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3 09:05
연재수 :
899 회
조회수 :
3,828,581
추천수 :
118,687
글자수 :
9,955,036

작성
23.02.17 09:05
조회
3,654
추천
134
글자
25쪽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잠시 후 -

세 사람이 서재에 자리 잡았다.

먼저 레오나가 문서 하나를 류지호의 앞에 놓았다.

류지호는 가타부타 말없이, 문서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류아라가 먼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들을 나열하고,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벌이고 있는 참전용사 관련 행사들을 설명했다.

이어 미국을 대표로 참전국가들의 한국전쟁 기념사업 현황과 한국 보훈단체들의 기부활동과 지원 내역을 설명했다.


“이 자료들 누가 도와줬어?”

“레오양과 나 둘이서 장장 6개월에 걸쳐 준비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음을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너희 둘이 준비했다고?”

“네. 맹세코!”


류지호가 레오나를 돌아봤다.

레오나가 야무진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레오나가 UN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 사업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했다.


“한국 국가보훈처에서는 아직 평화캠프 행사를 하지 않고 있어?”

“문의해 본 결과, 그와 관련된 어떤 행사 계획도 없었습니다.”

“다른 참가국들도 마찬가지야?”

“네.”


이전 삶에서 UN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 행사는 2009년부터 국가보훈처에서 6.25 기념식을 전후로 해서 개최했다.

국내 대학과 연계해서 참전용사 후손들 200명이 매년 참가했는데,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부터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꽤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다울재단, 미국의 파커재단이 행사를 주관하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진행을 돕도록 하겠다?”

“네.”

“국가보훈처는 뭐래?”

“따로 예산이 책정 된 바가 없기 때문에 당장 금전적인 지원은 해줄 수 없지만, 대사관을 통해 각국 참전용사회 네트워크를 연결해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재원은?”

“파커와 다울이 행사 주최가 되며, 사업 시행의 부족한 부분은 한국과 미국 기업들로부터 스폰서를 받을 계획입니다.”

“JHO, 파커, 그레이엄, 가온이겠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들 기업은 당연히 스폰서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만, 좀 더 많은 기업과 민간단체와 연계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는 오성, 경일, 금성, 미국에서는....”

“파커와 JHO의 위세를 빌려서?”

“당연합니다. 프로그램의 주최는 두 재단이니까요. 한국에서는 다울재단이 미국에서는 파커재단의 이름으로 스폰서 의향서를 보내면 긍정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렇다고 치고. 사업 초기부터 200명을 초청하겠다고 했는데, 가능하다고 생각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현재까지 한국 보훈처가 수집한 해외 참전용사 현황에 따르면 그 초청자 숫자는 적게 잡은 편입니다.”

“UN참전국 중에 저개발 국가도 있는 건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에티오피아나 필리핀 아이들이 초청을 받았다고 쳐. 그 아이들이 한국에 오려고 할까? 아니 왔다고 가정했을 때 다른 나라 아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을까?”

“언어 문제는 외국어 가능 자원봉사자 위주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언어 문제를 묻는 게 아니란 걸 모르겠어?”

“....예?”


레오나가 고개를 돌려 류아라를 쳐다봤다.

류아라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 1대와 2대에게는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3대로 내려가면 피부에 와 닿는 일이 아니야. 레오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참전군인으로서 윌리엄 파커에 대해 존경심이 없었잖아. 아니 그와 관련된 역사나 사연에 대해 몰랐잖아. 그런 아이들에게 한국으로 오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무조건 방문할까?”


2010년대 대한민국이라면 몰라도 지금 대한민국은 반드시 가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다.


“비행기 티켓도 보내주고 캠프 기간 내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추억을 쌓을 수 있는데?”

“내가 아까 저개발 국가 이야기를 했잖아. 어른들도 보훈처에서 초청하면 방문을 거절하시는 분들도 있대. 몸이 불편해서 혹은 사정이 있어서 못 오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못 오시는 분들도 많아.”


먹고 살기 힘들고 바빠 죽겠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할아버지의 참전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방문해 주십사 초청했다고, 놀러간다고 좋다고 단숨에 달려오기란 쉽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다.

보훈처 같은 경우는 해외교류협력 자원봉사자들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그런 부분까지 어느 정도 신경을 쓴다.

미국이나 영국인, 캐나다, 프랑스 참전용사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은 잘 사는 집안 자녀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선입견이다.


“이것도 한 번 봐주십시오.”


레오나가 다른 문서 하나를 건넸다.

류지호가 지적한 UN참전국 가운데 저개발 국가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또한 그와 관련된 지원사업까지.

누가 월가 큰 손의 딸 아니랄까봐 사업 규모나 지원 액수가 황당했다.

이제 갓 대학 신입생이 고려할 사이즈가 아니었다.


“코리아 빌리지(Korea Village)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


에티오피아는 한국전 참전국가 중 하나다.

당시의 황제 셀라시에는 정예군인 근위대 병력을 차출해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6,037명의 군인이 세 차례에 걸쳐 파병돼 536명 부상 121명이 사망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엘리트 군대를 몇 백 명도 아닌 수천 명을 보내기 쉽지 않다.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참전국 중 유일하게 포로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근위대는 황제의 배려로 수도 아디스아바바 동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코리아 빌리지 터에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이 모여 살았다.

안타깝게도 1974년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박해를 받았다.

황제의 근위병들이었기 때문이다.

코리아 빌리지는 결국 빈민촌으로 전락해 버렸고, 현재는 여건이 더욱 나빠졌다.

빈민촌에서 살고 있던 참전용사 가족들은 시련이 계속되면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현재 1,000가구 중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은 100가구도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학교를 세우고, 마을의 도로를 닦아주고, 집을 보수해 주고 싶다?”

“가장 환경이 열악한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필리핀, 콜롬비아 그리고 터키 등의 참전용사회와 연계해 직접적인 금전 지원보다 인프라 조성 지원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그쪽으로 기부나 지원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잘... 그 부분은 향후 알아보겠습니다.”

“애들아.....”


류아라와 레오나가 이어질 류지호의 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빠에게 먼저 찾아와 의논한 건 칭찬해 줄게.”


짝.


류아라와 레오나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만 너희들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하나 잊은 채로 이 자선사업을 기획했다는 걸 말해줄게.”


류아라가 진지했던 자세를 버리고 여동생 태세로 변신했다.


“그게 뭔데?”

“개인이 참전용사와 가족들에게 기부를 하는 것과 파커재단이 아니 JHO재단만 되어도 결코 작은 차원의 일이 아니야. 당장 너희 계획이 내일 자 뉴욕신문 아무데나 기사로 나가게 되면, 캐서린과 제임스는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전화를 받아야 할 거야. 파커가문의 손녀가 자선사업을 한다는데 자신들도 함께 하고 싶다거나 혹은 한 발 걸치고 싶어 하는... 사이즈는 조금 작겠지만 그건 이 오빠에게도 해당돼.”

“그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두 여동생이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사업을 해보고 싶다면, 너희들은 두 사람을 설득해야 돼.”

“큰오빠가 허락하면 되는 것 아니었어?”

“아라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레오나는 할아버지를 설득해.”


자신 있다는 듯 류아라와 레오나의 고개가 크게 움직였다.


“너희가 기획한 프로그램을 실행할 실무팀을 각각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런 다음 너희들은 그 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

“밑바닥부터 배워. 단 방학 동안에만.”

“......”

“왜 대답이 없지?”

“응.”

“알겠어.”


두 여동생도 안다.

자신들이 제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사업을 맡겨주지 않을 거란 걸.

그래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PT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네....


류지호가 웃으며 묻자 냉큼 옆자리를 차지하고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여동생들이다.


“아우 씨.... 말도 마!”

“리포트가 아닌 사업계획서를 준비해보니까 어때?”

“미국의 공무원은 너무 느리고, 한국의 공무원은 너무 불친절해.”


류지호로서는 동생들의 생각이 몹시 기특했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수준의 기획이었다면 부모·형제의 부를 통해 위선을 떤다고 욕할 사람도 있다.

그런데 참전용사 후손을 위한 캠프는 참전용사인 할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식으로 포장이 가능하고 진부하지만 ‘평화‘라는 슬로건만큼 좋은 명분도 없다.

이벤트가 벌어지는 곳이 지구 유일의 분단국가라면 더더욱 좋은 명분이다.

참고로 국가보훈처에서는 ‘UN군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라는 프로그램을 지난 1975년부터 추진해 오고 있다.

참전용사들에게 참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자는 취지다.

2000년 현재 총 20만 명의 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초청했다.

한국전쟁 참전 연인원은 무려 194만여 명이다.

이중 생존자는 약 53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별개로 수십 만 해외참전 용사들은 소프트파워와 연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인력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이 한국에 대해 호감을 품는다면 국가적으로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민간기업들이 해외참전용사와 그 가족에 대해 지원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는 것은 대략 2000년대 말 경부터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어떤 대기업도 한국전쟁 해외참전용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마케팅 부분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수백만 명의 가족들에게 한국의 브랜드에 대해서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음에도.


‘한국에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데 해외참전용사에 관심을 두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이제 막 한류가 일본과 중국 등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음악과 드라마를 매개로 한 문화산업 한류, 수천 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 세계 태권도인, 전 세계 21개국에 퍼져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 그 네트워크가 결합하면 그것만으로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매년 대기업들이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한 홍보마케팅비로 수십억에서 수백억까지 쓴다.

그 중 일부만 사용하면 21개국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에게 한국에 대한 호감을 심어주면서 자사 브랜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다.

기업이 자선활동을 하는 것은 이익의 사회 환원이란 의미도 있지만, 공공에 대한 투자이며 공익 비즈니스의 일환이기도 하다.

꾸준히 진행해야 하고,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나 그 결과가 나오는 투자이지만.

류지호가 여동생들이 놓고 간 자료를 들춰보며 중얼거렸다.


“참전국 중에 에티오피아랑 콜롬비아가 커피로 유명한 나라 아니었나?”


에티오피아의 코리아 빌리지와 강뉴 부대에 대해서는 국내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다뤄졌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게 되고.

두 나라와 관련해 참전용사 지원과 새로운 사업이 불현 듯 떠올랐다.

골칫거리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까지도.


✻ ✻ ✻


다음날.


류지호는 합정로터리 WaW 프로덕션 오피스가 아니라 강남 본사로 출근했다.

참전용사와 가족에게 돈을 주고, 후진국에는 학교를 세워주고, 주거 환경을 개선해 줄 곳은 한국정부를 포함해 민간기업까지 많았다.

다만 그들의 먹고 살길까지 마련해 주진 않는다.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 커피 산업과, 두 나라의 한국전 참정용사 현황을 파악해 봐요.”


김우영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하고 황재정과 점심을 먹기 위해 외출했다.

곁에서 류지호의 지시사항을 들었던 황재정이 물었다.


“갑자기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는 왜?”

“멀티플렉스 사업 쪽에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 나라들 멀티플렉스가 들어가 봐야 손해만 볼 텐데?”

“멀티플렉스에 커피숍이 입점하잖아. 채 사장님 쪽에 커피숍 프랜차이즈 한 번 해보라고 권유해 보려고.”

“커피라.....”


미국을 대표하는 커피전문점 세이렌이 작년 이대입구에 처음 점포를 열었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객항의가 이어지고 있다.

달달하고 싸기까지 한 믹스커피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세이렌의 커피 맛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이 2,500원으로 짜장면 한 그릇 값과 비슷했으니 사람들은 매우 불편한 시선으로 세이렌을 대하고 있다.


“채 사장님 남편이 곧 출소할거야.”

“그것과 커피가 무슨.....”

“아줌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을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로 뺑뺑이 좀 돌려볼까 한다.”

“알아듣게 설명해 줄래?”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에 현지 커피 유통업체를 각각 세워보려고. 한국의 아네모네 커피 프랜차이즈에 원두를 공급하는 거지. 현지 회사에 어렵게 사는 참전용사 가족들을 취업시켜서 일자리를 마련해 주면 어떨까 생각 중이야.”

“현지 회사를 조폭 두목에게 맡긴다?”

“아줌마 남편을 1~2년 그 곳 사업체 지점장 파견형식으로 내보낼까... 생각해 봤어.”

“출소해서 사고 칠까봐 걱정 돼?”

“아무리 본인이 조용히 살겠다고 해도 이놈에 사회가 가만 놔둘까 싶다.”

“그러네. 옛날 부하들이 모여들 수도 있고. 경찰이나 검찰에서 어떻게든 범죄를 엮어서 다시 교도소로 보내려고 할지도 모르고.”

“이빨 다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한 때 인천에서 알아줬다잖아. 경찰 입장에서 사회에 풀어놓고 관리하느니 교도소에 넣어버리면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없는 죄를 만들진 않겠지.”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디 술 마시고 시비 붙어 싸움이라도 벌여봐라. 바로 그 날로 모든 언론에서 대서특필 할 거다. 왕년에 조폭 두목 술집에서 깽판치다가 경찰서행 그런 식으로. 아네모네부터 가온까지 엮어서 별의 별 소설들이 써지겠지.”

“아줌마에게 사실 대로 말할 거야?”

“응.”

“아줌마가 받아들일까?”

“아줌마도 함께 나가 있으라고 하지 뭐.”

“가만 보자. 두 나라를 돌면서 이런저런 선행 좀 하게 만들어서 언론 플레이 좀 해야겠네? 과거에 저지른 일들을 참회하고 봉사활동으로 회개한다 뭐 그런 스토리.”

“아줌마의 과거지사는 이미 언론을 통해 다 까발려졌거든.”

“대중들에게는 룸싸롱 마담 출신이 출세해서 기부도 많이 하고 장학사업에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 많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지. 조폭 두목 출신 남편과 외국에 나가 봉사활동도 하고 새로운 사업도 개척한다는 이미지도 하나 더 추가시켜 줄 수 있지 않겠냐?”

“시나리오 쓰냐?”

“시놉시스는 네가 썼거든. 영화는 할리우드와 충무로에서 해 줄래. 현실에서 하지 말고.”

“어허! 하늘같은 의장이 시키면 군소리 말고 할 것이. 연봉도 많이 받는 놈이.”


사실 황재정이 보고서를 쓸 업무는 아니다.


“이제 하다하다 커피숍까지 하냐?”

“아네모네가 한다니까.”

“아네모네 대주주가 너님이거든.”

“암튼, 비서실에 두 나라 상황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으니까. 자료 넘어오면 너도 검토해 봐.”

“네네.”


강남에서 황재정과 점심을 먹은 류지호는 프로덕션 오피스가 있는 합정로터리가 아닌 밀레니엄 힐턴으로 향했다.

그곳에 전라도 지역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과 일본과 중국에서 온 역사학자들이 영화 <복수의 꽃>과 관련한 미니 세미나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되면 실증과 왜곡 문제가 무조건 도마에 오르게 되어 있다.

제작자나 감독의 입장에서는 그 스트레스를 온전히 감내해야 한다.

특히 한국은 영화나 드라마의 고증과 관련한 시스템이나 학계와의 공조가 아예 없다.

류지호와 스티븐 아들러가 함께 기획·기획 제작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고증에 서른 명이 넘는 생존자, 학자, 연구가가 참여하고 있다.

대작 역사물의 고증에 수십 명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제3세계를 묘사할 때마다 심각한 왜곡이 일어난다.

자신들의 역사를 다룰 때는 최고의 권위자들을 불러서 고증을 철저하게 받지만, 힘없고 존재감 없는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제작하기 때문이다.

제작비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고증이 미흡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포위섬멸작전은 일본의 대본영과 정부가 벌인 조직적인 ‘국가의 제노사이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조차 농민군들이 규율을 따르며 조직적 전투를 치렀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일본의 동학 연구 권위자인 이노우에 교수가 미니 세미나에서 류지호에게 한 말이다.

딱히 친한파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교수다.

그런데 역사학자로서 삶의 절반을 동학농민전쟁에 할애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중국 북경대학에서 온 중국인 교수는 동학농민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비교하고 그를 통해 동아시아의 민중봉기가 현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발표했다.


“과도한 작가적 상상력은 또 다른 역사 폭력의 문제를 낳습니다. 반드시 그 점을 명심해서 작품에 임해주길 바랍니다.”


<복수의 꽃> 고증에 참여하는 12명의 동학농민운동 역사학자들의 일관된 주문이었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또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할 때는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실제(fact)에 허구적(fiction) 요소를 가미한 ‘팩션(faction)’ 영화는 역사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창작의 영역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립할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창작의 영역 보장을, 전문가들은 완벽한 역사 고증을 주문한다.

그 중간에 위치한 관객은 ‘사실’과 ‘재미’ 사이에서 혼동을 겪기도 한다.


“나는 감독에게 무조건 적인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그대로의 재현만을 주장하고 싶지 않아요. 영화는 창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적 표현에 대해 최대한 존중 받아야 하니까요. 다만 허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음을 관객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결국 영화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의 현미경 고증이 아니라 엄연히 관객의 몫이니까요.”

“영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복수의 꽃> 또한 역사를 재구성했고, 허구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걸 충분히 설명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인물은 천도교와 연관 된 동학농민운동 연구자였다.

류지호는 12명의 고증자문단을 구성하며 다양한 연구분야의 학자들을 초빙했다.

굳이 주류 사학계의 명망 높은 학자나 동학운동 특화 연구자로 한정하지 않았다.

일본인 학자, 중국인 학자, 종교계 학자, 비주류 사학계 연구원까지도 자문위원으로 발탁했다.

그들의 자문과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류지호의 몫이다.


“<복수의 꽃>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창작된 허구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 시절을 살아갔던 내 가족 누군가의 이야기입니다. 극적인 서사의 영화는 아니지만 그것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전주대학 역사학과의 교수가 한 말이었다.

전라도 지역의 근대사 연구로 명망이 높은 교수로 비록 <복수의 꽃>이 동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당시 시대상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호감을 표했다.


“허구적 인물이지만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연화에 녹아 있기에 시대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수동적이며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에서 억압받는 진부한 여성이 아니라 현대 즉 이 시대가 바라는 여성상으로 그려짐으로써 공감을 얻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의상 관련 고증을 해주는 여대 역사학자이자 모 박물관장이 힘주어 말했다.

은근슬쩍 페미니즘을 묻히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관장님, <복수의 꽃>은 여성영화 아닙니다. 복수극이자 검술액션영화입니다. 장르영화임에도 역사고증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는 그 시대에 살았던 분들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역사 고증을 충실히 할 때 진정성도 전달되는 법이다.

그럼으로써 관객의 정서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역사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는 단순히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을 넘어 역사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왜곡 없이 전달할 의무가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니까.

류지호는 그렇게 믿었다.

미니 세미나를 마무리하고 실질적인 내용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특히 우금치 전투에 대한 역사적 고증에 주의를 기울였다.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개틀링 기관포와 스나이더 소총을 국내에서 구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미국에서 들여와야 했다.

지금까지 우금치 전투를 영상으로 묘사한 것은 1991년 영화 <개벽>과 1994년 KBC의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극장> 둘 뿐이다.

두 편 모두에서 고증 오류가 많았다.

류지호는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고증 오류들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이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고증 오류 중에 하나가 우리 사극의 군사들이 도적이나 왈패처럼 칼을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는 모습이다.

이미 90년대 초부터 학자들이 TV드라마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해왔고, 앞으로도 20년 가까이 꾸준히 지적하지만 안 바뀐다.

조선의 칼 패용법은 ‘환도(環刀)’ 패용이라고 해서 칼집에 '띠돈'이라는 특수 회전형 고리를 달아 360도 회전이 가능한 형태로 몸에 착용했다.

여러 사료에서도 명확하게 칼의 손잡이가 뒤로 가도록 환도 패용법을 기술하고 있다.

TV드라마 사극에서는 심지어 조선군이 일본 사무라이처럼 허리춤에 칼을 끼워 넣고 나오는 장면도 무수히 많다.

만약 조선군이 적군을 만나 칼을 뽑게 되면 칼집은 도대체 어디에 둘까?

한 손에 칼집을 들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싸울까?

찌르기 보다는 베기에 더 특화된 조선의 도법인데?

그렇다고 칼집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싸울까.

고증이라고 해서 사료를 열심히 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상식을 바탕으로 한다.

또 하나는 활쏘기 자세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엄지손가락에 깍지라는 보조 기구를 끼워 쏘는 엄지걸이 방식의 활쏘기가 기본이다.

그럼에도 TV사극을 보면 서양식 양궁 사법으로 활을 쏘는 경우가 심심찮다.

그저 화려한 궁궐이나 전통 옷을 고증에 맞춰 제작해 입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역사에는 그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 안에 정신과 문화도 내재되어 있다.

편의에 의해서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고쳐지지 않을까?

제작비 때문이다.

아주 좋은 핑계거리로 사극 제작진들은 수십 년 간 뻔뻔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노우에 교수님은 언제 일본으로 돌아가십니까?”

“내일부터 삼일 동안 학회가 있어서 주말에 돌아갑니다.”

“떠나시기 전에 식사자리 마련해 보겠습니다.”

“초대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복수의 꽃> 고증 회의를 마친 교수들이 약소한 선물(?)을 하나씩 챙겨 호텔을 떠나갔다.

류지호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역사를 다룬 영화는 독립운동가를 조명한 흑백영화였다.

비록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감독의 인생영화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로 훌륭했다.

류지호는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역사영화이자 실존 인물을 다루면서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신중하게 이야기를 풀었어야 했을지.

그 같은 강박에 가까운 무게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강렬하게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구했으니 그렇게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이 들기도 했다.

또 겨레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를 두고 꽤나 많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거북선을 두고 별의 별 트집을 잡아 틀렸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잘 못 되었다면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다.

다만 지적은 영화를 충분히 즐긴 다음에 해도 되지 않나 싶었다.

예고편만 보고 온갖 지적을 해대는 소위 영화팬이자 방구석 전문가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곤 했었다.


‘<복꽃> 역시 트집을 잡히겠지.’


어차피 사극을 찍을 때 제작진과 감독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말 맞이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52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1) +4 23.03.22 3,423 115 24쪽
451 곧.... 필름은 죽습니다. (2) +6 23.03.21 3,359 111 23쪽
450 곧.... 필름은 죽습니다. (1) +6 23.03.20 3,418 109 25쪽
449 내가 잘되자고 하는 겁니다! (2) +4 23.03.18 3,512 120 25쪽
448 내가 잘되자고 하는 겁니다! (1) +5 23.03.17 3,503 120 27쪽
447 혼자 늙어 죽는 수가 있거든! +6 23.03.16 3,460 124 25쪽
446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3) +3 23.03.15 3,411 110 23쪽
445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2) +4 23.03.14 3,472 108 21쪽
444 계륵이거나 삥을 뜯거나.... (1) +9 23.03.13 3,617 118 20쪽
443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3) +6 23.03.11 3,675 128 26쪽
442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2) +5 23.03.10 3,624 121 26쪽
441 언젠가 만나야 했을 인연들. (1) +7 23.03.09 3,648 118 23쪽
440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3) +4 23.03.08 3,578 123 24쪽
439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2) +14 23.03.07 3,580 128 21쪽
438 다 해먹는다는 말 나오진 않겠죠? (1) +3 23.03.06 3,586 117 21쪽
437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면 됩니다. +6 23.03.04 3,705 128 27쪽
436 복수의 꽃. (10) +8 23.03.03 3,397 127 21쪽
435 복수의 꽃. (9) +6 23.03.02 3,268 127 21쪽
434 복수의 꽃. (8) +4 23.03.01 3,262 120 21쪽
433 복수의 꽃. (7) +3 23.02.28 3,331 119 22쪽
432 복수의 꽃. (6) +4 23.02.27 3,377 115 21쪽
431 복수의 꽃. (5) +4 23.02.25 3,456 128 24쪽
430 복수의 꽃. (4) +5 23.02.24 3,384 128 25쪽
429 복수의 꽃. (3) +11 23.02.23 3,468 115 26쪽
428 복수의 꽃. (2) +2 23.02.22 3,558 128 24쪽
427 복수의 꽃. (1) +5 23.02.21 3,677 123 20쪽
426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4) +6 23.02.20 3,647 126 25쪽
425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3) +5 23.02.18 3,702 135 25쪽
»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2) +6 23.02.17 3,655 134 25쪽
423 내가 먹을 걸 남에게 맡기면 위험이 따른다. (1) +7 23.02.16 3,746 139 2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