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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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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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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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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복수의 꽃.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홀 안에 배우이름과 배역이 적힌 팻말이 놓인 커다란 'ㄷ‘자 테이블이 놓여 있다.

송라원이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팻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 일찍 온 편이라서 대부분의 배역 자리가 비어 있었다.

문제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다과들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수가 놓여 있다.

리딩장 한 편에는 뷔페처럼 간식거리와 김밥 같은 간단한 요깃거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드라마 대본 리딩에 참가해 본적이 있는 송라원이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드라마작가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호화판 대본 리딩을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역시 억만 장자 스케일.....!”


류지호는 뭐만 하면 충무로에서 구설수에 오른다.

<복수의 꽃> 대본 리딩까지 충무로에서 수군댔다.

김영복이 류지호의 눈치를 살피며 투덜댔다.


“호텔을 빌려서 대본 리딩을 할 수 있는 거지 사람들이 말이야 참.....!”


류지호가 뭐만 하면 돈지랄이라고 흉을 본다.

합정동 WaW 프로덕션 오피스의 회의실이 작아서 소규모 대본리딩 밖에 소화하지 못한다.

류지호처럼 단역과 주요 헤드스태프들을 불러 모아서 대본 리딩을 진행할 경우 모든 이들이 다 들어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대본 리딩장을 따로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본 리딩, 제작발표회, 고사 및 뒤풀이, 크랭크업 기자회견까지 패키지로 밀레니엄 힐턴 호텔과 계약했다.

영화 포스터와 크레디트에 협찬을 명시하기로 했고.

류지호의 돈이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단 의미다.


“사극은 협찬을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전하영 피디는 이번 호텔 협찬을 통해 사극 PPL은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을 깼다.


“외국의 유명 패션브랜드가 중세시대 배경이나 근대 배경 할리우드 시대극의 의상을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협찬을 하기도 해요. 시대극이라고 해서 협찬 못 받는 게 아닙니다.”

“가온그룹 계열사가 아니었어도 협찬을 해줬을까요?”


류지호 소유 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다.


“아마도.”

“톱스타도 안 나오잖아요.”


김영복이 끼어들었다.


“감독이 유명하잖아. 세계적으로.”

“아!”


함께 자리한 이들 모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 류지호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안녕하세요.”

“자리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리딩 시간이 다가오자 주요 배우들이 속속 도착했다.

송라원이 옆으로 지나쳐 가는 조감독 이동화의 발길을 붙잡았다.


“조감독님~”

“엉, 왜?”

“저기 카메라들은 머예요?”

“메이킹 촬영하는 거야.”

“헹~ 아직 대본리딩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데.....”

“카메라 의식하면 나중에 현장 가서 연기 어떻게 할래?”

“그거랑 이거랑 안 같아요.”


벌떡.


두 사람은 더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백순이 선생이 리딩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송라원이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어서, 화사하게 웃고 있지만 센 인상을 감출 수 없는 이서영 배우가 들어왔다.

김영찬 배우는 류지호와 함께 입장했다.

송라원은 대선배들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서 있었다.


“왜 서있어. 앉아. 그러지 마. 불편 해.”


백순이를 비롯해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송라원과 젊은 배우들의 조심스러운 몸가짐에 질색했다.

도리어 후배들보다 본인들이 더 몸 둘 바 몰라 어색해 했다.


절레절레.


류지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예절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과공은 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듯이.


“......”


류지호가 넓은 연회장을 쭉 둘러봤다.

중앙의 ‘ㄷ'자 테이블에는 주조연들이 자리했다.

그들 뒤편에 간이의자 수십 개가 놓여 있는데, 단역들의 자리다.

촬영 퍼스트 어시스턴트, 동시녹음기사, 아트디렉터, 분장·의상팀장까지 참석했다.

촬영 퍼스트는 처음으로 배우들의 스킨톤을 확인하기 위해, 동시녹음팀은 배우들의 목소리와 톤을 들어보기 위해, 아트디렉터는 배우들의 분장과 의상에서 바꿔야 할 것이 있는지 최종적으로 점검하기 위해서 일부러 참석했다.

충무로에서는 대본 리딩이 있는 날 배우들의 의상 피팅도 함께 하는 편이다.

<복수의 꽃>은 주인공 의상을 모두 제작하기 때문에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고, 단역들의 치수까지도 다 확인해 둔 상태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주요 헤드스태프들을 불렀다.


“......”


류지호는 과거로 돌아와 처음으로 충무로에서 장편영화를 작업한다.

그럼에도 여려 번 작업했던 것처럼 편하고 여유로웠다.


‘온 사방에서 한국말만 들린다는 것도 신기하고.....’


사전에 공지된 리딩 시간이 되자, 테이블과 간이의자가 사람들로 꽉 찼다.

대사가 한 마디도 없는 단역(이미지 단역)까지 포함해 60여 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용하고 그런 거 없다.

류지호는 일부러 배우들에게 말을 많이 시켰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권위주의적인 대본리딩이 되지 않도록 연출부들도 배우들과 스스럼없이 농담도 하고 장난을 쳤다.

연기 경험이 많은 이들도 이정도 규모로 대본리딩이 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류지호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KBC 대하사극도 이 정도로 다 같이 모여 전체 대본리딩 안 할 것 같은데.....”

“그 만큼 기대작이란 거겠지.”

“배우들이 엄청 후달리겠는 걸.”

“할리우드 현역 감독이랑 일하는 게 쉬운 일이냐?”

“와우가 확실히 스탶 잘 먹이고 잘 챙기는 것 같아.”

“대신 유도리가 없지.”

“누가 호텔에서 대본리딩을 할 생각을 하겠어.”


- 아, 아~


조감독 이동화가 마이크를 잡자, 왁자지껄하던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먼저 <복꽃> 리딩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본격적인 리딩에 앞 서 피디님과 감독님 말씀 듣고 그 다음에 출연진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류지호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스탠드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했다.


“반갑습니다. 연출을 맡은 류지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짝짝짝.


송라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류지호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앉아서 말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안녕하세요. 연화역할을 맡은 송라원이라고 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대로 영혼까지 연기에 갈아 넣어 이 작품에 임할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반갑습니다. 김영찬입니다. 연기생활 처음으로 빌어먹을 메소드에 빠져 있습니다. 혹시 제가 뭔가 이상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우리 감독님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리셨는데.... 제가 하자고 우겨서.... 암튼 끝날 때까지 잘 해 봅시다.”


짝짝짝.


류지호가 끼어들었다.


“김영찬 배우님이 한 말 절대 빈말 아닙니다.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대길에 많이 들어가 있어서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감안하십시오.”


메소드 연기는 양날의 검이다.

김영찬은 촬영 내내 평소 알 던 모습이 아닌 대길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주변에 풀려고 할 수도 있다.

본래 메소드 연기라고 밝히는 일은 없다.

자칫 배우로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김영찬은 함께 작업하는 이들에게 폐가 될까봐 미리 밝히기로 했다.

당연히 배우들도 눈치라는 게 있다.


짝짝짝.


전보다 훨씬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할리우드는 물론이고 충무로에서 메소드 연기하다가 현장 분위기 개판 만드는 배우들이 몇 명 있지.’


이어 백순이, 이서영 등 주요 배우들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엑스트라가 아닌 배우 전체가 출연했기 때문에 주요 배역만 소개하고 넘어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리딩을 해 봅시다. 그 전에..... 뒷줄에 앉아 있는 배우들은 최종 오디션 때 보고 처음 보죠?”


대답을 기대했는데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다.


“여러분들이 출연한 <복수의 꽃>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블록버스터가 아닙니다. 제작비가 수 십 억 원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엄청난 카타르시스도 없습니다. 역사적인 고증문제에 나름 철저히 준비 했습니다만 때론 현대적인 해석이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시대의 일상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상상만으로 모든 걸 채울 순 없겠죠. 굳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살았던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생각 그리고 감정 때로는 탐욕까지도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제가 딴에는 외국생활을 좀 오래 해봐서 잘 압니다. 하하.”


확실히 미국과 한국의 작업 분위기가 다르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웃기지도 않은 류지호의 농담에도 많은 이들이 반응 보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안 웃긴다고 면박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억지 감동 쥐어짜는 법 모릅니다. 그저 시나리오가 제시하고 콘티가 이끄는 방향대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방향으로 연기를 풀어냈으면 좋겠습니다.”


짝짝짝.


박수가 잦아들고.

편안해 보이는 류지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덩달아 배우들도 진지해졌다.


“프롤로그부터 가봅시다.”


도적패의 수괴이자 원수 대길과 그의 아내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대본리딩이 시작됐다.


“힘을 뺀다는 것이 기운을 뺀다는 것은 아닙니다. 읊조리는 대사라고 할지라도 에너지나 감정을 꾹꾹 압축해서 표현해 주세요.”


조감독 이동화는 대본리딩 전에 배우들에게 실전처럼 해 줄 것을 당부했다.

대충 연기와 목소리 톤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힘을 빼고 다이얼로그를 읽는 배우가 있었다.


“음... 나는 연기 선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자칫 가르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어요. 그런 의도는 없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텍스트는 글이 아니고 대화입니다. 다이얼로그는 독백이나 방백이 아니라 상대방과 말 뿐만 아니라 감정도 함께 나누는 겁니다. 혼자 너무 앞 서 가지 않도록 유의해 주세요. 혼자 떠드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어디든 환영을 받죠. 내 것만 읽지 마세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그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연기는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혼신의 연기를 펼치지만 발연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돋보이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장면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연기에 있어서 상대 배우와 앙상블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대화 장면에서 서로의 호흡을 느끼고 반응하는 타이밍, 리듬, 강약조절에 따라 장면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Eye-MAX 촬영으로 인해 후시녹음이 꽤 많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실전처럼 해달라고 말한 겁니다. 참고로 나는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후시녹음에 대한 편견이나 불편함을 전혀 못 느낍니다. 동시녹음에 대한 이상한 맹신과 오해 때문에 여러분의 연기를 망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는 관객의 귀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으로도 전해진다는 걸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러니 목소리를 억지로 누른다든가 톤을 필요 이상으로 조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인 목소리에 자신을 가지세요. 여러분의 목소리는 여러분의 눈만큼이나 아름다우니까.”


영어로 하면 꽤 그럴 듯하게 들릴 것 같은데, 똑같은 의미를 한국말로 하려다 보니 류지호의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뒷줄에 앉아 있는 우리 단역배우들. 쫄지 마세요. 얼마나 대단한 명연기를 보여주려고 바짝 기합이 들었습니까? 연기에 멋 부리지 마세요. 단역이 무슨 감정을 조절하고 숨기는 내면연기를 합니까. 질러요 그냥. 단역의 연기를 하세요. 주인공의 연기가 아니라.”


어떤 연기 코치는 단역에게 이렇게 말한다.


- 비록 단역으로 출연하지만 연기는 주인공처럼 해라.


감독이 들었을 때는 개소리다.

등장인물이 주요 배역부터 주조연, 조단역, 단역, 엑스트라로 나눠진 것은 그에 따른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엑스트라가 숨 쉬는 피사체이자 풍경의 일부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단역은 그 쓰임새에 알맞은 연기를 펼치면 그만이다.

주인공의 마음가짐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연기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는 단역이 있다면 절대 좋은 배역 못 따낸다.


“영찬 선배, 느긋하고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다이얼로그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감정까지 치달으면 곤란합니다.”


대본리딩의 분위기는 감독에게 달렸다.

드라마 대본리딩에서는 작가에게 달렸고.

자꾸 맥을 끊으면 뭔가 삐걱거린다는 뜻이다.

술술 잘 넘어간다면 문제가 없단 의미다.

경험이 많거나 영리한 배우는 대본리딩 과정에서 감독의 성향과 스타일을 파악한다.

<복수의 꽃> 대본리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두 번을 더 했다.

휴식 시간에는 호텔에서 준비해 준 각종 간식과 과일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후아~ 빡세네.”

“우리 감독님 되게 디테일 하시다, 그치?”

“백순이 선생님은 진짜 우시더라고. 연극 하실 때도 안 그러셨거든.”

“영찬 선생님은 또 어떻고.”


김영찬은 리딩일 뿐인데도 곰방대 대신 진짜 연초를 피우면서 실전처럼 리딩을 선보였다.

남자 주인공이 그러니 연차가 있는 조연배우도 적당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모습에 적응 못한 배우들도 있긴 했다.

간간이 배우들 사이에서 불꽃 튀는 연기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얼굴이 널리 알졌다고 해서, WaW 픽처스와 신뢰가 깊다고 해서.

류지호는 그런 식으로 <복수의 꽃>의 배역을 결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촬영현장에서의 태도와 연기 실력만 보고 선택했다.

때문에 중견 배우들의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연기 내공은 다들 명불허전이다.

아무리 실전같이 연기를 했다고 해서 실전인 것은 아니다.

대본리딩은 그저 다이얼로그 연기 톤으로 읽기, 그 이상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배우들이 얼마나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현장에서 잡아 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송라원은 원톱 주인공이란 부담감에 짓눌려 있어 보였다.

제 아무리 씩씩한 척 해봐야 류지호 눈에는 다 보였다.

대본리딩에서도 배울 점이 있을 거라며 한껏 기대했겠지만.

류지호는 그런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다.

배울 것은 현장에 있다.

대본리딩은 배우들이 모여 처음으로 전체적으로 맞춰보는 중요한 행사다.

또 연출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들을 수 있는 자리다.

함께 호흡을 맞춰볼 배우들 간의 상견례 성격도 있다.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에 앞 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런데 배우의 연기가 가장 잘 느는 곳은 현장이다.

감독도 그렇지만 배우에게도 현장만한 스승이 없다.

대본리딩은 말 그대로 읽기일 뿐이다.


“본 촬영 때 오늘의 리딩 만큼만 해주면 걱정 없겠네요. 대박 냄새가 솔솔 납니다. 모두 힘을 합쳐서 한국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써봅시다!”


전하영 피디의 말에 참석자들이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짝짝짝!


❉ ❉ ❉


Eye-MAX와 파나플렉스 슈퍼 35mm 카메라 테스트는 진작 끝났다.

여주 WaW 종합촬영소에 세우고 있던 <복수의 꽃> 야외 세트가 완공됐다.

영진위 남양주 스튜디오 실내 세트 제작에도 착수했다.

대본리딩까지 마친 <복수의 꽃>팀은 크랭크인 고사를 지냈다.

로케이션 장소가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어서 배우·스태프들이 묵을 숙소와 식당을 섭외하느라 제작부들의 고생이 많았다.

이동화는 길고 복잡한 동선 때문에 촬영스케줄을 짜느라 골머리를 썩었다.


마침내 9월 초순.


<복수의 꽃>의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초반 촬영은 Eye-MAX MKⅡ 카메라의 장점을 활용한 거대한 화면 위주로 진행했다.

시화호 간척사업으로 수년간 방치된 황무지에서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황무지 한 편에 거대한 강풍기 네 대가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했다.


부다다다다!


강풍기가 돌아가며 마른 흙먼지를 피워냈다.


“강풍기 조금만 더 들어와!”


안재민이 무전기에 대고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특수효과 업체 비주얼 FX의 직원들이 귀를 먹게 할 소음 속에서도 안재민의 지시를 따르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감독이 원하는 것은 흙먼지가 아니라 검회색의 포연이었다.

강풍기 앞에 피워놓은 검회색 연기의 통제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비주얼 FX 직원들은 힘겹게 피워놓은 포연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류지호가 동분서주하는 특수효과팀에게 보다 못해 무전을 보냈다.


“안 기사! 완벽하지 않아도 돼!”

“감독님! 조금만! 10분만 주세요!”


그렇게 특수효과팀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끝에 검회색의 포연 같은 연기가 황무지 한 곳에 모여들었다.

사방을 분간하기도 힘든 연기 속에서 여주인공 송라원이 대기하고 있다.

저 만치 잡풀 사이에는 숨겨져 있던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링.

지지직. 칙!


드디어 무전기에서 류지호의 사인이 흘러나왔다.


- 액션!


전통 한복의 저고리는 품이 넉넉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디자인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기장이 짧고 품과 소매가 좁은 저고리를 착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송라원이 입고 있는 저고리도 후기 스타일이다.

다만 기장이 길고 풍성한 치마 대신에 여염집 처자들이 입는 품이 좁은 치마를 입었다.


슥.


송라원이 치마 속에 감춰진 발을 한 발 내밀었다.


터덜터덜.


자욱한 연기를 뚫고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송라원의 시야에 드넓은 황무지가 펼쳐졌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치이익. 칙.


무전기에서 류지호의 디렉션이 쏟아졌다.


- 너무 느려! 조금만 빨리!“


잠시 감정이 흐트러졌던 송라원이 다시 <복수의 꽃>의 주인공 연화로 몰입해 들어갔다.


작렬하는 태양.

마른 흙이 흩날리는 황무지...

마치 황폐한 조선을 암시하는 듯한.

저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황무지를 걸어오고 있는 까만 점 하나.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옮기는 소녀의 발길은 지치고 무겁기만 하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모하는 나이... 이팔청춘의 이연화.

연화는 가족을 몰살시킨 도적패를 찾아 유랑민처럼 삼남 지방을 떠돌고 있다.

외롭고 고달픈 복수의 길이다...


치이익. 칙.


- 컷! 잠시 대기!


촤라라라.... 락.


재봉틀 박는 소음을 마구 발산하던 Eye-MAX 카메라가 멈췄다.

MKⅡ모델은 아직 1000Ft 매거진을 장착할 수 없다.

하지만 충무로 촬영스태프의 순발력은 대단했다.

500Ft 매거진 두 개를 이어 붙이는 재치를 발휘했다.

류지호는 캐나다의 Eye-MAX본사에 전화를 걸어 김영복 촬영팀의 아이디어를 전달했다.

Eye-MAX에서는 반신반의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었다.

오너의 부탁이었으니까.

며칠 후, 류지호가 설명한 대로 500Ft 매거진을 개조해 한국으로 보냈다.

MKⅡ 모델은 필름 매거진을 카메라 바디의 옆구리에 장착한다.

때문에 기존에는 1000Ft 필름 무게와 필름이 들어가고 나가는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김영복의 촬영팀은 정확하게 촬영에 필요한 필름 길이를 계산한 후에 필름 매거진에 보조 매거진을 묶어서 두 매거진을 연결시켜 촬영하는 꾀를 내었다.

그럼으로 해서 최대 4분 15초 정도의 롱테이크 쇼트를 촬영할 수 있게 됐다.

좋게 포장하면 순발력이고 응용력이다.


“하여튼.... 꼼수는 세계 최고라니까.”


정석이 아니다.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촬영된 네가 필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쩌다 한 번씩 롱 테이크에서 시도해 볼만 했다.


황무지 저 멀리서 카메라 앞까지 연화가 걸어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무지막지한 필름값과 Eye-MAX 카메라의 한 번 촬영 시간을 고려했을 때 불가피하게 몇 번에 걸쳐 끊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점프컷과 오버랩이 섞인 장면이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끊지 말고. 남은 필름 다 써버리세요.”


지치고 고단함이 잔뜩 묻어 있는 연화... 그녀가 카메라를 지나쳐 가버리면.

그 뒤로 남은 황량한 황무지....


첫날 촬영은 연기와의 싸움이었다.

액팅(Acting)이 아니라 스모크(smoke)가 문제였다.

10Km에 걸친 광활한 평지에서 진행된 촬영이었다.

특수효과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워놓은 연기가 자꾸 흩어졌다.

CG로 연기를 채워 넣을 것이라고 설명해도, 안재민은 최대한 현장감을 살리고 싶어했다.

때문에 아침부터 오후까지 특효팀을 닦달해가며 포연을 만들어냈다.

안재민은 <Remo : The Destroyer>에서 할리우드 특수효과팀이 평원에서 포연을 만들어낼 때 한 손 보탰다.

어깨너머로 그들의 노하우를 훔쳤다.

배웠으니 써먹는 것은 당연한 거다.

충무로에서 똑같이 재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물량과 충무로 물량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할리우드 스태프들조차 류지호가 원하는 Eye-MAX 화각 안을 모두 연기로 채울 순 없다.

과하게 의욕을 보이는 안재민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지 마. CG로 보충할 거라니까.”

“더 풍부한 영상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필요로 하는 만큼만 해. 그 이상은 열정도 노력도 아니야. 낭비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결과가 무조건 효율적이란 법이 없다.

안 되는 걸 알면서 하는 것은 노력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안 되는 것, 불가능한 것을 특효팀이 감독에게 정확하게 조언해야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거야. 네가 날 뛴다고 해서 안 되는 걸 되게 만들 순 없어.”

“레모에서는 했잖아.”

“그곳은 분지였어. 여기처럼 사방이 뻥 뚫린 개활지가 아니었잖아, 이 바보야.”

“......”

“바람, 기압 모든 걸 사전에 꼼꼼하게 체크하고 촬영했다는 걸 잊었어? 특효팀이 며칠 동안 테스트까지 마친 후에 촬영했잖아. 그 한 씬의 예산이 얼마인 줄 너도 들었잖아.”

“CG가 만능이 아니라서. 해보는 데까지 해볼게.”


한편으로 맞는 말이긴 했다.

최선을 다해 보고 안 될 때, 그때 포기해도 늦지 않다.

다만 하용 범위 안에서.

류지호로서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이 한 커트만 촬영하니까 나도 욕심을 부리는 거야. 여섯 테이크 안에 OK를 뽑아내면 되는 거잖아. 우리 팀이 더 분발하면 한 테이크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영화 도입부에서 이 한 커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다음 촬영부터는 네 충고대로 할 테니까, 오늘은 맡겨 둬.”

“알겠어.”


촬영현장에서 연습이란 없다.

프로들이 일하는 현장에서는 프로답게 움직여야 한다.

만약 안재민이 이러저런 시도를 해보고 싶다라고 했다면 류지호는 당장에 그의 노력을 단념시키고 프리단계에서 합의한 대로 촬영을 빨리 진행했을 터.

우왕좌왕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내버려 뒀다.


“참나... 미국에서 일할 때는 칼 같이 할 것만 해서 답답하더니, 충무로 와서는 다들 너무 의욕이 넘쳐서 난감하네.”


할리우드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이 뛰어다니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만약 뛰거나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주로 감독이다.

그날그날 타임 테이블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콩 볶듯 이리저리 튈 이유가 없다.

반면에 충무로에서는 너도나도 뛰어다니고 몹시 분주하다.

할리우드는 공정이 표준화된 공장에 투입된 숙련공들이 일하는 것 같다면, 충무로 스태프들은 전쟁터에 나온 전사들 같았다.

한 쇼트 한 쇼트에 목숨을 건 전사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가시죠!”


칙.


- 소리 안 질러도 잘 들립니다. 가능하면 무전기에 대고 부드럽게 말씀해 주세요.


킥킥.


몇몇 스태프가 웃었다.

의욕 넘치는 특효팀장과 적당히 하라고 말리는 감독.

충무로 영화현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차라리 그 반대가 되어야 자연스러운 것이 한국영화 촬영장이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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