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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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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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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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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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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복수의 꽃. (10)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틀 동안 리허설만 했다.

열악한 촬영여건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추웠다.

사소한 것까지 제작진에게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촬영은 하지 않고 리허설만 진행하자 짜증이 폭발한 보조출연자도 나왔다.


“X발! 촬영은 안 하고 똥개 훈련만 시켜!”

“뭐 하자는 수작이야!”

“나 안 해. 아니 못 해!”


촬영현장에서 이탈하는 보조출연자까지 나왔다.

전하영 피디와 김재욱 실장은 보조출연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일당을 약간 올려주는 당근을 내밀었다.

보조출연자들의 이탈로 촬영이 막 시작될 즈음에는 최소한의 인원수에도 모자랐다.

스턴트맨들이 자신들의 지인들을 급하게 불러 모으고, 김재욱이 강릉과 춘천으로 가서 대학 운동선수들을 섭외해 오기도 했다.

그래도 모자라 연출부와 제작부들이 옷을 갈아입고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렇지. 쉽게 갈 리가 있나....’


두 번의 삶을 통틀어 류지호는 단 한 번도 순탄하게 영화를 찍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대규모 전쟁씬 촬영은 여러 가지 악재가 터지게 마련이다.

그나마 폭파와 피탄 등에서 부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경미한 부상자는 다수 나왔지만.

폭발음 때문에 인근 농가에서 신고가 들어가 경찰과 군이 출동하는 소동도 있었고, 소품용 총기들이 몇 정 파손되면서 제작부가 울상이 되었다.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다 보니 하루 진행비가 억대로 지출되었다.

혹시 눈이라도 내릴까봐 마지막 커트를 촬영할 때까지 모두가 긴장했다.


✻ ✻ ✻


<복수의 꽃>에서는 우금치 전투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연이은 패배로 지쳐있는 농민군의 소년 병사를 보여준다.


오돌오돌.


추위에 떠는 것인지 겁에 질려있는 것인지.

소년 병사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살아남은 농민군들 역시 소년병과 다르지 않다.

십여 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3,000명 남짓.

전쟁은 패배했다.

농민군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

녹두장군과 지휘부는 퇴각을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후우.


연신 입김이 흘러나온다.

엄동설한에 일본군과 관군은 완전무장하고 있다.

방한모에 양털 방한복차림으로 방한 양말과 방한 가죽신을 신고 서양 신무기인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정규군이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의복이 남루하여 말이 아니다.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채 머리에 흰수건으로 띠를 두른 동학농민군은 무명에 핫바지 차림으로 버선발에 짚신을 신고 있다.

눈이 오면 물이 들어와 질퍽이는 짚신과 젖은 한복으로 감기와 동상에 걸리기 일쑤다.

아프지 않은 이들까지 추위에 지쳐서 사실상 전투 자체가 무리다.

봄이나 여름이었다면 아무리 신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이라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의 인해전술 앞에 굴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기기 힘들었을걸?”

“죽창이 기관총을 어떻게 이겨.”


촬영부들이 나눈 잡담처럼 조선 관군에게는 동학군이 갖지 못한 서양식총과 독일제 크룹 포와 개틀링 기관총이 있었다.

영국제 스나이더 단발 소총을 주력으로 쓰고 있었는데, 중앙 병력 일부는 더 신식인 모젤 총을 장비하기도 했다.

전쟁에 투입된 일본군 역시 스나이더와 무라다 소총을 사용했다.

동학군의 화승총이 새총처럼 여겨질 정도다.


“동학군 쪽에 나눠 줄 화승총이 모자라요.”


특효팀 조수의 말에 안재민이 스나이더 총에 꾀죄죄한 천을 둘둘 말아 넘겨주었다.


“카메라에서 먼 데 있는 엑스트라한테 이렇게 해서 줘. 이렇게 가리면 화승총인지 스나이더인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옛!”


10여년 만에 한국영화에서 등장한 초대형 전쟁씬이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리허설에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막상 촬영을 하려고 드니 이곳저곳에서 우왕좌왕이다.

어쨌든 패색이 짙은 동학군은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있다.

징, 꽹과리, 북을 치는 동학도조차 기운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실제 보조출연자들은 촬영에서 의욕이 없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니 진짜 패잔병 같아 보였다.

일반적으로 지휘관은 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후방에서 지휘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기록에 따르면 녹두장군 전봉준은 붉은 덮개를 씌운 사인교(네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타고 우금치 계곡으로 들어 와 공격을 지휘했다고 한다.

거병 이래 녹두장군은 말을 타고 지휘했다.

산의 경사가 급해서, 혹은 자신감을 보이기 위한 연출의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녹두장군은 원거리에서도 확연히 관측이 되는 붉은 가마를 탔다.

고증에 입각해 그 같은 디테일까지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따로 녹두장군을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는 정도로 절제했다.


[모두 진격하라!]

[와아아!]


동학군의 전법은 19세기 중반까지 사용되던 밀집대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중 돌격이다.

즉 열과 오를 늘어선 집단이 지휘자의 독전 속에 적진에 쇄도하는 전투 방식이다.

선두의 죽창을 든 농민군들이 산 능선에 포진하고 있는 관군을 향해 달린다.

그들 사이에서 사수들이 화승총을 발사하거나 활을 쏘아댄다.

농민군의 최후의 돌격이 감행되자....


퍼펑.

꽝.


일본군과 관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실제 역사에서 관군과 일본군은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제사격을 가했다가 해가 지면 산 속으로 은신했다.

그 같은 방식을 며칠 동안 반복했다.

농민군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곧바로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그렇게 하기를 40~50차례 거듭하고 나면 농민군의 시체가 온 산에 가득히 찼다.

전투는 거의 열흘 간 계속되었다.

전면적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군 200여 명 관군 2,500여 명 등 삼천 명에도 미치지 못한 진압군을 수만의 이르는 농민군이 끝내 극복하지 못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었다.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가 2,000m에 이르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다.

반면에 농민군은 그저 농사를 짓던 무지렁이일 뿐이었다.

대부분 죽창을 들었다.

일부가 활이나 낫을 소지했을 뿐이다.

또 극히 일부가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100보 사거리의 재래식 화승총을 무장하기도 했고, 관군으로부터 노획한 신식 소총도 일부 사용했다.

신식화기들은 적들에 비해 조족지혈이었다.

무장에서 워나 차이가 난데다가 추위로 사기까지 떨어진 농민군은 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에게 접근하기 전에 피를 흘렸다.


[흑흑.]


4일 간 진행된 전쟁씬 촬영의 마지막은 소년병의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겁에 질렸는지, 분하고 억울한 눈물인지, 무기력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인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소년은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동학 주문을 외워본다.

주문의 힘을 빌려 총알이 빗나가기를 바라면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하지만 총알이 날아와 소년병의 가슴을 꿰뚫는다.

동학주문도 적들의 총탄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좋은 시상에서 살고 싶은 것뿐인디... 왜 왜!]


꽝!


포탄이 날아와 박힌다.

검회색 포연이 소년병을 집어 삼키면서...


“컷.”


편집을 통해 이 포연을 뚫고 연화가 등장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연화의 등장 모습은 간척지 황무지에서 이미 찍어두었다.

계획된 모든 장면의 촬영이 끝이 났다.


“감독님, 현장편집 확인 안 하십니까?”

“봅시다.”


Eye-MAX 카메라가 한 대 더 촬영에 동원되면서 좀 더 풍부한 편집 소스를 얻을 수 있었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대강의 편집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혹시나 보충해야 할 커트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와아아아...


농민군들은 살기를 포기했다.

오직 산마루 너머에 천국이라도 있다고 믿는 것처럼 죽창을 들고 기어오를 뿐.

그렇게 죽을 자리를 찾아 뛰어드는 부나방들을 향해 관군과 일본군이 총을 쏜다.


[시벌! 다 죽여불랑게에에에!]

[니미~ 난 살기를 에즉에 포기했어라!]


관군의 총성의 파고를 높일수록 농민군의 분노도 거세진다.

류지호는 전투의 전체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한편으로 격정과 고요가 교차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냈다.

우금치 전투 시퀀스의 시작을 고요와 정적으로 시작한 후, 소년병의 코 훌쩍임으로 분위기를 확 깨버린다.

그러다가 다시 전장이 고요 속에 숨을 죽인다.


징.


느닷없이 누군가 징이라도 건드렸는지 짧은 징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식으로 긴장감을 좀 더 고조시킨다.

농민군의 대열을 카메라가 훑을 때는 간간이 동학 주문을 외우는 중얼거림이 들리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음악도 깔지 않을 생각이다.

코 훌쩍거림, 징 소리, 동학 주문 외는 소리 등만 간간이 들릴 뿐.

그러다가 동상 걸린 짚신발이 불쑥 전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음악이 깔리게 되고,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음악과 함께 광기로 가득 찬 전장이 펼쳐지게 된다.

고요로 시작해 불안을 묘사하다가 혼돈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전투씬 묘사 방식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의 아리아‘ <블랙호크 다운>에서 지미 핸드릭스의 ’Voodoo Chile’ 같은 유명한 곡이 웅장하게 울리진 않는다.

대신 <복수의 꽃>의 전장에는 징, 꽹과리, 북소리가 진혼곡처럼 울려 퍼진다.

농악은 일터에서 또 축제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때론 장례에서도 사용되던 민초들의 음악이었다.

평상시의 농악은 농부들의 흥을 돋아줬다.

전쟁터에서는 독전에 쓰이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애도음악 같다.

마치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것처럼.

음악감독이 BGM에 백파이프 소리를 연상시키는 피리소리를 교묘하게 섞어 놨다.

웅장하면서 다이내믹한 음악이 종종 변조되면서 슬픈 곡조로 바뀌기도 했다.


‘음악은 믹싱에서 조금 조정하는 것으로 하고....’


이번에 강원도 산불 지역에서 촬영한 전투씬은 사실성 그 자체로 탁월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만큼 전투고증에 있어서 전문가들과 일일이 의논하면 찍었으니까.

다만 그것에 그치고 만다면 범작에 머물고 만다는 사실.

그 안에 내용과 의미가 함께 담겨야 한다.

이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전쟁 시퀀스를 조율하는 데는 군사작전 못지않은 확고하고 빈틈없는 연출계획이 필수적이다.

물론 고증도 매우 중요하고.


“아무도 역사를 배우기 위해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


영화는 스토리가 있는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스토리에는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복수의 꽃> 도입부는 역사적 사실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지만, 주인공이 없다.

녹두장군이나 이름 없는 농민군이나 모두 평등하게 묘사되었다.

무심결에 징을 건드리는 농민군도 동학주문을 외는 농민군도 붉은색 사인교에서 지휘하는 녹두장군도 겁에 질린 소년병도.... 그들 모두가 Eye-MAX 화면비 안에서 비중의 경중 없이 똑같이 담겼다.

반면에 관군과 일본군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가해자를 고발하는 것보다 무수히 피를 뿌린 이름 없는 민초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주된 의도였기에.

이 전쟁 스퀸스에는 불안정하게 화면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이 쓰이지 않았다.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웅장한 음악도 없다.

광기로 얼룩진 인물의 얼굴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덧없이 죽어가는 농민군만 집요하게 묘사할 뿐이다.

노트북 화면으로 보이는 현장편집본은 전쟁씬치고 심심하다.

사실성, 절제, 단호함....

류지호는 최대한 전투를 담담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커트에서 조금은 감정이입이 된 것도 같았다.

소년병의 죽음을 묘사할 때만큼은.


“됐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


며칠 간 강원도 산등성이에서 고생한 제작진들이 열렬한 박수로 촬영종료를 자축했다.

촬영 내내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보조출연자들도 그때만큼은 친절한 동료로 태세가 바뀌어서 제작진에게 수고를 전했다.

<복수의 꽃>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크랭크업했다.


❉ ❉ ❉


촬영된 필름은 허리우드 현상소에서 현상을 끝내고, 이상 유무 확인까지 마쳤다.

필름 일부가 실리콘밸리 GMG Lab으로 옮겨져 4K 스캐닝 작업에 들어갔다.

2K 후반작업을 하게 되면 Eye-MAX 카메라로 촬영한 의미가 퇴색했기에 최신 스캐닝 장비를 구비하고 있는 GMG Lab에서 주요 작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술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실 후반 작업에 참여하는 JHO Company 계열사들이 공짜로 작업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각종 현물 협찬 등 <복수의 꽃>과 PPL 계약이 되어 있었다.

사극에 PPL이 웬 말일까.

예를 들어 Eye-MAX의 경우 대길의 지리산 움막 울타리에 브랜드를 심어두었다.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 울타리의 모양을 알고 보게 되면 EYE. M. A. X 글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연화가 기생집 수챗구멍에서 거지들과 음식물 찌꺼기를 받아먹는 장면에서 거지나 굶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수챗구멍에 잔반을 흘려보내는 기생의 저고리에 달려있는 화려한 노리개에는 GMG Lab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류지호는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는 기생의 바스트 쇼트(B.S)를 찍었다.


[워메~ 아~ 네모여, 아~네모네랑게.]


영화 속에서 악당들이 시시덕거릴 때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얼굴이 네모난 일행을 놀리며 '아~ 네모네'라고 하는 80년대 말장난이었다.

그리고 지중해에서 자생하는 꽃인 아네모네를 연화가 움직이는 곳에 일부러 심어두었다.

실제는 4~5월에 피는 꽃이다.

아네모네 프랜차이즈 브랜드 노출을 위해 그 같은 사실성은 포기했다.

사실성에는 위배되지만 붉은색, 흰색, 분홍색, 자주색, 노란색, 하늘색 등 다양한 아네모네 꽃의 색깔은 그것대로 영상을 화려한 색으로 수놓았다.

심지어 영화 엔딩에서 연화의 방에 아네모네 꽃이 낡은 도자기에 꽂혀있다.

류지호가 억지로 갖다 붙인 설명은 아네모네의 꽃말에 배신, 기대, 기다림, 허무한 사랑, 사랑의 괴로움 등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옥에 티로 가장해 일부러 화면에 노출시킨 것도 있었다.

여주 종합촬영소 군산 세트장에서 만억이 다나카 상회를 찾아가는 커트에서 CCTV가 화면에 걸린 것.

류지호는 알고도 찍었다.

그 CCTV에는 나래안전이라 떡하니 브랜드명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JHO와 가온그룹 계열사 PPL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류지호와 미술감독만 알고 있다.

류지호는 미술감독에게 마음만 먹으면 사극에서도 PPL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물론 사전에 알고 있어야 확인할 수 있다.

모르고 보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게 장치했다.

한국에서 개봉할 때 관객수가 떨어질 때 즈음 이런 내용을 흘릴 예정이다.

혹시나 관객들이 호기심에라도 재관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물론 영화가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PPL이 되버리겠지만.

이전 삶에서 <왕좌의 게임> 에피소드에 유명한 커피전문점 종이컵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각종 SNS과 언론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마케팅 전문가는 광고효과가 23억 달러에 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작사인 TBO는 실수였다며 해명과 함께 시청자에게 사과까지 했다.

과연 그 장면에 세이렌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종이컵을 놓아둔 것과 또 그걸 촬영해서 편집까지 마친 후 방송에 내보낸 것이 실수였을까.

<왕좌의 게임>의 방식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유치하기까지 했다.

할리우드 영화 시대극에서는 훨씬 교묘하면서 의심을 유발하는 쪽으로 PPL을 쓰고 있다.

귀족가문의 이름이 특정 회사를 연상시킨다던가, 반지의 새겨진 이니셜 M&M이 특정 브랜드를 연상시킨다던가, 특정 문양에 코카콜라 로고나 스포츠 브랜드 로고를 삽입한다든가 하는.

류지호가 미술감독을 제외하고 비밀로 한 것은 영화하는 사람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술감독 윤민구는 ParaMax Films 작품에서 아트 디렉터를 해봤기 때문에 PPL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윤감독, 여주 세트장 울타리 그거 심심해서 장난친 거야?”

“무슨 장난이요?”

“싸리나무로 Eye-MAX 글자를 만들어 놨잖아.”


쫑파티에 참석한 윤민구는 김영복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PPL은 아니겠지? 사극에 무슨....”

“협찬에 공짜는 없습니다.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

“허~. 지호 저 놈은 이제 하다하다 사극에서 PPL까지 넣는구만.”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스태프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있는 류지호를 보며 김영복이 혀를 찼다.


“하여간 큰머리든 잔머리든 잘 돌아간다니까.”


류지호는 고생한 배우와 스태프들을 위해 성대한 쫑파티를 열었다.

강남의 유명한 고깃집을 하루 통째로 빌려 파티를 열었다.

영화잡지 기자들도 참석하고, 박중환, 배창훈, 차영재, 심희명 등 영화인들도 찾아와 무사히 촬영을 마친 <복수의 꽃> 제작진을 축하해주었다.


“Eye-MAX는 63빌딩에서 밖에 상영을 못 할 텐데, 호기심치고는 너무 무리하신 건 아닌가요?”


씨네마21 기자의 물음에 소주잔을 단숨에 비운 류지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전 세계 프리미어는 Eye-MAX 전용 상영관에서 공개하고, 일반 상영관은 따로 시네마스코프 버전으로 상영할 계획입니다.”

“손익분기점이 전국 200만이라는 말이 있던데, 가능하다고 보세요?”

“WaW 배급팀이 고민할 문제죠.”

“영화 흥행은 일정 부분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요. 아마 본전은 건지지 않을까 하네요.”


류지호는 자신감을 자제하고, 겸손하게 대답하고 자리를 옮겼다.

많은 감독들이 초대받아 파티에 왔다.

충무로도 할리우드와 인맥관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쫑파티에 친분 있는 영화계 관계자를 불러 친목을 다지면서 차기작에 대해 슬쩍 운을 떼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영화비평 수준이 상당히 얕아졌어.”

“비평이 아니라 평론이지.”

“개나 소나 내러티브 비평이래.”

“내러티브 비평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 비판하기 쉬우니까. 전문 지식이 없이도.”


내러티브는 줄거리, 개연성, 주제 의식 등 영화에서 텍스트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들을 총칭하는 영화 용어다.

영화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는 영화잡지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의 영화비평계는 수박 겉핥기식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평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산업으로나 영화팬 모두에게 좋지 않은 현상이다.


“류 감독은 한국영화가 지나치게 내러티브 중심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박진우 감독이 편하게 말을 놨다.

한국에서 <복수의 꽃>을 작업하면 몇 번 술자리를 하면서 친해지면서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영화에 줄거리와 메시지가 담기며 다양성과 대중성이 확장되긴 했죠. 관객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내러티브 안에 체계적으로 구조를 이루면 장르가 되잖아요. 지난 10년 간 장르가 다양화되면서 관객의 수요를 조금씩 따라잡고 있는 거죠.”

“그래도 너무 그쪽으로만 치중되어 있는 거 아닐까?”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영화를 봤다고 할 때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화의 스토리와 개연성, 메시지를 납득했다는 이야기다.

대중들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해하고 평가하고, 영화계 역시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영화계가 내러티브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면서 한국영화의 대중화가 몰라보게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이미지(미장센), 사운드, 실험성이 한편으로 밀려나는 것에 우려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본래 그 같은 우려는 비평계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한국영화 비평 수준이 신문이나 잡지에 수박 겉핥기식 평론을 싣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러티브에 치중하는 영화는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할 우려가 있다.

관객을 쉽고 빠르게 설득하기 위해 현실 속 보수적·남성적·편향적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집단에 대한 편견을 이용해 개연성을 충족시키는 일이 많다.

당장은 ‘조직폭력배’를 활용하는 방식이 그렇고, 조금 지나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을 설정으로 가져와 손쉽게 줄거리 전개를 하게 되고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하게 된다.

더 넓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전형적인 관념이나 여성과 외국인에 대한 인식까지 차별적인 묘사를 통한 내러티브에 의존하게 된다.


“류 감독 영화들을 보면 모성 코드라고 할까 억압받는 여성이라고 할까, 어떤 페미니즘 코드가 깔려 있는 것 같아. 자네 혹시 페미니스트야?”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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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 내가 잘되자고 하는 겁니다! (1) +5 23.03.17 3,503 120 27쪽
447 혼자 늙어 죽는 수가 있거든! +6 23.03.16 3,460 124 25쪽
446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3) +3 23.03.15 3,411 110 23쪽
445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2) +4 23.03.14 3,473 108 21쪽
444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1) +9 23.03.13 3,617 118 20쪽
443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3) +6 23.03.11 3,675 128 26쪽
442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2) +5 23.03.10 3,624 121 26쪽
441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1) +7 23.03.09 3,648 118 23쪽
440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3) +4 23.03.08 3,578 123 24쪽
439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2) +14 23.03.07 3,580 128 21쪽
438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1) +3 23.03.06 3,586 117 21쪽
437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면 됩니다. +6 23.03.04 3,705 128 27쪽
» 복수의 꽃. (10) +8 23.03.03 3,398 127 21쪽
435 복수의 꽃. (9) +6 23.03.02 3,268 127 21쪽
434 복수의 꽃. (8) +4 23.03.01 3,262 120 21쪽
433 복수의 꽃. (7) +3 23.02.28 3,331 119 22쪽
432 복수의 꽃. (6) +4 23.02.27 3,377 115 21쪽
431 복수의 꽃. (5) +4 23.02.25 3,456 128 24쪽
430 복수의 꽃. (4) +5 23.02.24 3,384 128 25쪽
429 복수의 꽃. (3) +11 23.02.23 3,468 115 26쪽
428 복수의 꽃. (2) +2 23.02.22 3,558 128 24쪽
427 복수의 꽃. (1) +5 23.02.21 3,677 123 20쪽
426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4) +6 23.02.20 3,648 126 25쪽
425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3) +5 23.02.18 3,702 135 25쪽
424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6 23.02.17 3,655 134 25쪽
423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1) +7 23.02.16 3,746 139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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