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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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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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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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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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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복수의 꽃.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관객들에게 단편영화라고 하면 일단 어렵고 실험적이라는 선입견이 강하잖아.”


박진욱 감독이 말을 받았다.


“단편영화제에 관객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요.”

“여기 박 감독이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고 하더군.”


신인감독의 등용문.

감독 지망생들판 슈퍼스타 코리아.

바로 미장센 쇼트필름 페스티벌이다.


“장편영화처럼 장르 개념을 도입하면 관객이 쉽게 단편영화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 보려고.”


박진욱 감독이 입을 열었다.


“단편영화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


이영승 감독이 다시 말을 받았다.


“한 발은 익숙한 장르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면서 다른 한 발은 장르의 경계를 넘어 낯선 영토로 나아가려는 영화까지 발굴하자는 의도야.”


류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감독 위주로 영화제를 만드실 생각이라면.... 나는 왜?”


류지호는 이제 막 충무로에서 입봉작품을 찍고 있었다.

감독협회 정회원도 아니다.


“자네는 단편영화 감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잖아.”

“영화제에서 수상 몇 번 해본 것 뿐이죠 뭐.”

“그게 쉽나? 후배 단편감독들에게 귀감이 되어줘야지.”


무슨 귀감씩이나....


“혹시 아네모네 청소년영상제라고 아세요?”

“인천에서 열리는 고등학생 영상제?”

“그걸 확대 개편하면 어떨까요?”

“......?”

“하나부터 열까지 영화제를 만들려면 시간과 돈이 들잖아요. 감독님들 자기 영화 준비하기도 바쁠 텐데.”

“...음.”

“스폰서 구하러 다니는 것도 일이고. 그냥 아네모네 영상제의 이름 바꾸고, 그걸 그대로 인수 받아서 감독님들이 맡아서 하세요. 거기 직원들 그대로 승계해서 서울에 사무실 하나 내고.”

“그걸 류 감독이 마음대로 결정해도 돼?”

“해도 되니까 말씀드리죠. 극장은 G.O.M 강남점이 편하겠어요? 아니면 G.O.M 신촌점에서 영화제를 상영해도 되고요.”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류지호를 쳐다봤다.


“......?”


이제 막 단편영화제의 방향성만 잡힌 상태다.

영화제의 목적과 대략적인 비전을 설명하며 열심히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데 중요한 내용은 듣지도 않고 바로 결정을 내려버리니.


“클레르몽-페랑에 가봤는지 모르지만, 그 영화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집행위원들의 마인드, 단편영화제를 즐기는 시민들, 단편영화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진 감독들. 우리나라는 단편영화가 입봉으로 가는 연습단계, 혹은 자기들끼리 즐기는 하위문화 정도로 인식되고 있잖아요. 영화의 미래는 단편영화라고 하는데.... 안타깝죠.”

“그럼 아네모네 청소년 영상제를 클레르몽-페랑처럼 키우려고 만들었던 거야?”

“그렇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네모네 청소년영상제는 전국의 고등학생들의 비디오 작품들이 출품되고 있다.

주로 전국 고등학교 방송반들의 축제처럼 인식되고 있다.

어느 순간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영상제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영화제 명칭을 뭐라고 하든, 시상 부분에 청소년 섹션만 하나 만들어주면, 스폰서들은 만족할 겁니다.”

“가온에서는 부산과 부천도 지원하고 있지 않나?”

“가온그룹은 따로 매체에 기업광고를 하고 있지 않아요. 광고비를 영화제나 좋은 뜻을 가진 행사, 그밖에 E-스포츠 혹은 아마추어 스포츠 지원에 쓰고 있죠. 단편영화제 여는데 몇 백억씩 필요할 것 같진 않네요.”

“정식으로 영화제 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 찾아가도 되지?”

“올 해 안에 찾아와야 될 걸요. 내년 초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봐야 해서.”

“알겠어.”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나자 박진욱 감독이 입을 열었다.


“혹시 촬영장에 구경 가도 될까요?”

“어떤.....?”

“지금 찍고 있는 <복수의 꽃>.”

“다음 주부터 세트 들어가서 별로 볼 것도 없을 텐데.”

“양수리?”

“다음 주부터 여주의 종합촬영소 백랏에서 촬영하고 11월 중순에 양수리 스튜디오로 넘어갈 예정이에요.”

“Eye-MAX 촬영은 모두 마쳤어요?”

“지금 세컨 유닛이 따로 항공촬영이랑 인서트 찍으러 다니고 있어요.”


12월에 우금치 전투 장면을 재현한 시퀀스를 촬영할 예정이다.

그때 다시 Eye-MAX팀이 합류하기로 했다.

전쟁씬을 촬영할 때 제일 한가한 스태프가 감독이다.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프리비주얼을 제작해두었다.

그에 따라 스태프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리허설이 진행되기 전까지 감독인 류지호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12월에 몹씬을 일주일 정도 촬영할 것 같은데, 그때 오시든가요.”


감독들의 현장 방문을 류지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의 촬영장에 방문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할리우드에서도 류지호는 친분 있는 감독이나 프로듀서의 방문요청을 들어주는 편이다.

그보다 훨씬 현장 통제가 느슨한 충무로에서는 오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올 사람은 오게 되어 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는 네가 얼마나 잘 찍는지 한 번 보자.”


류지호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화 촬영은 할리우드나 충무로나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온갖 장비를 쌓아놓고 촬영한다는 것, 스태프 숫자가 충무로보다 두 배에서 세 배 많다는 것,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칼 같이 진행된다는 것 정도가 다를 뿐.

그것도 스튜디오 영화에서나 그렇다.

저예산영화 촬영장은 충무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하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오시려면 제게 미리 연락 주세요. 12월 중순에 언론사 현장공개가 잡혀있어요.”


최근 충무로 영화현장은 WaW 픽처스의 투자로 인해서 촬영장비가 풍부해졌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 스태프의 숫자만 70명에 이른다.

류지호는 선배 감독들에게 현장 규모를 자랑할 일이 없다.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뽐낼 일도 없다.

언론사 현장공개에 맞춰 감독들이 방문한다면 그걸로 홍보기사가 하나라도 더 나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딴 세상 사람인 것으로 굳어져버린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 ❉ ❉


바쁜 재정비 기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류지호는 촬영팀보다 이틀 앞 서 여주로 내려왔다.

여주에는 <복수의 꽃> 스태프를 모두 수용할 모텔로 마땅치 않았다.

관광도시도 아니라서 호텔도 없었다.

서울에서 종합촬영소를 매일 출퇴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급한 대로 <복수의 꽃> 제작부는 여주와 이천의 펜션 세 곳을 장기 임대했다.

이틀이나 먼저 여주에 내려온 류지호는 남한강변에 인접해 있는 고층빌딩 공사장을 둘러봤다.

전망이 꽤나 좋은 입지를 자랑하는 빌딩이 건설 중이다.

WaW 종합촬영소 개장에 맞춰 가온 호텔 사업부가 건설 중인 4성급 호텔이다.


“남한강이 상수원보호구역일 텐데.....?”


대유(가온)건설 여주 호텔 현장소장이 기합이 바짝 들어 대답했다.


“팔당취수원 상수원보호구역은 158.8㎢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지역은 자연보전지역으로 경기도에서 건설허가를 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수변구역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던가 하는 여러 꼼수들이 동원되었다.


“취·등록세 면제, 수도요금 20% 감면제도를 처음으로 적용받았습니다.”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 지류의 하류라서 가능한 것인지.

경기도와 여주가 가온그룹에 잘 보이려고 한 것인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니 류지호는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객실 수는 어떻게 됩니까?”

“대략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의장님. 가온호텔 여주점은 연면적 11,000평 건축면적 1,500평 객실 200실 규모에 사우나, 휘트니스센터, 리셉션홀 등의 부대시설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준공은 2002년 종합촬영소 개장 전에 마칠 예정입니다.”


가온호텔 여주점은 종합촬영소를 이용하는 영화팀의 숙소로 사용될 예정이다.

독립된 별관은 WaW 픽처스와 계약한 작가·감독들이 묵으며 시나리오를 구상하거나 집필할 공간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양수리 종합촬영소처럼 촬영단지 내에 기숙사형 숙소를 짓자는 의견도 나왔다.

류지호가 단번에 기각했다.

숙소와 일터를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반 관광객과 섞이면 곤란할 텐데....”

“배우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분리된 엘리베이터와 동선을 보장해 줄 예정입니다.”


류지호가 고개를 돌리자, 50대에 반백의 머리, 안경을 쓴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

WaW 종합촬영소장 정인국이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곳 호텔에 투숙하게 되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겠지만, 경기도 영상위원회와 숙소 비용지원을 논의 중에 있습니다.”


WaW 종합촬영소가 연중무휴로 돌아가게 되고, 그로 인해 호텔 로비나 커피숍에서 영화배우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게 된다면 영화배우들을 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호텔 투숙객도 늘어나게 되고, 할리우드식 종합촬영소 투어 프로그램까지 진행하게 되면 관광객도 찾아올 수도 있다.

컬버시티나 베벌리힐스처럼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


“세종대왕릉 및 효종대왕릉과 명성황후생가 등 문화유적지, 남한강 수상레저와 캠핑장 등을 연계한 관광레저 프로그램도 개발할 예정입니다.”

“호텔&리조트 사업부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매출을 늘려보겠다고 무리하게 관광객을 받아서 당초 취지인 제작진 숙소로서의 기능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겁니다.”

“예.”


종합촬영소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되면 객실 200개는 금방 채울 수 있다.

충무로 영화인들의 사랑방이 되면서 나쁜 점이 나올 터.

그럼에도 잘 먹고 잘 쉬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는 법이다.

영화팀 조수들이 싸구려 여관 한 방에서 모두가 함께 취침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류지호다.

따라서 적자로 허덕이는 여주 호텔의 부정적인 미래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 ✻


다음날.

오전부터 스태프들이 속속 도착해 숙소로 임대한 펜션에 짐을 풀었다.

헤드스태프들은 도착하자마자 종합촬영소 야외 세트 구역으로 향했다.

1910년대 군산 거리를 재현해 놓은 야외 세트에서 류지호를 만났다.

몇 년은 끄떡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들어놓은 야외 세트다.

건설비용은 WaW 종합촬영소가 전부 부담했다.

<복수의 꽃>은 사용료만 지불하기로 했다.

류지호가 WaW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지 않았다면 <복수의 꽃> 제작비는 100억 원을 훌쩍 넘었을지도 몰랐다.

군산 거리 야외 세트 건설비용만 수억 원이 소요되었으니까.


“태풍과 장마에 손상된 곳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일부러 비바람을 맞춘 곳도 있습니다.”

“시간을 묻히려 했군요?”

“아무리 미술로 오래된 느낌을 주려고 해도 자연 현상만한 미술은 없으니까요.”


프로덕션 디자인 파트는 크게 공간 디자인, 소품, 데커레이션으로 나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영화의 콘셉트를 각 파트와 공유하고 조율해나가는 일을 한다.

미술 파트를 대표하며 촬영, 조명, 의상, 분장의 책임자들과 의견을 나눈다.

아트 디렉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할리우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처음 영화 미술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이래로 영화미술을 책임지는 스태프를 프로덕션 디자이너라고 지칭하고 있다.

할리우드는 프로덕션 중이더라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거나 분량만큼 해내지 못하면 가차 없이 해고된다.

심지어 영화감독조차 현장에서 메가폰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그런 와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시작부터 끝까지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아트 디렉터 윌리엄 멘지스였다.

제작자였던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성공한 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콘셉트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한 윌리엄의 역할이 컸다며 그의 공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다가 프로덕션 디자이너라고 부르게 됐다.

그것이 프로덕션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윤민구가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품 몇 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하게 준비를 못했습니다. 감독님.”


윤민구는 자존심이 무척 상해있었다.

근사한 야외 세트를 만들었는데, 그걸 살려줄 디테일한 소품을 채워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수리 종합촬영소 소품창고와 인사동을 뒤지고, 지상파 방송사 소품실까지 모두 돌아다녀봤다.

시대 고증에 맞는 소품을 모두 구할 수 없었다.

필요한 소품을 사전 제작해야 했지만, 예산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교감한 내용이잖아요. 윤 미감과 내 성에 차는 미술을 하려고 했다면 거의 다 소품을 제작해야 했을 겁니다. 지금의 제작비로는 감당이 안 되잖아요.”


감독이 괜찮다면 된 것이다.

더 이상 왈가왈부해봐야 소모적인 대화일 뿐.


“인테리어와 영화 미술은 마감이 중요하죠. 지금도 좋네요.”


세트 곳곳에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났다.

류지호로서는 낡고 오래된 건물들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미술팀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순 없다.

대여섯 명의 미술팀이 대규모 야외 세트에 세월을 입히기 위해 했을 수고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눈물이 앞을 가리겠지만, 어설픈 치하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트를 잘 써먹어주는 것이 그들의 노고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 ✻ ✻


북적북적.

왁자지껄.


보조출연자들이 서울에서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여주로 내려왔다.

관광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서울예술 보조출연자들이 낡은 시대극 복장으로 환복하고 수염을 붙이고,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WaW 종합촬영소 일제강점기 거리 세트에서는 군중씬이 많았다.

제작진 중에서 가장 먼저 아침 식사를 마친 촬영·조명팀이 전기선을 깔고, 각종 장비를 군산 거리에 늘어놓았다.

미술팀은 자전거, 지게 등 각종 대도구를 가져다 놓거나 소도구들의 디테일을 손봤다.

한쪽에는 전날 옮겨놓은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일본인 지주들이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배편으로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쌓아놓았던 걸 재현하는 소품들이다.

조감독 이동화는 연출부들을 움직여 보조출연자들의 위치와 동선을 설계했다.

분주한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류지호와 김영복은 군산거리 세트에서 첫 날 촬영할 쇼트들을 확인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오전 내내 보조출연자의 포지션을 잡고, 카메라 워킹을 점검했다.


“감독님! 점심 먹기 전에 한 테이크 사부작 가보시죠.”

“가능하겠어?”

“슛 테스트 한 번 봐 주세요”


조감독 이동화가 실제 촬영을 방불케 하는 리허설을 진행했다.


“한 번 카메라 돌려봐도 되겠는데?”


김영복 촬영감독이 좋다고 하면 고민하거나 망설일 필요 없다.


“레디....”


촬영 스탠바이 콜은 조감독 이동화가 한다.

감독인 류지호는 촬영개시와 종료 사인을 낸다.

촬영개시는 조감독, DP도 할 수 있다.

촬영을 끊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영역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액션!”


군산 저잣거리로 만억이 거지꼴로 들어선다.

죽음의 사신 연화로부터 도망쳐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친 끝에 겨우 군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

만억은 곧장 다나카 상회로 찾아가 갑수를 찾는다.

곡물상인 다나카가 본국에서 데리고 온 사무라이들에 의해 문전박대 당한다.

사무라이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 출신 잔당들이다.

조선침략을 밑바닥부터 다지기 위해 파견된 정치 무뢰배들이다.


“컷!”

“곧바로 연화 커트 가겠습니다!”


뒤늦게 만억을 추격해 군산으로 들어 온 연화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만억에게 수중에 있던 엽전을 모두 빼앗겨 무일푼인 상태다.

만억이 오로지 갑수를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저잣거리를 달려갔다면, 연화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때문에 만억을 찍을 때와 달리 연화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세트장에 펼쳐놓은 풍경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로인해 보조출연자들의 움직임을 좀 더 섬세하게 가져가야 했다.


“컷!”


군산 야외 세트에서의 장면들은 Eye-MAX와 파나플렉스 슈퍼 35mm를 섞어서 촬영했다.

연화와 만억이 군산 시내를 활보하는 장면들은 Eye-MAX로 촬영한 1.44:1 화면비로, 그들이 다나카 상회 실내로 들어가는 순간 DMR 1.9:1 화면으로 변하게 된다.

Eye-MAX 상영관에서 보면 야외 씬은 1.44:1 화면비로, 실내 씬은 1.9:1 화면비로 보이게 된다.

1.9:1 화면비에서 레터박스를 넣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일반 상영관에서는 모든 장면이 시네마스코프로 펼쳐지기에 상관은 없지만.

두 포맷 모두 시원시원한 화면을 선사하는 것은 똑같다.

화면비가 다르다고 미학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 ❉ ❉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권력자들의 수탈을 피해 도망친 농민, 개항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한 영세상인, 승려, 몰락한 양반, 전직 군인, 노비, 민란에 가담한 반란자, 동학도 등이 숨어든 피난처다.

대부분은 화적으로 살아간다.

깊은 산중에 숨어살며 삼남지역에서 부호나 관청을 습격해 재물을 탈취해 살고 있다.

일부는 산맥의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군다.

화전민 마을에서도 좀 더 외따로 떨어진 숲 안.

움막 한 채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다.

관군이 삼남지방에서 동학도 색출이란 미명 아래 온갖 악행을 일삼자 대길(김영찬)이 가족의 안전을 위해 피난처로 삼은 곳이 지리산의 이곳 움막이다.

세간 살림이라고 볼 수 없는 초라한 잡동사니들이 움막을 채우고 있다.

서른 중반 나이, 얼굴에 옅은 곰보 자국이 있는 아낙(이서영) 그리고 아들로 보이는 여섯 살 사내아이 차돌이가 낡고 헤진 이불을 덥고 잠들어 있다.


꽉.


대길의 처(妻)는 제 남편이 지난 난리 때처럼 말도 없이 사라질까봐 남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잠들어 있다.

대길은 손질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한창 나이인 30대 후반에 걸맞지 않게 어딘지 음울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컷!”


류지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카메라 셋업을 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영복 촬영감독이 현장편집본을 확인하고 물었다.


“감독님, 와이드렌즈 한 번도 안 써도 되겠어?”

“화각이 답답하더라도 표준렌즈 위주로 가자구요.”

“망원은?”

“대길의 움막에서 망원은 안 써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관용적으로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는 거의 예외가 없다 싶을 정도로 망원렌즈를 쓴다.

주로 얼굴 클로즈업(C.U)에서 자주 쓰일 수밖에 없다.

간혹 바스트 쇼트(B.S)에서도 종종 쓰인다.

반면에 광각렌즈는 좁은 곳에서 인물과 공간을 다 보여주고 싶을 때, 소실점을 만들어 공간의 깊이감을 살리고 싶을 때 그리고 기괴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주로 쓰인다.

좁은 움막 안 장면에서 광각렌즈로 공간감을 보여줄 법도 하건만.

류지호는 표준렌즈만 고집했다.

영상언어 혹은 영상문법이란 것은 간단하다.

인간의 말과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영상에서 말과 감정에 집중할 때 주로 쓰이는 얼굴 클로즈업(C.U), 바스트 쇼트(B.S)는 인물의 주관적인 면을 보여주는 쇼트다.

감독이 관객에게 그 인물의 말과 감정을 통해 그의 이성적인 부분과 심정적인 상태를 들여다보도록 의도한 것이다.

그러한 맥락을 기준으로 화면 사이즈를 구분하자면 풀 쇼트(F.S)부터 미디움 쇼트(M.S)까지는 동작에, 미디움 쇼트(M.S)부터 바스트 쇼트(B.S), 얼굴 클로즈업(C.U)까지는 의식에 초점이 맞춰져서 연출된 것이다.

즉 얼굴 클로즈업(C.U)으로 갈수록 주관적인 쇼트로, 풀 쇼트(F.S)로 갈수록 객관적인 쇼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새로운 화법,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들고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다.

보는 사람들에게 관습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당연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든,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하는 사람이든 관습을 이루고 있는 규범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한다.

또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즉 영화의 기본 테크닉과 이론을 모른다거나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관객에게 가닿을 수가 없다.

류지호는 쇼트 하나를 구성하더라도 인물의 위치, 인물의 크기, 사이즈, 시점, 인물들 간의 거리, 심도까지 꼼꼼하게 고민하고 계산해서 구성한다.

그 모든 것이 미장센에 포함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방금 촬영을 끝낸 장면은 밤에 대길이 잠을 못 이루는 단순한 내용이다.

그 단순한 내용을 몇 개의 표준렌즈를 이용해서 음울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범한 씬일 뿐인데 고구마를 백 개쯤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곧이어 뭔가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조명과 배우의 연기까지 더해져서 밀도 있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좋은 영화는 처음 한 번 볼 때도 재밌지만, 두 번 세 번 봐도 재밌다.

왜냐면 볼수록 안 보이던 것 혹은 새로운 것들이 자꾸만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감독들은 한 쇼트도 허투루 찍는 법이 없다.

그저 예쁘고 화려하기만 한 쇼트를 나열하기만 하는 감독도 많긴 하지만.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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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곧.... 필름은 죽습니다. (1) +6 23.03.20 3,417 109 25쪽
449 내가 잘되자고 하는 겁니다! (2) +4 23.03.18 3,511 120 25쪽
448 내가 잘되자고 하는 겁니다! (1) +5 23.03.17 3,502 120 27쪽
447 혼자 늙어 죽는 수가 있거든! +6 23.03.16 3,460 124 25쪽
446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3) +3 23.03.15 3,410 110 23쪽
445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2) +4 23.03.14 3,472 108 21쪽
444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1) +9 23.03.13 3,616 118 20쪽
443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3) +6 23.03.11 3,674 128 26쪽
442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2) +5 23.03.10 3,623 121 26쪽
441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1) +7 23.03.09 3,647 118 23쪽
440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3) +4 23.03.08 3,578 123 24쪽
439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2) +14 23.03.07 3,579 128 21쪽
438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1) +3 23.03.06 3,585 117 21쪽
437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면 됩니다. +6 23.03.04 3,704 128 27쪽
436 복수의 꽃. (10) +8 23.03.03 3,397 127 21쪽
435 복수의 꽃. (9) +6 23.03.02 3,267 127 21쪽
434 복수의 꽃. (8) +4 23.03.01 3,261 120 21쪽
» 복수의 꽃. (7) +3 23.02.28 3,331 119 22쪽
432 복수의 꽃. (6) +4 23.02.27 3,376 115 21쪽
431 복수의 꽃. (5) +4 23.02.25 3,456 128 24쪽
430 복수의 꽃. (4) +5 23.02.24 3,383 128 25쪽
429 복수의 꽃. (3) +11 23.02.23 3,467 115 26쪽
428 복수의 꽃. (2) +2 23.02.22 3,557 128 24쪽
427 복수의 꽃. (1) +5 23.02.21 3,676 123 20쪽
426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4) +6 23.02.20 3,647 126 25쪽
425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3) +5 23.02.18 3,701 135 25쪽
424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6 23.02.17 3,654 134 25쪽
423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1) +7 23.02.16 3,745 13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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