 싶다.

하지만 복수는 결코 바쁘게 해치워야 할 일이 아니다.

복수는 확실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다.


<복수의 꽃> 제작진은 설악에서 시작해 단풍을 따라서 월악산, 이어 속리산으로 내려오며 촬영을 이어갔다.


그 날의 도적... 만억.

만억은 두승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숲을 헤치고 달린다.

호랑이에 쫓기는 산짐승 같다.

만억이 달아난 길을 쫒아 연화가 개울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폭포 아래서 만억이 허겁지겁 물을 퍼마신다.

같은 폭포에서 연화는 각시탈을 씻는다.

그리고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내서 각시탈에 연지곤지를 그린다.


훅훅.


촬영팀 조수들은 죽을 맛이었다.

Eye-MAX 장비만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보조카메라 파나플렉스 슈퍼 35를 짊어지고 산을 타야 했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쏴아아아.


한국 사극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괴산의 수옥폭포.

강행군으로 지친 스태프들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촬영을 이어갔다.

단풍이 지기 전에 주요 로케이션 촬영을 마쳐야했다.

한시도 쉴 틈이 엇이 전라도의 산들과 숲속을 헤집고 다녔다.

만억에 대한 연화의 추격을 일주일 동안 촬영했다.

두 사람의 추격전을 만억이 군산에 들어서면서 멈추게 된다.

10월 중순 경 단풍이 절정을 이룬 내장산에서 추격전 촬영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미친 듯한 촬영 속도에 강행군이었다.


“일요일에도 촬영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제대로 촬영이 되고 있는 거겠지?”


류지호는 무조건 일요일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또한 하루 10시간 내 촬영과 식사 시간을 반드시 보장했다.

류지호의 그 같은 방침 때문에 계획된 촬영 분량을 소화하지 못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 조감독 이동화가 영리하게 스케줄을 조정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찍어도 진짜 되는 겁니까?”

“상관없어.”


이동화는 미심쩍어 몇 번이고 류지호에게 확인을 받았다.

전 날 소화하지 못한 쇼트들을 다음 촬영에서 이씬 저씬에 끼워 넣어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날 허둥지둥 폭포에 모습을 드러내는 만억의 풀 쇼트에서 이어지는 연결 쇼트를 미처 촬영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을 다음 날 연화 분량을 찍기 전에 만억을 먼저 찍도록 스케줄을 조정하는 식이었다.

그럴 경우 류지호는 연화의 촬영 쇼트 중에서 미처 못 찍은 쇼트와 가장 유사한 카메라 방향의 앵글, 포지션을 바꾸면서 셋업 수를 줄였다.


“무슨 대단한 감정이나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정도는 이렇게 찍어도 대세에 지장 없어.”


촬영 퍼스트는 전날 촬영한 씬의 노출값과 색온도 등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도도 못하는 촬영 퍼스트는 세상 어떤 영화판에도 없다.


“다른 감독님들은 그냥 처음부터 다시 찍으시던데. 누끼도 잘 안하시고.”


90년대 중반부터 제작비가 늘어나면서 필름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감독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산해서 찍는 것도 옛말이 되어 가고 있다.


“개나 소.... 보통 순서대로 찍으시더라고요. 옛날 감독님들이나 누끼를 치던데...”

“내가 옛날 감독이냐?”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는 감독님이 씬 누끼, 커트 누끼 치실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잘못 알려진 것 중에 하나다.

할리우드라고 해서 모든 영화를 멀티카메라로 촬영하고 필름을 물 쓰듯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앵글의 쇼트들을 모아 찍는 건 현장에서 기본이야. 셋업 수를 줄여야 예산대로 영화를 찍지. 여주 백랏 세트 들어가면 일일촬영분량 조금 늘여도 돼.“

“예?”

“몹씬은 안 되겠지만, 연화 단독으로 나오는 것들 잘 모아둬.”

“점점 해가 짧아져서 4시가 넘으면 데이 씬 촬영 접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 풀 쇼트 위주로 다 쳐야지. 4시 가까워지면 클로즈업 같이 타이트한 쇼트만 모아서 조명으로 만들어서 촬영하고. 오케이?”

“아, 예....”


영화 편집상 기능적으로 필요한 소트까지 심혈을 기울여 촬영하는 것은 ‘똥폼’일 뿐이다.

제작비 누수가 생기는 것 중에 30분이면 촬영할 수 있을 것을 한 시간 넘게 시간을 잡아먹는 것도 많다.

그것은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서 찍는다에서 최선은 Best가 아니야. 안타깝지만 영화감독은 Bad or Worst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직업일 때가 많거든.”


감독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마법의 영역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완벽이란 있을 수가 없다.

<복수의 꽃> 제작진은 강원도부터 전라남도까지 순차적으로 이동하며 촬영했다.

류지호는 클로즈업은 촬영하지 않고 대체로 롱 쇼트, 풀 쇼트 위주로 빨리 치면서 내려왔다.

그렇게 남겨진 클로즈업 쇼트들은 내장산에 와서 모아서 촬영했다.


“어차피 산속은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니까.”


인물을 화면에 꽉 차게 찍는 쇼트는 어떤 장소든 숲 속 느낌이 나는 장소에서 촬영하면 되는 것이다.


“배우가 그때 감정을 잊거나 놓치면 어떻게 하고요?”

“한 달 전도 아니고,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이 찍었던 감정과 연기를 까먹었다면, 배우로서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연기의 문제이니까.”


류지호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은 몇몇 배우가 흠칫 표정을 굳혔다.

내심 찔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복잡한 감정을 연기해야하는 쇼트들은 류지호가 현장편집본을 배우들과 함께 보면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촬영했으니까.

모든 배우를 그렇게 촬영하진 않았다.

경험이 부족한 송라원만큼은 모아찍기 때신에 순서대로 찍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10월 말.


강원도와 전라도 일대를 누비고 다녔던 <복수의 꽃> 제작진이 서울로 철수했다.

1주일의 정비시간을 가졌다.

한 달이 넘은 기간 내내 산과 들로만 다녀서 스태프들의 피로도가 상당했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가의말

평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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