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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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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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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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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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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복수의 꽃. (9)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스태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커리어가 화려해야 돼요. 난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물론 모두가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고 해도 디렉터들은 함께 작업하는 배우·스태프들로부터 기본적으로 존중을 받죠.”

“아카데미상을 받았는데 존경을 못 받아?”

“감독으로 받은 게 아니라 제작자로 받은 상이잖아요. 냉정하게 말해, 스태프들이 일할 때 좋아하는 감독일지는 몰라도 존경 받는 감독은 아직은 아니에요.”

“할리우드에서 일 할 때도 스태프 이름 다 외워?”

“크레디트에 이름 올리는 친구들은 가능하면 이름을 불러주려고 노력하죠. <Remo : The Destroyer> 정도 사이즈만 되어도 솔직히 그렇게 못 해요. 그때그때 촬영마다 들어왔다 나가는 스태프들이 하도 많아서.”


박건호 대표가 조용히 소주잔을 들었다.

류지호가 얼른 그의 잔을 들어 부딪쳤다.


“누군가 감독님이 설렁설렁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하더군요.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현장 나와서 이것도 해볼까 저것도 해볼까 고민하는 게 싫어요.”

“단편영화 찍을 때부터 그러더만. 지독하게 준비해서 칼 같이 찍는 스타일.”


김영복의 말에 김영찬 등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류지호가 말을 이었다.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이 촬영 나가서 무엇을 찍어야 하고 무엇을 얻어야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야 하죠. 만약 촬영장에서 약간이라도 헤매다가 일정을 초과하기라도 하면 당장 스튜디오 임원이 달려와요. 스튜디오가 볼 때 감독이 아니다 싶으면 현장에서 곧바로 자격을 박탈해 버려요. 그럼 감독은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죠.”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 트라이-스텔라에서도 그렇게 해?”

“80년대 까지는 그런 일이 자주 벌어졌다는데, 요새는 자주 있지는 않더라고요. 감독 측에서 계약서를 무지하게 꼼꼼하게 쓰거든요. 중간에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 별의 별 조항을 만들어서 스튜디오와 협상을 벌이죠. 할리우드에서는 재주는 창작자와 제작자가 부리고 돈은 변호사가 챙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뭐.... 말 다했죠.”


김영찬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에서 잘 나간다는 거야 비리비리하다는 거야?”

“비즈니스로는 잘 나가죠. 메이저 스튜디오 오너이니까. 오스카 수상자이기도 하고. 하지만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감독으로 A-List에는 못 껴요.”


류지호는 할리우드에 대해 물어올 때마다 비교적 상세히 현실을 말해주곤 했다.

할리우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게 하는 말 대신 냉혹한 현실을 주로 들려줬다.

헌데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모양이다.

몸값으로 명확하게 대접이 달라지는 자본주의 할리우드의 현실을 이야기하면 흘려듣다가도 흥미진진한 무용담 같은 일화를 들려주면 귀담아 듣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자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리우드 근처에도 못 가볼 것이라 단정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할리우드는 세계영화시장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행운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할 기회를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 인종차별, 극단적 부익부 빈익빈, 스튜디오의 간섭, 엄청난 물가 등을 생각했을 때, 한국에서 영화를 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당장은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암튼 나는 설렁설렁 찍고 있지 않으니까, 여러분이 안달복달할 필요 없어요.”


감독이 그렇다는데 더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프리프로덕션을 제대로 해 놓으면 감독에게 프로덕션은 쉽다.

‘액션’ ‘컷’ ‘OK or NG' 단 세 개의 의사결정만 하면 되니까.

특히나 류지호의 경우는 전작이 <Remo : The Destroyer>였다.

그에 비하면 <복수의 꽃> 정도 영화는 땅 짚고 헤엄치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일하기 쉽다는 의미다.

스태프들은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피를 말리고 있지만.


❉ ❉ ❉


대길이 지게를 짊어지고 터덜터덜 숲길을 걷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움막에서 아들 차돌이의 녹두장군 노래가 들려온다.

움막으로 돌아온 대길을 월공 스님이 맞이한다.

월공은 대길처럼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한 전적이 있는 인사다.

동학농민전쟁에는 불교 승려들도 많이 참여했다.

동학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서포(徐布)의 지도자 서장옥이 불교 승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월공 스님은 대길의 아들 차돌이에게 개벽과 평등에 대해 설파한다.

그것이 못마땅한 대길의 처는 허황된 소리라며 세상이 동학도로 가득하면 세상이 뒤집어지냐고 쏘아붙인다.

대길은 무심하게 지게를 한편에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 옷을 탁탁 털 뿐.

대길의 처가 얼른 바가지에 시원한 냉수를 퍼온다.

냉수를 마신 대길은 월공과 시국을 논한다.

대길은 화전민이 흩어져 사는 지리산 골짜기 근방에서 가장 유식한 상민이다.

동학운동이 실패하고 우울한 하루하루를 지내는 월공의 입장에서 이따금 대길의 움막으로 내려와 시국담이라도 나눠야 답답한 심사를 다독일 수 있다.


[기찰이 서릿발 같글래 알아본게 전주고, 정읍이고, 줄포고 색시탈 살변 땀시 흉흉혀. 대길이 자네 고향서 총각대방하던 칠성이라고 있었제? 죽은 자 중에 그 놈도 끼어있다등만.]


연쇄살인이 가리키는 것은 명확했다.

그날...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그날에 함께 했던 자들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다.

언젠가 그 복수자가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날지도 모른다.

음울한 대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동요하는 것 같다.


[민초를 왜 민초라고 하는가. 잡초 같이 밟아도 싹을 틔워 살아남는 것이 민초다.]


월공은 대의를 들먹이며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고 삐뚤어진 도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하지만 대길은 부정적이다.

고부에서 들고 일어났을 때 전주성까지 점령했지만 물러났다.

끝내 나라를 뒤엎은 일은 없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그 모두가 평정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동학도가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는 조정이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제 백성을 학살했다.

대길은 월공에게 어차피 흘러갈 물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과거의 과오도 과오려니와 모든 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지는 대길이다.

월공은 패배감에 찌든 대길이 남일 같지 않다.

지난 갑오년의 난리에서 살아남은 이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한울님을 모시며 자연의 조화를 따르며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나니. 지극한 기운이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크게 내려주시옵소서)


우울함에 월공은 그저 동학주문 13자를 외울 뿐.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수고는 감독님이 하셨죠. 저야 머리만 빡빡 밀고 날로 먹는 것 같아서.....”

“그 결정이 쉽지 않잖아요.”


<복수의 꽃>에는 기존의 탤런트 출신뿐만 아니라, 박인철처럼 연극에서 잔뼈가 굵지만 TV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인지도가 없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다.

연기력이 검증 된 배우들이 투입되어 극의 활력과 긴장감을 끌어올려주고 있다.

류지호는 연화와 스쳐지나가는 단역 배우까지 이전 삶에서 활발하게 TV·영화를 넘나들며 활약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향후 한국영화를 종횡무진하게 될 배우들의 신인 시절 모습을 <복수의 꽃>에서 볼 수가 있을 터.


‘배우 크레디트만으로 이 영화가 전설이 될지도 모르겠네.’


연극만 하다가 영화 단역을 처음 하는 60~70년대 출생 배우들이 꽤 많다.

주머니의 송곳은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10년 후가 되면 한국영화 배우풀의 허리를 튼튼하게 받쳐줄 이들이다.


❉ ❉ ❉


12주 간 진행된 <복수의 꽃> 프로덕션도 이제 6회차 촬영만 남겨 두었다.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일요일, 이동일, 일주 일 간 브레이크 타임 등을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촬영했다.

좋게 말하면 깔끔한 프로덕션이었고, 나쁘게 보면 감독으로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스템에 너무 얽매인다고 볼 수도 있다.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들 입장에서는 자신감으로 비춰졌다.

류지호와 전쟁씬을 촬영할 산악 세트장을 둘러보던 김영복이 입을 열었다.


“로케이션 촬영도 많고, Eye-MAX라는 생소한 시스템을 운용하고, 조명은 또 어찌나 많이 쓰는지.”

“그래서 때깔이 좋잖아.”

“진짜 되긴 되는 구나?”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최소 5회 차는 오버할 거라 예상했다.

다들 그런 각오를 하고 프로덕션에 임했다.

헌데, 마지막 일 주일의 촬영을 남겨둔 시점에서 돌아보니, 일정대로 무사히 촬영을 진행했다.


“안 찍을 건 찍지 않았고, 찍어야 할 것들은 무슨 수를 다 써서라도 찍었으니까.”


류지호는 아무리 많이 찍어도 7 take 이상 촬영하는 법이 없었다.

도저히 하루 촬영 분량을 소화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서울에서 ARiCH 535 카메라 두 대를 공수해 와서 멀티 카메라를 돌렸다.

어떻게든 일정에 맞추는 중에도 반드시 새벽에 찍어야 할 몇 장면에서는 스태프에게 오버 차지를 지불하면서까지 촬영했고, 석양 씬 역시 Eye-MAX 팀을 따로 운용해 몇 날 며칠을 기다려가며 원하는 그림을 뽑아냈다.


“요새 유행하는 현장편집으로 확인도 안 해보고 찍었는데, 불안하지는 않아?”

“불안할 게 뭐있어. 스토리보드 이상의 소스를 찍었구만.”

“그래도 나는 좀 더 다양한 앵글로 찍어둘 것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어차피 편집에서 다 날릴 거 뭐 하러 찍어? 시간과 돈 낭비야.”

“그런 게 아니지. 쇼트가 많으면 편집하기도 좋잖아.”

“액션영화가 아니잖아. 영화 템포도 느린 편이고.”

“액션영화지 무슨...!”

“액션이 많은 드라마라고 해둬.”

“너무 단독을 안 따놓은 거 아냐? 난 좀 불안 한데.”

“대화씬만 나오면 얼굴, 얼굴, OS, OS 그렇게 붙이는 거 별로야. 촌스러워.”


영화 잘 찍는지 보려면 대화씬 보면 된다.

잘한 편집 역시 대화씬을 보면 답이 나온다.


“요즘 누가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제작비 20억 이상 들어갔다는 한국 영화 절반은 그렇던데?”

“너 잘났다, 자식아!”

“잘난 척 하는 게 아니야. 근사한 장소를 빌려서 촬영하면서 왜 주인공 얼굴만 주구장창 찍는지...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서 세트를 지어놓고 왜 인물들 얼굴만 촬영하고 마는지.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연속극 화면을 보려고 관객이 6천원을 내고 극장에 오는 게 아닌데 말이야.”

“감독이 편집감이 없으니까. 쉽잖아. 인물 위주로 콘티 짜는 거. 내가 누구라고 말은 못하는데, 기본도 안 된 주제에 폼은 이빠이 잡는 감독도 꽤 있어.”

“형이 이름 안대도 나도 알아.”

“충무로 곳곳에 스파이 심어놨냐?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 미국에 있는 놈이.”

“영화 보면 아는 걸 뭘 스파이를 심어.”

“너 잘 났다.”

“형님... 잘 난 사람한테 잘났다고 하는 건 욕이 아니거든요.”

“욕한 거야.”

“다음 영화에서는 다양한 앵글로 실컷 촬영하게 해드릴게. 기대하셔.”

“<Help Me, Please>처럼 영화 전체를 핸드헬드로 가자고 하지는 않겠지?”

“해볼까? 사실감을 극대화시켜 봐?”

“<세7븐>처럼 찍어. 수묵화니 한국화니 이제 그만 찾고 쫌!”


영화감독 성향에서 스타일리스트와 비주얼리스트가 있다.

같은 말 같지만, 조금 다르다.

연출에 힘을 좀 더 싣는다면 스타일리스트, 연출보다는 미학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 쪽이 비주얼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두 성향 모두 장면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의미를 담든 미학을 담든.

장면마다 촘촘하게 뭔가를 담아내기에 때론 그 숨 막힐 것 같은 불편함으로 인해 일반 관객에게 진입장벽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다만 화려하게 치장만 할 줄 아는 감독에게 그 같은 칭호를 붙이지는 않는다는 점.

류지호는 미국 영화평단에서 비주얼리스트라고 불리곤 한다.

본인은 스타일리스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흙만 살짝 덮어놓지 마.”

“깃발을 너무 떨어뜨려 놓지 말고!”


안재민이 특효팀과 함께 촬영지를 돌아다니며 폭약을 묻을 곳들을 점검하고 있고, 미술팀은 시체 대용으로 쓰일 더미들이 놓일 위치에 깃발을 꽂아 표시를 남기고 있다.

<복수의 꽃>의 도입부 ‘우금치 전투’ 촬영지는 울진군 근처 야산이다.

올 4월에 일주일 동안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역이다.

당시 산불로 인해 고성군과 삼척시, 동해시, 강릉시,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 산림이 불타버렸다.

발화된 지점이 고성이어서 고성산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동해안 전역으로 번졌기에 동해안 산불이라고도 불렀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서 발화하여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까지 산림 2만 3천 헥타르(ha)를 태우고, 850여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아직까지도 산불의 여파가 상당한 것 같지?”


불과 6개여 월 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갔던 곳이다.

그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산불로 인해 나무들이 모두 연소된 곳으로, 치열한 전투로 인해 땅이 움푹 패고 나무들도 불에 타버린 1894년 우금치 전투 당시의 정서를 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재민들에게는 큰 상처일 텐데 우리는 여기서 영화를 찍고 있네.”

“가온그룹에서 이재민에게 도움 되라고 많은 지원을 했다며? 그럼 됐지 뭐.”

“엄청 빡세긴 할 거야.”

“전쟁씬은 항상 어렵지. <남부군> 때 산속에서 전쟁씬 찍어보고 진짜 오랜만에 산에 들어와서 전쟁씬 해보는 것 같아.”

“그때도 겨울이었나?”

“진짜 고생 많이 했어.”

“안전사고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촬영해.”


로케이션 장소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실제 산을 세트로 활용하기 때문에 제작진의 고생이 예견된다는 점.

제대로 서있기 조차 어려운 경사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피로감을 더할 테고, 높은 경사 때문에 장비로 촬영기자재들을 이동할 수 없어 제작진들이 손수 지게를 지고 올려야 하는 어려움이 따를 터.

모두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량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을 내버리고 싶지만...’


류지호는 장비와 사람들의 이동을 위해 카메라 화각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산 뒤쪽에 길을 내버릴 생각을 해보았다.

이 지역에서 영화 촬영하는 것도 강원도와 군 당국 양쪽에서 허가를 받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했다.

길을 내겠다고 하면 군당국에서 허락해줄 리가 없다.

사전 준비를 하고 있는 현재도 21사단 관계자가 나와 자문을 빙자한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캐틀링과 스나이더 소총에 대해 엄격한 관리를 주문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군당국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촬영을 해본 류지호로서는 한국 군당국의 처사가 아쉽고 답답했다.

류지호는 그저 사고 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할 뿐.


❉ ❉ ❉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제작비를 모두 쏟아 부었다.

슈퍼 크레인, 테크노 크레인, 150m 달리 레일, 수십 개의 대용량 HMI 조명, 세 대의 발전차, 각종 특수효과 장치들, 총기·화포류, 죽창·활·낫·칼, 충무로에서 불러 모은 100여 명의 스턴트맨들, 서울예술에 의뢰해 강원도에서 모집한 보조출연자들, 일본과 조선의 군복, 시대의상을 실은 의상 트럭, 십여 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등.

그 외에 두 대의 앰뷸런스와 다수의 의료진이 현장에 상주했고,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수 있는 몽골텐트가 촬영지 산등성 아래 수 십 채가 세워졌다.

게다가 Eye-MAX MKⅡ 카메라가 한 대 더 캐나다에서 공수됐다.

하나는 Dolly 위에, 다른 하나는 테크노 크레인에 달려 있다.

Dolly 위에 거치된 Eye-MAX 카메라에 중년의 백인 남자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렉이 직접 카메라를 운용하려고요?

“디렉터가 허락만 해준다면.”

“DP와 의논해보고 알려줄게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네.”


류지호와 대화를 나눈 백인남자는 조지 맥길리브레이(George MacGillivray)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Eye-MAX 영화 전문감독으로도 유명했다.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 노미네이트 감독이기도 하고.

1963년 친구와 함께 Mac&Freeman Films를 설립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오다가 1976년 <To Fly>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Eye-MAX 다큐멘터리 작업을 주로 해오고 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대원들을 촬영한 1996년작 <에베레스트>는 가장 큰 흥행작이자 대표작이다.

그의 Eye-MAX영화 데뷔작인 <To Fly>는 1987년 <창공을 날아라>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의 63빌딩 Eye-MAX관에서 뒤늦게 상영되기도 했다.

참고로 <창공을 날아라>는 한국에서 최초로 상영된 Eye-MAX 영화였다.

<To Fly>는 열기구를 비롯하여 행글라이딩, 비행기, 우주항공선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탐색이었다.

이후로 동굴의 절경을 담은 <동굴 대탐험>, 각종 운동선수들의 육체를 담은 <톱 스피드> 등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가장 성공적인 Eye-MAX 영화감독이자, 가장 유명한 Eye-MAX 영화감독이다.

상업영화계에서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잘 모르지만.

그런 Eye-MAX의 대가가 류지호의 요청도 없었음에도 자비를 들여 한국을 방문했다.

상영영화에서 Eye-MAX가 사용되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물론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차기작 투자를 받기 위해서다.


“144일간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를 종단할 예정이네. 나일강 유역의 문화와 자연 그리고 풍속을 보여주는 Eye-MAX 영화가 될 거야.”


조지 멕길리브레이가 피칭에서 한 말이다.

그 외에도 고대 그리스, 팔라우 공화국 주변 해양 탐사 등 여러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고 어필했다.

그는 환경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자연보호와 공해에 대한 경각심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또 아이들에게 해양사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고 싶다며 Eye-MAX 다큐멘터리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류지호는 흔쾌히 투자를 결정했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로 40분 러닝타임의 근사한 Eye-MAX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다.

류지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Eye-MAX 영화는 언제나 부족하니까.


“조지가 Eye-MAX 카메라를 잡고 싶다고 하는데, 형이 양보해 줄 수 있어?”


김영복이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조지 맥길리브레이를 힐끗 보고 되물었다.


“저 감독 유명한 사람이야?”

“메인 카메라 잡는 데이비드와 함께 쭉 작업하고 있는 감독인데, Eye-MAX 다큐 쪽에서는 독보적이야.”

“다큐만 해?”

“응.”

“다큐 감독이니까 촬영은 할 줄 알 테고....”

“짬이 30년이 넘으니까.”

“B팀 애들 붙여주면 되는 거냐?”

“응. 카메라 포지션과 앵글은 형이 잡아줘.”

“오케이. 근데 파나플렉스는? 진짜 안돌려도 되겠어?”

“이 시퀀스 전체를 오리지널 Eye-MAX로만 담고 싶어.”

“그냥 예비로 내가 파나플렉스 돌릴 게. 네가 쓰든 안 쓰든.”

“괜찮겠어?”


<복수의 꽃> 촬영현장은 할리우드식으로 돌아갔다.

촬영준비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것은 DP 김영복이 했다.

류지호는 배우들과 미술적인 부분에 대해 디렉션을 주는데 집중했다.


“핸드헬드 몇 커트만 따 놓자. 그거 안 찍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생각보다 촬영이 빡빡해.”

“안 기사에게 말해 뒀어. 폭약 다 쓰지 말고 남겨두라고.”

“일단 Eye-MAX 촬영 위주로 진행하고, 혹시 가능하다면 찍어보자.”

“오케이!”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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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면 됩니다. +6 23.03.04 3,705 128 27쪽
436 복수의 꽃. (10) +8 23.03.03 3,397 127 21쪽
» 복수의 꽃. (9) +6 23.03.02 3,268 127 21쪽
434 복수의 꽃. (8) +4 23.03.01 3,262 120 21쪽
433 복수의 꽃. (7) +3 23.02.28 3,331 119 22쪽
432 복수의 꽃. (6) +4 23.02.27 3,377 115 21쪽
431 복수의 꽃. (5) +4 23.02.25 3,456 128 24쪽
430 복수의 꽃. (4) +5 23.02.24 3,384 128 25쪽
429 복수의 꽃. (3) +11 23.02.23 3,468 115 26쪽
428 복수의 꽃. (2) +2 23.02.22 3,558 128 24쪽
427 복수의 꽃. (1) +5 23.02.21 3,677 123 20쪽
426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4) +6 23.02.20 3,647 126 25쪽
425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3) +5 23.02.18 3,702 135 25쪽
424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6 23.02.17 3,654 134 25쪽
423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1) +7 23.02.16 3,746 13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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